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매화산 청량사
절집을 답사하는 계획표에 따라 해인사를 여러 번이나 찾아가면서, 청량사로 가는 안내판을 보았다. 버스길에서 3km라고 하였다. 청량사가 매화산 자락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얼마나 걸어가야 하는지는 몰랐다. 안내판의 3km는 내 머릿속에 아주 강하게 각인이 되었나 보다.
여름도 지나고, 가을바람이 불어오니, 여름 동안 중지하였던 절집 답사를 다시 시작해 볼 심산이었다. 아내더러 매화산 청량사에 가자고 했다. 가야 정류장에 내려서 3km길이라고 하니, 왕복 6km이다. 우리가 걷기에는 딱 맞는 거리라고 말해주었다. 잘못된 정보였다.
가야면 정류장에 내려서, 쭈욱 올라가면 청량사 가는 안내판이 나온다고 하였다. 우리 부부는 안내판 나오기만 바라면서 해인사 쪽으로 난 오르막 길을 걷다보니 2km나 걸었다. 아이구야, 3km 라는 안내판은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5km 길이고, 왕복이면 10km인데. 산길 10km는 무리이다 싶어 낙담하고 있는데, 마침 택시가 지나갔다. 우리 부부는 택시를 타고, 절까지 오르막 길을 달렸다. 오르막 경사가 꽤 심했다.
내가 청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탑 공부를 하고서부터이다. 아래 고을인 야로면에 있는 월광사지 탑과 더불어 신라 말의 석탑 양식을 잘 갖춘 탑이다. 고려시대 탑의 일반적인 양식으로 ‘지대석’이 있다. 청량사 탑에서 처음으로 지대석이 나타난다고 하니, 탑공부를 하는 사람은 가보고 싶어 하는 탑 중의 하나이다.
청량사는 가야산 국립공원에 있는 합천 해인사의 산내 암자이다. 가야산과 마주하고 있는 매화산의 해발 600미터 쯤에 자리잡고 있다. 절 지붕 위로 바라보이는 매화산 봉우리는 기암절벽이어서 금강산을 흉내 낸 절경 중의 절경이다. 이런 이유로 등산객이 줄을 잇는다. 그들은 절 앞으로 난 길을 따라 산을 오르고, 절집에 들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내와 나는 절 마당에 들어섰다.
청량사의 정확한 창건 년대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삼국사기의 열전 최치원 조에 이 절에서 말년을 보냈다면서 남긴 기록이 있다. 옮겨보면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 다시 벼슬에 뜻이 없었다. 이에 산수 사이에서 소요하고, 강과 바다에서 노닐었으니 누대와 정자를 지어 소나무 대나무를 심기도 하고, 글을 읽고 시를 읊조리며 한 세월을 보냈다. 저 경주의 남산, 강주(지금의 의성)의 빙산, 합주(지금의 합천)의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지금의 마산)의 별서(농지 사이의 오두막을 뜻하나, 별장의 의미가 강하다,)가 모두 그가 노닐던 곳이다.”
최치원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들리지만 이 절에 있는 세 개의 유물은 전설이 아니고, 사실이다. 대웅전 안의 석조여래좌상(보물 265호), 대웅전 앞에 나란히 서 있는 고복형 석등(보물 252호) 그리고 삼층 석탑( )이다. 석탑은 내가 불교미술을 공부하면서 탑을 공부하였으므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매화산 등산로에 있는 절이라 하여, 험한 산길이라 지레짐작하고 찾기를 미루고 있었다. 그 탑을 마주하고 있으니 약간 흥분도 되는 묘한 기분이다.
절집에 닿으면 대웅전의 축담 위에 서서 골짜기를 바라보는 것도, 절집 답사의 즐거움이다. 유홍준이 소개한, 영주 부석사의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서 절 아래로 펼쳐지는 골자기의 풍광 이야기 때문이리라. 여기서 바라보는 골짜기의 경치도 일품이다. 산자락의 능선이 겹겹이고, 저 멀리 골짜기 아래는 실안개 속처럼 흐릿하다.
절집 바로 앞으로는 제법 널찍한 주차장이 있고, 알록달록한 차림을 한 등산객이 오르내린다. 등산로가 숲속으로 사라지자 그들도 숲속으로 사라진다. 등산객의 모습은 산과 하나가 되어 있다. 우리는 절집 앞의 바위 위에 앉아서 준비해간 점심을 먹었다.
우리 부부가 절집을 찾을 때마다 묘한 기분을 느낀다. 너무 많이 장식하고, 치장하여 절집이라는 본래의 뜻을 훼손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막말로 하면 속세의 세상인지 수양의 장소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그러나 절 마당은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분위기가 고적하여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는 절집도 많다. 산속 암자일수록 그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청량사도 산내 암자로 소개되어 있으나, 암자가 아니고 온전한 절이다. 여기저기를 최근에 다듬은 흔적이 많지만 너무 요사스레 장식한 것은 아니다. 하여간에 청량사는 이것도, 저것도 모두 느껴진다.
언제나 그랬듯이 아내는 법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절 마당에 서서 합장하고 고개 숙여 절
하였다. 그리고는 고복형 석등과 삼층 석탑 앞을 어슬렁거렸다.
보물로 대우를 받는 석조여래 좌상을 보자.
지난 주에 방문했던 군위 삼존불의 부처님은 인체의 비율로 보면 얼굴이 유난히 크고, 무릎 부분은 빈약하다. 석굴암 부처님과 비교하면 인체 포현에서 균형이 안 맞다, 이런 이유로 석굴암 부처님보다 먼저 태어나셨다고 한다. 여기 청량사 부처님은 몸의 비례와 균형이 석굴암 부처님에 가깝다. 그러나 미적 표현이 많이 떨어진다. 그래서 석굴암 부처님보다는 년세가 모자라지만 통일신라 후대의 부처님으로 본다. 삼층석탑의 지대석까지 생각하면, 최치원 선생이 사시던 때에 조성한 부처님이 맞을 듯하다. 미술사적 관점에서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자.
산중 절은 거의가 오르막 길을 힘들게 올라가야 한다. 절집을 찾는 이유는 부처님의 음덕만을 바라서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부처님이 무슨 음덕을 베푸신단 말인가. 그런 분이 아닌데 말이다. 부처님을 뵈오려 오를 때는 정성을 다해야 한다. 오르막 길을 힘들게 오르는 이유라면 힘든 길을 걷는 것이 나의 정성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맞다, 정성들여 힘들게 오르는 동안에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깨달음도 얻어리라. 내가 나에게 음덕을 베푸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부부는 택시를 타고 왔다.
내려가는 길은 걷기로 했다. 걸어서 내려가니 엄청 가파른 길어었다. 몸이 앞으로 쏠려서 무게가 발 끝에 실린다. 발톱이 아프다. 나는 손톱깎기를 꺼내서 아내더러 발톱을 깎아달랬더니, 이것도 가져다녀 한다. ‘나는 본래 준비성이 많은 사람이야. 으쓱했다. 쉬엄쉬엄 내려가니 산에 갔다 내려오시는 분들은 우리를 앞서더니 금방 굽이 길 너머로 사라진다.
내리막길이라서 조금 수월하긴 하더라도, 그래도 5킬로미터 길을 걸어서 가야 정류장에 왔다. 마음이 흐뭇하고 기분이 좋다. 정류장에는 대구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하아, 맞다. 오늘이 일요일이지. 도시로 나가 살던 사람이 일요일을 맞아. 고향을, 시골의 부모님을 찾아뵈오려 왔을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네들의 얼굴이 환하고, 밝다.
23. 10. 24
첫댓글 힘든 길을 잘 다녀 오셨네요. 매화산 남산제일봉 등산 다니던 추억이 아련합니다. 절집은 잠시 스쳐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