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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실 로마사는 잘 모릅니다 -.-
귀족파 (Patricivs)
이 사람은 상류 계급인 귀족파입니다. 그들은 과거 팔라티누스 언덕의 거주민들로, 공화국의 세습 귀족 집단을 형성했습니다. 귀족파는 호민관에는 선출될 수 없지만, 그 외의 모든 공직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평민파들은 세습 귀족 사회들이 피해갈 수 없는 쇠퇴기를 틈타 귀족파의 영향력을 잠식해 왔습니다. 평민파 중에서도 출세한 자들, 즉 '평민파' 노빌레스와 연대하여 다른 평민파들을 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지나치게 크게 성장하지 못하도록 견제해야 합니다.
평민파 (Plebeivs)
이 사람은 로마 시민 사회의 중추이자, 과거 아벤티누스 언덕의 거주민들이었던 평민파 출신입니다. 즉 귀족이 아닙니다. 물론 법적으로는 귀족파와 평민파는 동등한 계급이지만, 실제로는 수십 년 동안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차이가 큽니다. 카눌레이우스 법에 따라 귀족파와 평민파의 혼인도 가능해졌지만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
평민파들은 대부분의 공직에 진출하지 못하지만, 최근 신설된 호민관(tribunus plebis)과 평민파 안찰관(aediles plebis)은 맡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을 기반으로 더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죠. 만약 집정관(consvl)에 선출된다면 그의 가문은 노빌레스 계급(nobilitas)에 진입할 것입니다.
노비타스 (Novitas)
이 사람은 새로운 인간(Novus Homo), 즉 그의 가문 내에서 최초로 집정관직에 선출된 사람으로서, 기존의 귀족파 및 평민파와 구분되는 새로운 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Jus Imaginum의 권리를 갖게 되어, 그가 죽은 뒤 그의 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상에는 그가 생전 얻었던 직함들이 표시되며, 평소에는 잘 보관되어 있다가 중요한 축제일 때 월계관으로 장식되어 엄숙한 행렬 대열에 서게 됩니다.
노빌레 (Nobile)
이 사람은 노빌레, 즉 과거 조상들 중에 최소 한 명 이상 집정관을 지낸 사람이 있는 가문 출신입니다. 즉 그는 "유명한", 노빌리타스의 일원입니다. 노빌리타스 중 대부분은 귀족파이지만, 평민파 출신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노빌레스는 Jus Imaginum의 특권이 있어서, 그의 유명한 조상들을 본따 만들고 그들의 직함을 써넣은 밀랍 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상들은 집에 보관해 뒀다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화관으로 장식한 뒤 도시를 행진하게 됩니다.
물론 노빌레스는 노빌레스가 아닌 자들(Ignobiles)보다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평민파 노빌레스들은 여전히 귀족파들의 권력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역이용해 귀족파와 평민파 사이의 중재역이라는 새로운 입지를 발견했고, 잘하면 그를 통해 더욱 권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레리우스 씨족 (Gens Valeria)
발레리우스 씨족 사람들은 공화정 초기부터 제정 시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항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는 최초의 공화국 집정관이었으며 푸블리콜라(민중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거대한 갈리아 전사와 결투를 벌였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일 것입니다. 신들께서 마르쿠스를 돕기 위해 까마귀를 보내셨고, 마르쿠스는 그의 투구에 내려앉은 까마귀가 상대방의 얼굴과 눈을 쪼아댄 덕에 이길 수 있었습니다. 마르쿠스는 그 이후 코르부스(까마귀)라는 별명을 얻었고, 집정관에 여섯 차례 당선됐습니다. 발레리우스 씨족은 몇 가지 희귀한 특권을 누렸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시신을 로마 성벽 안에 묻을 수 있는 권리였고, 다른 하나는 키르쿠스 안에서 작은 왕좌가 놓인 특별한 자리를 보장받는 권리입니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Valerivs Flaccvs), 귀족파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Valerivs Maximvs), 귀족파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Valerivs Laevinvs), 귀족파
유니우스 씨족 (Gens Ivnia)
이 사람은 아마도 로마에서 가장 저명한 씨족이라 할 수 있는 유니우스 씨족 출신입니다. 공화정을 건설한 영웅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폭군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다시 세우려 한 그의 아들들을 처형함으로써 그의 애국심을 증명했습니다. 유니우스 씨족의 최전성기는 공화정 초기로, 많은 유니우스 씨족 사람들이 초기 집정관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공화정의 건설자이자 보호자로써 유니우스 씨족 사람들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유니우스 브루투스 (Ivnivs Brvtvs), 귀족파
유니우스 부불쿠스 (Ivnivs Bvbvlcvs), 귀족파
유니우스 페라 (Ivnivs Pera), 귀족파
유니우스 실라누스 (Ivnivs Silanvs), 귀족파
셈프로니우스 씨족 (Gens Sempronia)
셈프로니우스 씨족은 공화정 시기의 중요하고 유서 깊은 평민파 가문으로, 혼인을 통해 유력한 귀족파 씨족들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업을 통해 부유해졌고, 이익을 놓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셈프로니우스 씨족은 철저한 포퓰리스트들로써 capite censi, 즉 무산 빈민층의 지지를 얻는 데 집중합니다. 셈프로니우스 씨족은 이 거대한 지지층을 기반으로 원로원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동지는 물론이요 적까지 많이 만드는 정책이므로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기도 합니다.
셈프로니우스 블라이수스 (Sempronivs Blaesvs), 평민파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Sempronivs Cracchvs), 평민파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Sempronivs Longvs), 평민파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 (Sempronivs Tvditanvs), 평민파
칼푸르니우스 씨족 (Gens Calpvrnia)
칼푸르니우스는 공화국의 아주 오래된 씨족입니다. 칼푸르니우스 씨족은 로물루스의 후계자인 누마 폼필리우스의 4남 가운데 3남 칼푸스의 후손을 자칭하는 평민파로써, 그들의 주화에서 누마의 두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칼푸르니우스 씨족이 처음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차 포에니 전쟁 시기이며, 그들 가운데 최초로 집정관이 된 것은 BC 180년의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였습니다. 그 뒤로 칼푸르니우스 씨족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같은 입법자들을 배출하며 명문가로 성장했습니다. 칼푸르니우스 법(BC 149년)과 아킬리우스 칼푸르니우스 법(BC 67년)에 그들의 씨족명이 나옵니다.
칼푸르니우스 피소 (Calpvrnivs Piso), 평민파
카이킬리우스 씨족 (Gens Caecilia)
이 사람은 카이킬리우스 씨족 출신입니다. 카이킬리우스 씨족은 불카누스의 아들로써 프라이네스테의 건설자이자 아이네아스의 적이었던 카이쿨루스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로마에서 가장 부유하고 존경받는 평민파 가문이기도 합니다. 비록 12년 전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덴테르가 아레티움 전투(BC 284)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카이킬리우스 씨족은 여전히 공화국의 주요 직책들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평민파 출신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입니다. 그들은 특히 신앙심이 깊지만, 군사적 능력도 출중한 편입니다. 카이킬리우스 씨족은 불카누스의 후예답게 자신들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타오르는 내면의 불길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뛰어난 지휘관들이지만, 승리할 때마다 신들께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이 깊은 신앙심을 통해 그들은 공화국과 공화국을 대표하는 모든 것에 열광적으로 충성하며, 그 대상에는 귀족파 가문들도 포함돼 있습니다. 귀족들을 지지함으로써 이들은 공직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Caecilivs Metellvs), 평민파
리키니우스 씨족 (Gens Licinia)
이 사람은 평민파인 리키니우스 씨족 출신입니다. 그들은 에트루리아인의 후예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리키니우스 씨족은 평민파 중 가장 중요한 씨족 가운데 하나인데, 바로 루키우스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와 함께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을 통과시킨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 스톨로가 바로 이 씨족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이 법은 콘술(집정관)제를 재도입하는 한편 두 집정관 중 한 명은 평민 출신으로 하도록 정한 법입니다. 리키니우스 씨족은 평민 권리를 맹렬하게 옹호하며, 뛰어난 웅변가들이기도 합니다. 리키니우스 씨족 사람들은 대개 퇴폐적이고, 전쟁을 선호하며 달변가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금 거두는 데도 일가견이 있는데, 너무 잘 거둬서 문제이기도 합니다. 똑똑하지만 이기적이며, 특히 이베리아 사람들과 동방 사람들을 상대로 한 전쟁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평민파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자부심 높은 지도자들입니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Licinivs Crassvs), 평민파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Licinivs Lvcvllvs), 평민파
아우렐리우스 씨족 (Gens Avrelia)
이 사람은 고전기 라틴어 "황금"에서 따온 이름인 아우렐리우스 씨족의 후예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남성형이고, 아우렐리아는 여성형입니다. 역사적으로 아우렐리우스 씨족은 부유하고 중요한 씨족으로, 여덟 차례 집정관에 당선됐으며 그 외 'cursus honorum'에 해당하는 많은 공직을 역임했습니다. 아우렐리우스 씨족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임페라토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후계자 콤모두스일 것입니다. 임페라토르 아우레릴우스는 사실 아버지인 안토니우스에게 입양된 자식이었습니다. 여성으로는 가장 이상적인 어머니로 알려진 임페라토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가 있습니다.
아우렐리우스 코타 (Avrelivs Cotta), 평민파
아우렐리우스 오레스테스 (Avrelivs Orestes), 평민파
쿠리우스 씨족 (Gens Cvria)
쿠리아 씨족은 오래되고 존경받는 로마의 기사 가문입니다. 이 씨족의 가장 유명한 후손을 꼽자면 역시 3차 삼니움 전쟁을 종결시키고 베네벤툼 전투에서 피루스 왕을 무찌른 마니우스 덴타투스일 것입니다. 쿠리우스 씨족은 원래 티베르 강 위쪽에 살던 사비니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중에 로마 편에 가담한 쿠리우스 씨족은 옛 동족들을 상대로 싸워 여러 차례 승리했으며, 마니우스 덴타투스 역시 사비니족을 무찌르고 개선식을 치렀습니다. 또 마니우스 덴타투스는 집정관으로써 사비니인들에게 civitas sine suffragio, 혹은 로마 시민권에 준하는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쿠리우스 덴타투스 (Cvrivs Dentatvs), 평민파
옥타비우스 씨족 (Gens Octavia)
이 사람은 옥타비아 씨족 출생입니다. 옥타비우스 씨족이 한때 벨리트라이의 명문가였었다는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일례로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가 옥타비아누스 거리라고 불렸던 적이 있었으며, 그 옆에 세워진 제단 역시 옥타비우스 씨족 사람에 의해 축성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웃 도시와의 전쟁에서 지도자를 맡았던 인물로, 마르스에게 제물을 바치던 중 적이 급습해 왔다는 보고를 듣자 제물의 내장을 끄집어내 덜 익은 상태로 바친 뒤 싸움에 나가 승리했습니다. 한편, 그 뒤로는 사람들이 마르스에게 제물을 바칠 때 그가 했던 것처럼 익지 않은 내장을 따로 꺼내 바친 뒤, 나머지 제물은 옥타비우스 씨족에게 넘겨주도록 결정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옥타비우스 씨족은 상인, 무역업자로 귀족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훗날에는 옥타비우스 씨족은 이탈리아 남부의 투리이 근처 마을에서 밧줄 만드는 일을 하다 자유를 산 해방노예의 후손들이라는 악성 소문이 떠돌기도 했습니다. 혹은 그 시조가 '손에서 돈냄새 나는' 환전상이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회고록에서 자신의 집안히 단순히 '부유하고 오래된 기사 가문'이라고만 썼습니다.
옥타비우스 씨족은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왕 시대에 원로원에 들어갔으며,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에 의해 귀족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다시 평민의 지위로 떨어졌고, 긴 공백기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귀족으로 복귀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처음으로 높은 공직에 오른 사람은 재무관으로 선출된 가이우스 루푸스였습니다. 이후 옥타비우스 씨족은 그의 두 아들, 그나이우스와 가이우스의 계통으로 나뉘었으며 두 가계는 매우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그나이우스와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높은 공직을 차지한 데 반해, 가이우스와 그의 자손들은 자의였든 아니든 간에 아우구스투스의 아버지 대까지 기사 계급에 머물렀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증조부는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시칠리아에서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휘하의 tribunus militum으로 복무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조부는 지방 도시의 관직에 안주하며 많은 돈을 벌었고, 안락한 노후를 보냈습니다. 물론 이것은 여러 설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아우구스투스 스스로는 자신의 가문에 대해 그의 아버지 대에서야 처음으로 원로원에 진출한 오래되고 부유한 기사 가문이라고 썼습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조부가 투리이 근교에서 밧줄 만드는 일을 한 해방노예였으며, 그의 조부는 환전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옥타비우스 (Octavivs), 평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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