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한 삶4-5. 목적 없는 대화의 힘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무언가를 부탁해 본 적 있는가? 안 그래도 어색한 사이에 다짜고짜 용건부터 꺼내는 것만큼 민망한 일도 없다. 그럴 때 우리는 괜스레 안부를 묻게 된다.
“애는 잘 커?” “요즘 잘 지내지?” “하시는 일은 잘 되고?”
물론 영혼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니까. 이렇게 빙빙 돌려 근황에 대해 물은 후에야 본격적으로 용건으로 들어가는 게 바로 어른의 대화 스킬 아니던가. 그렇다. 우리는 안부와 용건을 패키지로 묶을 줄 아는 성숙한 어른들이다.
물론 우리 뇌는 이 패턴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안 친한 친구가 불쑥 전화해서 안부를 물으면 슬슬 불안해지곤 한다. 언제 강력한 용건이 튀어나와 나를 곤란하게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안부를 길게 물으면 물을수록 뒤에 나올 용건도 어려울 것만 같다.
그런데 안부와 용건을 패키지로 묶는 스킬이 필요 없는 사이도 있다. 정말 친한 친구들이다. 아무 때나 불쑥 전화해서 용건만 툭 던져도 상관없다.
“용식이냐? 야, 집에 캠핑 의자 있다고 했던가? 너 안 쓰면 나 좀 빌려줘.”
진짜 친한 친구라면 당연히 “어, 알았어.” 하거나 “야, 그거 지금 없어.”라고 대답할 것이다. 불쑥 용건부터 주고받는 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굳이 잘 지내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아이가 학교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길고 긴 안부를 물어본다면 오히려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진짜 친구를 구별하는 또 한가지 방법이 있다. 용건이 없이도 전화하는 사이가 진짜 친한 사이다. “뭐 하냐? 지나가다 심심해서 전화했어. 어~, 나중에 보자.”
이렇게 딱히 할 말이 없어도 연락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사이. 그게 바로 진짜 친구 사이다. 그러다 보니 진짜 친한 친구들이 모여 있는 메신저 단톡방을 들여다보면 참 실없다. 하는 얘기라곤 전부 쓰잘머리 없는 내용인 데다가 메시지의 90%가 ‘ㅋㅋㅋㅋ’ 아니면 ‘ㅎㅎㅎ’, 아니면 ‘헐~’뿐이니 말이다.
남성과 여성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들이 있다. 소위 여자가 말이 더 많고 남자들이 과묵하다고 한다. 물론 이 통념이 진실인지 연구하는 학자들이 존재한다.
텍사스 대학의 제이미 페니베이커 교수 팀은 사람이 평소에 사용하는 어마어마한 단어들을 싹 다 모아 전수조사를 했다. 정말 여성이 남성보다 하루 동안 더 많은 어휘를 발화하는지 단어 사용량을 분석해 보니, 그다지 눈에 띄는 차이는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남성이 근소한 차이로 말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여자가 더 말이 많다고 생각하는 걸까? 연구진은 남녀가 사용하는 단어의 내용을 분석하여 그 비밀을 풀어 보았다.
남성은 주로 뚜렷한 목표가 있을 때 상대방과 대화를 시도하는 성향이 두드러졌다. 물건을 사야 할 때, 계약을 체결해야 할 때, 누군가와 친해져야 할 때, 그들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길고 많은 대화를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기 내면의 수다쟁이를 깨우는 셈이다.
여성의 언어 사용 방식은 달랐다. ‘확정적인 언어행동’을 구사하는 그들은 특별한 주제와 목적 없이도 상대방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러다 보니 남자 입장에서는 여자들이 불필요한 얘기를 많이 하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의 대화 방식 중 무엇이 더 인간의 생존에 유리할까? 언뜻 보면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보다 꼭 필요한 이야기만 걸러서 하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안전하고 효율적이며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그렇게 단순하게 설계되지 않았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언제나 쌍방 소통이기 때문이다. 목적이 없는 대화를 나눈 사람에게 더 많은 호감과 친밀감이 생겨난다. 용건과 안부를 패키지로 묶지 않는 친구와의 대화가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것처럼 말이다.
비효율적인 대화는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을 만들어 주는 강력한 힘이 된다. 일상의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친구는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친구이며 행복의 빈도을 높여 주는 관계다. 그러니 여성적 언어활동이 진화론적 관점에서 훨씬 더 생존력이 강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앞서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소시오패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양심 있는 일반인들은 소시오패스가 어디 숨어 있는지 찾기조차 힘들 것이다. 그러나 쉽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들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자신의 이익과 관계없는 인간관계를 꺼리는 것이다. 용무가 있거나 이용해야 할 때 정겨운 얼굴을 하지만 별일 없이 순수하게 안부를 묻는 연락은 귀찮아하게 마련이다. 쓸모없는 사람에게 내용 없는 연락이 오면 상대에게 모멸감을 줄 가능성도 상당하다.
만약 내가 용건 없이 누군가에게 순수하게 말을 걸었는데 모멸감 섞인 대답으로 돌아온다면? 그 사람을 꼭 소시오패스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최대한 거리를 두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는 나를 필요할 때는 이용하고 가치가 떨어지면 버리는 도구로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강연에서 만나는 많은 분들에게 이런 부류의 인간을 만나면 스마트폰 연락처에서 주저 말고 삭제라하고 말씀드린다. 언젠가 나의 쓸모를 찾아 다시 연락이 왔을 때 매번 “누구세요?”로 응답하라는 것이다. 아마 상대는 머리가 복잡해질 것이고 몇 차례 반복되면 이용하기 어렵다는 것을 판단할 것이다. 그들은 아마 내 존재를 지우고 다른 먹잇감을 찾아 떠날 것이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대화만을 강조하는 사회, 현대 사회는 분명 소시오패스적인 사회이지만, 여전히 우리 곁엔 순수하게 안부를 물어봐 주는 착한 보통 사람들이 존재한다.
목적 없는 대화를 생각할 때면 문득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내가 일하는 아주대학교는 수원에 있는데 친구 중 한 녀석은 지방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수원 톨게이트가 보이면 내 생각이 난다고 한다. 그럴 땐 뜬금없이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으면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로 “겡일아~.”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반사적으로 “어어, ㅇㅇ야, 왜?” 하고 용건부터 묻는다. 이럴 때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이다.
“아아, 그냥 했어? 그런데 웬일이야?”
또 한 번 용건을 재촉하는 못난 나에게 친구는 말한다.
“어, 보고 싶어서, 잘 지내나.”
이 한마디면 나는 스르륵 무장해제 되어 버린다. “나야 잘 지내지. 너도 별일 없지?” 친구는 어김없이 무덤덤한 사투리로 인사를 전한다.
“궁금해서 전화했는데 잘 지낸다니 됐다. 나중에 밥이나 함 묵자.”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지만 녀석과의 전화는 늘 코끝을 시큰하게 한다. 내가 인생을 아주 잘못 살지는 않았구나. 나름대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았구나. 엉뚱하게도 내 생애가 자랑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사람의 존재 가치를 무엇으로 잴 수 있을까? 연봉이나 재산, 사회적 지위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겐 용무가 없어도 안부를 물어봐 주는 친구가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라는 사람, 이 정도면 괜찮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한편, 녀석은 매번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나는 다른 소중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자주 용건 없는 연락을 했나. 그냥 안부만 물으면 되는 그 간단한 일을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미뤄오지 않았던가. 사회적 거리두기가 길어지면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늘 생각하면 고맙고 소중한 사람들, 지금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전화를 들어 그냥 툭 연락해 보면 어떨까. 용건 없이 물어봐 주는 싱거운 안부가 얼어 있는 마음을 녹여 줄 것이다.
*위 글은 고려대학교 심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교에 심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인지심리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아트 마크먼 교수의 지도하에 인간의 판단, 의사결정, 문제해결 그리고 창의성에 관해 연구하였고, 현재는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아주대학교 창의력연구센터장을 지냈고 게임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면서 대학교 각종 교육기관, 기업에서 왕성하게 강연하고 있고, ‘어쩌다 어른’, ‘세바시’, ‘책 읽어 드립니다’, ‘나의 첫 사회생활’ 등 다수의 프로그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게 있는 “김경일”교수의 저서 ‘적정한 삶’ 제4장 ‘불안의 시대에서 행복을 말하다’ 중 일부를 옮겨본 것입니다. 그 외 저자의 저서로는 “지혜의 심리학”, “이끌지 말고 따르게 하라”, “어쩌면 우리가 거꾸로 해왔던 것들”, “십 대를 위한 공부사전” 등이 있고, 역서로는 “혁신의 도구”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