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타이페이 박물관 소장 기황후 초상화
기황후(중국어: 奇皇后, 1315년경 - 1369년)는 원나라 원 혜종의 황후였다. 몽골명은 솔롱고 올제이 후투그(한자: 肅良合 完者 忽都 숙량합 완자 홀도)이며, 존호는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이다. 고려 출신의 여자로, 고려후기의 무신 기홍영의 증손녀이자 고려 고종의 사위인 기온의 종손녀였다.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 중의 한사람이었으며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주선으로 황궁의 궁녀가 되었다가 원 혜종의 총애를 얻어 귀빈으로 책봉되고, 훗날 혜종의 뒤를 이어 황제로 등극하는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다. 정적관계였던 제2황후 탕기시리가 역모죄로 사사되자 외국인은 정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재상 메르키트 바얀의 반대를 견뎌내고 제2황후가 되었고, 1365년에 제1황후인 곤기라트 출신의 바얀 후투그 사망하자 제1황후로 등극하였다. 이후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황태자로 옹립하였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임명한 뒤 고려인 출신 환관과 고려인 출신 관리 및 일부 몽골관료들을 포진시켜 자신의 친위대로 삼았다.
친정인 기씨 일족을 통해 고려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얼마못가 사라졌다. 공민왕에 의해 친정오빠 기철 등이 살해되자 원 혜종을 사주하여 충선왕의 서자 덕흥군을 왕으로 앉히고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태자인 아유르시리다르의 비(妃) 역시 고려여인으로 정하여 권씨(權氏)를 태자비로 삼았다.
출생과 가계
본관은 행주이다. 기순우의 후손으로, 그녀의 부친은 사후 영안왕에 추증된 기자오(奇子敖)이고, 어머니는 전서 이행검의 딸 이씨이다. 오빠로는 기식(奇軾), 기철(奇轍), 기원(奇轅), 기주(奇?), 기륜(奇輪) 등이 있었다. 또한, 그녀는 원나라의 황제인 혜종의 배우자이며, 북원의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의 어머니이다. 몽골명은 올제이 후투그(?ljei Khutugh, 完者 忽都)였다.
종고조부 기윤위는 희종 때인 1211년 왕준명, 우승경 등이 최충헌을 제거하려 할 때 최충헌을 구출하였으며, 이후 최충헌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고조부 기윤숙은 상장군과 중서,문하성의 양성의 관직을 지내고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증조부 기홍영은 좌우위보승낭장을 지내고 사후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에 추증되었다. 종증조부 기홍수는 문하시랑을 역임했고, 기홍영의 아들이자 할아버지 기관의 형제였던 기온(奇蘊)은 고려 고종의 부마였다.
첫째 기식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기철이 사실상의 장남이었다.
고려의 공녀 차출
목은 이색은 "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다"고 말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했고 오히려 걱정하는 자신의 친정 부모를 위로하였다.
자원한 공녀길은 아니지만 이왕 뽑힌 이상, 이를 새로운 인생의 계기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세계를 지배하는 원나라이니 만큼 더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공녀로 원나라에 가게 되어 대도의 황궁에 도착하였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그는 원나라생활 중 부처에게 기도하였다. 이때 고려인 출신 내시 고용보(高龍普)를 만나게 된다.
원 황실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였던 고용보는 기씨 소녀같은 인물이 꼭 필요했다. 기씨 소녀라면 황제 혜종을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그녀를 적극 추천하여 혜종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들었다
후궁 생활
명종의 장자로서 황태자였던 토곤 테무르(혜종)는 1330년 7월 한때 원 황실 내부의 싸움에 패배해 인천 서쪽 대청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1년 5개월을 대청도에서 보낸 그는 원나라로 돌아가 2년 후에 황제에 즉위한다.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세계제국의 후계자에서 고려의 작은 섬에 유배되었던 기억은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와 어우러져 기씨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했다. 원 혜종의 이러한 호감은 기씨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기씨는 혜종을 통해 자기 뜻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타나시리는 채찍으로 기씨를 매질할 정도로 질투가 심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3] 그녀는 혜종을 내세워 타나시리와 싸웠다. 타나시리의 친정에 불만을 갖고 있던 혜종은 기씨의 의도대로 1335년 승상 바얀과 손잡고 타나시리의 친정을 황제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제거했다.
그리고 타나시리에게 사약을 내렸다.
황후와 황자 출산
1339년 황자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다. 이전의 황후 다나시리가 탕기시의 반란으로 1340년 폐위된 후 기씨를 황후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권자 메르키트 바얀이 그것을 반대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원 혜종을 조종해 바얀의 축출을 기도했고, 황제를 찾아가 통곡하며 바얀과 궁궐내 그의 심복들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주장하였다. 기씨의 하소연을 들은 혜종은 자신의 스승 사라판과 손잡고 바얀을 탄핵,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1340년 2월 메르키트 바얀(伯顔) 세력이 숙청된 뒤 4월 드디어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제2황후로 되면서 친정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부에게 왕(王)의 작위가 추증된다. 아버지 기자오(奇子敖)는 영안왕(榮安王) 또는 경왕(敬王)이고, 할아버지 기관(奇琯)의 시호는 미상이고, 증조부 기홍영(奇洪潁)은 인왕(仁王)에 추증되었다.
원 혜종은 특별히 한림학사를 보내 기자오의 묘비를 지어주었다. 어머니는 영안왕 대부인(大夫人) 작위를 받았고 기철은 원나라의 관직과 함께 고려의 정승으로 임명됐다. 더불어 기철은 덕성부원군, 동생 기원은 덕양군에 봉해졌다. 기씨의 성공에는 고려 출신들을 주축으로 철저하게 현지화 전략을 펼친 것이 주효했다.[3] '원사(元史)'는 그녀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칭기즈 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바친 후에야 자신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현지화 전략으로 명분을 축적하면서 원의 황실을 장악했던 것이다.
황후가 된 뒤 곧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이름을 바꾸고 여기에 고려인 출신 환관과 고려 유민, 고려인 유학생들을 등용하여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며, 이를 배경으로 자신의 친위대로 활용하게 된다. 그녀는 흥성궁(興聖宮:현 베이징 중남해 자리)에 거주하면서 황후부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았다. 자정원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 출신 환관들은 물론 고려인 출신 관료들, 몽골 출신 고위관리들도 가담해 자정원당'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선정과 대규모의 아사 사건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이용하여 황제 혜종에게 아유르시리다르를 황태자로 책봉하도록 압박하였고, 1353년, 마침내 아유르시리다르는 황태자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 통솔의 최고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만들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공녀였던 그녀는 힘없는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원사 후비열전’은 1358년 북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가 관청에 명해 죽을 쑤어주고, 자정원에서는 금은 포백·곡식 등을 내어 십여 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원제국의 위기였다. 그 때, 원나라 내부에서는 황태자의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 내전이 있었고, 반 황태자파의 지도자 볼루드 테무르는 결국 1364년 수도 대도를 점령하였다. 아유르시리다르는 황태자 지지자인 코케 테무르(擴廓 帖木爾)에게 달아났지만 기황후는 볼루드 테무르의 포로가 되었다.
고려와의 갈등
당시 원나라는 징기스칸의 확장정책으로 징기스칸의 병력이 닫는 곳은 모두 징기스칸의 휘하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는 30년간의 항쟁으로 직접적인 합병은 면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기황후는 대원제국의 제2황후를 거쳐 황태자를 낳고 제1황후가 된 것이다. 기황후가 황후가 되기전 원나라는 고려의 조정을 마음대로 조정하였다. 원나라의 승인이 없이는 고려 왕도 되지못한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30년간의 항쟁으로 합병은 면했지만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었다.
그러한 관계로 고려 조정에서는 고려 스스로 원나라의 1개성으로 들어가자는 논의가 활발했던 때가 기황후가 황후가 되기전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황후가 원의 황후가 되면서 고려조정에서 스스로 원의 속국. 1개의 성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논의는 중단된 것이다. 그것은 기황후가 황후가 되면서 고려침략의 두려움이 해소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기황후가 고려의 자주권을 보장해준 역할이 된 것이었다. 황후가 된후, 고려 조정에서는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덕성부원군에 봉하게 된다.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고려조정은 어떻게든 대원제국의 침략을 받지않고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대원제국 황후인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등에 업고 고려왕실의 안정을 꾀하고자 먼저 작위를 내린것이 덕성부원군 이라는 벼슬이었다. 또 원나라는 기철에게 정동행성의 수장으로 임명하게 된다. 이렇게 권력이 기철에게 집중되면서 권겸을 비롯한 많은 당시의 권세가들이 기철의 수중에 들어간다. 이것은 고려스스로 왕권을 약화시키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 되고만다. 이러한 것은 당시의 고려왕실이 원의 조정을 받는 허수아비 왕실인 상황에서 어쩔수없는 선택이었다. 이로 인해,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 당시 주류층의 권세가들은 황후의 세에 힘입어 권세를 누리게된다. 이에 고려 공민왕은 1356년 원나라가 약화되는 틈을 타서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 권겸 등을 멸하였다. 1364년 이로인해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타시 테무르(충선왕(공민왕의 조부)의 서자(庶子) 셋째 아들 덕흥군.공민왕의 삼춘)를 고려의 왕으로 세우려 고려로 1만의 군사를 보냈지만, 압록강을 건너던 중 고려군에게 폐퇴하게 된다. 공민왕은 10년간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었던 인물이다. 원이 고려왕을 내정할때의 기준에 들지 않은것을 기철이 천거하여 고려왕이 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기황후는 공민왕에 의해 참살된것에 더욱 격분한 나머지 1만의 군사를 고려인 최윤장수 에게 맏겨 보내서 공민왕을 폐위시키기 위한 출정이었던 것이다.
기황후는 당시 집안의 멸족 소식을 접하고 극도로 분노하였다.[2] 그녀는 원 혜종을 설득하여 공민왕에 대한 복수를 요구하였고, 1364년(공민왕 13년) 원나라 황제는 기황후의 뜻에 따라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한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명이 먹혀들지 않자 기황후는 덕흥군에게 원나라 군사 1만명을 주어 고려 정벌을 명한다. 이들은 평안도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나 최영·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대에 패한다.
제1황후 책봉과 최후
1365년, 제1 황후인 곤기라트 출신의 바얀 후투그가 죽은 후에 기황후는 제1황후가 되었다. 이는 이민족 출신을 황후로 책봉하지 않는 원나라의 전례를 깨뜨리고 정후가 된 것이었다.
기황후는 고려국 금강산 장안사에 거액의 내탕금(內帑金: 판공비)을 내어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키고 많은 불상을 봉안하였다. 그녀는 특별히 며느리도 고려 출신 여성으로 정하여 권씨(權氏)를 황태자비로 삼게 했다.
1368년, 주원장의 25만 명나라 대군이 대도를 점령하자 북원으로 전락한 원나라는 응창부(應昌府)로 천도를 하였다. 기황후도 이때 응창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응창은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타알 호수(Lake Taal)에 위치했었다.
1368년 응창에서 포로가 되고 1369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370년, 남편인 혜종이 죽고 그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가 황좌를 계승한다. 그러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는 후사를 남기지 못했고 그녀가 친히 간택함 며느리 권황후는 딸만 1명 낳았다. 이로써 그녀의 후손은 끊어졌다.
사후
한국의 경기도 연천군 상리(上里)에는 기황후의 묘로 알려진 고분(古墳)이 있다.그녀의 시신은 조선으로 운구되어 경기도 연천현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시신이 언제 조선에 운구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금강산 장안사에는 그녀의 위패가 봉안되어 넋을 기리기도 했다.
가족 관계
[출처 - 위키백과 ]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준제(북원의 혜종)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 그는 북원의 소종이 되었다.
MBC 월화드라마 오후 10시 주연 기승냥 역의 하지원 왕유역의 (주진모), 타환역의 (지창욱), 타나실리역의 (백진희), 황태후역의 (김서형) 지금 한창 방영되는 드라마를 놓고 글을 쓰는 것이 온당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현재 평균 시청률이 19.5%이고 한때 20%를 돌파하여 자축행사를 펼쳤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드라마 왜곡 논란이 빚어졌습니다.
요즈음 드라마 방영마다 문제제기가 참 많은 것도 특이현상 중의 하나입니다.
판단은 여러분이 하실 것이라 생각하고 그 논란의 내용만 올려봅니다.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자는 측과 몽고에 대한 고려인들의 정신을 우롱하는 처사라는 측도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주인공들의 팬 입장에서 우호적인 반을을 보이는 측과 사극의 사자는 역사의 사자이지 조작의 사자가 아니라면서 비록 드라마라해도 역사적 관점에서는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측도 있습니다.
일단 왜곡 논란에 있어서는 위 사항과 같습니다.
그러면 다음에서 왜곡이다 하는 주장에 대해 제작진의 논리를 영상으로 올려봅니다.
이 또한 판단도 여러분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역사왜곡 논란 휩싸인 '기황후', 제작진 대답은?
다음 아래 내용은 왜곡된 사실에 대한 반응들입니다.
천하의 매국녀와 강간킹이 영웅이라..... 이건 해도 해도 정도가 너무 심한 듯...ㅡ.ㅡ 하지원 이번에는 드라마 선택 잘못한거 같네요. [ 댓글 ] 모국 고려 농단한 기황후, 폭군 충혜왕 영웅화
MBC 최악 역사 왜곡 드라마 만드나? [ 경향신문 ]
'기황후' 왜곡논란, 역사학자들도"잘못"
■충혜왕 악행 : 고려사절요 25권
1339년 5월 : 부왕의 후처인 수비(壽妃) 권(權)씨와 간통. 1339년 7월 : 부왕 후처인 경화공주를 강간. 송명리(宋明理)의 무리로 공주의 몸을 붙들어서 꼼짝할 수 없게 하고 입을 틀어막아 말을 못하게 하여 그를 간음. 1339년 8월 : 남씨는 본래 양반의 아내였는데 폐신(嬖臣) 최안도(崔安道)ㆍ김지경(金之鏡)도 그와 간통하였다. 충혜왕도 그와 관계하고서 얼마 후에 영서(英瑞)에게 주고는, 또 그 집에 자주 다니며 사통. 1341년 11월 : 왕이 내시 전자유(田子由)의 집에 행차해서 그의 아내 이씨(李氏)를 덮쳐 강간. 얼마 되지 않아 자유는 그의 아내와 함께 달아남. 기륜의 집으로 행차하여 마파를 잡으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불량배를 보내어 또 마파를 기륜의 집에서 수색하게 함 1341년 12월 : 왕이 폐인(嬖人) 호첩목아(胡帖木兒)에게 곤장을 치고, 그 혀를 불로 지지며, 그 음낭을 불로 지지고는 섬에 귀양보냄. ■기황후 고려 침공 : 고려사절요 27권 1362년 12월 : 서북면 만호 정찬(丁贊)이 원 나라에 덕흥군(德興君 충선왕의 셋째아들)를 국왕으로 세운다고 보고 1363년 3월 : 황후(기황후)가 국왕(고려 공민왕)을 원망. 국왕을 모함하여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울 것을 꾀함 1363년 3월 : 황후는 그래도 노여움이 다 풀리지 않아 이공수에게 덕흥군을 받들어 동으로 돌아가라 함. 1363년 12월 : 덕흥군 요동에 둔을 치고 척후기병(斥候騎兵)이 여러 번 압록강에 이름. ■기황후 일가 악행 기록 : 고려사절요 25~26권 1347년 3월 : 기황후 집안 동생인 기삼만(奇三萬)이 세력을 믿고 남의 토지를 빼앗고 불법을 자행. 1347년 4월 : 기황후의 친족인 기주(奇柱)는 일찍이 세력을 믿고 포악한 행동을 함부로 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그에게 고통을 당함. 1356년 3월 : 기씨(奇氏) 일족이 황후의 세력을 믿고 횡포하였는데, 어떤 자가 밀고하기를 기철(奇轍)이 쌍성의 반란민과 통하여 당을 만들고 역모를 꾸밈. 1356년 5월 : 기철 등이 세력을 믿고 임금을 업신여기며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여 백성을 한없이 해침. 원 나라 황실과 혼인 관계가 있어 한결같이 모두 따라줌. 1356년 5월 : 기철 등이 빼앗아 가진 인구와 토지에 대하여는, 빼앗긴 사람에게 고발하는 것을 허락하여 각각 원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함. 1356년 6월 : 기철 등이 임금을 능가하는 위세를 빙자하여 나라의 법도를 흔듬. 관리의 임명은 그들의 희노(喜怒)에 좌우. 남이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빼앗았으며, 남이 노비를 가지고 있어도 빼앗음. 앞으로 드라마 진행상황에 따라서 그 왜곡 진위가 날로 첨화될 것 같습니다.
관심있게 보시는 분들은 나름대로 평가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
다음검색
출처: hollo 원문보기 글쓴이: 까투리
첫댓글 저는 솔직히 이 드라마 봐요. 일단 어찌되었든, 소재는 분명 좋아요.
우리나라에서 좋은 인물만 하진 않잖아요. 인조와 조 귀인 얘기도 다루고 하잖아요.
중국에서도 허구헌 날 사극 하는 게 서태후 이야기죠. 그런식으로 생각하고 보는거죠.
또 저는 기황후 원나라의 고려 출신 황후 보현숙성황후 기씨 이야기를 알고 있으니깐, 정확하게
그래서 보는 것이죠. 기황후라는 인물에 대한 왜곡보다 충혜왕에 대한 왜곡이 더 급선무죠.
근데 이미 시작한 거 어쩌겠음. 그냥 기황후라는 한국 사극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소재를
한번 제대로 다뤄본 것도 괜찮은 거 같아서 그냥 봐요. 재밌기는 하더라고요. 중요한건
그 역사를 알고봐야합니다
드라마는 드라마 일뿐이라 말한 주진모나 미화 하는 역사 드라마 내 아무리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도 보지 않습니다 ,
기황후라는 테마로 완전 새로운 드라마를 만든것 같은데 어줍잔은 정통사극이 아니라 오히려 허구라는 인식이 뚜렸하여
비판 할 가치가 없음 그냥 환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