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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대한민국 서울 신촌
지은은 버스에서 내려 버스정류장에 잠시 멈춰 서서 버스의 현재 위치와 노선이 번갈아 가면서 나타나는 불투명한 디스플레이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가며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웨이브를 준 단발머리에 두꺼운 애교 살이 돋보이는 귀여운 얼굴, 하얀색 블라우스, 늘씬한 다리라인이 돋보이는 검은색 H라인 치마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그녀 주위에 있던 다른 남성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바지를 입을걸 그랬나…”
지은은 그런 시선들을 느끼지 못하고 이리저리 자신을 비춰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은은 머리를 한 번 만지고는 스마트 폰을 확인했다. 자신과 성철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밝게 비치는 액정에 표시된 시간은 “오후 2시 32분”, 평소 같았으면 그녀가 사관학교에서 훈련과 교육에 임할 시간이었지만 오늘 그녀는 살면서 처음으로 ‘잔꾀’를 부려 학교를 빠져 나왔다. 지은은 홀가분함과 알지 모를 해방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평일에도 사람들로 붐비는 신촌 거리를 둘러봤다. 오늘 그녀는 엄격한 사관학교 규정으로 자주 외출하지 못하는 미안함에 성철을 깜짝 방문할 차였다. 휴학을 한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느 대학생들처럼 생활하는 성철이었다. 그녀는 그가 그녀에게 ‘너 공부하는 동안 일하고 돈 벌면 너랑 좀 더 즐겁게 다닐 수 있잖아.’라고 웃으며 말하던 그녀의 집 앞 주황빛 가로등 아래 큰 키와 듬직한 몸집으로 그녀에게는 누구보다 잘생긴 그의 미소와 함께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 날을 생각하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지은은 성철이 일하는 카페를 찾기 위해 복잡한 신촌 거리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몇 번을 와본 이곳이었지만, 지은은 자신이 길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며원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가던 곳이 보이지 않아 안 그래도 짜증이 나던 차에 오늘따라 도심 곳곳에서 들리는 반복적인 뉴스 보도는 그녀의 짜증을 더욱 솟구치게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보건 당국은 현재 아프리카와 동유럽 일부 지역에서 창궐하고 있는 변종 마르부르크 출혈열 바이러스에 대해 심각한 수준의 우려는 불필요하다며, SNS로 급격하게 퍼지고 있는 소문과 추측성 기사에 대해 자제해줄 것을 요쳥했습니다…”
또 다시 들리는 반복적인 맨트는 지은의 집중력을 더욱 흐렸고, 지은은 이제는 마구잡이로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찾던 카페가 그녀가 처음 출발했던 그 자리 근처에 있었음을 깨닫자 세삼 그녀는 내비게이션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녀를 항상 학교까지 데려다 주던 아버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20분간 헤맸음을 시간을 통해 알고 모던하고 심플한 분위기가 물씬 나는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가자 한 남자 종업원이 “어서 오세요”라고그녀를 맞이했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으며 종업원에게 물었다.
“저기, 성철이는 어디 있어요?”
종업원은 이제야 그녀가 누구였는지 기억해내며 말했다.
“아, 성철이 여자 친구 분이시구나.”
종업원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성철이 카페 나가면 바로 왼편에 있는 골목에서 담배피고 있을 거예요.”
종업원은 그녀에게 친절히 말해주었고 그녀는 마찬가지로 미소로 화답하며 뒤돌아 종업원이 알려준 방향으로 가기 위해 다시 문으로 향했다. 지은은 곧 성철이 자신을 보며 놀라움과 기쁜 표정을 동시에 지을 것을 생각하니 벅찬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방향을 알려준 성철의 동료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저런 여자를 둔 성철이 새삼 부럽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는 연이어 들어오는 손님들이 보이자 그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어서 오세요.”를 기계적으로 말하며 주문을 받았다.
지은은 카페 문을 열고 나갔다. 은은한 커피 향이 그녀의 기분을 더욱 돋구었다. 성철에게 담배에 대해 한 소리 해줄 생각을 가지고 그녀는 카페 옆 건물 사이 조그만 골목 사이를 돌려던 참이었다.
“아, 잠깐이면 되잖아.”
지은이 모퉁이를 꺾으려는 순간,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은은 본능적으로 잠시 멈칫하고 슬쩍 고개만 내밀어 골목 안쪽을 보았다. 그녀만한 키의 여자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성철이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은은 자신도 모르게 성철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안된다니까. 들어가야 해.”
성철은 자꾸만 들러붙는 그 여자를 때어내며 말했다. 지은은 심장 한 켠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친구끼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지은은 스스로 생각을 이끌어냈다. 성철은 얼마 멀지 않은 골목 끝에 지은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꿈에도 모른 체 계속 그 여자를 때어내기만 했다. 그는 담뱃불을 끄고 무어라 그 여자에게 말한 다음 카페로 돌아가기 위함인지 지은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 순간이었다. 그 여자는 성철을 양 손으로 어깨를 붙잡고 성철에게 입을 맞추었다. 지은은 마음 전체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성철은 그녀를 때어내지도 않았다. 아니,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마치 지은 자신에게 매일 그랬듯이 그녀의 입술을 반갑게 맞이했다. 지은은 양 손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성철이 자신에게 했던 그 모든 말, 모든 행동 들. 그녀의 가슴에 수많은 총탄이 한번에 박히듯 그녀의 가슴 어디쯤이 너무도 아파왔다. 그런 그녀의 상처를 더 후비는 듯, 두 남녀는 오랜 시간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돌아섰다. 그리고 그녀가 왔던 처음 장소로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그녀의 양 볼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흘러 내렸다.
성철은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나 카페로 다시 들어왔다. 그의 동료는 마침 손님들에게 주문한 커피를 주고 잠시 휴식을 취하려던 참이었다.
“어, 지은 씨랑 잘 있다 왔어?”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온 성철은 자신의 동료의 말에 머리가 찌릿 거리는 것을 느꼈다.
“응?”
종업원은 실실 웃으며 성철에게 다시 말했다.
“지은 씨랑 잠깐이나마 좋은 시간 보내다가 왔냐고.”
성철은 잠시 멍하니 그의 동료를 쳐다보다가 카운터를 박차고 카페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의 뒤에서 자신을 수차례 부르는 동료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철은 달리며 휴대폰을 꺼내 들어 지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가 난 뒤…”
성철은 멈춰 섰다. 숨이 가빠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헐떡거리는 자신을 한 번씩 흘깃 쳐다보며 지나갔다.
4년간의 두 남녀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2025년 5월 10일 저녁
구 대한민국 서울, 격리구역 D 중앙 광장 군 막사 내부
지은은 막사 내부 화장실에서 자신의 볼에 난 상처를 소독약으로 대충 소독하며 따끔거리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의무관에게 가보라는 자신을 보좌하는 두 병사들의 조언에도 별거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는 그녀였다. 두 병사는 그녀의 고집을 알기에 더 이상 자신의 상관에게 ‘보좌’라는 것을 하지 않고 그녀의 가서 쉬라는 말을 듣고는 사병 막사로 돌아갔다.
종각 ‘피아노 거리’에 길게 자리 잡은 군 시설은 격리구역 D의 모든 시설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시설이었다. 격리 당시 급하게 공수한 이동 군 막사 시설과 민간 시설을 개조하여 건설한 군 막사는 그럭저럭 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잔존한 D구역 병력 중 몇 안 되는 장교 중 한 명인 그녀는 소독을 마치고 나오며 조그맣지만 혼자 지내기에는 부족함 없는 자신만의 공간을 슬쩍 둘러보고는 철제 의자 위에 풀썩 앉았다. 몸에 모든 힘이 빠져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의자 앞, 마찬가지로 차가운 철제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문서들에 팔을 올려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푹 숙이며 자신의 머리를 헤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병신 같은 년…”
지은은 자신의 머리를 양 손바닥으로 반복해서 때리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방금 전까지 일어난 상황을 천천히 되내였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멈춰 세운 성철에게 자신은 분명 화를 내고 있었다. 그의 몰지각한 질문때문이 아니라, 그녀는 그에게 그 이상의 감정 때문에 그에게 필요 이상의 행동을 했고 화를 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지은은 스스로 이 순간 수 백 번을 물었다. 설마 내가 아직 걔를 사랑하나? 아니다. 그녀의 머리가 대답했다. 그녀는 절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감정은 무엇일까. 방벽 밖에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때, 그리고 그가 그녀를 붙잡으며 미안하다고 말했을 때, 그 때 순간 느껴지던 성철을 향한 묘한 애틋함과 동질감은 무엇인지. 지은은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더 차갑게, 그의 마음에 그녀에게 다시는 다가오지 못하도록 더 날카로운 비수를 꽂아야 했었다. 성철에게 멍청하게 사랑한다며 그를 따라다니던 그 시간, 그녀의 모든 것을 그에게 받친 그 한심한 4년간의 시간의 끝을 이겨내기 위해 그녀는 더욱 독하게 살아야만 했다. 바보같이 성철과 함께 하던, 그녀에게는 너무도 긴 그 지옥과도 같이 변해버린 시간을 잊기 위해. 그의 손길과 너무도 아늑하던 그의 품 속을 잊기 위해.
그런 그녀의 독기는 그녀를 사관학교에서 가장 뛰어난 장교 중 한 명으로 만들어줬고, 여생도 중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게 해주었다. 너무나도 뛰어난 일들을 척척 해 나가는 그녀를 보며 그녀 주위의 사람들은 지은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할 수 있느냐고, 그녀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물었지만 지은은 단 한번도 그녀의 동기를 말한 적이 없었다.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그녀 자신 스스로를 깎아 내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그 사람들에게 웃으며 다른 대화를 이끌어나갔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이룬 그녀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성철을 이겨냈다고 끊임없이 자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네가 버리고 간 내가 이런 사람이 되었다고, 이제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 어떤 것을 주어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 한 쪽 구석은 그녀를 항상 시리고 외롭게 만들었다. 그녀는 그 마음 한 쪽을 채워줄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누가 그것을 채울 수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알고 있더라도 그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반드시 자신을 완전한 자신으로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은은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자꾸만 그녀를 꺾으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마음 한구석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바로 성철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책상 위 한 켠에 올려져 있는 필통 꽂이를 집어 순간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막사 어느 한 켠으로 강하게 던졌다. 철제 꽂이는 캐비닛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며 꽂혀있던 팬들을 요란하게 쏟으며 굴렀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자신이 앉아있었던 의자마저 발로 걷어찼다. 부서지지 않은 것이 다행인 그의자는 더욱 더 큰 소리를 내며 막사 입구 근처로 날아가 문 앞에 서 있는 한 사병 발치로 떨어졌다. 지은은 그 병사가 자신의 문 앞에 서있는지는 꿈에도 모른 체 상기된 얼굴로 서있었다. ‘막사로 가서 양지은 중위에게 내게 오라.’라고 전하라던 지휘관의 말을 듣고 같은 곳에 몇 년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소문난 미모의 장교에게 기대감을 안고 말을 전하러 온 그 병사는 자신이 지금 본 광경에서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작은 키의 아담한 여자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반쯤 미친 사람처럼 서있었다.
“저기… 양지은 중위님?”
어려운 생각 끝에 입을 연 병사는 겨우 입을 때 그녀를 불렀다. 지은은 획 돌아보며 병사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눈을 잠시 동안 감으며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망가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충 정리하고는 병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중위님께 일일 보고를 하라는 사령관님의 명령을 전하러 왔습니다.”
지은은 막사에 걸려있는 낡은 동그란 시계를 쳐다보며 시간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알겠어. 대령님께 곧 간다고 전해드려.”
병사는 짧고 강한 대답을 남기고는 조금은 당황한 기색이 있는 표정으로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은은 거울을 보며 자신이 한껏 헤집은 머리를 다시 잘 정리하고 철제 의자를 다시 세워놓았다. 집어 던진 필통을 집어 올리려다 이미 조금 늦어버린 시간 덕에 그녀는 그 일은 뒤로 미루고 급히 근처의 사령관 막사로 걸어갔다.
사령관 막사는 군 시설 막사 중에서도 가장 중앙에 위치해있었다. 이렇게 한정적인 크기의 군 규모에서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사령관의 역할은 그야말로 중요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최태성 대령은 7년간 그 임무를 잘 수행해내고 있었다. 그의 직감적인 전략 편성 능력과 위험 대처 능력은 마치 이런 상황에 대비해 미리 훈련한 듯 자신과 이곳 모든 사람의 생존을 위해서 부족함 없는 역할을 해왔다. 사령관 막사는 작은 회색 빛 컨테이너 가건물을 이용해 급하게 만든 건물이었다. 지은은 그 앞을지키고 있는 두 병사에게 수고한다는 말을 전하며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 그래.”
지은은 대령의 말을 듣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대령의 막사 중앙에는 동그란 원탁이 항상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는 각종 지도와 문서들이 회의를 위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총 여섯 곳의 자리 중 이제 그 곳에 앉을 수 있는 장교는 지은 자신과 대령을 포함 하여 세 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린 지은은 차분히 문을 닫고 원탁 한 가운데 앉아 파일을 뒤적거리는 대령에게 입을 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령님.”
대령은 파일을 덮어두고 기가 죽어있는 지은을 보며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중위가 늦는 것이 한두 번 있는 일인가?”
전혀 비꼼 없는 그의 순수한 농담에 지은은 배시시 웃으며 앉으라는 대령의 말에 그녀는 그의 건너편에 앉았다. 최태성 대령은 이제 50대 중후반의 그야말로 현장 감각이 뛰어난 배태랑 장교였다. 잘 정돈된 조금 일찍 자란 그의 백발은 그의 노련함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지 않아도 두 눈으로 느끼게 해줬고, 그의 주름진 얼굴과 편안하고 인자한 웃음, 그리고 군인으로서 엄격해야 할 때의 그의 지엄함은 그야말로 이곳의 리더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자, 차고 넘치는 감염자들과 뜯겨져 나가는 사람 시체 말고 또 오늘 말할 만한 특이사항이 있나?”
지은은 말없이 머리를 굴렸다. 갑작스럽게 개인적인 감정적인 문제에서 이러한 일에 대해 입을 열려니 쉽지는 않았다.
“청와대로 진입할 수 있는 추가 동선 확보가 어렵다는 말 외에는…”
대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서 뒷짐을 지고는 막사 내부를 맴돌며 말했다.
“그래, 청와대.”
대령은 원탁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와서는 말을 이었다.
“방벽 폐쇄 전 내가 마지막으로 들었던 청와대로부터의 무전 수신 내용은 다음과 같네. 지은양.”
대령은 가끔 지은 자신을 ‘중위’가 아닌 ‘지은 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한 것이 지은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군의 계급 체계를 넘어서는 그의 그러한 친밀한 태도가 그녀가 그를 더 신뢰하고 따를 수 있게 만들어준 한 부분이기도 했다. 대령은 원탁 뒤쪽의 자신의 개인적인 수집품을 모아둔 책상 위에서 이미 낡아 곳곳이 녹슨 작은 라디오를 들고 원탁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재생’ 버튼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터치해 눌렀다. 몇 초가 지나자 양쪽 스피커에서 정신 없는총성과 괴성과 함께 한 굵직한 남성의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음과 섞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대통령과 영부인을 청와대 벙커로 모시겠다. 서울을 제외한 전국 지역의 대통령 비상 벙커와는 교신이 불가하다. 광화문 광장의 군에게 갈 수 있는 더 이상의 여력을 낼 수가 없다!”
목소리는 잠시 끊긴 뒤, 큰 총성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왔다. 아마도, 무전을 보내던 그 남자가 발사한 총 같았다. 잠시 후 더욱 다급해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는 긴박한 발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는 다시 흘러나왔다.
“이 무전을 수신할 수 있는 모든 군에게 전파한다. 나는 김영태 청와대 안보실장이다. 대통령님과 영부인, 청와대 안보수석과 함께 현재 청와대 벙커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감염체의 공격을 받고 있다. 현재까지 전달받은 모든 치료…”
또 다시 다수의 총성과 괴성이 들렸다. ‘대통령님 이쪽입니다!’라고 긴박하게 외치는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도 들렸다.
“…치료 샘플에 관한 연구 자료와 보관 장소가 담긴 문서를 우리가 가지고 이동 중이다! 서울 전 지역에 비상 방송을 송출해!"
잠시의 엄청난 잡음과 함께 무전이 끊긴 듯하다가 희미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는 군경은… 신속… 청와대 집무실… 더 이상의 무전은…. 렵다.”
마지막으로 무언가 강력하게 닫히는 철제 문 소리와 함께 무전은 완벽한 잡음으로 변했다. 막사 내부 정적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치익-하는 무전 잡음으로 가득 찼다. 지은은 무언가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껏 이곳에서 임무를 수행하며 두려움 따위는 한 번도 느끼지 않은 그녀였지만, 과거 그녀도 대체 지금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전혀 생각해낼 수 없는 상황이 떠올랐다. 그 무전 기록은 지은에게 하여금 7년 전, 그녀가 철조망 문을 닫아야만 했던,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걷어차버릴 수 밖에 없었던 바로 그 날을 떠올리게 했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은 양 눈동자에서 보이는군.”
지은은 두려운 과거를 떨쳐내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대령님.”
대령은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이고 말을 이었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어. 나도 가끔 벗어나고 싶으니까.”
대령은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내려놓았던 파일 뒤쪽의 문서를 뒤적이다가 한 장의 종이를 꺼내 지은의 앞으로 밀었다. 지은은 대령이 이쪽으로 미는 그 종이 한 장을 받아 들고는 찬찬히 훑어보았다. 안국 지하철역 근처에서 활동하는 무장 세력에 관한 내용이었다. 사진 속에는 M1 카빈 소총과 M16 소총으로 무장한 열 명 가량의 불량한 차림의 한 남성 무리가 폐허가 된 상가 지역을 헤집고 있는 모습이었다.
“민병대 놈들이 점점 몸을 불리고 있네.”
지은은 종이를 내려두고 입을 열었다.
“위협 수준이 얼마나 되나요?”
대령은 지은의 말 끝 수식어에 대해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다. 사실 대령은 내심 지은을 자신의 아끼는 딸 뻘 여자아이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주변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조금이나마 친밀하고,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 요즘 그가 사는 유일한 낙이었다. 대령은 심각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입을 열었다.
“아직까지 우리를 압도할 수 있는 훈련 수준이나 수는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와 대적은 할 수 있겠지.”
지은은 그 종이에 한 번 더 눈길을 주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와 왜 적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아낸 것이 있나요?”
대령은 고개를 양 옆으로 흔들며 말했다.
“아니 없어. 확실한 것은 최근 들어 그들이 청와대 쪽으로 진입을 계속해서 시도 한다는 것이지.”
지은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전, 그들이 처음 ‘민병대’라는 세력과 조우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2025년 5월 1일 저녁
구 대한민국 서울 광화문 광장, 격리구역 C 부서진 방벽 앞
길게 뻗은 광화문 광장 한 가운데 위치한 격리구역 C지역은 내부 곳곳에서 회색 빛 연기가 힘없이 뿜어져 나오며, 아직도 화약 냄새와 탄내로 가득했다. 격리구역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서있는 이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네 발 달린 고철덩어리들은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그들을 기다렸다. 누런 녹이 곳곳에 슬며.
지은은 양 손에 묵직한 K-2 소총을 손에 꽉 움켜쥐고 부서진 방벽 문 바로 옆 벽에 몸을 밀착했다. 그를 따르는 열 명의 병사들도 다섯 명씩 나누어 다섯 명은 지은의 반대편 벽으로 밀착했다. 문 양 옆으로 절반씩 나뉘어 붙은 그들은, 정적만이 가득한 무너진 방벽 안의 상황을 온 몸으로 예측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순간만큼은 말 많던 신참도, 자신의 직감과 능력을 믿는 지은도 긴장을 놓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지은은 고개를 살짝 내밀어 내부를 살피어봤다. 아사해 사망한 감염체와 곳곳에 절단된 신체 부위들이 어지럽게 흩어져있었다. 지은은 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다시 고개를 돌려 눈으로 병사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리고는 손짓으로 소총의 탄알 집을 툭툭 치며 탄약 상태를 점검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탄알 집을 분리해 자신의 탄약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지은은 큰 숨을 들이키며잿빛 하늘을 쳐다봤다. 그 날 이후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도심의 고층 빌딩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지은은 한 때 수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던 이 광장과 아직도 자랑스레 자신의 양 허리에 손을 얹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보며 묘한 아이러니를 느꼈다.
병사들이 모두 이상 없다는 신호를 보내자 지은은 격리구역 안쪽으로 총구를 겨누며 진입했다. 반대편의 병사도 그녀를 따라 반대편 코너를 확인한 뒤, 병사들은 산개해 위치를 확보했다. 감염채는 보이지 않았고, 바닥에는 이리저리 혈흔과 무너진 생필품 더미들로 가득했다. 지은은 왼쪽 귀에 부착된 마이크를 통해 말했다.
“방벽 입구 확보, 각자 정신 차리고 탐색을 계속한다. 특이 사항 있을 시, 즉시 보고하고 2인 1개조로 나뉘어 2분마다 상황 보고해.”
지은은 자신의 뒤에 바짝 쫓아오는 신참 병사를 툭툭 치고는 자신을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격리구역 내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무거운 정적에 지은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방벽 문을 들어서자 양 옆으로 길게 뻗은 군 막사들을 그녀와 병사들은 차분히 내부를 수색하며 탄약과 신원을 식별할 수 있는 군번줄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무거운 정적 속에 병사들은 정확히 2분에 한번씩 차례대로 보고했다. ‘이상 없다.’는 의례적으로 들릴 수 있는 그 보고가 지은은 오늘만큼 반가울 수 없었다. 양 쪽 마지막 막사 앞에는 길게 앞쪽의 격리구역 내부 민간 지역과 가로막은 잡동사니 더미가 위치해 있었다. 지은은 마지막 오른쪽 막사에서 권총 1정과 탄약을 회수하고는 막사를 나서 그 잡동사니 건너편으로 넘어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그녀의 귀여 잡동사니 건너편으로 철제 통이 떨어지는 소리와 어수선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그를 뒤따르던 신참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내리고는 잡동사니 뒤로 같이 몸을 숨겼다. 나머지 병사들은 아직 막사 탐색과 주변 지역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지은은 잡동사니 건너편 소리에 집중했다. 어쩌면 시체를 파먹는 쥐 무리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웅성거리는 사람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은은 반가웠고 두려웠다. 격리구역에서 살아남아 그들의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터였다. 지은은 마이크를 통해 다시 한 번 병사들에게 전파했다.
“양지은 중위가 전파한다. 막사 끝 잡동사니 건너편으로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인원이 발견되었다. 후방에서 엄폐 후 경계바람.”
지은은 조용히 마이크를 통해 말을 전파하고 병사에게 자신과 반대편 쪽 잡동사니 끝으로 가서 자리를 잡을 것을 명령했다. 길게 늘어선 잡동사니 벽 양쪽에 자리 잡은 그들은, 지은의 신호와 함께 더미 위로 소총을 견착하고 소리 나는 방향으로 총구를 겨누었다.
지은은 잡동사니 더미 건너편에 바닥에서 쭈그려 앉아 무언가 정리하고 있는 세 명의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아직 이쪽을 보지 못한 듯 했다. 모두 허름한 옷가지에 지저분한 외모였지만 분명 생존자들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형식상 구호를 그들에 소리쳤다.
“대한민국 군입니다. 생존자들입니까?”
지은은 소총 아래에 부착된 라이트를 켜고 그들을 비추었다. 그들은 그 밝고 강렬한 빛이 못마땅한 듯 눈을 찌푸리며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멀뚱히 그녀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서 넘어오십시오.”
지은은 여전히 그들을 비추며 말했다. 그들은 서서히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서로 눈치만을 보며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지은은 조금 더 힘을 주어 소총을 움켜쥐었다. 명령에 불복하는 자들을 보자 본능적으로 나오는 그녀의 반응이었다. 지은은 한 번 더 참을성을 발휘하여 그들이 똑똑히 들리도록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안심하시고, 이쪽으로 넘어오십시오, 안전한…”
순간이었다. 건너면 민간 건물 어디에선가 거대한 총성과 함께 옆으로 무언가 박히는 듯 한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더미 밑으로 몸을 숨기고 무전으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사격 개시해!”
그녀의 말과 동시에 곳곳에 엄폐해있던 병사들은 총성이 들린 쪽과 잡동사니 너머 세 명의 남자들을 향해 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정적으로 가득 차던 광화문 광장을 수십 발의 총성이 가득 매웠다. 지은은 총알은 자신을 따라오던 신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병사에게 말을 건넬 수 없었다. 뒤로 고꾸라진 몸에는 자신이 들고 있던 소총이 손에 쥐어져 있었고, 그 어딘가로 그의 머리는 떨어져 나가 있었다. 지은은 차마 그 병사의 주검에서 솟구치는 피에 눈을 두지 못한 체, 다시 잡동사니 더미 넘어 소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잡동사니 너머 셋 중 하나는 이미 병사들의 총에 맞아 피가 쏟아지는 양다리를 움켜쥐고 신음하고 있었다. 지은은 그 너머로 황급히 도망가는 둘 중 왼쪽에 있는 남자를 조준했다. 지은은 숨을 멈췄다. 동그란 가늠좌에 그의 몸통을 정확히 집어 넣고, 검지로 가볍게 방아쇠를 당겼다. ‘탕’하는 총성과 함께 그녀의 귀는 멍해졌고 소총의 오른편에서는 노란 쇳덩이가 총에서 튕겨져 나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 어디론가 굴러 내려갔다. 지은은 망설이지 않고 급히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는 다시 한 번 오른쪽의 남자를 조준하여 거침없이 방아쇠를 잡아 당겼다. 정확히 심장 뒤편에 총알이 관통한 두 남자는 바닥에 고꾸라져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지은은 자신의 근처로 모두 달려와 자신을 보호하는 병사들에게 ‘상황 종료’를 전파하고는 시신을 확인하고, 다리에 총상을 입은 자는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지시했다. 병사 대부분은 앞으로 나가 그녀의 명령에 따랐고, 병사 둘과 그녀는 정확히 목을 관통한 신참의 시신과 떨어져나간 머리를 쳐다보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지은은 무릎 한 쪽을 꿇고 앉아 아직도 목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그 병사의 군번줄을 조심스럽게 거두고는그의 소총을 회수하여 자신의 반대편 어깨에 걸고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지은은 또 다시 마음 위로 무거운 짐 하나를 쌓은 체 일어서 두 병사에게 말했다.
“시신 수습하고, 복귀 준비한다.”
두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만일에 대비해 휴대하는 시신 수습 봉투와 도구를 꺼내 들었다. 지은은 앞 쪽에 나가있는 병사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다리를 잡으며 신음소리를 내는 그 남자의 주위에는 병사 몇 명이 그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병사 중 한 명이 지은이 오는 것을 보자 자리를 조금 비켜주며 말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지은은 몸을 구부려 고통스러워하는 젊은 남자를 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너희, 강도 놈들인가?”
지은은 고통스러워하는 남자의 표정 속에서 희미한 미소를 보았다. 그 남자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강도?... 아니, 너희보다 나은 사람들이지.”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를 쳐다본 체 숨을 멈췄다. 지은은 그 남자의 죽은 눈을 보며 소름이 돋는 자신을 애써 숨기고 허리를 피며 주위 병사들에게 말했다.
“소지품 확인해봐.”
병사들은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죽은 남자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눈을 뜬 체 식어버린 그의 주검이 자꾸 지은의 눈에 들어와 그녀는 몸을 돌려 자신들이 들어왔던 문 쪽을 쳐다보았다. 신참의 시신을 수습하는 병사들 중 한 명이 구역질을 하는 것이 보였다.
“중위님 이걸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그녀 옆에 꽤 키가 큰 병사 하나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그녀에게 낡은 수첩을 하나 건넸다. 카키색의 거의 해진 수첩의 표지에는 ‘자유시민 민병대 정찰 소대’라고 적혀 있었다.
2025년 5월 10일 밤
구 대한민국 서울, 격리구역 D 민간지역 주점
격리구역 내의 민간지역 중 주점은 언제나 가장 사람들로 붐비었다. 발 디딜 틈 없는 것이 일상이지만 오늘은 운 좋게 지훈과 성철은 마지막 자리에 앉아 편히 한 잔 할 수 있었다. ‘비어-오크’라고 쓰여 있는 간판이었지만, 사실 그 간판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 주점은, 이런 상황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직접 담근 술로 인기가 높았다. ‘구할 수 있는 재료’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은 언제나 이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토론 주제가 되었지만, 이 곳 주인인 넉살 좋은 60대 영감은 단 한 번도 그 답을 내놓은 적이 없었다. 지훈과 성철은 언제나와 같이 환대를 받으며 자리에 앉아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담근 술과 육포를 주문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지훈이나 성철이나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보다 그들은 오히려 말없이 혼자 술을 들이키며 자주 각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오늘따라 유독 말 수가 적은 성철에게 지훈은 입을 열었다.
“귀엽더라. 그 여자.”
성철은 지훈의 말에 슬쩍 웃으며 자신도 모르게 지은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제는 나랑 상관없는 여자인데 뭐.”
성철은 언제나 그랬듯이 사람 좋은 웃음으로 지훈의 말을 넘길 참이었다. 지훈은 지은이라는 여자와 성철이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성철이 먼저 입을 열줄 알았던 그였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지훈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여자랑 어떻게 된 건데?”
성철은 그의 말에 조금 표정이 굳었다. 사실 별 것 아닌 일이었다. ‘내가 다른 여자 만나서 끝났어.’라고 말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그의 마음 속 어디에서인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한 때 누구보다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여자를 모욕하는 일인 것 같았다. 성철은 혼란스러웠다. 그 여자는 지금 나와는 별개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군인이었고 나는 그녀의 보호를 받는 시민일 뿐이었다. 그녀와 자신이 사랑스레 서로를 쳐다보던 시간은 끝났다. 세상은 변했다. 그리고 긴 시간이 흘렀다. 그는 지은을잊었었다. 잊었다고 그 스스로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자신의 한 때 빛났던 시절이라며 남자들 사이에서 자랑스럽게 말 할 수 있던 경험을 꺼내지 못하는지, 가슴 어디에서인지 왜 그 말이 걸려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말해봐 뭐 어때.”
지훈은 그런 성철을 재촉했다. 지훈은 성철이 그런 여자와 어떻게 끝을 맡게 되었는지, 어떻게 7년 전 그 혼란 속에서 이 방벽 안에서 군인과 일반 시민의 신분으로 서로 함께 있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오늘 하루 종일 굳어있는 성철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성철도 그런 지훈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마치 그가 오늘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성철 자신의 착잡한 오늘 하루를 ‘그냥 말하고 털어버리는 것이 어때?’하고 말하고 있음을. 성철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지훈의 갸름한 얼굴과 잘 정리된 적당한 길이의 머리가 괜히 자신의 대답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성철은 입을 다시 열었다.
“나중에.”
성철은 술을 한잔 다시 들이켰다. 씁쓸하면서 달콤한 끝 맛이 중독 적으로 그의 입 전체를 자극했다. 정확히 알코올의 함량을 알 수 없었지만 꽤나 진한 술임이 틀림없었다. 성철은 술을 한 병 더 주문하고는 스스로 잔을 채웠다. 지훈은 그런 성철의 반응에 맥이 빠졌다. 어쩌면 오늘일로 인해 그래도 자신과는 반대로 쾌활하고 유쾌했던 성철이 가슴 속 어딘가에 무겁게 짓눌려있는 무언가 때문에 자신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스운 걱정을 하기도 했다. 성철은 자신이 슬슬 술기운에 취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도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그였지만, 오늘만큼은 어떤 것보다 이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순간 7년간 그가 잊었다고 믿고싶었던 지은의 얼굴과 목소리, 모든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성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으로 그것을 억제해보려고 했지만, 자신의 몸에 술이 들어가 퍼진 이상 그것은 부질없는 짓임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생각들을 흘려 보내며 그래도 그 일 이후에 아직까지 지은은 잘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 의미 없는 위안에 다다라서야 그러한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끝낼 수 있었다. 또, 자신이 절대 용서 받지 못할 것이라는 당연한 이야기를 한번 더 스스로에게 들려줌으로써.
주점은 점점 더 시끄러워졌다. 아니, 그의 머릿속에서 주위의 소음을 더 증폭시키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지럽게 주점 주인이 자신에게 비법을 알려달라며 벌건 얼굴로 흥분한 한 손님을 진정시키는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냥 헤어진 여자 이야기잖아.”
지훈은 그런 성철에게 말했다. 성철은 자신처럼 더 이상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그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인 자신의 과거 이야기만큼이나 말하기 힘들어하는 성철의 모습을 보며 답답했다. 그도 술기운이 올라, 그가 한 말이 공격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은 차마 인지하지 못했다.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
그의 말에 망설이던 성철이 지훈에게 말했다. 지훈의 말이 맞았다. 지은은 그냥 자신의 한 때 그냥 지나가는 여자일지도 몰랐다. 긴 시간과는 상관없이, 그냥 시간이 지나면 돌아보고 한번쯤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여자. 하지만 그의 머리 속에서 지훈의 말은 지은을 모욕하는 것만 같았다. 성철은 자기 스스로가 그의 말에 지은에 대한 모욕이라고 느껴야 할, 느낄 신분도 위치도 아님을 알고 있었다. 성철은 자신이 지금 지은과 사랑하고 있는 당사자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잘못된 정보라고 아무리 스스로에게 말을 해도 자신의 입과 몸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성철의 말에 멈칫한 지훈에게 성철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마음속에 항상 있는 그 여자만큼이나 나한테는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흘러간 사람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성철은 이제 머리를 거쳐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으로 흘러나오는 그의 말에 자기 스스로도 동조하고 있었다. 지훈은 성철이 혜수를 언급하자 자신도 모르게 비난하듯 그에게 말했다. 지훈은 술을 한잔 더 들이키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럼 아까 왜 그냥 가만히 있었어?”
성철은 자신의 심장에 아주 날이 선 칼 한 자루가 박히는 듯 한 감정을 느꼈다. 성철은 이제 자신에게, 지훈에게 그리고 과거 잠시의 그 공백을 참지 못했던 멍청했던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과 그때 그 골목에서 키스를 나누던 스쳐가던 그 여자 아이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성철은 거칠게 일어나 건너편 지훈의 멱살을 강하게 붙잡았다. 성철보다 키가 조금 작은 지훈은 그런 그의 행동에 당황하여 속절없이 그의 손에 끌려 일어섰다.
“네가 매일 밤마다 찾는 그 여자보다 나한테는 더 소중한 사람이야.”
지훈은 성철의 공격적인 어조에 자신의 옷을 움켜진 그의 손을 내치고 성철을 쏘아 붙였다.
“그렇게 소중한 네 여자가 그럼 너한테 왜 아까같이 행동하는데? 다른 여자랑 침대에서 뒹굴기라도 했나 보다”
성철의 주먹이 자신도 모르게 지훈의 얼굴을 강하게 가격했다. 성철은 자신의 주먹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통증을 느꼈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지훈은 성철의 주먹에 그대로 넘어져 간격이 좁은 통로 옆 테이블로 그대로 넘어져 옆 상의 모든 것을 요란하게 엎으며 넘어졌다. 성철도 마찬가지로 주먹을 휘두르며 자빠져, 겨우 기어서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지훈에게로 가서 다시 멱살을 부여잡고 말했다.
“나도 더 이상 7년이 지나도 한 여자 때문에 아침마다 끙끙대는 너 같은 새끼 옆에 못 있겠다.”
성철은 지훈의 멱살을 강하게 뿌리치며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너 혼자 살려고 도망친걸 실수라고 네 스스로 합리화시키지 마.”
성철은 자신도 믿지 못 할 만큼 차가운 말을 지훈에게 내뱉었다. 7년간 이 좁아터진 곳에서 함께했던 자신의 친구에게 한 말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공격적이고날카로운 말이었다. 지훈은 한 손을 겨우 올려 자신이 맞은 부위를 매만졌다. 입술은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고 손에 피가 묻은 것을 보자 그는 아무런 말없이 그대로 누워버렸다. 주점 안에 사람들은 항상 붙어 다니던 둘의 몸싸움과 알지 못할 말들을 들으며 그들 주위에 몰려들어있었다. 성철은 비틀거리며 그들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을 해치며 주점 밖으로 나갔다. 매일 있는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닦던 영감은 비틀거리며 나가는 성철을 슬쩍 보고는 다시 잔을 닦으며 그의 뒤에다 나지막이 말했다.
“또 오슈.”
-마린웨이브의 말
어느덧 2화가 연재되었습니다. 저
분량을 어떻게 나눌까 많은 걱정을 하게 됩니다. 무튼, 현재 어떤분의 질문에 답을해드리자면 지금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2010기준으로 약 80장 가량의 분량까지 확보된 상태입니다. 현재 연재된 분량은 아직도 초반 부분이구요. 세계관에 대해 궁금한 부분이나 여러가지 사항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바로 답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찾아주시고 제 작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속적으로 비공개 피드백을 통해 오타, 문맥, 스토리 라인등에 대한 검토를 진행해주신 20여명의 비공개 피드백 멤버에게 감사드립니다.
마린웨이브의 <Lose Something>은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