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 천리 길> (1941)
이가실 작사/ 이운정 작곡/ 이규남 노래
(1)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촉석루에 달빛만 나무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살이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누나
(대사) 진주라 천리길을 어이 왔던가?
연자방아 돌고 돌아 세월은 흘러가고,
인생은 오락가락 청춘도 늙었더라!
늙어가는 이 청춘에 젊어가는 옛 추억 …
아~ 손을 잡고 헤어지던 그 사람,
그 사람은 간 곳이 없구나!
(2)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남강가에 외로이 피리소리를 들을 적에
아~ 모래알을 만지며 옛노래를 불러본다
♣이 노래 들어보기 ♣
이규남-진주라 천리길(https://youtu.be/1SgXoArDOew)
소리사랑 - 진주라 천리길 (youtube.com)
한봄 (진주시홍보대사가수) - 진주라천리길 (youtube.com)
<진주라 천리길>은 1941년에 이가실(李嘉實)이 노랫말을 짓고, 이운정(李雲亭)
이 작곡하여 이규남(李圭南)이 취입하였는데, 이 노래는 그 당시 조선천지 어느
곳에서도 흥얼거릴 줄 모르는 사람이 없던 노래였다고 한다. 그렇게 전국민의 사
랑을 받으며 크게 불리어지던 이 노래가 그만 남북이 분단되고 얼마 후 6.25라는
몹쓸 민족의 비극까지 맞이하여, 공교롭게도 작사가와 작곡가, 그리고 노래를 부
른 가수까지 모두 다 월북하고 말았다.
<진주라 천리길>이 6.25동란 중인 1952년부터 절대금지곡이 되어 이 노래를 작
사작곡한 사람도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완전히 국민의 뇌리
에서 존재하지도 않고, 이런 노래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없는 노래가 되었다. 그러
다가 1992년 해금이 되어 소리사랑에서 1993년에 노래의 원곡을 찾아 재취입
하여 레코드에 담아내게 되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이규남(李圭南 : 1910~1974)은 충남 연기군 남면 월산리
(현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출신으로 본명은 윤건혁(尹建赫)이다. 휘문
고보를 졸업하고, 도쿄음악학교(東京音樂學校)에 들어가 피아노를 공부하고 돌
아온 정석 음악전공의 엘리트였다. 1932년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1933년
임헌익(林憲翼)이라는 예명으로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첫음반을 발표하여 가수
로 데뷔했다. 초기에 취입한 노래는 신민요풍의 음악들이었다.
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활발한 가수활동을 하여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일
본에서는 미나미 쿠니오(南邦雄)라는 이름을 썼고, 임헌익(林憲翼)대신 이규남
(李圭南)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한 것은 1936년 빅타레코드에서 음반을 내
면서 부터이다. 빅타에서 활동할 때는 홍난파가 특별히 이규남을 아껴 다수의
곡을 만들어 주었다. 1941년 다시 콜롬비아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되었다.
이규남이 부른 총140여곡의 가요 중에는 대표작 <진주라 천리길>(1941)이나
민요분야의 히트작 <장모님전 상서>(1938)등 인기곡도 적지않았으나, 6.25전
쟁 중 이북으로 가면서 오랫동안 언급자체가 금기시되어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특히 <진주라 천리길>은 월북작사가인 이가실이 작사하고, 작곡역시 월북작곡
가인 이운정이 맡은 곡이라 완전한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다. 이 노래는 <사의
찬미>처럼 이오시프 이바노비치(Iosif Ivanovich : 1845?~1902)의 <다뉴브강
의 잔물결(Valurile Dunarii=The Danube Waves)>(1880)선율로 시작되는 세
련된 곡이다.
작사가인 이가실(李嘉實 : 1913~1993)의 본명은 조영출(趙靈出)인데, 충남 아
산에서 출생하였다. 이가실(李嘉實)이란 이름 이외에도 조영출(趙靈出), 조명암
(趙鳴岩), 김운탄(金雲灘), 김다인(金茶人) 등 여러 이름을 사용하여 작품활동을
한 사람으로, 1948년 월북 후 북한에서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
장을 지냈다.
이 노래를 작곡한 이운정(李雲亭 : 1908~1989)은 함경남도 함흥출신으로 이운
정(李雲亭)이란 이름말고도 이면상(李冕相), 이웅일, 이춘상 또는 이훈상이라는
별칭도 있었으며, 원산에서 보통학교 훈도를 거쳐 니혼음악학교(日本音樂學校)
를 나와 음악활동을 하다가 광복이후 함남음악건설동맹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조선음악가동맹중앙위원장까지 올라가고,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까지 지낸 사
람이다.
<진주라 천리길>의 작사자 조명암(趙鳴岩)이나 작곡가인 이면상(李冕相)은 북
한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음악인들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이규남(李圭南)도
이들과 같이 북한에서 순탄한 삶을 살면서 작곡과 무대예술분야에서 활동한 것
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진주라 천리길>을 <목포의 눈물>과 비견하여 그 당시 고향을 노래한 2곡
이라고 말하는데, 일제말기에는 <진주라 천리길>이 확실한 우세를 보였다고 한다.
<목포의 눈물>은 목포출신 가수 이난영이 취입하였고, 진주출신인 손목인이 작곡
하였다. 그러나 <진주라 천리길>은 그 당시 조선천지 최고의 가수인 진주 출신 남
인수가 취입하지 않았다. 광복 후 남북분단이 이루어지고, 곧이어 6.25전쟁이 터져
<진주라 천리길>의 작사 작곡자 및 취입가수가 모두 북으로 갔지만, <목포의 눈물>
에 관여한 모든 음악인들은 남한을 지켰다. 다만 가수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 작곡
가는 이북으로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