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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주님께서 판관들을 세우셨으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판관기의 말씀 2,11-19>
그 무렵
11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알들을 섬겨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12 그들은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주님, 저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민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고 경배하여, 주님의 화를 돋우었다.
13 그들은 주님을 저버리고 바알과 아스타롯을 섬겼다.
14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어 그들을 약탈자들의 손에 넘겨 버리시고 약탈당하게 하셨다.
또한 그들을 주위의 원수들에게 팔아넘기셨으므로, 그들이 다시는 원수들에게 맞설 수 없었다.
15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주님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그들이 싸우러 나갈 때마다 주님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심한 곤경에 빠졌다.
16 주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우시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탈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17 그런데도 그들은 저희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을뿐더러, 다른 신들을 따르며 불륜을 저지르고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이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빨리도 벗어났다.
그들은 조상들의 본을 따르지 않았다.
18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판관들을 세우실 때마다 그 판관과 함께 계시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억압하는 자들과 학대하는 자들 앞에서 터져 나오는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그들을 가엾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19 그러나 판관이 죽으면 그들은 조상들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경배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의 완악한 행실과 길을 버리지 않았다.
✠ 복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너의 재산을 팔아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16-22>
그때에
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20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옭아매는 것>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면 흐뭇합니다.
언제든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지 않아도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닙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간혹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주머니를 비워놓던 사람은 그런 것에 자유롭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 21)
그러나 젊은이는 답을 얻었으면서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답을 얻었으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면서 길을 알려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지만, 본인이 거부하는 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부자에게는 돈이 전부입니다.
그의 재산은 곧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선을 베풀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것을 알지만 돈에 매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돈 때문에 형제 부모도 없는 사람처럼 싸우는 사람들의 추한 모습을!
주목할 것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공로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공로로 구원을 얻지 않고 주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물로부터의 자유를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우선으로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학식도 명예도 권력도 재물에 속합니다.
그러한 것을 지니면 지닐수록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다 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먼저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고 항상! 주님”을 앞세울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르 8,35)
버림으로써 얻는 신비에 눈뜨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라는 것은 또 다른 무엇으로부터의 옭아 매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만을 갈망하여 세상 것에 자유로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주님에게서 모든 것이 솟아납니다.
주님을 오롯이 사랑한다면 무엇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할 수 있고,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형제들끼리 “너는 내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한 부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영원한 생명에 관해 묻습니다.
그런데 묻는 방식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그는 선한 일을 해야만 구원을 받는 줄 압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은 ‘사랑’에 관한 율법입니다.
그가 ‘행동’에 관해 물었기에, ‘행동 지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행동으로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더 완전함을 추구하는 그 사람에게 가진 것을 팔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가진 것을 팔아야 합니다.
돈에 대한 욕구가 있다면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기에, 그리스도를 따름은 곧 욕구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율법은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아 그분의 법이 내 안에서 실현되게 만들어야 완성됩니다.
자기 힘만으로 지키려는 율법은 항상 한계가 있습니다.
사랑을 행동으로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인의 힘으로 사랑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한계에 부딪힙니다.
왜냐하면 자기 욕구가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가 입에 뼈다귀를 물고 주인이 주는 밥을 먹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소유욕이 살아있는데 내어주려고 사랑하려 하니, 결국 이도 저도 안 됩니다.
영화 ‘싱글라이더’(2017)는 일밖에 모르던 한 가장이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진 삶을 무겁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증권회사의 지점장 강재훈은 회사가 부실채권을 팔아 피해자가 많이 생기고 회사가 와해하자 죄책감과 상실감을 느낍니다.
아무도 없는 집에 와서 서재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호주로 유학 보낸 아내와 아들의 집 주소를 손에 적고는 술을 마십니다.
그러다 아내와 아들이 보고 싶어 무작정 호주로 떠납니다.
호주에 도착하여 가족이 있는 집으로 찾아가지만, 집에 아무도 없는 걸 보고 슬쩍 들어가 살펴봅니다.
그러다 아내와 아들이 돌아오는 소리에 급히 집을 나가서 목격한 것은 아내 이수진과 아들, 옆집 아저씨 크리스와 그의 딸 일행이 한 가족처럼 들어와 놀고 저녁을 먹는 모습입니다.
수진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여유롭고 행복해 보였고 그만두었다던 바이올린도 다시 연주를 시작한 상태입니다.
다음 날 그는 아내의 애인으로 의심되는 크리스를 미행합니다.
계속 미행하다가 크리스가 한 병원의 병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걸 보고 본인도 들어가는데 거기에는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있는 크리스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재훈은 복잡한 표정으로 병원을 나오고 다시 집으로 간 재훈은 수진이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려고 오디션을 준비하는 걸 몰래 지켜보고, 아내가 주체적인 삶을 찾은 모습을 봅니다.
지금까지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던 것 때문에 아주 호주에 남기로 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수진이 오케스트라 면접을 보는 동안 재훈은 수진의 집에 돌아와서는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동네 노인의 목격에 의하면 재훈의 아들이 통증으로 쓰러져 있는 것을 크리스가 발견하고 맨발로 뛰어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재훈은 수진과 크리스 몰래 병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만납니다.
아들은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아빠 맞냐며 기뻐하고 재훈은 아들에게 괜찮냐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그동안 자신이 아내와 아들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밤 재훈은 크리스와 수진의 불륜 광경을 목격하고 배신감을 느끼고 자리를 떠납니다.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집에 몰래 들어온 재훈은 수진이 작성한 영주권 신청서를 발견하고 아직도 자신을 남편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에 울음을 터트립니다.
재훈은 잠자는 아들 옆에 누워서 아내와 아들이 매일 즐겁게 지내길 빌고는 집 밖으로 나와 오열합니다.
아들은 수진에게 아빠가 와서 자신과 얘기했다고 말하고, 수진은 그럴 리 없다 하면서도 의아해하며 한국의 집으로 전화를 거니 벨만 울립니다.
아내 수진은 크리스에게 사과하며 이성으로서의 관계를 거절하고 영주권 신청서를 준비하고 재훈에게 알리려 한국 집에 전화하지만, 또다시 통화가 되지 않자 한국 집의 관리소장에게 전화해 비밀번호를 알려줄 테니 남편이 잘 있나 확인해달라 부탁합니다.
남편의 회사가 망한 것을 안 수진은 한국에 있을 재훈을 걱정해 열쇠수리공까지 불러 한국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건 컴퓨터 앞에 조용히 자는 듯 죽어있는 재훈이었습니다.
재훈은 가정을 위해 일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정에 무심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랑의 일환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일도 잃고 가정도 잃었습니다.
다 사랑 때문에 한 일이었지만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그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지 참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진도 남편을 사랑했지만 자신에게 무심한 재훈보다는 옆에 있으며 자신과 아들을 챙겨주는 크리스에게 더 끌립니다.
불륜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죽었습니다.
수진도 사랑은 했지만 자기 욕심을 버릴 수 없어 불륜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내가 하려는 사랑엔 반드시 ‘나’가 살아있어서 그 나의 소유욕, 성욕, 이기심이 발동하기 때문에 항상 이런 결말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부자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마음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스승님, 제가 사랑을 쟁취하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해서 사랑이 된다면 나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만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 자아가 하느님처럼 살아있기 때문에 사랑으로 소유하려던 것을 잃으면 그 절망감에 견딜 수 없게 됩니다.
내가 하려는 사랑은 ‘소유’하려는 마음이기에 항상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
소유함은 창조자의 속성입니다.
피조물은 서로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스마트폰끼리 서로 너는 내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끼리 서로 “너는 내 거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들 모두의 주인은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예수님의 충고처럼 ‘가진 것을 버리고’, 곧 ‘내가 창조자가 아닌 피조물임을 인정하고’ 참 창조자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부모 밑에서는 형제가 나를 미워하고 죽었다고 할 때 나의 생명까지 끊는 그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라 부모의 것이고, 나까지 잘못돼 버리면 부모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소유’가 되지 않고 적정한 ‘분리’ 안에서 성취됩니다.
따라서 사랑은 부모가 있는 형제 안에서 더 완전하게 성취되듯,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서만 완성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이시고 나를 창조하신 주님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할 때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느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가 되고 나는 부모의 뜻만 따르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할 때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 되고, 그래서 나의 모든 소유욕이 사라져 마치 태양이 지구를 사랑하듯 상대가 있거나 없거나 그저 사랑의 빛을 보낼 뿐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영원한 생명 - 주님 추종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목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
(시편 63,2)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
(시편 42,2-3)
자주 만나는 그 유명한 시편 성구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사람, 하느님을 목말라 하는 사람,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바로 이것이 사람에 대한 정의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향한 갈망에서 샘솟는 열정이요 마음의 순수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유명한 고백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위해 만드셨으니, 우리는 당신 안에 머물 때까지는 안식이 없나이다!”
예전 써놨던 자작시 두 편도 생각납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새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은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1997.3)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1998.12.25.)
세월 흐른 지금도 여전히 같은 심정입니다.
당신이 지칭하는 바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인 주님입니다.
이런 주님과 사랑의 만남을, 사랑의 일치를 갈망하는, 목말라 하는 사람입니다.
평생 이런 주님을 만나 목마름을 해갈하지 못하고, 아니 아예 이런 주님께 대한 자각없이 생각없이 대충 살다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 사랑의 만남이, 사랑의 일치가 누구나 목마르게 찾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이 아니고는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채워줄 수 없는 우리의 끝없는 목마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대하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 젊은이 우리 보편적 인간상입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비춰주는 오늘 복음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참 아이러니하게도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앞에 두고 영원한 생명을 묻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만날 때 영원한 생명인데, 주님을 만나는 사랑의 관상보다는 해야 할 활동의 일을 찾습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
“어떤 것들입니까?”
“살인해서는 안된다.
간음해서는 안된다.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영적 명의이신 주님께 영적 상태를 진단받는 젊은이입니다.
참으로 십계명과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해온 훌륭한 모범적 신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영원한 생명을 목말라 하는 젊은이입니다.
그처럼 오래 계명을 실천해 왔어도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선하신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외적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면서도 여전히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목말라 하는 우리 모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결정타가 된 권고 말씀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영적 명의이신 주님은 진단은 정확했습니다.
아주 근본적인 처방을 필요로 하는 젊은 부자였습니다.
은수자들의 아버지, 사막의 안토니오를 회심케한 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 말씀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한 안토니오입니다.
이제 그만 땅에 보물을 쌓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권고입니다.
가진 것을 비우고 홀가분한 삶으로 당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부분적 지엽적 계명을 지켜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 사랑하여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만나 따를 때 저절로 계명 준수의 실천입니다.
바로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젊은이에게 근본적 문제가 무엇인지 환히 밝혀 줍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우리를 비춰주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마음의 중심인 하느님 자리에 재물이 또아리 틀고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한 탐욕에 눈이 멀어 주님을 만나고도 몰랐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절호의 기회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참 보물인,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참으로 만났더라면 이렇게 좌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그가 많은 재물을 포기할 수 없어 슬퍼하며 떠났지만, 예전과는 달라진 젊은이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여 만날 때 회개와 겸손이요 무집착의 이탈의 삶에 자발적 따름의 주님 추종의 삶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평생 과정입니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의 주님은 고정적 실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찾아 만나 사랑하고 따라야 하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유동적 실재임을 깨닫습니다.
오늘부터는 판관기의 시작입니다.
판관기의 답을 오늘 복음이 줍니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패턴의 악순환의 죄스런 현실입니다.
판관이 있을 때는 주님을 잘 섬기다가 판관이 떠나면 또 탈선하여 악행을 저지르고, 고통을 당해 부르짖으면 하느님은 또 판관을 보내 구해주시고, 끊임없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예나 이제나 변함 없는 인간의 부정적 현실입니다.
답은 단 하나, 날마다 늘 주님과 새로운 사랑의 만남의 회개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회개하지 않을 때 반복되는 악순환입니다.
이런 인간의 무지와 망각에 대한 근본적 치유는 날마다 주님과 새로운 사랑의 만남과 추종의 삶뿐입니다.
이래야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회개를 통한 주님과 사랑의 만남, 버림과 비움, 따름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고 당신을 한결같이 따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허를 찔리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21)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찾으려고 주님께 온 부자 청년에게 주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하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 19,18-19)
이에 십계명에 해당되는 그런 것들은 다 지켜왔다고 청년이 대답하고,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는지 다시 여쭈었을 때, 부족한 것이 있다는 뜻으로 그래서 완전하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님께서는 또 일러주십니다.
완전하게 되고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우선 이웃 사랑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들, 그러니까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같은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한다면 최소한 남을 해치는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하지 말아야 할 사랑'은 다 실천해왔고, 더 나아가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과 같은 '해야 할 사랑'도 실천해왔다고 답하며 이것 말고도 더 해야 할 것이 있는지 젊은이는 묻습니다.
그러니까 완전을 위해 또는 완전한 사랑을 위해 더 나아가야 할 것이 있냐는 질문인데, 이에 주님께서 완전한 사랑을 위한 마지막 퍼즐을 말씀해주십니다.
- 가진 것을 다 파는 것,
-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
-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했다고 자신있게 답했는데, 정말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했는지 의문을 제기하시는 것이고, 정말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이웃을 위해 자기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가진 것을 파는 부분에서 주님께서 다 팔아서 주라는 말씀은 없어도 제 생각에 ‘다’ 팔아 다 주라는 말씀일 것 같은데,이 ‘다’가 걸리는 겁니다.
다 팔지 못하고 일부만 팔고, 다 주지 못하고 일부만 주는 삶을 일생 살아왔는데, 이것이 그러니까 아직도 제가 불완전한 부분입니다.
오늘 부자 청년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다 실천해왔다고 하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하고 여쭙는데, 주님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자신이 다 실천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만 허를 찔린 것이지요.
그런데 이 부자 청년처럼 오늘 주님 말씀에서 제가 허를 찔린 겁니다.
그런데 완전한 사랑의 관점에서 더 큰 '허'가 있습니다.
곧 주님을 따름입니다.
사실 주님을 따름이 완전한 사랑의 가장 마지막 퍼즐입니다.
아니 가진 것을 다 팔아 이웃에게 주는 것도 다 이것, 주님을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런 허를 찔렸는데 여러분도 이런 허를 찔리는 오늘이 되시길 빕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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