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들어가요!”
미자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껏 여유로운
마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또 하는 말이지만, 마음이 참 편해요.”
미자르가 편하게 말하자, 경진이 엷은 미소로 화답했다.
“우리 이대로 잘 수는 없지 않겠어요. 오늘은 조선시대 신혼처
럼 일 치러요. 알았죠?”
미자르가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고는, 조선시대 신혼초야
의식 치루는 법을 경진에게 가르쳐 주었다. 경진은 그녀가 가르쳐
준대로 옷고름을 풀고 저고리를 벗겼다. 그리고 갑자기 웃음을 터
트렸다. 진회색 투명복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하하! 투명복도 벗겨야 돼요?”
경진의 말에 그녀도 함께 웃으며 반감된 신혼 초야의 기분을 웃
음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합한주는 없었으나, 구석에 서있는 등잔
이 그들의 사랑놀이를 지켜보며 가끔씩 가볍게 흔들거렸다
경진이 먼저 일찍 일어났다. 미자르는 투명복 생활에서의 해방
감 때문인지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더 자려고 잠을 청했으
나 잠은 오지 않았고, 오히려 서울에 남겨진 가족의 얼굴이 떠올
라 몸을 가끔씩 뒤채였다. 그리고 자신의 기척에 그녀가 깰 것 같
아 조용히 문을 닫고 마당으로 나왔다.
‘아! 서울의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경진이 짧게 뱉은 외마디 탄식은 곧이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서
울 집의 정경을 이끌고 지나갔다. 첫 번째 장면은 중년으로 접어
들면서 긴장감과 여인의 매력은 많이 감소했으나 편안하고 막역한
처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여기저기 허둥대며
자신의 형제들과 친구들 그리고 거래처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모습과 중간 중간에 보이는 좌절하는 안타까운 모습에 눈이 아렸
다. 십 수 년을 같이 살아오면서 중간마다 둘만의 사건도 떠올라
그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경진씨, 일찍 일어났네요?...그리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아!...그냥 여러 생각들이 떠올라서요....”
미자르의 갑작스런 출현과 물음에 경진은 잘못한 일 하다 들킨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얼버무렸다.
“더 자지 그랬어요? 피곤한 것 같아 살며시 나왔는데...”
“호호! 자다보니 옆구리가 허전해서 봤더니 경진씨가 없잖아요.
무슨 맛으로 잠을 더 청하겠어요. 그래서 그냥 나왔죠.”
경진은 그녀에게 인사치레 차 던진 말이 의외의 답으로 돌아오
자, 고개를 살짝 돌리며 딴청을 했다. 조금 전에 생각한 아내에
대한 연민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
다.
“자기, 우리 언제 궁에서 나가죠?”
“글쎄요. 전하께서는 우리가 궁에 나간 줄 알고 계실 텐데...여
기에 들어온 이상 인사는 드리고 나가야 하는 게 도리겠죠. 오전
에는 어전회의가 있을 거고 점심 식사 후에나 나가야 될 것 같네
요. 어! 그런데?...”
“왜요?...”
“아뇨, 밖에서 보는 미자르의 모습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동안 밖에서 그녀와의 대화는 대상이 안 보이는 상태로 했었
다. 그런데 아침 햇살에 곱게 비추어진 미자르의 화사한 얼굴을
보고 잠시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잠시지만 그녀가 참 아름
답다고 생각되어 흐뭇했다.
“호호! 실은 나도 어색하기도 하면서 조금은 불안해요.”
“조금 있으면 익숙해질 거예요.”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박 내관이 구석을 찾아
다니며 마당을 쓸고 있었다. 그러나 흘끔거리며 보는 모습이 무언
가 할 말이 있어 보일 것이라고 경진은 생각했다.
“박 내관,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겐가?”
경진의 물음에 내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묻는
다.
“조반은 어찌 할까요?”
“아무 때나 가져오게!”
박 내관이 인사하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경진과 미자르는 만추에 젖어 아침부터 얼굴을 붉힌 나뭇잎과
돌담을 타고 다니는 예쁜 담쟁이 이파리에 마음을 녹여가고 있었
다.
“나리, 조반이 준비됐습니다요.”
박 내관은 다정히 손잡고 정원을 걷는 그들의 모습이 생경한 듯
자신의 얼굴을 둘 곳을 몰라 하며 먼발치에서 말했다.
“알았네!”
두 사람은 방으로 들어와 상을 보았다.
밥과 국, 숟가락과 젓가락이 두 대씩 있었다.
“하하! 이제는 내가 편해졌네요. 항상 젓가락이 하나 밖에 없어
서 미자르에게 애기처럼 반찬을 먹여주는 수고로움을 덜게 되었으
니 말이요.”
“어머나! 내게 젓가락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람! 사용할 줄 모르
면 있어도 없는 거나 같은데...”
미자르가 다소 실망한 듯 말했다.
“그럼 굶을 수밖에...”
경진이 그녀를 놀렸다.
“알았어요. 그럼 굶어 죽을게요. 조선에서 굶어 죽은 귀신이 되
서 자기만 따라다니며 괴롭힐 거예요”
그녀가 그가 밉다는 듯 얼굴을 예쁘게 일그러뜨리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미시(오후 1시)가 조금 넘어서 상선이 경진의 거처에 찾아왔다.
그는 상선을 따라 조계청의 세종대왕에게 부인을 찾았음을 보고했
다. 임금은 마치 자신의 일 인양 매우 기뻐하며 40근의 가채(고
관 부인용 가발)와 금과 옥으로 만든 장신구 등을 하사했다. 그는
임금에게 그동안의 후의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옥교 두 대로 미
자르와 함께 머물던 반촌의 집으로 돌아왔다.
“경진씨! 이틀밖에 머물지 않은 곳인데, 내 집에 온 것 같아요.”
미자르가 이틀간 궁의 생활이 부담스러웠는지 무척 좋아했다.
경진 역시 그렇게 생각이 되어 맞장구를 쳐주었다. 궁에서 거처하
던 곳보다 아기자기하고 고급스러움은 뒤지지만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서 좋았다. 그리고 궁에서 왕족이나 다른 많은 사람들
의 눈에 띠일까 하는 우려감이 걷혀서 그런지 마음 또한 편했다.
경진과 미자르는 오랜만에 작은 자유감을 만끽했다. 경진은 자
신을 감시하고자 궁에서 파견 나왔던 다방별감이 복귀하고, 자신
이 데려온 박 내관이 노복 2명과 함께 수발을 해주기 때문이었다.
비록 대문 밖으로 출입은 허용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후원과 내
원 등은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다.
“미자르, 이젠 좀 안정이 되어가는 것 같지요?”
“예, 하지만 조금 있으면 또 답답할 거예요.”
미자르가 연못가에 핀 작은 꽃을 따내며 말을 했다.
“그래도 할 수 없잖아요. 우리가 미래에서 온 게 사람들에게 알
려지면, 세종대왕님과 황희정승님께서 우리에게 배려를 해주신 것
에 대한 누를 끼치는 것이니까요.”
경진이 담담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후훗, 자기는 어쩌면 그렇게도 고지식하죠?”
미자르가 그의 얼굴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 무슨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어요.”
“후후! 박 내관도 우리 사람이 되어 있겠다. 가끔은 살짝살짝
밖으로 마실갈 수도 있잖아요. 뭐 우리가 백인이나 흑인처럼 피
부색이 틀린 것도 아니고, 안경을 낀 것도 아니어서 조선시대 사
람들과 틀린 것이 어디 있어요. 행동만이 조금 부자연스럽고 말의
억양이 조금 틀린 것 밖에는....”
그녀가 자신 있고 당당한 억양으로 말을 건네자, 경진은 조심만
하면 그렇게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듣고 보니 그래도 되겠네요.”
“후훗! 그것뿐인 줄 아세요?”
그녀가 경진을 향해 개구쟁이 같은 천진한 웃음과 함께 말을 건
넸다.
“뭐가 또 있어요?”
“호호, 저번에 내가 얘기했잖아요. 타임머신이 고장 나서 비록
시간여행은 안되어도 마하 2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다고요. 그것
타고 제주도도 갔다 오고 무인도며 중국도 갔다 오죠.”
경진은 그녀의 당돌함을 보고 귀여움을 느꼈다.
“하하! 개구쟁이 같으니라고...”
경진은 그녀의 말에 기분이 한층 고조되어, 그녀의 허리를 잡고
몸을 올렸다. 그리고 장난기가 생겼다.
“미자르! 연못에다 던질 거예요!”
경진이 그녀를 던지는 흉내를 내자, 그녀는 그의 허리춤에 손을
끼더니 재미있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장을 지져요. 자기가 연못에 나를 던지면...그리고 만약
던져지면 동귀어진하죠.”
“어! 미자르, 동귀어진이란 말도 알아요?”
“호호! 그럼요. 적과 더불어 같이 죽자는 뜻 아니겠어요? 나도
조선시대에 와서 많이 배웠어요. 물론 들은 풍월이지만요.”
“나리! 영상대감께서 납시셨습니다요.”
박 내관이 허둥대며 뛰어와 그들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응? 황희정승님이...”
경진과 미자르는 내관을 앞세우고 사랑채를 향해 걸어갔다.
“미자르, 정승께 인사 올릴 준비하세요.”
경진이 그녀에게 귀엣말로 속삭이자, 그녀도 알았다는 듯이 고
개를 끄덕거렸다.
경진이 방에 들어서자, 정승은 병풍을 뒤로하고 좌정하여, 엷은
웃음으로 반겼다. 경진은 그를 향해 큰 절을 올렸다.
“영상어르신, 인사드립니다!”
“하하! 재미는 좋으시고?...”
정승이 경진을 향해 마치 할아버지와 같은 다정한 말투를 던졌
다.
“예, 할아버...죄송합니다. 영상어르신의 보살핌입니다.”
“하하하! 이사람 좀 보게나! 영상이라고 했다가, 할아버지라고
하고 멋대로 일세, 그려! 하하하!”
노 정승이 기분이 좋은 듯 호탕하게 웃었다.
“예, 그것이... 그냥 생각하면 할아버지 같으시고, 엄해 보이시
면 또 정승님이라 불러드려야 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경진이 말하기가 곤란하여 더듬거리다가, 내친김이니 호칭에 대
한 못을 박을 필요가 있다 생각해서, 끝말을 또박또박 전했다.
“하하! 그런가? 그럼, 이렇게 하세. 전하 앞에서나 공적인 자리
에서는 정승의 예를 하고, 이처럼 사석에서는 할아버지라 하게!
어차피 자네는 먼 훗날에 내 후손이 아니던가? 하하하!”
“예. 할아버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경진이 고개를 들자 정승과 눈이 가볍게 마주쳤다. 그런데 그
두 눈, 교환하는 눈빛은 자애로움과 존경심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방의 공기는 금방 화기애애하게 덥혀졌다.
“허허! 그래? 부인은 찾았다고?... 주상께서 말씀해주셨네!”
“예, 생각보다 쉽게 찾았습니다. 제 생각처럼 사당 주변에 숨어
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경진은 거짓말한 것이 조금 켕기었으나 별다른 방법이 없는지라
자연스럽게 말했다.
“허허! 천만다행이로고!”
노정승이 인자한 얼굴로 경진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할아버님! 제 처에게 인사 올리게 하겠습니다.”
“허허! 이 사람아 됐네! 무슨...”
정승이 정색을 했다. 그러나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할아버님이신데...잠시만 계시면
제가 데리고 오겠습니다.”
경진이 말을 끝내고 바로 일어나 방을 나서서 건넌방으로 갔다.
“허허! 그 사람 성미하고는...”
노 정승이 그가 나가는 뒷모습을 향해 말을 던지고, 만족한 표
정으로 긴 흰 수염을 다듬으며 웃고 있었다.
경진을 따라 미자르가 다소곳이 방으로 들어왔다. 미자르가 세
종대왕이 하사한 40근이나 되는 무거운 어여머리 가채의 무게에
힘들어 했다. 자신의 머리카락과 장신구 무게를 빼고도 무려 24킬
로그램이나 나갔다. 원나라 지배를 받던 고려시절에 들어온 풍속
이 조선조에까지 넘어오면서, 그 크기가 여인네들의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평소에 야생마 갈기처럼 치렁치렁한
머리에 익숙한 그녀의 고통을 짐작하고도 남는 듯 경진은 안타깝
게 생각했다. 하지만 팔등신의 늘씬한 몸매에, 주먹만 한 얼굴 위
에 얹힌 가채와 잘 어울려진 빼어난 그 미모에 노 정승은 약간 당
황한 듯했다.
‘허허! 경국지색이로다...’
정승이 자신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독백했다.
“할아버님, 인사드립니다!”
미자르가 낭랑한 목소리로 정승에게 절을 했다.
“험...고생이 많았겠구려!...”
정승이 어색해하며 인사를 받았다.
“예,...”
미자르가 어색해 하는 노 정승에게 대화의 부담을 주지 않기 위
해서 간단한 대답만 했다.
“음!...어여머리도 익숙치 않고, 피곤할 텐데 쉬시오”
노 정승의 말에 그녀가 뒷걸음으로 조심스럽게 방에서 나갔다.
“허허! 자네는 복도 많으이! 부인의 용모가 경국지색일세. 그리
고 나이 차이도 꽤나 많이 차이가 나 보이네.”
노 정승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할아버님, 과찬이시옵니다. 미래의 여인들은 활동이 많고, 화장
품이 좋은지라 젊고 예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주
름살을 제거하는 수술도 쉽게 합니다.”
“허허! 그것 참. 신기한 일이 많이 있구먼...”
정승이 인사치레의 말을 하고, 약간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경진
을 바라보았다. 경진은 그의 얼굴에서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올 듯
한 예감이 들었다.
긴장감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 정승은 웬만해선 그렇게
표정이 쉽게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허! 이 사람아! 표정이 왜 그리 굳어 있나! 참, 그리고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해드렸나. 주상께서 자네에게 푹 빠
지셨다네!
하하!”
노 정승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분위기를 바꾸는 말을 던
졌다.“
“크게 재미있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미래의 일상적인 얘기 조금
하고, 현재의 조선시대 얘기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하면 안 된다고 당부하신 내용은 한 가지도 안 했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허물없이 얘기를 나누실 상대가 없으셔서 외로우셨던 것
같습니다.”
“흠. 잘했네! 그러실 게야. 나라를 호령하는 자리이긴 해도 무척
외로운 자리일세. 그 마음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정승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할아버님!...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
경진은 말을 던져 놓고 노 정승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노정승은 말을 잃은 듯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주름진 얼
굴에서 작은 떨림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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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샘터
콩다칸 팥다칸(장편소설) - ‘허허! 경국지색이로다...’ (24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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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1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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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경국지색 같은 미인이 요즘도 있을까요..워낙 성형이 성행하는 시대라..무엇이 진짜인지!!
그러게요. 옛날의 미인의 기준은 눈은 봏왕처럼 가는고 길며, 코는 높지 않되 마늘코가 좋고 얼굴형은 동그란 얼굴이라던데~~~ 지금 기준하고 많이 틀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