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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란가사(金襴袈裟)와 삼소걸(三笑乞)
까치가 울면 손님이 찾아온다고 하여 까치는 오래도록 길조(吉鳥)로 여겼다.
희소식을 전해준다는 까치는 경기도 성남시의 상징 새이기도 하다.
하지만 농작물 피해가 한해 50억이 넘어가자 까치는 2001년 유해조수로 지정되어 퇴치하기에 이르렀다.
피해가 알려지자 길조에서 유해조수로 바뀐 것이다.
까치는 어느 날 갑자기 유해한 새로 변한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까치는 농작물에 해를 주어왔다.
천적이 사라지고 숫자가 불어나 점점 농가의 피해가 커지자 결국 까치는 길조(吉鳥)라는 허울이 벗겨지고 유해조수로 지정한 것이다.
까치는 그냥 까치일 뿐이다.
까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변한 바가 없다. 사람들의 생각이 변한 것이다' 라고..
선(善)과 악(惡), 호(好)와 불호(不好)는 변한다.
아니 겉모습에 속아 내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대상에 대한 생각이 변하는 것은 내가 변했기 때문, 이해관계가 바뀌면 친구도 적이 되고, 정적(政敵)도 동지가 되는 세상인 것처럼 모든 인과(因果)가 둘이 아닌 하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세상에 좋고 나쁜 것은 없다.
서로 다른 것이 있을 뿐이다. 옳고 그른 것도 없다. 다만 생각이 다를 뿐이다.
일본 에도시대 유명한 선사가 있었다.
어느 날 마을의 큰 부자가 법회에 열면서 법문을 듣고자 선사를 초청을 했다.
선사는 평소처럼 남루한 옷을 걸치고 부잣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주인은 선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지 취급받은 선사는 문전에서 쫓겨났다.
선사는 다시 절로 돌아가 화려한 금란가사로 바꿔 입고 다시 찾아갔다.
금란가사를 입은 선사를 보고 주인은 그제야 허리를 굽히며 환대를 했다.
그러나 선사는 주인의 청을 사양했다.
"아닙니다. 소승은 이 문밖이 좋습니다."
주인은 선사가 안으로 들어와 법회를 주관해 주기를 바랐지만 선사는 가사를 벗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 가사를 드릴 테니 이 가사로 하여금 법회를 주관하게 하시지요. 소승은 이미 조금 전에 문 밖으로 쫓겨났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허리를 굽히며 용서를 빌었다.
선사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고, 그날 마을사람들은 아주 훌륭한 법문을 들었다.
불가(佛家)에서는 망심(妄心) 즉, 분별심(分別心)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선악은 세상에 있지만 그 선악도 한 생각 바꾸면 결코 둘이 아니듯이,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별도 결국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 살면서 어느 것 하나라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선과 악을 분별하기보다 그것을 바로 보고 바로 듣는 게 중요하다.
보이는 것이 진실이라고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보이는 것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다.
선사의 남루한 옷처럼 본질을 보지 못하면 그 허상에 속을 때가 있다.
그래서 웃음에 삼소걸(三笑乞)이 있는 것, 실상을 보고 웃고, 허상을 보고 웃고, 실상과 허상을 보고 웃고, 여기에 하나를 더해 실상과 허상을 보고 웃는 것을 보고 웃고..
사람은 제대로 세상을 본다고 말은 하지만 허상과 실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웃음만 지을 뿐이다.
과거 우리는 허상을 보고 많이 웃었다.
정확히 말하면 허상을 실상으로 알고 웃었다.
까치를 길조로 알았고, 금란가사에 속아 하늘을 보며 웃지 않았던가.
이제는 실상을 제대로 볼 차례다.
#차길진법사
첫댓글 고맙습니다._()()()_
()()()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