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신> 무엇을 쓸 것인가 / 임보 (시인)
로메다 님, 그동안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어서 시를 써 보고 싶은데 막상 시 쓰는 방법은 일러주지 않고 변죽만 울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겠지요.? 좋은 집을 지으려면 먼저 튼튼한 기초를 다지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그동안의 이야기들은 글을 쓰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고 생각하십시오.
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자, 그럼 이제부터 시작해 봅시다. 우선 시라는 글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맙시다. 그리고 처음부터 좋은 글을 쓰겠다고 너무 욕심부리지도 맙시다. 나는 전에 시를 '영롱한 언어의 사리'라고 신비로운 정의를 내린 바 있기는 합니다만 이는 좋은 시를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 우선은 좋은 시에 대한 욕심은 잠시 접어두고 쉽게 생각하십시다.
간략히 말하면 시는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을 짧게 기록한 글일 뿐입니다. '어떤 것'이란 바로 학교 작문시간에 '소재'라고 일컫는 것들입니다. 바로 그 소재―'글 쓸 거리'부터 생각해 봅시다. 시의 소재는 제한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다 소재가 됩니다. 산과 강, 나무와 동물 그리고 하찮은 곤충들에 이르기까지 소재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물을 바라다보는 우리 자신도, 나아가서는 우리 자신의 내면 속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감정들도 다 글의 좋은 소재들이 됩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논의의 편의상 소재를 양분해 본다면 우리의 몸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객체적 소재'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정황들을 '주체적 소재' 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객체적 소재들부터 생각해 봅시다. 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다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다 그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화가들이 모든 사물을 다 그리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만 선택해서 그립니다. 그 선택의 기준은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嗜好)와 무관하지 않습니다만 대체로 '아름답거나 이채(異彩)로운 사물'들을 선택하게 됩니다.
시의 소재도 그림의 경우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선택된 시의 소재가 만일 아름답다거나 혹은 이채롭다거나 하는 어떤 특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독자들의 환심을 살 수가 없습니다. 시라는 글도 하나의 발언(發言)입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기를 전제로 해서 쓰여진 글이 아닙니까? 로메다 님, 우리가 매일 친구들과 주고받는 일상적인 대화도 만일 재미가 없으면 상대방이 귀를 돌리고 맙니다. 하물며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쓰여진 시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평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글에 지나지 않다면 누가 관심을 갖고 그 시를 읽으려 하겠습니까?
나는 앞에서 아름답거나 이채로운 것이라고 했는데 좀더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을 선택하여 쓰라는 충고를 드리고 싶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로메다 님,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신기한 소재란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런 소재를 찾아 낯선 먼 이국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의 길에 오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처지라면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필요로 한 그러한 방법을 나는 별로 권장하고 싶진 않습니다.
로메다 님, 이채로운 대상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상에서 이채로운 생각이나 느낌을 얻는 일입니다. 아무리 이채로운 대상을 만났더라도 그 대상 속에서 얻은 생각이나 느낌이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와는 달리 비록 평범한 사물을 대했을 경우라도 평소와는 달리 이채로운 생각이나 느낌이 떠오르는 체험을 했다면 이것이 소중한 글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소재 자체가 아니라 소재로부터 얻어낸 이채로운― 다시 말해 감동적인 생각과 느낌입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대상으로부터 얻어낸 생각이나 느낌― 이것을 서양에서는 '이미지(image)'라는 용어로 부르고 동양에서는 '시상(詩想)'이라는 말로 즐겨 사용해 왔습니다. 특히 기발한 시상을 '영감(靈感)'이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감이라는 말은 어딘가 좀 신비로운 느낌이 없지 않으므로 요즈음 즐겨 쓰고 있는 이미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지는 우리가 어떤 대상(사물)을 접했을 때 그 '대상이 우리의 심리(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는 과거의 체험 내용'이라고 심리학에서는 정의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를 들어 설명해 보도록 하지요. 누가 이제 막 떠오르는 등근 보름달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러자 그의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들이 떠올랐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본 바 있던 ① 둥근 쟁반 ② 환하게 웃는 아가의 얼굴 ③ 이제 막 구워낸 따끈한 호떡 등이 떠올랐다면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이미지입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시의 싹이 됩니다. 그런데 앞의 세 가지 중 ①과 ②는 보통 사람들도 흔히 떠올리는 범상한 이미지들입니다. 그런데 ③은 좀 색다른 느낌이 들지요? 이런 색다른 이미지가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개의 이미지만으로 한 작품을 만들기도 합니다.
소설가 황순원씨는 『골동품』이라는 시집을 낸 바 있는데 그 시집 속에 수록되어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앞의 두 인용 작품처럼 한 개의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진 단시(短詩)들입니다. 빌딩에 달려있는 수많은 창문들을 보자 하모니카 구멍이 생각났고 잘 익은 옥수수를 보자 웃을 때 드러난 이빨들이 떠올랐겠지요. 네, 시는 이렇게 별로 대단한 글이 아닙니다. 앞에서 우리가 예로 들었던 '보름달'을 '막 구워낸 따끈한 호떡' 쯤으로 써 놓고 시라 불러도 크게 흠될 것이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시에 자신이 좀 생기지요? 그러면 이제 직접 한번 시도해 보기로 할까요? 다음의 소재들에서 이채로운 이미지들을 붙잡아 보시기 바랍니다. <우산> <항아리> <안경> 이것이 오늘의 과제입니다. 건필을 기대합니다.
- 임보 교수 시창작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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