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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기드온, 이스라엘을 구원하여라. 바로 내가 너를 보낸다.”
<판관기의 말씀 6,11-24ㄱ>
그 무렵
11 주님의 천사가 아비에제르 사람 요아스의 땅 오프라에 있는 향엽나무 아래에 와서 앉았다.
그때에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은 미디안족의 눈을 피해 밀을 감추어 두려고, 포도 확에서 밀 이삭을 떨고 있었다.
12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힘센 용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기드온이 천사에게 물었다.
“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시다면, 어째서 저희가 이 모든 일을 겪고 있단 말입니까?
저희 조상들이 ‘주님께서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오지 않으셨더냐?’ 하며 이야기한 주님의 그 놀라운 일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은 주님께서 저희를 버리셨습니다.
저희를 미디안의 손아귀에 넘겨 버리셨습니다.”
14 주님께서 기드온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너의 그 힘을 지니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족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여라.
바로 내가 너를 보낸다.”
15 그러자 기드온이 말하였다.
“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
16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 그리하여 너는 마치 한 사람을 치듯 미디안족을 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7 그러자 기드온이 또 말하였다.
“참으로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신다면, 저와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이 당신이시라는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
18 제가 예물을 꺼내다가 당신 앞에 놓을 터이니, 제가 올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마십시오.”
이에 주님께서, “네가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머물러 있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19 기드온은 가서 새끼 염소 한 마리를 잡고 밀가루 한 에파로 누룩 없는 빵을 만들었다.
그리고 고기는 광주리에, 국물은 냄비에 담아 가지고 향엽나무 아래에 있는 그분께 내다 바쳤다.
20 그러자 하느님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고기와 누룩 없는 빵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물을 그 위에 부어라.”
기드온이 그렇게 하였더니,
21 주님의 천사가 손에 든 지팡이를 내밀어, 그 끝을 고기와 누룩 없는 빵에 대었다.
그러자 그 큰 돌에서 불이 나와 고기와 누룩 없는 빵을 삼켜 버렸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는 그의 눈에서 사라졌다.
22 그제야 기드온은 그가 주님의 천사였다는 것을 알고 말하였다.
“아, 주 하느님, 제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주님의 천사를 뵈었군요!”
23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죽지 않는다.” 하고 말씀하셨다.
24 그래서 기드온은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주님은 평화’라고 하였다.
✠ 복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23-30>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24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7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2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30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마음을 부자로 만드는 열등감, 가난하게 만드는 양식>
어제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으면서도 가진 것을 다 팔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어려워 주저하던 부자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기보다 어렵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자는 돈의 액수에 달렸지 않습니다.
‘돈에 대한 집착’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서도 외적으로는 부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그런 재산은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거지라고 할지라도 신문지와 잠자리에 집착하여 이웃과 싸우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부자입니다.
부자는 욕심이 많아서 나눔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재물뿐만 아니라 먹는 것도 마찬가지고 권력이나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든 세상 것에 집착하는 이는 부자이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것들에 집착하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돈이 없어서 돈을 모을까요?
아닙니다.
결국 모든 집착의 원인은 ‘열등감’입니다.
자존감이 없으니 그런 것들로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우려 하는 것입니다.
보디빌딩을 할 때 어떤 개인 트레이너들은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음료수에 스테로이드를 타서 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개인 교습을 받다가 여자인데도 수염이 나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현상도 겪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헬스 트레이너 ‘김동현’ 씨가 ‘실화 탐사대’에 나와 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약물로 운동을 하다가 거의 성불구에 가깝게 되고 나서야 약물을 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은 스테로이드를 많이 복용하면 이런 증상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정자 생산 능력 저하, 성기능 약화, 심근경색, 심장마비, 급사, 전립선 비대증, 전립선암, 당뇨병, 고지혈증, 목소리 변화, (여성의) 남성화 등.”
이런 것을 알면서도 약물을 끊을 수 없는 이유는 몸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남들이 자신을 대단하게 봐주는 시선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헬스 전문 유튜버인 ‘박승현’ 씨는 고등학교 때 키 163cm에 몸무게 54kg의 왜소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05kg의 지나치게 근육이 비대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운동할 때는 사람들이 봐 주니까 한 달에 백만 원이 넘는 약물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 복용하며 몸을 키운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렇게 약물을 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고 하니, 그는 차라리 약물을 끊게 하려면 죽음을 달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는 이 몸을 통해서 많은 걸 얻고 있고 이것들을 버리고 싶지 않아요.
작은 몸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관심이나 사랑을 많이 받아보질 못했습니다.
그런 상태로 중학교, 고등학교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그래도 운동을 하다 보니까 몸이 조금 좋아졌어요.
그러니까 나한테 관심을 주고 나한테 말을 걸고 그러는 거예요.
내가 거기에 미쳐버린 겁니다.
나는 한 번도 살면서 받아보지 못했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된 거죠.
나를 특이하게 보고 나를 대단하게 봐주니까 저는 여기에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어요.
약물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요.”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굶어 죽을까 봐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다 사랑받지 못한 열등감 극복용으로 모으는 것입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주식을 50억쯤 하는 중년 자매님이 코로나로 며칠 사이 10억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정말 죽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10억이면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죽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이뤄놓은 것이 많지 않은데, 주식으로 성공했다는 자존심이 무너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가난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핵심은 ‘자존감’입니다.
열등감이 큰 만큼 집착이 큰 부자이고, 자존감이 큰 만큼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의 것입니다.
그런데 자존감은 ‘양식’으로 길러집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담긴 양식을 잘 먹은 이들은 자존감이 큽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늘에서 오는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같은 부모의 같은 양식을 먹는다면 그 사람은 지위가 상승합니다.
자존감이 폭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게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2014년에 복자품에 오른 분 중에 백정 출신도 있습니다.
순교자 황일광 시몬입니다.
1792년 황일광은 우연히 홍주 땅으로 이주하여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우게 됩니다.
교우들은 그의 사회적 신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를 애덕으로 감싸주고 하느님 안의 한 형제로 대합니다.
이 때문에 그는 농담조로 이렇게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경기도 광주 분원에 있는 정약종 회장의 집 이웃으로 이주해 살면서 황사영과 김한빈 등 여러 교우와 친밀하게 지냅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황일광은 땔나무를 하러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갑니다.
포도청과 형조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아무도 밀고하지 않았습니다.
관리들은 천한 신분을 가진 자가 그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배교의 대가로 주겠다고 하는 목숨도 거부하는 데 화가 나서 더 무서운 고문을 가했습니다.
황일광은 모든 것을 굳건하게 참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기쁨으로 외쳤습니다.
“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겠으니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 결과 그는 다리 하나가 부러져 으스러지도록 매질을 당합니다.
사형선고를 받고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가족들이 자기 곁으로 오지 않게 합니다.
홍주에 도착한 1802년 12월 27일, 참수터로 끌려나가 즉시 처형되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 45세였습니다.
그 당시 백정이면 열등감도 있을 만합니다.
그러나 그는 재물은 물론이요, 애정이나 생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미사 때 양반이나 상놈이나 할 것 없이 같은 식탁에서 생명의 양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부모의 자녀는 우열이 없습니다.
같은 식탁에서 같은 사랑이 담긴 음식을 먹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가난해져서 집착에서 벗어나 나눔을 실천할 수 있으려면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들만 사랑을 실천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베드로와 사도들이 버린 것은 사실 지극히 작고 하찮은 것들이었습니다>
오늘 부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 말씀은 섬뜩할 정도로 강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낙타, 바늘구멍과 같은 과장법까지 동원하시면서 재물을 홀로 독점하지 말고 나눌 것을, 더 나아가서 과감하게 초월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태오 복음 19장 24절)
예수님께서는 독점하는 재물, 부적절한 방법으로 축척된 재물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큰 걸림돌이 될 것임을 명확히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곰곰이 돌아보니 재물은 우리 시대 우상을 넘어 하느님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돈의 달콤한 매력에 흠뻑 빠져든 사람들은 이성을 상실하고, 인간성도 잃어버린 채, 오로지 돈돈하며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천문학적인 재물의 축척 외에 다른 대상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하느님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해보십시오.
즉시 콧방귀를 끼거나 비웃을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들과의 나눔? 가족애, 우정?
무가치한 일로 여길 것입니다.
돈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강하게 질타하시는 대상은 그냥 부자들이 아닙니다.
돈의 노예가 된 부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 자체를 폄하하신 것이 아닙니다.
돈을 권력이요 무기로 삼는 사람들, 오로지 돈밖에 모르며 돈이 최고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만 버리고 비울 것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먼저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 가난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해주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그 어떤 유혹, 그 어떤 대상에도 매이지 않으시고 대자유를 만끽하셨습니다.
그 힘으로 한 점 사심도 없이,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을 찾으며 열정적으로 복음 선포의 길을 떠나셨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버린 것은 사실 지극히 작고 하찮은 것들이었습니다.
낡은 조각배, 닳을 대로 닳아버린 그물, 몇 개 안되는 낚싯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포기를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크나큰 사랑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 살레시오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부자는 죄인인가?>
요즘 ‘유전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을 새삼스레 떠올립니다.
재벌들은 죄를 지어도 감옥에 가지 않을뿐더러 가더라도 쉽게 풀려나기 때문입니다.
돈이 사람을 부립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말씀을 들은 한 부자가 “하느님,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바늘귀를 아주아주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저의 재산 반을 당신께 아낌없이 바치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그렇다면 그가 재산을 바친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가 있을까요?
재물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을 거두어주시길 성령께 기도드립니다.
각자는 자기가 소유한 것을 포기하되 무엇을 버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버렸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유익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렸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상을 백배로 받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는 이유로 버린다면, 결코 진정한 열매는 맺을 수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상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그분의 이름 때문에” (루카 18,29. 마태 19,29) 바쳤을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입니다.
한가지 때문에 전체를 얻을 수도 있지만, 한가지 때문에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를 얻을 수 있는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사실 부자가 가진 재물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눈이 가려 보아야 할 참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재물은 인간을 노예화하는 유혹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만을 생각하면 부정을 해서라도 일등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정신, 의미, 알맹이, 즉 내용을 보면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이미 경기에서 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부자는 죄인인가요?
사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잘 써야 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많은 재물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을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물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쪼록 많이 벌되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들을 하나하나 만들기 바랍니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버리고 또 버려도 버릴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돈이 많다고 우쭐대다가는 쓰러지지만 착하게 살면 나뭇잎처럼 피어난다”고 했습니다. (잠언 11,28)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지 않으면 결국은 하느님 나라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장례식장에 이삿짐 차가 좇아가는 일은 없답니다.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모든 것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을 누리려 한 사람은 그것을 잃게 됩니다.
부디 모든 것을 얻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잠언 30,8-9)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의 물질에 매여 있다면 사랑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헛소리입니다.
성령님,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의 모두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의 모두를 당신의 뜻대로 써주십시오.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삶의 변화를 이루게 해 주십시오.
성령이시여,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나인가?>
우리의 전례는 이번 주간 판관기를 읽는데, 오늘은 판관 기드온 얘기를 들려줍니다.
기드온에게 나타난 주님의 천사는 이렇게 말을 겁니다.
"힘센 용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그리고 그러니 미디안을 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에 기드온은 이렇게 주님의 말을 되받습니다.
"나리,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
주님은 기드온이 힘센 용사라고 하고, 기도온은 자신과 자신의 지파가 약하고 보잘것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자신을 약하다고 하는 기드온의 말은 겸손입니까?
겸손을 가장한 엄살 또는 책임의 회피입니까?
그래서 저를 성찰케 됩니다.
과거의 저는 바쁘다는 말을 싫어했고, 그래서 바쁘냐고 인사치례로 말을 걸어도 바쁘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많은 경우 바쁜 척하는 것이고 엄살을 떠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제가 싫어한 말은 자신이 없다거나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일을 앞두고 그 일에 의미를 두지 않거나 열망이 부족한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일을 앞두고 멈칫하거나 망설이고 그래서 전만큼 추진력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툭하면 하는 말이 힘이 딸린다는 말인데, 그런데 이것이 사실이고 현실의 인정이기도 하지만, 하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된 방어적인 약함이거나 하지 않으려는 방어적 핑계와 엄살이 섞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힘이 약해지고 그래서 전에 쉽게 하던 일이 힘이 들게 되면 하고 싶은 마음도 줄어들고 그래서 망설이거나 멈칫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방어적인 핑계와 엄살이라고 너무 부정적으로만 말할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영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인간적인 핑계와 엄살이고, 그래서 하느님은 오늘 기드온에게처럼 힘센 용사라고 하는데 나는 힘도 없고 보잘것없다고 핑계를 대고 엄살을 부리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기드온의 주님은 "힘센 용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힘센 용사가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힘도 없고 보잘것없다고 핑계를 대거나 엄살을 부리는 것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표시일 뿐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나인지 또는 아닌지 돌아보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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