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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중동정책의 핵심 3가지 · 이스라엘에 대한 조건 없는 지지 · 미,이스라엘 동맹에 아랍국가들을 끌어들여 이란 붕괴시키기 · 팔레스타인의 고통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이희수 한양대 교수·중동학 칼럼 중에서, 경향신문) |
2. 이집트 혁명을 이끄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집트 혁명의 주체는 ‘히티스테’. (청년 실업자를 뜻하는 아랍어)
이집트 실업자 중 90%가 30대 이하 청년층이다.
청년층의 인구는 전체 이집트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이들은 페이스북과 SNS, 인터넷 활용에 능숙하다.
▲ 분노의 날 집회 포스터와 키파야 회원모습 ▲ 4월6일 운동 회원과 이집트 혁명 웹포스터
키파야(Kefaya)
2004년, ‘무바라크 대통령 퇴진’이란 공동의 요구 아래 만들어졌다.
키파야는 아랍어로 '충분하다' 라는 뜻으로
"30년 장기 집권으로 충분하니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의미의 시위 구호로 쓰였다.
이슬람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등 다양한 계층이 모인 ‘정치 그룹’으로
이들의 핵심 요구는 가장 넓은 영역인 민족, 민주, 자주국가 건설이다.
튀니지 혁명 직후, 1월 15일 키파야는 페이스북에 시위 공지 글을 올렸다.
4월 6일 운동(April 6 Youth Movement)
http://6april.org/ (사이트)
http://www.facebook.com/group.php?gid=9973986703 (페이스북)
페이스북으로 조직된 이집트 청소년 운동그룹.
2만 6000여 명의 페이스북 회원으로, 2008년에 이집트 노동자 파업을 지원하며 시작되었다.
정치 세력과 협력하지만 어떤 정당이나 운동 세력과는 관계가 없다.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 부정부패, 경제개혁을 요구하며 정부의 독재에 반대하고 있다.
3. 무바라크의 30년 장기독재가 가능했던 이유
무바라크(84세)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에서 전쟁영웅이 되면서,
1981년 10월 국민투표에서 유일 후보자인 무바라크가
98.46%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선 즉시 무바라크는 비상계엄선포를 내렸고,
이는 30년 동안 이어져 1989년 국정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는 이인자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국민의 신망과 육군의 지지를 한몸에 받았던
무함마드 아부 가잘라 국방장관을 집권 8년 만에 제거하면서 1인 독재체제를 굳혔다.
정권연장을 위한 선거법 개정
1996년에 선거법을 개정해 정권연장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야당의 집권가능성을 차단했다.
대선에 출마하려면 여당이 장악하고 있는 250여 명의 상,하원 의원 또는
지자체장의 추천을 받거나 설립된 지 5년 이상 된 정당 당원이어야 한다.
유권자 등록은 1년 전에, 유권자 재등록은 경찰서에서, 투표는 보안요원이 있는
공립학교나 경찰서에서 한다. 99%에 달하는 무라바크 지지율이 여기에 숨겨져 있다.
야권과 국민 탄압
무바라크는 반정부 세력은 물론이고 도전 세력을 대부분 추방하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보냈다.
반정부 세력 용의자를 체포하기 위해 가족을 가두는 방법까지 동원했다.
현재 이집트에는 수용소와 정치범의 숫자를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또한 가난한 다수 인민을 대변하는 정치조직, 무슬림형제단의 정당 설립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2010년 현재 무슬림형제단 1만 명이 재판 없이 감옥에 갇혀 있다." 알 타니 전 이집트 총리
2007년, 야당은 이집트 감옥에서 일어나는 고문과 비인도적인 처우를 기록해 책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5명 이상의 사람이 모이면 처벌하는 '비상사태법'은 이집트인 블로거와
노조 시위자들에게도 적용해 탄압하고 있다.
무바라크의 비밀경찰조직
1960년대부터 이집트 경찰은 일부 지역에서 마약을 밀매하고
기업을 착취해왔으며, 각 지역을 자체관리해왔다.
1980년부터는 세력이 커져, '갱(gang)' 단이라 불릴 만큼 통제가 불가능한 조직이 됐다.
무바라크 정부는 높은 임금으로 이들을 고용해 정치범 탄압, 여성 시위자 성폭행 등
정권의 사조직으로 만들어갔다.
무바라크 일가의 부정부패
영국 가디언지에 따르면 무바라크 대통령 일가 재산이 78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의 일가는 이집트 기업과 언론, 건설, 교육 등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무바라크의 장남인 알라는 이동통신 사업, 고가품 수입업, 건설, 방송을 장악했고,
차남인 가말은 무바라크 전 집권당 국민민주당의 서열 3위인 정책위원장이었다.
영부인 수잔은 문화와 교육사업을 장악하고 있다.
4. 이집트 다수 인민을 대변하는 정당, 무슬림형제단은 누구인가?
무슬림형제단 (Muslim Brotherhood)
◀ 현 지도자 무하마드 바디
무슬림 형제단은 세계 이슬람 운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오래된 조직 중 하나이다.
하마스, 헤즈볼라 등 이슬람 단체들이 무슬림형제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28년 이집트인 핫산 알 반나(Hassan al-Banna)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꾸란과 이슬람의 가르침대로 살고, 식민지배에 대한 거부와
칼리프의 귀환을 이데올로기로 표방하고 있다.
(칼리프: 이슬람 공동체·이슬람 국가의 지도자·최고 종교 권위자의 칭호)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 정부의 계속되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가장 대중적인 운동으로 성장해 왔다.
영국이 이집트에 주둔하며 지배를 계속하자 이에 대항하는 저항을 계속해 오는 등
이집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무바라크 정부는 무슬림형제단을 합법적인 정치조직으로 인정하지 않고,
선거 후보자를 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2005년 총선에서 후보들을 무소속으로 출마시켜 전체 의석 중 20%를 만들어냈다.
그 후 무바라크 정부는 무슬림형제단의 영향력을 제어하기 위해 민주화를 지연시켰고,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각종 모략을 펼쳐왔다.
지난해 11월 총선 기간 무슬림형제단 1,000명 이상을 체포하기도 했다.
5. 다음 이집트 대선 주자로 거론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75세)
지난달 29일, 무바라크 대통령은 30년간 공석으로 두었던 부통령직에 술레이만을 발탁했다.
그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오른팔로 알려졌다.
술레이만은 육군 중장 출신으로 오랫동안 정보기관 수장으로 일해왔다.
1995년 에티오피아 암살사건에서 무바라크 대통령의 목숨을 구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면서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절대적 신임을 받게 되었다.
지난 6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술레이만 부통령 지지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술레이만 부통령은 미국 ABC TV의 시사프로그램 '디스 위크'(This Week) 인터뷰에서
대선에 출마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엘바라데이 (70세)
전 IAEA 사무총장, 노벨평화상 수상자.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오랜 국외생활을 해왔다.
2010년 2월, 잠시 이집트로 돌아와 '변화를 위한 국민연대'를 창설했다.
'국민연대'는 헌법 개정과 자유선거 보장, 30년째 계속되고 있는 비상계엄법 폐지,
대통령의 3선 연임제한, 공정한 대선 보장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집트 민중들의 '백만인 행진'이 있던 2월1일,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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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그나물에 그밥?? ㅡ-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