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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뇌교육 종합 대학원 대학교 이승헌 총장의 젊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 이승헌 총장은 한 자리에 5분 이상 앉아있지 못할 만큼 집중력 장애가 심했습니다. 오죽하면 담임선생님이 생활기록부에 “이 학생은 가능성이 없습니다”라고 썼을까요. 대학입시도 연거푸 낙방하고 일없이 지내던 스물한 살의 이 총장은 마을 다리 아래에 방치 된 채 썩어가는 쓰레기 더미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쓰레기를 바라보았습니다. 순간 그 쓸모없는 쓰레기 더미가 꼭 그 자신처럼 느껴졌습니다. 열패감(劣敗感)이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이렇게 살 수 없어.” 그는 쓰레기를 치우기로 결심하고 집에 돌아가 지게와 삽을 챙겨들고 나섰습니다. 우선 다리에서 멀지않은 산자락에 구덩이를 여러 개 파놓고 지게로 쓰레기를 퍼 날랐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지게를 지니 어깨에는 깊은 피멍이 들었습니다. 그런 이 총장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의 어머니는 당장 그만두라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죄송했지만 이 총장은 포기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쓰레기를 모두 치우고 구덩이를 메운 자리에 호박씨를 뿌렸습니다. 몇 달이 지났습니다. 쓰레기를 묻었던 산자락은 풍성한 호박밭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렁주렁 탐스럽게 영근 호박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그는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커다란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결과에 따른 창조의 기쁨이었습니다. 쓰레기가 호박이 된 순간이 곧, 그의 안에 잠자고 있던 자신감과 희망이 깨어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깨달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단군의 홍익인간 이념을 전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기는 처음에 태어나면 매우 이기적입니다. 모두가 자기 것입니다. 그것을 갖지 못하면 화를 내고 울어버립니다. 그러면서 차차 학교에서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며 희생을 강요합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고, 세상을 구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저는 국기에 대한 맹세 같은 것을 하면서도 ‘과연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치면 행복한 건가?’ 하는 의구심을 끊임없이 품어왔었습니다. 종교에서도 남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신부님과 수녀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분들이 신자들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치신 분들임에도, 항상 행복해 보이지만은 않았습니다. 결국 깨달은 것은 다시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도 나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면 위선적일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나만 살아서도 안 되지만 너만 살아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받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거저 나인의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셨을까요? 그 기적 안에서 당신의 어머니를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연민은 그 과부와 장차 당신 아드님을 잃게 될 성모님께 대한 것이었습니다. 풀지 못하는 연민만큼 가슴 아픈 것이 있을까요? 예수님이 이기적이라고 하면 욕을 할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이기적(利己的)’, 즉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분이시라면 틀린 말일까요? 사람은 남을 위해 사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자신을 위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려주시면서도 당신 자신을 위함인 줄 아시기에 지치지 않고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괜히 나만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진짜 이기주의입니다. 왜냐하면 주는 것을 통해서 동시에 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도 도움이 돼야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악어새는 악어의 이빨을 청소해 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배도 채우는 것입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남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인간을 위해서만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위한 길이 세상을 위한 길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편안해야 우주가 편안한 것입니다. 무엇이든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믿어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남을 위해 봉사하면서 동시에 나의 양심도 평안함을 얻고 있음을 잊으면 알 될 것입니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님의 [한 치과 의사가 평생 실천한 하느님 사랑]이란 글을 옮겨보겠습니다. “지난 5월 6일 서대문구의 한 허름한 치과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습니다. 34년 동안 전국을 돌며 수많은 한센인을 찾아가 무료로 진료를 한 이 병원의 원장님에게 한센인 대표들이 감사패를 전달하러 온 것입니다. 원장님의 이름은 강대건 라우렌시오입니다. 서울 대신학교에 다닌 신부님들과 신학생들은 ‘아~ 그 선생님’ 하실 것입니다. 많은 신학생들이 강 원장님에게 무료로 치료를 받았고, 형편이 어려운 신학생들에게 용돈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희는 강 원장님께서 한센인들을 위해 봉사하신다는 이야기는 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강 원장님은 한사코 자신의 선행을 주변에 알리지 않았고, 큰 상을 준다고 해도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그는 묵묵히 그저 자신의 운명처럼, 평생을 한결같이 봉사만 했습니다. 딸들조차 병원이 너무 허름하여 친구들에게 여기가 우리 아빠 병원이라고 단 한 번도 자랑스럽게 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강 원장님께서 봉사를 시작하신 계기는 아주 우연한 경험을 통해서였습니다. 어떤 병원에 갔는데 한센인 한 명이 진료를 받으러 왔답니다. 그런데 병원 측에서는 돈을 집어 던지며 내쫓았습니다. ‘여기는 너 같은 문둥이가 오는 곳이 아니다. 병원 문 닫게 하려고 작정했냐!’ 그때 힘없이 돌아서는 한센인의 뒷모습을 본 강 원장님은 한센인을 위한 봉사를 결심하고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오래전에는 한센인들이 병원 진료는 엄두도 못 냈을 뿐 아니라, 시내버스도 못 타고 잠잘 곳도 없어 공동묘지 옆에서 자는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소외된 이들을 위한 강 원장님의 열정은 34년 동안 식지 않았습니다. 혹시 그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쫓긴 한센인의 모습으로 강 원장님에게 다가오신 건 아닐까요. 강 원장님이 감사패 전달식에서 하신 말씀은 오랫동안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립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대로 가슴으로 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습니다. 봉사에서 얻은 기쁨과 보람이 커서 나는 다시 태어나도 봉사를 할 겁니다.’”
따라서 내가 사랑을 실천해 주는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다운 희생도 사랑도 아닙니다. 가슴은 나의 사랑을 받아주는 그 상대 때문에 내가 행복해 질 수 있음을 압니다. 고 이태석 신부님이 생명을 바친 톤즈의 가장 불쌍한 한센인들에 대해 하신 말씀을 들어봅시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 한 채 이곳까지 오게 한 것도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드는 한센인들의 신비스러운 힘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 내 안엔 두 주인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바로 사탄과 하느님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아와 양심입니다. 그러나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양심을 만족시켜야합니다. 남에게 좋은 영향을 주어야 자신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만족시키려고 하면 언제나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라는 것의 본질이 영원한 불만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안의 양심, 즉 하느님을 만족시키려고 한다면 언제나 행복이 옵니다. 그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듯 이웃을 향한 희생입니다. 그러면 내 안의 새로운 주인, 아니 본래의 주인이었지만 그동안 잊혀졌던 그분께서 만족하십니다. 그러면 나도 만족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원한 만족을 본질로 지니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심의 본질은 ‘행복’입니다. 그리고 행복해지는 방법은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임을 아십니다. 따라서 나인의 과부도 예수님의 연민을 해결해주는 예수님께 도움을 준 사람인 것입니다. 나의 행복을 위한다면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하는 전제가 깔려있을 뿐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으십니까? 양심의 법을 충족시키십시오. 어느새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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