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가 금의환양했다. 나는 솔직히 유명한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전성기에 은퇴를 선언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약간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에 가까운지라 서태지의 은퇴 선언도 머지않아 뒤집힐 것이라는 생각을 그 동안 하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 단 한번도 그런 약속들이 번복되지 않고 지켜진 경우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솔로 앨범 1집을 발표하고 재빨리 빠지는 방법으로 성공적인 컴백을 모색하던 서태지가 4년 7개월의 은퇴를 접고 다시 열광하는 팬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문제로 보였다.
서태지는 과연 거물이었다. 어떤 비행기를 타고(비행기 회사에서 서로 모시려고 경쟁이 치열했단다) 한국에 도착할 것이냐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공항에 도착하면 어떤 방법으로 환영 나온 수천 명의 팬들을 따돌리고 안전하게 '경호'할 것인가의 결정, 그리고 첫 공개발표회의 연습과정을 공개적으로 할 것인가 비공개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 등, 이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대하는 모습은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의 국빈들이나 초일류 스타급 외국 연예인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절차들이었다. 서태지가 거물로 취급되고 있는 정황 증거라고나 할까.
서태지 자신도 이런 주위의 부추김에 걸맞게 행동하는 듯했다. 방송 출연을 드물게(견해에 따라서는 자주) 조정하면서 자신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팬들의 기대감과 조금도 괴리가 없게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일부 음악평론가들은 서태지의 이런 연출된 행동을 보고 '태지 마케팅', '신비화' 작업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그들은 또 새 앨범에 실린 음악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외국 그룹의 '모방'작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전혀 기대 밖의 반응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서태지는 거대 신문사와 일련의 인터뷰를 마련하고 부지런히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시작한다.
이런 논란 속에서도 그를 '영웅'의 대열에 놓고 숭배하던 골수 팬들의 지지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팬들은 그가 들고 나온 음악이 어떤 것이던지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서태지이니까 믿겠다는 얘기다. 그 동안에 그는 그들의 영웅이었으므로 앞으로도 그에 대한 지지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한번 영웅은 영원한 영웅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열성 팬들의 앞을 다투는 구매열기에 힘입어 서태지의 솔로 앨범 2집은 100여 만 장에 가까운 판매실적을 올린다.
서태지도 이 앨범의 상업적 성공은 인정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엇갈린 평가에 대해서는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모순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실제로 서태지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련의 현상들은 모순 덩어리임에 틀림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은 대중을 떠나 있는데도,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지지하며 지원해주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가수는 '사회운동가'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데도 수용자와 비평가들은 그의 음악 속에 담겨져 있는 '진보성'을 논하고 있는 모순도 드러난다. 미국의 비주류 음악이 한국의 주류 문화를 이루고 있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렇게 서태지는 난해하다. 그의 음악 세계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 현상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다. 어쩌면 '서태지 현상'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처한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그러나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점들은 돋보이는, 좋게 말하기도 나쁘게 평가하기도 애매한 그런 이중성이 서태지의 음악에 내재해 있다. 그렇다면 이를 파헤쳐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서태지 음악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보다도 우선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과연 서태지 음악이 존재하기나 한 것일까?
서태지는 창조자가 아니다
그 동안 서태지는 자신의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몇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오로지 새로운 음악적 영감을 얻기 위해 노력한 적이 많았다고 고백하곤 했다. 이는 서태지 음악이 저자 개인의 창조성에서 비롯된 산물이며, 따라서 그의 음악도 이런 처절한 노력의 결과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한 이야기인 듯싶었다. 한마디로 소비자들이 서태지의 음악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이런 그의 음악적 노력까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서태지는 독립적인 위치에서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표현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얘기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서태지라는 이름과 그가 작곡하고 연주한 음악을 동일시하고 있다. 서태지의 음악이 서태지라는 저자에 의해 창조된 산물로 믿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억지스럽고 모순된 일인지는 서태지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 그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음악이 새롭지도 실험적이지도 못하다는 지적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내 음악이 콘(Korn)과 비슷하다고들 말하는데 이런 계열의 음악을 하는 뮤지션치고 콘의 영향을 받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서태지 자신도 그가 이번에 들고 나온 음악이 미국의 락 그룹 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영향'이라는 말은 여기서 어울리지 않는다. 콘의 뮤직 비디오와 서태지의 연주 모습을 나란히 병치해 놓은 텔레비전 화면을 보게 되면 이 말이 얼마나 절제된 표현인지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서태지가 콘을 '복사'(copy)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만큼 서태지의 음악적 분위기와 스타일은 미국의 첨단 락 그룹을 빼닮아 있다. 물론 이에 대해 서태지는 "오히려 외국인들은 모두 (자신의 음악이) 새로운 사운드라고 평가해줬다"고 항변한다. 그는 락 음악이 마치 사운드만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듯이 아주 편리하게 대답한다.
여기서 콘과 서태지의 관계가 단순한 '영향'의 수준을 넘어섰다고 강조하는 것은 서태지의 음악을 폄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서태지의 음악이 개인의 창조적 재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신화를 뒤집기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배경 설명이다. 그가 데뷔 시절부터 무엇인가 항상 '새로운 것'을 들고 나왔다는 그 믿음을 깨기 위한 전제인 것이다. 도대체 그의 무엇을 새롭다고 얘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미국의 최신 음악 경향을 재빨리 수입해 한국 시장에 소개하는 것이 새로운 시도라고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런 노골적인 비평에 대해 서태지는 당황스러워 한다. 처음 듣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처음부터 첨단을 걷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 첨단성은 항상 '앞서가는 음악'을 모방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다행스럽게도, 그런 실험이 한국 수용자들에게는 아주 새로운 음악적 경험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바로 그 '새롭다'는 기준 하나만으로도 음반 판매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던 것이 사실이다. 새롭다는 추상적인 개념은 이렇게 현실을 구축할 수 있을 만큼 서태지 음악의 강력한 무기가 된 것이다.
이제까지 이런 과정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솔로 2집 발표를 계기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모방' 시비에 서태지는 당혹해 한다. 실제로 그가 새로 발표한 음악은 이미 서구에서 유행하는 하드코어의 변주에 가깝다. 첨단 음악을 변주할 수 있다는 것이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도 아니어서 어느 정도 재능이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서태지의 이번 음반이 창조적일 만큼 신선하지가 않다는 것이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변이다. 예를 들어, 대중음악평론가 성기완은 그의 음악이 "그리 대단하게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태지 "정도의 음악은 이미 닥터 코어 911이나 힙포켓·크래시 등 우리의 하드코어/랩 메탈 계열의 밴드가 괜히 미국 왔다갔다 안하고도 이 땅에서 만들어 냈던 것들이다"고 주장한다.
서태지 말고 한국의 다른 '뮤지션'들도 그와 비슷한 음악을 이미 하고 있다는 얘기는 서태지 음악이 그의 독창적 산물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그가 콘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순간 밝혀질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관례는 서구의 최첨단 유행 음악을 한국에 소개한 가수 그 자신이 어느 특정한 장르의 저자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이제까지 한국 유행 음악의 현실이었다. 바로 이런 근거에서 서태지는 힙합의 저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핌프 락의 창조자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그의 음악이 수입 완제품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들에게 서태지의 음악이 새롭지가 않다는 말이다.
서태지는 언론이 만든 허상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점은 서태지의 음악이 창조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음악을 창조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작업이며, 따라서 서태지 한 개인이 이룩할 수 있는 업적은 더더구나 아니다. 좁게는 유행 음악을, 넓게는 대중문화를 어느 한 사람이 '창조'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낭만적 사고의 잔재일 뿐이다. 좁은 공간에 자신을 가두고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해 새로운 아이디어로 새로운 문화를 그 개인이 창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시장성과 창조성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던 중세의 서구 예술가들을 지극히 이상적으로 그려 놓은 결과 나타난 허구적 작가 개념인 것이다.
작가는 따라서 허상이다. 음악을, 소설을, 그리고 그림을 작가가 제 혼자 힘으로 완성해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작가는 작품을 '창조'한다기보다는 기존의 모든 텍스트를 모방하고, 표절하며, 인용하고, 주석을 달면서 재조합시킨 결과 색다른 유사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뿐이다. 작품은 이제까지 남아 있는 여러 텍스트들의 침전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문화는 한 개인의 천재성에 의해 생산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문화는 사회구성원들끼리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서태지 현상'도 예외일 수가 없다. 그것은 당연히 사회적 과정의 산물이다. 무엇보다도 서태지 음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실제로 가수 서태지는 언론이 만들어 놓은 허상에 가깝다. 언론에게 그 허상은 자신의 비즈니스를 위한 훌륭한 상징적 자본이 될 수 있다. 항상 서구의 첨단 유행 음악을 소개하는 서태지야말로 언론에서 우선적으로 취급하고 싶어하는 인물일 것이며, 그런 만큼 언론사간의 취재 경쟁 또한 치열하다. 바로 이런 경쟁구조 속에서 서태지의 신화가 탄생되는 것이다. 언론은 그가 들고 나온 음악을 그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것으로 소개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서태지라는 개인을 부각시킨다. 필요 이상으로 부풀리면서 말이다.
따라서 언론의 입장에서는, 예를 들어, 핌프 락이 왜 이 시점에 한국에서 유행해야 하는지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만 핌프 락이 어느 누구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는 허구의 작가가 필요할 뿐이다. 새로운 음악을 소개한 서태지는 작가로 대접을 받고, 그런 만큼 서태지라는 개인의 경험, 자전적 역사, 의도가 그 음악을 해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언론은 그가 이 음악을 어떤 생각에서,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창조'했는지를 열심히 보도한다. 서태지의 천재성과 비전의 관점에서 그의 예전 노래와 이번 작품의 차이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가 이제까지 발표한 노래들에서 관통하는 일종의 서태지적 일관성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서태지라는 이름을 기준으로 온갖 해석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항상 같은 얘기를 새로운 것으로 포장해서 독자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언론에게 작가 중심의 해석은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따라서 언론이 대중문화를 다루면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고려에서 비롯된 선택인 것이다. 서태지 신화는 이런 언론의 조건에 힘입은 바가 크다. 언론은 그를 독창적인 음악가로 제시할 필요가 있었고, 서태지는 또 자신을 창조자로 포장하고 싶은 개인적인 욕망이 있었다. 결국, 언론의 필요와 서태지의 욕망이 서태지 현상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된 것이다. 따라서 가수 서태지는 신기루다. 모방을 창작이라 우겨도 누구 하나 개의치 않는 사막의 허깨비인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런 저자 중심의 해석으로 인해 대중음악이란 누구누구에 의해서 생산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다시 저자의 신화를 창조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 중심의 사고가 한 저자가 다른 저자보다 훌륭하거나 열등하다는 비교의 기준을 제시하면서, 결국 문화의 구분까지도 가능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서태지의 하드코어 락이 트롯이나 댄스곡보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음악이라고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저자기능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장르적 차이를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우열의 관계로 몰고 가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이다.
열광하는 청중들
그러나 서태지 현상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의 음악에 열광하는 수용자들의 몫 또한 이 기이한 현상의 중요한 결정 요소이기 때문이다. 서태지라는 존재는 그의 노래를 목이 터져라 따라 부르면서 발을 구르고, 손을 흔들며, 몸을 비틀어 지지를 표시하는 팬들의 성원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들에게 서태지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훌륭한 매개다. 그들은 그의 음악을 통해 몸의 해방을 추구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개를 위 아래로 격렬히 흔들어 댄다. 몸 안에 담겨 있는 온갖 내용물을 털어버리 듯이 말이다. 때로는 바지에 오줌을 싸기도 하고 심한 경우는 기절까지 해 몸에서 정신마저도 이탈시키는 광적인 오르가즘을 의도적으로 유도한다. 그리고 그 해방의 순간을 즐긴다.
서태지 팬들은 그의 음악이 어떤 것이던지 상관하지 않는다. 서태지에 무조건적 반사반응을 보일 만큼 그들의 신뢰가 견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조건적 반사반응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음악을 듣고 한때 자신들이 경험했던 육체의 해방을 다시 체험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서태지의 어떤 음악도 맹목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서태지 음악은 자신들의 기계적으로 훈련된 몸뚱어리에 담겨 있는 나약함을 털어내 버리고 대신 쾌락과 감정을 이입시키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 된다. 억눌리고 파편화된 정체성을 회복시켜 줄 영웅이 바로 서태지인 것이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믿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이는 아이러니다. 신기루 같은 서태지 음악이 이런 실제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그 허깨비 같은 음악도 일단 서태지의 팬들이 자신들의 현실 세계에 적용시키면 실제적인 효과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그의 음악을 현실을 반추하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이 서태지 음악을 듣고 춤을 출 수 있는 한 신기루는 현실로 존재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의 음악은 팬들에 의해 힘이 실리게 된다. 서태지 음악은 더 이상 허깨비가 아니라 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서태지 음악은 팬들의 영역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서태지는 팬들의 존재를 부정한다. 오늘날의 서태지를 만들어준 팬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그는 내뱉는다. "나는 뮤지션일뿐 사회운동가로 보지 말라." 그의 음악에 열광하는 지지자들도 서태지가 사회운동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들이 애초에 서태지를 선택한 것은 그의 음악에서 자유로움과 비판적 메시지를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억눌린 마음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서태지 음악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서태지 자신도 이런 청중들의 요구에 부응한 곡을 지속적으로 발표해 그들의 갈증에 화답하는 듯했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서태지는 가수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더 이상 청중들과 야합하기 싫다는 말은, 좋게 해석해 자신이 원하는 음악만을 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신문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말하는 자신의 음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의 음악 자체는 신기루요 허깨비며 허상이라는 점을 이미 지적했다. 단지, 청중들이 그 허상을 제 것으로 이용했을 때만 비로소 허깨비의 탈을 벗고 실재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서태지의 오만과 무지가 드러난다. 서태지의 음악은 오로지 그를 떠받드는 지지자의 한계 내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서태지는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음악이 점점 더 청중들의 구미에 멀어지고 있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 팬들의 서태지 지지는 맹목적일 것이다. 텔레비전은 서태지가 직접 자비로 제작한 프로그램을 방송하지 못해 안달이고, 신문은 연일 대문짝만한 특집 인터뷰 기사를 찍어내고 있으니 그의 인기는 지속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어느 누구도 그만한 언론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다면 어느 정도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명성이 탄탄한 서태지로서는 지금 이 순간 땅 짚고 헤엄치는 신선놀음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만약 그의 음악이 직수입에 불과한, 또 한국이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벗어난 상태로 지속된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청중들이 서태지의 촌스런 습작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의 음악보다 훨씬 더 세련된 콘의 오리지날 핌프 락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단지 그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정치 부재의 서태지 음악
이런 의심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물론 서태지 자신이다. 락 음악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립싱크를 서태지는 서슴없이 남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립싱크를 계속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처음에 이런 지적을 받았을 때 그의 반응은 가능하면 라이브를 늘려 가겠다는 겸연쩍어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안 돼 이를 번복하고 "하드코어 음악이 낯선 한국의 시청자들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앞으로도 최상의 사운드를 위해서라면 반주의 녹음과 립싱크를 할 것이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는 본인 스스로 아직 락 가수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다. 본토의 원조 락 밴드들은 어느 누구도 반주 녹음과 립싱크를 허용하지 않을 뿐더러, 이런 행위를 청중을 기만하는 사기행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태지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 도대체 이런 오만불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리고 이런 무원칙이 어떻게 용인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그것이 거품처럼 부풀려진 서태지의 위상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면, 함량미달의 수준이 바로 그 거품을 제거할 날도 머지않았다. 서태지의 실력이 현재 그가 누리고 있는 인기와 조금이라도 비례한다면 어떻게 자신의 라이브 사운드가 안 좋을 것을 미리 염려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정작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그는 락 뮤지션이 지녀야 할 최소한의 철학도 습득하지 못하고 있어, 그런 상태에서 만들어낸 음악이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닐지 의문이다. 아니다. 이 말은 틀렸다. 음악은 단순한 소리를 모아 놓은 것이 아니다. 음악은 의미를 전달하는 사인(sign)인 것이다. 작곡가가 설령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그가 만들어 놓은 소리는 당연히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다. 그러나 만약 서태지가 의도적으로 소리의 실험을 시도했다면 그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선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가 이런 락 음악의 정치적인 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한 소리의 실험에 불과하다는 사운드 테크니션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서태지는 이번 앨범에서 일반 청중들이 듣고 따라서 흥얼거리기 쉬운 그루브 부분을 의도적으로 줄이고 대신 "기계적이고 드라이한 사운드"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자체가 지극히 정치적인 행동이라는 사실을 그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원조 락 밴드들 어느 누구도 쉽게 이해하고 있는 상식일 텐데, 서태지는 그것을 단순한 테크닉의 변주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로 그것은 아니다. 그가 이번에 추구했던 "기계적이고 드라이한 사운드"는 기존의 하모니 구조에 반발하는, 다시 말해, 가지런히 정돈된 가치질서에 정면 도전한다는 저항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서태지는 이를 간파하지 못한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말 우스꽝스런 일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서태지는 미국에서 핌프 락의 스타일과 테크닉만 수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락 음악에서 형식과 내용적 요소를 분리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서태지는 아직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형식을 차용한 음악에서 제 스스로 정치적 의미를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서태지가 핌프 락 사운드와 테크닉을 모방하는 순간, 그 형식에 내재한 저항적 함의가 수반된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외친다. 나를 사회운동가로 보지 말라고.
서태지 음악에는 테크닉만 난무할 뿐 청중이 감동할 소울(soul)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인기 절정이다. 가히 한국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분명 언론의 영향이 크다. 그가 현재 누리고 있는 '문화권력'은 상당 부분 거품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는 언론이 서태지를 있는 그대로 평가해 그의 실체를 청중들에게 알리는 작업이 필요할 때다. 물론, 서태지가 한국 대중음악 시장에서 다양성을 추구하는 데 한몫을 할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서태지 음악의 존재 이유는 바로 거기에서 끝나야 한다. 그랬을 경우, 그가 들고 온 핌프 락을 과연 몇 명이나 진정으로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백 명? 아니면 천 명?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는 아니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