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남지에서 들녘을 지나
곧 장마가 다가온다는 소식이 전해진 하지를 사흘 앞둔 화요일이다. 오키나와에 머문다는 장마전선이 내일모레 제주도 부근까지 올라올 기미를 보이는 듯하다. 예년보다 이르게 찾아온 더위는 장마 이전 연일 폭염주의보와 경보가 내려 고령층은 야외 활동을 자제하십사는 안전 문자가 쏟아졌다. 어제 낮 시간대 우리 지역은 구름이 살짝 덮었지만 다시 맑은 하늘이 드러난 아침이다.
새벽녘 잠을 깨 음용할 약차를 달이면서 아침밥을 해결하고 산책을 나섰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원이대로로 나가려고 반송 소하천 곁을 따라 걸었다. 당국에서는 장마 우기를 대비해 냇바닥에 무성한 풀을 말끔하게 잘라 정리해 두었다. 풀숲에서 알을 놓아 새끼를 쳤던 흰뺨검둥오리 어미는 바뀐 서식 환경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끼들을 데리고 나와 먹이활동을 하느라 헤엄쳐 다녔다.
그 오리네 가족보다 먼저 새끼를 까서 성체가 된 오리가 두 팀이 있었는데 녀석들은 날아서 어디론가 떠나고 없었다. 냇바닥은 한동안 습지 식물 수초가 없어진 듯해도 장마 기간에 풀이 다시 자라 나와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갈 테다. 도심 소하천에서 둥지를 틀어 알을 모아 새끼를 치는 흰뺨검둥오리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지 않고 바뀌진 생태 환경에 적응해 잘 살아감이 기특했다.
원이대로 급행 간선도로로 도계동을 거쳐 본포로 나가는 30번 버스를 탔다. 이른 아침인데도 근교 작은 회사 일터로 나가는 몇몇 승객이 타고 내렸다. 용강고개를 넘어간 용잠삼거리에서 동읍 행정복지센터 앞을 지나 화목과 동전에 이르러 주남저수지를 비켜 용산에서 내렸다. 긴 머리를 찰랑이는 처자와 같이 걸었는데 늘 같이 다니던 친구는 다음 차편으로 오는가 동행하지 않았다.
들녘으로 산책을 먼저하고 가술 마을도서관을 찾아가느라고 몇 차례 다녀 두 처자를 알고 있다. 전번에 통근차도 운행하지 않은 한적한 교외에서 두 처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 물어봤더니 컴퓨터와 연관된 일을 한다고 했다. 이번에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짜느냐고 했더니 선풍기 부품 제작 공정에서 컴퓨터로 뭔가 일을 한다고 했는데 그 이상은 물어보지 않고 앞세워 보냈다.
산남저수지와 수문으로 연결된 주남저수지 수면은 연이 자라면서 펼친 잎을 한창 넓혀갔다. 연잎보다 작은 수초 마름도 세력을 떨쳐 나갔다. 용산마을에서 데크 따라 숲을 지난 둑으로 가니 단감과수원에는 농약을 치느라 고무호스에서 언덕으로 약이 분사되었다. 둑길 들머리는 접시꽃이 피었고 길게 이어진 둑을 따라 걸으니 무성한 물억새에는 종을 알 수 없는 나비가 팔랑거렸다.
주천강이 시작되는 배수문까지 가질 않고 쉼터 정자에서 아침이지만 따가운 여름 햇살을 잠시 피했다. 여름이면 상비약처럼 준비된 배낭의 죽염을 입안에 털어 넣고 얼음 생수를 마셨다. 한낮이 아니라도 뙤약볕에 걸어야 할 거리가 한 시간은 족히 되지 싶다. 쉼터에서 둑을 내려서 들녘으로 들었다. 이앙기가 굴러가며 모내기를 끝낸 논바닥 어린 모는 땅내를 맡아 포기를 늘려갔다.
들녘 수로를 따라 다니 구역이 달리진 농로에서 아스팔트로 포장된 찻길에는 백양마을이 나왔다. 백양은 소규모 공장과 창고와 함께 들녘 한복판 형성된 마을이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벼가 자라는 농지만 펼쳐져 시야가 탁 트였다. 한 마리 왜가리는 아침 식사를 끝냈는지 무슨 사념에 잠긴 듯 따가운 햇살에도 논둑에 외로이 서 있었다. 백양은 가촌으로 이어져 가술 거리로 통했다.
가술 마을도서관에 닿으니 용산부터 걸은 지 1시간 반 지난 때였다. 에어컨이 가동된 실내는 시원하기가 그지없었다. 배낭을 벗어두고 철학과 자연과학 서적이 꽂힌 서가에서 책을 몇 골라 열람석에 앉았다. 수학을 가르쳤던 이가 쓴 ‘풀잎 위에 알고리즘’을 펼쳤는데 인문학자보다 더 자연에 대한 관찰이 예리하고 애정이 담겨 있었다. 과학적인 주제임에도 서정적인 문체가 돋보였다. 24.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