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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9,4ㄴ-10
4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5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6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7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유다 사람, 예루살렘 주민들, 그리고 가까이 살든 멀리 살든,
당신께 저지른 배신 때문에 당신께서 내쫓으신
그 모든 나라에 사는 이스라엘인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8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9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10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6-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다니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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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다고 고백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며,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면 용서받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평지 설교’(루카 6,20-49 참조)의 한 부분입니다. 행복 선언(6,20-23 참조)과 불행 선언(6,24-26 참조), 원수 사랑의 가르침(6,27-35 참조)은 심판과 용서에 대한 가르침에 앞서 소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어 평지에서,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증언할 증인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그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십니다.
루카 복음 6장 36절은 원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마무리’하면서, 심판과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 6장 37-38절은 사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명령과 그 결과가 같은 형식으로 네 차례 반복되는데, 처음 두 번은 부정 명령이고 다음 두 번은 긍정 명령입니다. 루카 복음서의 저자는 이러한 대조적 구조를 통하여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며 베풀어야 한다는 행위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권고와 명령에 따른 실천은 긍정적 결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는 이는 하느님께 심판도 단죄도 받지 않으며 그분의 용서와 선물을 체험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예수님에게서 파견되어 그분을 증언해야 하는 이들을 위한 행동 기준이자 그들이 지향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판과 용서에 관한 가르침으로 제자들이 자비로운 아버지의 속성을 배우고 닮도록 촉구하십니다.(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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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자식들보다 다른 이들에게 한없이 자비롭다면 그 자녀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쩌면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자식들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 너그럽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의 어려움보다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에 더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의 잘못은 그대로 넘어간 일이 없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은 어떤 일이든 용서해 주기 때문입니다. 자식인 내가 가져야 할 몫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에 나의 몫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칭송을 받지만, 나에게만은 정말 매정한 아버지입니다. 자식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부모가 되고, 자녀를 낳아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알아 간다면 조금이나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충분히 너그러웠고 누구보다도 자식들을 많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넘치도록 많은 것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더 이상 줄 것이 없어 아쉬워하였습니다. 그 자녀들도 아버지처럼 살아가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이 때로는 우리를 실망스럽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도와 청은 잘 들어주시는 것 같은데 내 기도와 청에는 묵묵부답이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은총과 복을 넉넉히 주시지만, 나에게만은 고통과 아픔만을 주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받은 일들을, 하느님께 넘치도록 받은 것들을, 그리고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옹졸한 사람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비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받은 사랑과 용서를 되새기고, 그분께 감사해야 합니다. 먼저 감사함을 찾으십시오.(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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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자비의 희년의 주제는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같습니다. 또한 자비를 강조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문장에서도 “자비로이 부르시니”라는 말씀을 찾을 수 있습니다.
흔히 하느님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정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가장 큰 특징은 ‘자비’입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행동보다 앞선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자비로운 우리의 모습은 하느님의 자비에서 비롯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이미 그분의 자비를 듣고, 보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기 전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자비를 이미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되와 그릇을 만듭니다. 또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과 소통합니다. 그것으로 하느님의 선물을 받고 자비를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에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지라는,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을 닮아 가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하느님께서도 심판하시거나 단죄하시는 대신 우리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는 것보다 더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 가야 하겠습니다.(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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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계명에다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덧붙이며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고 가르치셨습니다. 원수마저 사랑할 때 비로소 아버지를 닮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제1독서의 다니엘 예언자가 이야기하듯이 당신을 거부하고, 적대시하며, 당신의 뜻을 어기는 원수를 용서하시고 그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요구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의 다른 식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다니엘 예언자는 동포들의 죄를 고백하며, 하느님 앞에서 자비와 용서를 청합니다. 자신들의 부끄러움이 얼굴에 가득함을 고백하며, 주님의 자비하심에 모든 것을 의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자기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는 이들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도,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권고하십니다.
물론, 이 일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에는 하느님 도움을 청하는 기도가 늘 필요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용서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 자체가 이미 용서를 시작하는 용기 있는 첫 걸음이라 하겠습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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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우리 사회에는 자비로운 마음이 절실합니다. 자비의 반대는 무자비이지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점점 무자비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거칠고 폭력적으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무자비해진 것입니까? 성스러운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앞날에 대한 희망을 잃어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점점 인간성을 상실하고, 무자비함이 확산하는 데는 언어의 문제도 큽니다. 점점 우리말이 거칠고 척박해지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인간관계에서 대중 매체에 이르기까지 말이 너무 거칠고, 비속어가 난무합니다. 오늘날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무엇보다 파괴된 언어의 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해 주는 대로, 그대로 나에게 되돌아오지 않습니까? 그러니 상대방에게 더한층 관대한 자세를 취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나의 상처부터 치유해야만 합니다. 내 안에 박힌 가시를 먼저 뽑아내야 하지요. 내가 입은 상처가 가시가 되어 다른 이들을 찌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내 안의 가시로 말미암아 다른 이에게 악한 기운이 많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선한 기운을 상대방에게 보내면 상대방도 나에게 따스한 기운을 보내 줄 것이 아닙니까? 이럴 때 하느님의 은총이 더욱더 작용할 것입니다.(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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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에서는 다니엘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그는 기도를 시작하면서 먼저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정의로우심을 찬미합니다. 이어 자신들의 부족함과 지은 죄를 회개하지요. 특히 다니엘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자세가 기도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남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에 대해 비판마저 합니다. 하지만 비판하면서도, 정작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확히 모를 때가 있습니다. 구체적인 상황도 모르고 군중 심리에 휩싸여 함께 비난할 때도 잦지요. 또한, 상대방이 저지른 잘못을 자신도 종종 범하곤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주관적으로 심하게 비판하면서도, 막상 자신이 비판받을 때는 객관적인 잣대를 요구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남을 비판하는 데도 황금률의 정신을 적용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황금률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라는 계명이지요.
남을 비판하는 데도 황금률을 적용한다면 상대방에 대한 비판은 현격히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참된 사실을 알기 전에는 비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면, 우리는 주님 앞에 더욱 겸손한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동시에 다른 이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지기 때문이지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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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니엘서의 내용과 같은 기도를 이스라엘이 올리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다윗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한참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만 했습니다.
완 전한 파멸을 겪기 전에는 아무리 잘못을 일러 주어도 이스라엘은 결코 깨닫지 못했습니다. 율법도 있었고 예언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옳고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나의 권리를 인정해 주셔야 한다고 믿고 주장하는 한, 어느 누구의 말도 소용없었습니다. 멸망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알고 그분의 자비를 깨닫습니다. 하느님과 나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 바로 나의 덕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내 손을 놓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은총임을 터득하게 됩니다.
이 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파멸만은 피해 가려고 버티면서 버둥거리는 우리를 가차 없이 꺾어 놓습니다. 아무에게서도 단죄나 심판을 받지 않도록 책잡힐 데 없이 살고 싶기도 하고 하느님께도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교만도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러한 태도로는 결코 하느님을 만나 뵙거나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니, 인간은 결코 그렇게 흠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우리의 자존심이 끊임없이 우리 눈앞에 거짓된 우리 모습을 세워 놓기에, 우리는 무수히 넘어지고 부서진 뒤에서야 비로소 자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부활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이 사순 시기가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가난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은총의 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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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시기는 자기 스스로를 시험대에 올려놓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는 우리 각자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도 삶의 방식과 판단 기준을 그 뿌리에서부터 성찰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 중에 갑자기 지난해의 끝자락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판단 기준들을 진지하게 살펴보는 계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잣대로 행한 말과 일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심각한 논란거리가 되면서 독설 어린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목소리가 교회 구성원들 가운데에서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불편한 진실'로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비난 또는 걱정의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교회가 과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는 복잡한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행태로, 혼란을 조장하며 국익을 손상시키는 일이라고 목청을 높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의 다니엘을 통하여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의 방식을 깊이 성찰하게 됩니다. 먼저 동포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다니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기도가 간절했던 것은 분명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깊은 운명적 결속과 아낌없는 애정을 느끼고 실천하는 삶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다니엘이 동포들을 사랑하며 바친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니엘이 무엇보다도 뼈아프게 통찰한 것은 이스라엘에 만연한,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외면한 채 부끄러운 죄를 저지른 삶이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다시 일깨우는 것이, 이 시대와 민족에 뜨거운 애정과 깊은 책임감을 가진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생각해 봅니다. 죄의 근원은 주님의 자비와 정의(공정)를 거스르는 것이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약한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그들에게 오만하고 냉혹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동포들과 나라를 깊이 사랑해야 하지만 그 사랑이 그저 세상 논리의 모방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 사랑의 길잡이라는 사실을 믿고 경청하는 자세는 이 사순 시기에 우리가 피해서는 안 될 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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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 죄대로 저희를 다루지 마소서”(시편 103〔102〕,10 참조). 오늘 화답송의 후렴 구절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은 죄대로 다루신다 하여도 주님께서 틀리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다루실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저희 죄대로 저희를 다루지 마소서.” 하는 우리의 염치없는 청마저도 들어주시는 넓은 분이십니다.
예로부터 하느님을 ‘데우스 셈페르 마요르’(Deus semper major)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크신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우주에 비유한다면 우주보다 더 넓으시고, 바다에 비유한다면 바다보다 더 깊습니다.
그렇게 언제나 더 크신 그분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을 비교한다면 우리 자신은 얼마나 미약하기만 합니까? 누가 그분의 그 크신 마음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미소한 종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 크신 사랑으로 모든 죄와 잘못을 있는 그대로 단죄하시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비와 햇살을 내려 주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참아버지로 모신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겉으로는 부드럽고 순하게 보이나 속은 곧고 굳세다.’는 뜻의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떠올리며 다른 이에게는 넓고 온유한 마음을, 자기 자신에게는 엄하고 깨어 있는 자세를 갖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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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곳은 휴전선 접경 지역이라서 가까이에 군부대가 많이 있습니다. 주일마다 병사들이 100명가량 미사에 참석하는데 저희 성당 신자 수와 거의 비슷합니다. 미사가 끝나고 병사들이 부대에 복귀하는 시간이 부대에서 점심 먹기가 애매한 시간이라, 저희 신자들은 병사들이 성당에서 점심을 먹고 복귀할 수 있도록 주일마다 점심을 마련해 줍니다. 성당 신자들 대부분이 연로하신 분들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 손자 같은 병사들을 위해서 애쓰시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이런 사정을 아는 병사들은 마음속 깊이 느끼는 것이 있나 봅니다. 스스로 찾아와서 세례를 받고 싶으니 교리를 가르쳐 달라는 병사들도 있습니다. 성당에 일손이 부족하면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손을 걷어붙이고 도와줍니다. 전역자들은 제대하기 전에 주방에 들러 할머니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떠납니다. 할머니들은 그 인사 한마디로 그동안의 수고로움이 싹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희 소식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많은 분이 저희 성당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금을 보내 주시고, 어떤 분들은 정기적으로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식재료를 사 가지고 와서 점심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군인들 때문에 몰랐던 신앙의 형제들을 많이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저희가 군인들에게 해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하신 예수님 말씀은 저희를 두고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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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포(楊布)가 외출할 때는 흰옷을 입고 나갔다가, 비를 맞아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왔는데, 양포의 개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짖어 대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개를 때리려 했더니, 형 양주(楊朱)가 “네 개가 나갈 때는 흰옷을 입고 나갔다가 검은 옷을 입고 돌아온다면 너 역시 괴상하게 여기지 않겠느냐?” 하고 나무랐습니다.
『한비자』에 나오는 양포지구(楊布之狗)의 뜻풀이입니다. 곧, 겉모습을 보고 속까지 판단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 주로 쓰는 고사성어입니다. 사람이 흰옷을 입었다고 그의 마음도 하얀 것이 아니고, 검은 옷을 입었다고 속까지 검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고 했듯이, 사람이란 그 자체로 이렇게 신비로워서 그 마음의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마저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감히 누구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약한 사람은 있어도, 악한 사람은 없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편해질 것입니다.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 심지어 범죄자들까지도 그 사람이 악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약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악의 세력이 인간의 나약함을 타고 들어와 일을 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범죄까지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선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그 사람 안에 선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면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악은 힘을 잃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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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엄청난 말씀입니다. 주고 베풀어도 모두 ‘돌아올’ 것이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실천은 희박합니다. 쉽게 베풀려 하지 않습니다. 많이 따지고, 틈이 생기면 그 일에서 빠지려 듭니다. 복음 말씀은 안중에도 없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받으려고 주라는 것은 아닙니다. 주고 되받는 체험을 ‘실천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좋은 말을 하면 ‘좋은 말’이 돌아옵니다. 웃으면 분위기도 밝아집니다. 하지만 거친 말은 ‘거친 분위기’를 만들고, 분노는 분노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아는 데’ 그치지 말고 삶의 자세를 바꾸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말씀이지만, 실천이 어려운 것은 예사롭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무관한’ 사람에게도 쉽게 비판의 화살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별생각 없이 말하더라도, 듣는 이의 영혼에는 화살이 꽂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에 ‘예스맨’이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이지요. 심판과 단죄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되돌아옵니다. 올바르지 않으면 자신의 운명에 상처를 남깁니다. ‘부메랑’은 목표물에 명중해야만 되돌아오지 않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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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말썽 없이 나누려면 쪼갠 뒤에 먼저 골라잡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크게 보이는 쪽을 가져가게 하는 것이지요. 어찌 빵뿐이겠습니까? 많은 부분에서 선택권을 양보하면 불만이 적어집니다. 불만이 생기더라도 쉽게 해소됩니다. 그러므로 약자에게 선택권을 배려하는 이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도 양보하라는 말씀입니다.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은 심판을 서둘러 하는지요?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내가 먼저 ‘감정을 섞고’ 언행을 높입니다. 별일도 아닌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여 분위기를 흐립니다. 때로는 침소봉대하며 떠벌립니다. 모두가 내 삶에 ‘어두운 기운’을 불어넣는 행위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업’을 만드는 것이지요. 먼저 양보했더라면 피해 갈 수 있었던 ‘업’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잠든 영혼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실천에 옮긴다면 매일매일 기적을 일으키게 하는 말씀입니다. 늘 부딪치는 관계를 새삼스레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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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어느 빵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인은 신선한 빵을 구우려고 버터를 매일 아침마다 직접 농부에게서 배달받았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버터가 정량에 모자라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버터를 저울에 달아 보니 역시 버터의 양이 부족하였습니다.
주인은 매우 화가 나서 자신을 속인 농부를 고소했고, 농부는 결국 피의자 신분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뒤집어쓰고 망신을 당한 쪽은 농부가 아닌 빵집 주인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농부에게는 젖소 몇 마리는 있었지만 너무 가난하여 저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농부는 배달할 버터의 양을 정하는 데 매일 자신이 납품하는 빵집에서 갖다 먹는 빵의 무게를 기준으로 버터를 잘랐던 것입니다. 결국 빵집 주인의 얄팍한 상술과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을 판단한 마음이 오히려 자신을 판단받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거나 단죄하고 싶을 때 먼저 우리 자신의 비판받고 단죄받을 행동들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찾아내고 그것을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 들 때에 비로소 이웃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 감정은 관용으로 바뀔 것입니다.
책을 읽다가 어떤 생각이 나서 뭔가를 찾으러 거실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가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기억이 되살아날까 싶어서 다시 사재로 되돌아갔지만 역시 생각나지 않습니다. ‘내 뇌가 퇴화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거실로 나가 두리번거립니다. 내 뇌의 퇴화를 인정할 수 없다며 이것저것을 보며 기억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저만 그럴까요?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한두 번은 이런 일을 겪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2~30대도 겪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주의가 산만해서 그렇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5~60대로 넘어가면 뇌가 쇠퇴하는 징후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뇌과학자들은 기억력 쇠퇴가 암울한 징조가 아니라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젊었을 때는 뇌가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뇌는 외부환경에서 비롯되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드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자기 자신의 생각을 심사숙고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생각이 많아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뇌과학자들이 말하듯이, 뇌의 퇴화가 아닌 당연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당연한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스스로 갇혀 있는 생각 때문입니다.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 조건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니, 하느님의 사랑까지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더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하게 지금을 인정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심판의 주체는 늘 하느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남을 심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율법이 허락하지 않는 행동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했기에 하느님께서는 그 모습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점을 주님께서는 기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심판하지 않는 행동의 결과인 용서와 자선을 이야기하십니다. 즉, 베풀고 용서해야, 자비하신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임에도 끊임없이 심판하고 단죄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따르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에서 드러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옷은 목에서 발목에 이르는 품이 넓은 옷이었습니다. 담을 그릇이 없을 때, 이 옷은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주신다는 것이지요.
이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영역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모습이 됩니다.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찻잔을 천천히 손에 쥐어 보라. 귀가 후 천천히 옷을 벗어 보라. 일상을 음미하면 옷을 벗는 것이 힘든 하루의 일과를 벗어내는 것과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달을 수 있다. 축제를 즐기려면 지금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여야 한다(안셀름 그륀).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지 마세요
등교길과 등굣길, 차값과 찻값, 최대값과 최댓값.
어떤 단어가 맞을까요?
이런 단어들을 만나면 우리말이 참 어렵다 싶습니다. 우선 정답은 ‘우리말’과 ‘한자어’로 구성된 단어는 중간에 사이시옷을 넣게 되어 있으므로 등굣길, 찻값, 최댓값이 맞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한국말을 쓰며 살았지만, 아직도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하긴 아는 청년 중에 우리나라 국어사전을 만드는 청년이 있는데, 그 친구도 종종 헷갈려서 힘들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랫동안 써 온 우리말도 이렇게 정확하게 쓰기 어렵습니다. 이것만 봐도 다른 사람의 말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판단과 단죄로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전하고 있었을까요?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먼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삶이 아닌, 용서하고 베푸는 자선의 삶을 통해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이 훨씬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단죄와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저 용서하고 또 용서할 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절을 지내며 십자가상 예수님의 모습을 자주 묵상하게 됩니다. 활기찬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의 모습도 감동적이지만, 십자가 상 예수님의 모습역시 그에 못지 않게 감동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의 그 끔찍하고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명언 몇가지를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이른바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도 합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오 복음 27장 46절)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복음 22장 3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복음 23장 43절)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복음 23장 46절)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복음 19장 26~27절)
“목마르다.”(요한 복음 19장 28절)
“다 이루어졌다.”(요한 복음 19장 30절)
여러 말씀 가운데 오늘은 용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제 마음에 큰 반향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복음 22장 34절)
그토록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저런 말씀이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 참으로 놀랍니다. 그 순간 저 말씀이 예수님 입에서 나온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 아니시라면 도저히 저런 표현을 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만일 십자가상 예수님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묵상해봅니다. 욱하기 잘하고, 한 성깔 하는 제가 도저히 그냥 넘길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선 하느님 아버지께 따졌을 것입니다.
“아버지, 아무리 인류 구원 사업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저 인간들 하는 행동 한번 보십시오. 어떻게 저럴수가 있습니까? 인간으로서 저게 할짓입니까? 저는 저들의 치유와 구원, 행복과 영생을 위해 이 한 목숨 불살랐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습니까? 무죄한 저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것도 모지라 저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무리 바쁘시다 할지라도 제게 딱 3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저 녀석들 제대로 손좀 보고 다시 십자가 위로 올라오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함구하십니다. 철저히 침묵하십니다. 인간들의 무자비한 악행 앞에서도 보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 적대자들의 용서를 청하셨습니다. 참으로 크고도 놀라운 예수님의 인내요 사랑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마음에 깊이 새깁니다. 단죄와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저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것입니다.
미움은 고통의 바다에서 스티로폼이지만 행복의 바다에서는 납덩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가장 자주 나오는 주제이지만 일상에서 가장 되지 않는 것이 또 용서일 것입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해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득문득 떠오르는 순간은 내가 행복하지 못할 때일 것입니다.
보통은 누구를 미워하는 이유는 내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지 않은 탓을 남에게 돌리는 것이 미움입니다. 하지만 순서상 그 사람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청년이 애인과 헤어져 고통스럽다며 저를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벌써 한 달째 술로 밤을 지새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술자리에서 친구와 싸움도 일어나고 부모에게 상처도 주고 돈도 떼이고 직장생활도 잘 안 되는 등의 사건이 더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 청년이 그 애인을 만나기 전에는 행복했을까요?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행복을 그 애인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애인은 상대를 행복하게 해줘야만 하는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애인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으면 그 기회를 이용해 떠나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부부가 서로 미워한다고 생각하면 그 미움 전에 각자의 고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나기 전에 외로웠고 만나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행복하지 못하니 그 탓을 상대에게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행복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용서에 대한 이러저러한 방법을 제시하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기가 더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해도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고통스러워서 미워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의 근본 원인을 알아야 참다운 용서가 생깁니다. 미움이 고통에서 시작된다면 행복하면 누구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용서하기 위해 그 사람을 계속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행복이란 물 밑으로 가라앉히면 됩니다.
천국에 미운 사람과 함께 있는 편이 나을까요, 아니면 미운 사람을 보지 않으려고 천국 행복을 포기하는 편이 나을까요? 모두 미운 사람과 있어도 천국에 머물려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천국에 있다면 미움은 사라집니다.
따라서 행복할 수 있는 천국만 이 세상에서 발견한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더라도, 혹은 살해당했더라도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용서는 행복으로 미움의 고통을 수장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마치 암초처럼 우리 배를 긁습니다. 방법은 물 수위를 높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들 가운 데 있다면 그 행복의 수준이 고통을 넘어서기 때문에 미워할 이유도 사라지게 됩니다.
2015년 6월 17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흑인교회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던 신자 9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총을 난사한 범인은 21세 백인 청년 딜런 로프는 백인우월주의자였습니다.
19일 법원 대형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보석 여부를 결정하는 약식재판정에는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가해자에게 직접 얘기할 기회를 주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관행에 따라 유족들은 한 명씩 범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네이딘 콜리어, 어머니를 잃은 딸]
“나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갔습니다. 엄마와 다시는 얘기를 나눌 수도, 엄마를 다시 안을 수도 없지만,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 영혼에 자비가 깃들기를 빕니다. 당신은 나를 아프게 했어요. 다른 많은 사람을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펠리샤 샌더스, 아들을 잃은 어머니]
“당신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을 죽게 했어요. 내 살점 하나하나가 다 아픕니다. 이제 우리 모두 예전처럼 살아가지 못하겠죠. 하지만 당신을 용서합니다. 당신 영혼에 신의 자비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이들 모두가 예상치 못한 용서의 말을 하자 범인도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떻게 그들은 부모와 자녀를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 교회가 나눔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용서해도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손을 부여잡고 죽은 이들을 애도하며 서로를 위로했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자비의 공동체에서는 용서할 수 있는 에너지가 흘러넘칩니다.
용서가 안 될 때 그 사람과 직접 맞대결하지 마십시오. 그건 잘못된 해결방법입니다.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미움은 납덩이처럼 가라앉습니다.
행복하려면 행복한 공동체에 머무르려고 하십시오. 그런데 직장과 같은 데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눔의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족 공동체는 좋기는 하지만 너무 작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어떠한 고통이 와도 그 고통을 이겨낼 공동체에 속해있어야 합니다. 그 공동체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 사랑이 쏟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나 그 행복의 수위가 모든 고통을 넘어설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독특하게 ‘용서하는 마음’과 ‘주는 마음’이 결합하여 있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도 하십니다.
용서와 주는 것은 서로 다는 것 같지만 실제로 같은 ‘자비’에서 나옵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서로 나눌 줄 아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용서도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용서도 자비고, 주는 것도 자비입니다. 주는 마음이 사라지면 용서하는 마음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 용서의 힘도 커집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19로부터 우리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은 3가지입니다.
첫째는 바이러스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불필요한 활동의 자제입니다. 이런 수칙을 잘 지키면 바이러스로부터 우리의 몸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잘 지킨 나라는 바이러스의 감염을 줄 일 수 있었습니다. 의료체계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사망자의 수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둘째는 백신의 개발입니다. 백신을 맞으면 우리의 몸에는 바이러스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항체가 형성됩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했음에도 바이러스는 우리의 몸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고, 약간의 틈새도 놓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신을 맞으면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70% 이상의 사람이 백신을 맞으면 집단면역이 생기고, 바이러스는 더 이상 전파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셋째는 치료제입니다. 바이러스는 증식하는 과정에서 우리 몸의 장기를 다치게 합니다. 특히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은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치료제가 있으면 우리 몸의 장기를 보호 할 수 있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백신은 개발되어서 접종이 시작되었습니다. 2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백신을 접종 받았습니다. 이제 곧 치료제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코로나19의 위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일상의 소중함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나뭇잎은 흔들리고 싶지 않아도 바람이 불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죄와 유혹의 바람에 흔들리곤 합니다. 하느님과 멀어지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몸이 바이러스로 인해 피해를 입듯이, 우리의 영혼도 악의 세력에 의해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하느님께로 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비슷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나의 허물과 잘못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둘째는 ‘청원’입니다. 청원은 백신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셋째는 ‘선행’입니다. 선행은 치료제와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이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어두운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세상은 선한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간다면 어떤 악의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를 구하소서. 당신 이름 위하여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나와 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나
너는 너
나는
나 안의 나
너는
나 앞의 나
너는
너 안의 너
나는
너 앞의 너
나는 너
너는 나
삼일절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고구려 광개토태왕 이후 나라 잃고 동북삼성을 누비던 독립운동가들 안중근, 김좌진, 홍범도, 신채호, 그리고 유관순으로 이어진 1919. 03.01. 전국 독립운동 ‘대한독립만세’로 이어졌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훌륭한 초기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살리기 위해 만주벌판과 연해주를 누볐고 상해를 누볐다. 구국의 일념 하나로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에서의 거사,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스케일이 큰 애국지사들, 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독립운동가들은 구국을 위해 기개를 펼쳤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배우려 나는 매년 10월이면 학생들을 데리고 만주벌판으로 날아갔었다. 그리고 하얼빈과 발해 연해주를 찾았다. 해란강이 내려다 보이는 용정의 일송정이 있던 곳에서 역사에 잠겼다. 백두산에 올라 북녁 하늘을 바라 보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건물이 있는 상해로 다시 날아갔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 학생들의 스케일도 커져갔고 목표가 생겨났었다.
반도는 두동강나고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정신도 이념에 가리어 자유당 독재정치, 군부구테타 독재정부, 일본과 밀착된 친일파 세력에 의해 퇴색되어 갔다. 반도의 남쪽은 좁아터진 정치꾼들의 싸움터가 되어 헐뜯고 속이고 속는다. 삼일절에 적폐들은 자기 생존을 위해 나라사랑 한다고 외치고 있다. 4,19혁명, 6,29선언, 5,18광주 민주화 항쟁, 뜨거웠던 촛불혁명이 애국정신을 이어간다.
오늘 산책을 나갔다. 쉼터에서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노인들이 변하고 있다. 생각없는 우익이 아니라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려는 움직임이다. 이 정부가 의를 위해 지구전을 펼치며 정치를 잘하고 있다며 노인들의 목소리가 비전있는 우익이 되어 대화내용도 수준이 제법 높았다. 대통령의 래임덕이 올법도 한데 여전히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며 말이다. 노인들의 나라 사랑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삼일절에 나라의 평화통일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자비를 이야기하십니다.
제1독서는 바빌론에 유배를 갔다가 왕궁에 들어간 다니엘이 동포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의 대목입니다.
"저희는 ...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다니 9,5-6)
다니엘은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리신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겪는 몰락과 유배의 원인을 자신들에게서 찾습니다. 이스라엘은 거듭 다가오시는 주님을 외면하고, 거듭 보내시는 예언자들을 거부한 대가로 이방 민족들 사이에 흩어져 하느님의 율법과 예식, 성전을 그리워하는 신세가 되었지요.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다니 9,7)
다니엘 예언자는 나락으로 떨어진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주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의로우심을 고백합니다. 자신들의 죄에 비추어 지금 겪는 벌은 합당하다는 뜻이지요.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다니 9,9)
하지만 뼈아픈 통회는 자책과 자포자기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희망의 상기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배반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또 그에 대해 벌을 받은 일도 다반사였지만, 그때마다 다시 당신 백성에게 얼굴을 돌이켜 기회를 주신 분은 하느님이심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계속 죄 속에 주저앉아 멋대로 살자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간과했던 일들,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말씀 경청, 계명 준수를 다시 기억하자는 겁니다. 당신 백성의 고통을 가장 아파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니 그분께 돌아갈 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것이지요.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받는 사람에서 그 자비를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나약한 죄인인 우리에게 아버지처럼 자비로우라는 권고는 꽤나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사 이해관계에 얽혀 돌아가다 보니, 마냥 자비롭다가는 이용만 당하고 바보 취급 받기 십상이니까요. 사실 자비는 우리가 자기 힘만으로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로 자비를 베풉니다. 우리가 나누는 사랑이 나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인 것과 같습니다. 모든 사랑이 그렇듯, 모든 자비도 자비의 원천이신 하느님에게서 흘러 나옵니다.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 흘러온 자비는 우리 안에 고여있지 않고, 그 자비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또 흘러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소유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흐름으로써 진정 "자비"가 되는 신비입니다.
"심판하지 마라. ... 단죄하지 마라. ... 용서하여라. ... 주어라."(루카 6,37-38)
예수님은 아버지의 자비가 우리에게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가 아버지의 자비와 다른 건, 보상이 약속된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는 "너희가 타인을 이러이러하게 자비로 대하면, 나도 너희를 그렇게 대하겠다."는 약속이 따릅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는 또 다시 아버지의 자비를 부릅니다. 자비를 베푼 만큼 또 다시 자비를 얻는다니, 힘껏 자비의 사람이 되려 노력해도 좋을 듯하지요. 자비는 이렇게 순환되고 확장됩니다.
그렇다면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는 무슨 보상을 받으실까요? 아버지께서 자비로 얻을 보상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분은 그것으로 흡족하시고 행복하십니다. 우리가 베푸는 자비의 보상도 결국 그 사람의 구원일 겁니다. 그러니 다른 보상은 기대할 필요가 없겠지요.
사랑하는 벗님! 벗님이 주님의 자비를 체험한 때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때 받은 자비가 누군가에게 이어져 열매를 맺었는지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겠지요. 여전히 그 자비가 내 안에 고여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으니 힘 내어 자비를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자비는 또 다른 자비를 부를 것입니다. 그러면 자비를 입은 사람은 물론, 벗님도 행복하고, 아버지는 더더욱 흡족하시겠지요.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은 벗님을 응원합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순 제2주간 월요일>(2021. 3. 1. 월)(루카 6,36-3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1)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라는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35).” 라는 계명에 이어져 있는 말씀입니다.
마태오복음에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말씀을 합하면, 하느님의 ‘완전하심’은 곧 ‘자비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완전함에 다가가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처럼 된다는 말은, 하느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간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는다는 뜻입니다.)
“너희도 하느님처럼 되어라.” 라는 말씀에서 레위기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 19,2).”
이 말씀을 인용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베드 1,14-16).”
사실 하느님의 자비, 완전성, 거룩함은 하나입니다. 완전함과 거룩함은 표현만 다를 뿐이지 사실은 같은 것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자비’로 드러납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요한 1서에 있는 다음 말로 합해집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완성하는 일이고,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일이고,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 완전한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반대로, 원수 같은 사람은 제외하고서,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을 하는 것이고, 즉 죄를 짓는 일이고(루카 6,32),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일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거룩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생활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다른 일을(다른 신심 행위를) 전혀 하지 않아도 사랑만 하면 되는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만 내세우면서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기본 신심 행위들을 일부러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 사랑입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등 신앙인으로서 하게 되는 일들을 기쁨으로 하는 법입니다.>
2)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감히 하느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가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사탄의 첫 번째 유혹에 연결됩니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5)”
뱀이(사탄이) 한 말을(유혹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는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거짓말이다.
2.너희가 그 열매를 따 먹으면 선과 악을 알게 되어서 하느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갈 수 있다.
3.하느님과 같은 위치로 올라가면 하느님도 너희를 죽이지 못한다. 오늘날에도 사탄의 유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유혹은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서 하느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선과 악을 심판하는 심판자가 되라는 유혹입니다.(남을 심판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면, 그것은 하느님 행세를 하라는 사탄의 유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감히 하느님 행세를 하는 것은 신성모독죄이고, 당연히 심판받을 죄입니다.
3) “남을 단죄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앙갚음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루카 6,27-31).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7-21).”
4) “...을 하지 않으면, 너희도 ...을 받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과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를 잘 받아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신 분”입니다(루카 6,35).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남을 심판하고, 남을 단죄하고, 또 남을 용서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죄와 욕망과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비를 안 받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용서의 은혜를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렇게 거부함으로써 용서를 못 받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시는데도 우리가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를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으려고 하시면서, 어떻게든 나를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하시는데, 내가 고집을 부리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내 발로 심판대로 간다는 것,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지옥으로, 또는 멸망으로 떨어지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그쪽으로 쫓아내신 사람이 아니라, 자기 발로 그쪽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생명의 말씀이 세상에서도 이뤄지도록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세상은 이와 정 반대로 생각하라며 절대 손해 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남의 잘못을 심판단죄하고 원수갚고 손해 보지 말고 배상받으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판 단죄 말고 용서하고 후히 베풀며 살라 하십니다.
예수님 안 믿으면 이익이고 믿으면 손해란 말 이래서하는 거라 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바로 그 뒤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시고 세상엔 없습니다.
세상 말은 죽기 전까진 그럴싸해도 살기 험한 경쟁 투쟁 살인뿐입니다.
영이며 생명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세상에서도 이뤄지도록 노력합시다.
가톨릭 알림 말: 예수님말씀은 영생 가는 길이라고 가톨릭은 믿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사제로 살아오면서 그동안 정말 많은 장례미사를 집전했었지만 저희 아버지 장례식 때를 기억하면 그 때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셨던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아마도 저희 아버지는 살아계실 때 정말 많은 봉사를 하시면서 남들에게 자비로운 일들을 많이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 주변에 지인들의 경우를 보아도 평상시에 많은 봉사를 하면서 많이 베풀고 나눈 분들의 경우를 보면 그 분 역시도 다른 분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으시곤 합니다. 어쩌면 내가 사랑을 베풀고 나눈다는 것은 결국엔 다른 이들 뿐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번 장례미사 때 봉독하는 말씀 중 마태오 복음25장 40절에 이렇게 전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훗날 우리가 당신 대전에 나아갔을 때 그렇게 얼마나 베풀었는가를 물어보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가경자 최양업 신부님의 업적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어제 주일 강론을 통해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최양업 신부님의 탄신일을 맞아, 그 업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최양업 신부님의 업적에 대한 내용을 그분이 쓰신 편지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최양업 신부님은 당시의 조선 풍습에 맞춰 선교 활동을 하셨습니다. 1851년에 쓴 여덟 번째를 보면, 최 신부님은 죽은 이를 기리는 유가족의 상복을 입고 온몸을 가리는 풍습을 이용하여, 서양 선교사들과 함게 상복을 입고 온몸을 가리고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두 번째, 최양업 신부님은 찾아가는 선교 사목 활동을 펼치셨습니다. 서양 신부님들이 드러내놓고 신자들을 방문할 수 없었던 박해시기에, 최양업 신부님은 찾아오는 신자들을 맞이하는데 그치지 않고, 최 신부님이 담당한 5도, 충청도, 경상 좌우도, 전라 좌우도의 교우촌을 일일이 걸어서 방문하여 3815명의 교우분들을 맞으십니다. 이는 당시 전국 신자수 11,000명의 약 35 퍼센트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박해를 피해 밤 늦게 교우촌에 도착하여 고해성사를 주고 새벽미사를 봉헌한 후 새벽녘 동이 트기 전에 새로운 곳으로 떠나시는 방법으로 사목활동을 하셨습니다.
세 번째, 최 신부님은 조선인 방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애쓰셨습니다. 1854년 3월 이만돌 바울리노, 김 요한, 임 빈첸시오 세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말레이 반도 페낭의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로 보내어 사제양성과정을 밟게 합니다.
네 번째, 최 신부님은 한글을 통한 복음 선교에 힘쓰셨습니다. 최 신부님은 당시 천주교 서적인, ‘성교 요리 문답’과 ‘천주 성교 공과’를 번역하며, 신자들이 쉽게 천주교리를 배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다섯 번째, 최 신부님은 한글 언문체로 ‘천주가사’를 저술하여, 신자들이 쉽게 교리를 이해하고 암송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말, 즉 죽음, 심판, 천당, 지옥을 그린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을 가사 형식으로 써서, 신자들이 천주교 주요 교리를 익히고, 묵상과 심신 함양 미치 교리 실천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여섯 번째, 최 신부님은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전하였습니다. 현석문 가를로와 이재의 토마스가 수집하고 페레올 주교가 보완 정리한 프랑스어본 ‘기해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교황청에 보고하였고, 1857년 기해박해 73위와 병오박해 9위 등 한국 순교자 82위를 가경자로 선포토록 하는데 기여했습니다.
일곱 번째, 최 신부님은 복음을 선교하시며 동시에 어렵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셨습니다. 최 신부님은 죽음을 앞둔 박해의 선교 현장 속에서도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풀어주고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려는 노력을 교회 사목의 일차적인 선교 목표요 방법으로 삼았습니다
박해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당시의 풍습과 이용 가능한 방법을 최대한 동원하여 선교 사목 활동을 평치신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기억하고 시복시성을 위해 기도하며,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실현 가능한 선교 방법은 무엇인지 모색하고 실현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헌신하여야 하겠습니다.
자비로운 판관이 되자<루카, 6/36-38>3/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자비는 선의 최고봉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살아도 적어도 양심의 도를 깨달은 사람은 자비를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더구나 주님을 알고 믿는 사람은 자비를 생명으로 알고 따라 사라야 합니다. 나는 자비를 바지 않고는 여기 존재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나를 존재하게 하려고 모든 것이 있습니다. 가까이는 태양의 빛이 없으면 힘을 쓰지 못하고 공기가 없으면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아침에 맑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감사와 감단이 나옵니다. 단순이 물병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제방에 물이 오기까지의 행로를 생각하면 하느님의 자비로운 창조로부터 물을 이방에 있게한 사람들의 은혜를 생각하면 자비의 은총입니다. 20년전 눈이 불편헤서 병원에 안과 병원을 찾았는데 즉시 수술을 하라고 하여 수슬을 받고 이야기를 들으니 한쪽 눈이 실명할 뻔 했다고 하며 사진을 보여주는데 시신경이 굽어 있는데 끊어지는 것 수술로 막아주어 보게되었다고 합니다. 의사가 없었으면 저는 징님으로 살아야 하였는데 의사의 자비로 지금것 눈을 뜨고 살아갑니다. 이같이 나 외의 사람에게 자바로 살아갑니다.
오늘 “하느님 아버지는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 하느님은 우리를 자비로 완전하게 꾸미시고 이름답고 깨끗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이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니 하느님을 닮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작은 아들의 비유이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는 영원무진하다고 들었고 만단롄트 빚진 사람이 백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아서 감옥에 가치게 되는 말씀을 통해서 나는 모든 이에게 자비로운 판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느날 고시함격하고 핀괸으로 임영되는 축하식에 초대되어 가는길에 선물도 없이 가다가 호텔에 들려 상품 파는 곳에 들려눈에 띠는 것은 시꼐가 달린 온도계 였습니다. 그때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면서 주었습니다. 판관은 무든 판결은 시계처럼 완전하고 정확하게 해야 하지만 날씨의 차이로 온도계가 오르 내리는 것같이 따뜻한 마음으로 만사를 판결해야 합니다. 모든 판결은 법보다 주먹이 앞슨다고 하였듯이 강하게 이끄는 쪽으로 판결 내려야 합니다.
한번 벌받고 죽어바라. 너같은 것 법이 무서운 줄 알아라. 아니라 선으로 이끌고 쉽게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할 말이 있으면 정정당당히 나서 말하되 뉘우치는 사람은 용서하고 자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비는 손을 짤라 버리거나 머리 숙여 사좌하는 사람을 묵을짜르거나 자비를 구하는 입을 막거나 전후 사정도 모르고 판단하는 판관은 자기 말에 자기도 걸리게 됩니다. 사형수의 목을 짜르려고 준비한 계로징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 결국자기도 자기가 만든 게로징에 목이 잘렸습니다.
“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가 되받을 것아디”
자비는 자비를 낳고 자비는 생명을 보존합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자비를 받고 내가 생명을 유지하는 것같이 다른 이의 생명도 유지 발전시켜야 합니다. 사형제도가 있어 형무소에서 사형이 진행 도리 때 배가 고파 구멍가게에 들려 먹을 것을 찾다가 노인을 살해한 사형수가 한 천사 같은 수녀님과 변호사와 판관으로 살아난 이야기가 방송을 타고 흘려 나오고 실질로 지금도 살아서 꽃동내에서 봉사하고 사는 사람은 주위에 모든 사람이 자비를 베푸는 판관이 였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형무소에 있을 때 몇 번 방문하였지만 죽어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저는 판단하였습니다.
우리는 함께 사는 사람들을 죄인 만들고 파련치 범으로 만들고 뒷담아를 통해 사건이상으로 부불러 죄인으로 만들지 말고 자기편애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며 살아갑시다.
김성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에 이어, ‘자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자비’라는 것은, 자비를 베푸는 입장 과 자비를 입는 입장 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늘 자비를 베푸시는 입장이고, 반면에,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야 하는 입장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심판과 단죄 그리고, 용서 를 언급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완전하신 분, 거룩하신 분, 위대하신 분 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완전하심, 하느님의 거룩하심,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하심, 거룩하심, 위대하심을, 우리를 한없이 용서하시는 모습으로 드러내십니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의 참 모습이 있고, 그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자비롭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는 하느님께 바로 그러한 점을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함 자체이시고, 기준 자체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완전함 대로, 기준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한없는 용서로 대하신다는 사실에 마음으로부터 한없는 감사를 드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그러한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기준에 맞추어 옆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나 역시, 조금씩,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3,36)
이민락 라우렌시오 신부님
+찬미예수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온도가 있습니다. 말에 차가운 말과 따뜻한 말이 있습니다. 사랑, 배려, 이해, 인정, 격려, 위안, 용서 등의 말을 생각해보면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비난, 험담, 욕설, 상처, 지적 등의 말을 생각해보면 차가움이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따뜻한 말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은 따뜻함을 좋아합니다. 상대방에서 온기가 느껴질 때 긴장을 풀고 마음을 놓고 편안함을 느낍니다.
“엄마 가슴은 절대차면 안 돼. 엄마는 똑똑한 필요가 없어. 엄마 가슴이 뜨거우면 아이는 그 열로 살아갈 힘을 얻는 거야. 요즘 엄마들은 가슴은 차고 머리는 똑똑해서 아이들이 탈이 많이 나거든.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아이를 닦달하는 엄마들을 보면 아이들이 불쌍해.”(어른 연습. 양순자)
자녀들이 엄마를 좋아하고 엄마 가슴이 고향 같은 것은 따뜻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자녀를 판단하고 심판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기 때문에 엄마는 따뜻함으로 남아 있습니다. 엄마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따뜻한 가슴이 필요합니다. 서로 따뜻함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에게 힘이 됩니다. 따뜻함이 온기 있는 가정과 사회를 만들어 갑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3,36)
자비로운 사람이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입니다. 따뜻한 가슴이 따뜻한 말을 합니다. 냉철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비의 온도를 측정한다면 36.5도 일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사랑의 온도입니다. 신앙인 역시 따뜻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은 정상 온도를 가진 따뜻한 사람이 될 때 정상적으로 살아갑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정상 온도를 가질 때 서로 잘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
판단과 심판과 단죄가 아니라 용서와 사랑을 통해 따뜻함을 지닌 자비로운 사람이 됩시다.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를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아멘
무지한 사람에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길. -기도, 회개, 실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3월 첫날 ‘삼일절’이자 4월4일 주님 부활 대축일을 앞둔 본격적 복된 영적훈련의 ‘파스카의 달’이자 ‘성 요셉 성월’입니다. 본기도중 ‘영혼의 건강을 위하여 육신의 극기를 명하셨으니’라는 대목도 참 적절합니다. 육신의 극기와 직결된 영혼의 건강임을 깨닫습니다. 1년 영적 농사의 성패가 이 한달에 달려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 부활을 앞당겨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을 살아야 할 마음 설레게 하는 3월의 봄날들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우울하고 어둡게가 아닌 기쁘고 밝게 지내야 할 사순절임을 이미 규칙서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기쁨으로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성규49,6-7).
규칙서에서 기쁨이란 말마디가 오직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라는 장에만 단 두 번 나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기쁨을 살아야 할 3월 봄철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맨 먼저 영춘화迎春花, 하느님의 봄꽃 선물이 참 반갑고 기뻤습니다. 영춘迎春花, 봄꽃 어감도 말 뜻도 곱고 깊습니다. 겨울에서 봄맞이 영춘화 봄꽃 그대로 ‘파스카의 꽃’이라 명명해도 좋겠습니다. 두분과 주고 받은 메시지입니다.
-“영춘화 봄사랑 선물입니다.”
“영춘화가 피었으니 봄이 왔군요. 아, 세월은 어김없이 지나가고 있으니 오늘 그동안 잡고 있던 2월을 또 놓치고 있네요!”
“영춘화! 정말 봄사랑입니다. 노란 영춘화가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설레임이랄까, 봄날같은 삶으로, 희망으로---”-
은총의 사순시기, 하루하루 놓치지 말고 하루의 선물을 보람있고 기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좋으면 축복은 저절로 따릅니다. 사람이 희망입니다. 사람이 참 보물입니다. 사람이 참 선물입니다. 아무리 환경 좋고 건물 좋고 전통 좋아도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특히 수도형제는 더 그러합니다. 아무리 거금을 주고도 수도자는 스카웃 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새 지원자 정보영 사도 요한 형제를 공동체에 선물로 보내 주셨으니 참 감사하고 기쁩니다. 전번 예결산 회의를 하면서 수도자 하나하나가 얼마나 수도공동체의 기초와 기반을 튼튼히 하는 보물인지 절감했습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회개도 겸손도 불가능합니다. 참으로 사람이 하느님을 따르면 사람도 돈도 온갖 축복도 저절로 뒤따릅니다. 결코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찾아 하느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참 사람입니다. 무지한 사람에게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참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인간의 고질적 마음의 병인 무지에 대한 궁극의 처방도 자비뿐임을 깨닫습니다. 자비롭고 너그럽고 지혜로운 하느님을 닮아가는 길뿐입니다. 사순시기 3월 첫날의 복음이 흡사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3월의 말씀’처럼 생각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바다같이 넓고 깊은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지난 토요일 마태복음의 아버지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무지한 사람에서 완전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 너그러운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지난 토요일 강론중 일부가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거룩함holiness이자 온전함wholeness이요 영어 발음도 같습니다. 바로 아버지를 닮은 ‘완전함perfection’은 그대로 ‘거룩함’과 ‘온전함’과 ‘자비로움’은 하나로 통함을 봅니다. 지난 밤 정월 보름달처럼 원숙, 원만圓滿한 둥근 모습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닮을수록 둥근 마음, 둥근 삶이 됨을 깨닫습니다. 둥근 해, 둥근 달, 가을철 둥글게 익은 원숙圓熟한 열매들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참으로 이렇게 무지에서 벗어나 너그럽고 자비롭고 지혜로운 노년의 둥근 인생이라면 얼마나 멋있고 아름다울런지요!”
우리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승들의 궁극의 꿈이자 목표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을런지요? 이의 결정적 롤모델이 가엾이 여기는, 불쌍히 여기는, 측은히 여기는 자비로운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기도와 회개, 그리고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삶이자 사랑입니다.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입니다. 기도없는 인간은 애당초 성립되지 않습니다. 기도할수록 자비로운 하느님을 닮아 참 사람의 내가 됩니다. 제1독서 다니엘서는 매년 사순시기 1000년동안 계속된 말씀입니다. 매해 들을 때 마다 감동입니다.
그대로 기도와 동시적으로 이뤄지는 회개가 우리의 공동전례 기도를 닮았습니다. 우리의 평생 끊임없이 하루하루 바치는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 기도가 ‘회개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함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회개의 시스템’같은 일과표가 고맙습니다. 다니엘의 감동적 기도 일부를 그대로 소개합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모두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런 진정성 가득한 겸손과 경배, 고백과 탄원의 회개의 기도가 무지의 병을 치유하여 자비하신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자비롭고 너그럽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기도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전환과 개혁, 변화의 회개입니다. 여기에 반드시 추가되어야 할 하나의 결정적 요소가 자비의 실천이요 오늘 복음이 가르쳐줍니다. 아주 간단한 처방이나 늘 걸려 넘어지는 자비의 수행입니다.
“1.남을 심판하지 마라. 2.남을 단죄하지 마라. 3.용서하여라. 4.주어라.”
넷입니다. 최종적 심판이나 단죄는 일단 무조건 보류하고, 결론내리지 말고 활짝 열어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경솔한 심판이나 단죄의 죄로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비상한 자비행이 아니라 심판이나 단죄를 하지 않는, 용서하는, 소소한 일상의 평범한 자비행이요 이들이 완덕에 도달한 성인입니다.
마지막 ‘주어라’는 대목도 너무 중요합니다. 인색하지 말고 돈과 물질의 재물을 나누는 자선이 자비행의 결정적 요소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살 때 저절로 축복입니다. 우리는 심판받지 않고, 단죄받지 않고, 용서받고, 하느님은 또 넘치도록 후하게 우리 품에 담아 주십니다.
무지에서 벗어나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길은 오직 기도와 회개, 자비의 실천뿐이요 우리 모두의 평생과제입니다. 말그대로 기도의 여정, 회개의 여정, 자비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런 성공적 인생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아멘.
자비 실천
-아우구스티누스-
자비 실천은 복수심을 없애는 것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것, 이 둘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이 둘을 간단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
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 훈련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한계가 많은 이승에서도, 순결한 미음으로 하느님의 불변하는 실재를 볼 수 있게 합니다. 이 일을 못하도록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뿌리치고 곧장 빛을 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루카 11,41)라고 하셨습니다. 그런즉, 여섯 번째인 다음 단계는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사랑할수록 닮아가는 사랑의 마음
이승화 시몬 신부님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은 그분의 발자취만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동행하는 길입니다. 만약 발자취의 흔적만 찾는다면, 그 흔적에만 빠져 예수님이 보여주시려는 여정의 목적지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타인을 심판하기보다 용서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살아가는 이가 되는 것, 바로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가 맺어지길 바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닮아갑니다. 상대의 사랑을 내 안에 담고, 그 사랑으로 관계를 맺어가며 어느새 사랑의 향기가 내 안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할수록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은 이웃에게 전해집니다. 내가 사랑받은 만큼, 내가 자비를 입은 만큼, 내가 용서를 받은 만큼 나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자비롭게 대하며 용서해줄 수 있습니다. 내가 체험하지 못한 사랑을 전하려하면 자칫 분열과 갈등이 생겨납니다. 선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서로에게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닮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나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소중히 간직한 하느님 사랑의 체험은 무엇인가요?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다니엘은 바빌론 유배시기에 하느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로 활동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유배의 생활로 이어졌다고 한탄하며 고백합니다.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다니 9,5-6)
그것은 이미 다른 예언자들도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며 왕과 지도자들의 잘못된 이런 죄를 지적했는데 다니엘은 하느님께 그들의 잘못을 용서 청하며 자비를 구합니다.
또한 다니엘은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사람 뿐 아니라 유배지의 동포를 포함한 이들의 죄까지도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1) 그리고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대로 심판받고 단죄를 받을 것이라고 하시지요.
어질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은 남을 비판하기보다 먼저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것 또한 사랑에서 나오는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착하고 어질며, 남의 단점을 인내할 수 있는 여백이 있습니다.
이어서 주님의 기도에서도 용서를 청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듯이 주님께서 ‘용서하라’고 하라고 하십니다.2) 사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의도를 갖거나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이웃의 무례나 한 마디 말에도 쉽게 상처도 받고 또 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용과 겸손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이웃을 용서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주님의 오늘 말씀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사는 비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베풀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읽고 그분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참 신앙인이라 하겠습니다. 넉넉한 삶의 모습은 어떤 처지에서든 이웃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가까운 예로 행복한 부부는 서로 받기보다는 서로 베풀려고 노력하는 관계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부부에게서 진정한 행복은 혼자의 노력 보다는 함께 실천할 때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좁은 집에 살 수는 있어도 속이 좁아터진 사람과 사는 것은 어렵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는데, 아무래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과는 충돌하고 함께 오랜 관계를 지속하기는 힘들지요.
신앙에서 그래도 중요한 것은 속이 넓고 자비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게 큰 그릇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 사람이 참다운 신앙인이냐?’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 하나가 ‘편한 사람’. 아니면 ‘따뜻한 사람’이 아닐까요?
물론 여기다가 ‘진실한 사람’도 포함하면 더 좋겠지만, ‘베푸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화와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불편하거나 차가운 사람’은 아무래도 베푸는 것은 없고 자기 가치관에 묶여 인색하거나 부자유스럽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사 전례에서 세 번이나 가슴을 칠 정도로 우리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대들보는 못보고 남의 눈의 티는 보며 따지고 판단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는 먼저 주님 앞에 겸손을 청하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잘못도 살피고 우리의 죄에 대한 회개를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남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접고 대신 그 손으로 우리 자신의 가슴을 세 번 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을 읽다가3)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좋은 말은 진실한 말, 따뜻한 말, 필요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 글을 쓴 저자도 이 말의 출처가 생각나지는 않는데 20여년을 간직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이 말이 하느님의 사랑이 바탕이 될 때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을 말로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인이라도 베풀지 않고 받는 것만을 바라는 사람도 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라는 말을 남깁니다.4)
그리스도교가 ‘은총’이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선행’도 신앙인의 삶에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교회역사에서 베푸는 ‘선행’에도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부족한 가운데 하느님 사랑을 바탕으로 베풀고 나누는 삶을 또한 가르치십니다.
그럴 때 신앙인은 고통 중에서 사랑의 삶을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고 이웃에게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과 함께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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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오잌티르몬 에스틴(οἰκτίρμων ἐστίν)’처럼.”에서 하느님의 본성이 사랑이심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자비와 측은한 마음이 나오신다. 유학(儒學) 사단(四端)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측은하게 생각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롭지 못함과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는 수오지심(羞惡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사양지심(辭讓之心), 그리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있다. 이것은 인간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중에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양보할 줄 아는 마음은 어진 마음(仁)과 연결되는데, 복음은 ‘사랑’을 가리키고 동양의 가르침은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2) 주님께서 ‘심판하지 마라(크리네테 κρίνετε)’. ‘단죄하지 마라(카타디카제테 καταδικάζετε)’. ‘용서하라(아포뤼케헤스테 ἀπολύετε)’라는 말씀을 이어서 하신다. 그래야 그 결과로 ‘심판받지 않고.’ ‘단죄 받지 않으며’. ‘용서 받을 수 있다’고 하신다. 부족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범할 빠져들 들 수 있는 잘못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랑의 참다운 단계에 우리가 이르러야 가능할 것이다.
3) ‘좋은 생각’1월호(2015,48-49): 1992년 8월에 창간된 에세이 전문 월간지.
4) 사도 바오로가 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전에(사도 20,22) 에페소 원로들과 작별하기 전에 했던 말이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에페 20,35)
"용서하여라."(루카 6,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용서의
봄비가
내린다.
용서의
여정안에
나와 너가
있다.
용서는
어렵고
용서는
힘들다.
사람이
누군지를
묻는 은총의
사순시기이다.
불안하고
부족한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의
자비가 더더욱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
관계이다.
너의 용서가
나를 살게한다.
나의 용서가
너를 찾는
은총이 된다.
단죄와 심판은
오늘을 죽인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자신을
보게하신다.
과거에 묶여있는
우리를 십자가로
자유롭게 하신다.
사람의 여정은
용서의 여정을
걸어간다.
용서의 실천이
서로를 살리고
닫혀있는 역사를
가능성의 역사로
바꾸어놓는다.
서로의 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죄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는
십자가의 사순이다.
새로운 삶이란
용서의 삶이다.
용서는
사람을
살린다.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린다.
누간가의
피해자가
누군가의
가해자가 된다.
유한한 삶속에
용서의 여정이
있다.
용서는
어떤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
모든 일상의
시간이다.
하느님의
자비의 순간이며
하느님 용서의
순간이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용서의 오늘이
있다.
용서는
살아있음의
가장 큰
은총이다.
나와 너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다.
사람과 용서
생명과 자비는
언제나 우리를
살게한다.
용서가
아름다운 것은
실천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비로
바로 우리자신이
용서의 가장 큰
수혜자로
살고 있다.
용서와
용서사이에
하느님과 우리
사람이 있다.
요즘에는 코로나19로 인해 가지 못하지만, 그전에는 매주 부모님과 미사를 하기 위해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빵을 사서 가는데, 한번은 빵을 모두 고른 뒤에 계산대에 줄을 서서 제 차례를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계산대 옆에 아주 맛있어 보이는 빵이 있는 것입니다. 얼른 손을 뻗어 빵을 집어서 다른 빵들과 함께 계산했습니다. 만약 제 눈에 이 빵들이 보이지 않았다면, 즉 계산대 옆에 이 빵이 없었다면 사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물건을 구매하러 가게에 들어가서 종종 체험하실 것입니다. 전혀 살 의사가 없었음에도 눈에 띄어서 구매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자신이 생각했던 가격보다 저렴하다면 무조건 손이 가게 될 것입니다.
‘거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주 유혹에 빠지는 것들은 아예 눈에 띄지 않도록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죄를 짓는 유혹 거리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까운 거리에 두어야 할까요?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사랑을 가까운 거리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죄를 멀리하면 주님의 뜻에 맞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남을 심판하지 않는 것, 남을 단죄하지 않는 것, 용서하는 것, 남을 향해 베푸는 것 등이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하시지요. 따라서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심판과 단죄는 멀리하고, 용서와 나눔은 가까이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판단하지 않고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보기에 좋은 모습이지만, 이러한 삶을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험한 이 세상 안에서 지혜롭지 못한 모습처럼 여겨지고, 이렇게 살다 가는 사람들의 이용만 당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주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구한테 받는다는 것일까요? 세상은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수 있지만, 이 사랑의 실천을 보고서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후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은총을 떠올리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일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조지프 애디슨).
내 주변을 바꾸십시오.
비교적 자주 가는 대형 상점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느 곳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그 위치를 대략 알게 되더군요. 지난번에도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서 평상시에 갔던 위치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위치에는 전혀 다른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매장에서의 제품 위치들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대부분의 대형 상점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제품 위치를 바꾼다고 합니다. 실제로 어느 연구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매장의 진열이 바뀔 때마다 7%가량의 판매가 증가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원하는 물건을 찾다가 사려고 하지 않았던 물건을 보게 되고 이런 식으로 구매하는 양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 삶 안에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인의 변화를 원한다면 내 주변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익숙해지면 타성에 젖어서 아무런 진전도 이루어지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리정돈, 재배치만으로도 새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스스로의 변화 7%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주님! 오늘 저는 이웃을 함부로 저울질하지 않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인 자비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오늘 우리에게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부탁하십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복음 6장 36절)
이웃을 향한 자비는 이웃을 비판하지 않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 이웃이 자비를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인지 아닌지 따져보기 시작하면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이미 물 건너 가고 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침마다 눈만 뜨면 주님 앞에 맹세해야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는 이웃을 함부로 저울질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죽었다 깨어나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그를 매일 매 순간 마주 대해야 하는데, 백번 천번 마음 바꿔 먹어도 그에 대해서만큼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데...그러니 예수님의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당부는 참으로 요구성이 큰 요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웃이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범하는 죄나 무례한 행동들은 자비를 실천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두 가지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첫번째 길이 용서하는 것이요, 두번째 길이 주는 것입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 복음 6장 37~38절)
너그러운 용서를 통해 그와 나 사이에 가로막힌 철조망이 제거될 것입니다. 관대한 ‘줌’의 행위를 통해 그와 나 사이에 다리 하나가 놓일 것입니다.
심판관으로서 하느님의 태도는 오늘 우리 각자의 행위에 달려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심판의 결과는 오늘 우리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그에게 주면 하느님께서도 아주 후하게,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축복과 은총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는 한 전원 주택 작은 거실의 벽난로 속에 조심스레 간직해야 할 아슬아슬 작은 불씨가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 자비의 불은 점점 강하게 타오르는 불이며,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이 도시에서 또 다른 도시로 번져가야할 불, 결코 꺼지지 않는 불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온몸으로 충만히 체험한 사람은 자신 안에 하느님 자비의 강렬한 불꽃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 만으로부터 오는 풍요로움과 부유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옹졸하게 앞뒤를 따진다거나 벌벌 떨며 계산기를 두드리지도 않습니다. 인색하지도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터니 그분께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자신에게 넘치는 것이 있다면 아낌없이 이웃들과 나눌줄 압니다.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 안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주는 것은 반드시 되돌아온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국의 어느 제과업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빵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그 제과업자에게는 매일 아침, 버터를 만들어 공급해주는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납품되는 버터를 보니 정량보다 조금 모자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두고 납품된 버터를 저울로 일일이 달아 보았습니다. 예측한 대로 정량에 미달하였습니다. 화가 난 이 업자는 버터를 납품하는 농부에게 변상할 것을 요구하며 법정에 고발했습니다. 농부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관은 농부의 진술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집에는 저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터를 만들어 그 제과업자가 파는 1파운드짜리 빵의 규격에 맞추어 버터를 자르고 포장해서 납품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제과업자가 이익을 남기기 위해 그 1파운드짜리 빵의 양을 줄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이 농부는 줄여서 만들어진 빵에 맞추어서 버터를 만들고 납품을 한 것입니다. 내가 주는 것이 항상 나에게 돌아오는 법입니다.
어떤 사진을 보았습니다. 커다란 도미노 벽 앞에서 어떤 신사가 서 있는 그림입니다. 그 도미노 벽을 밀어 쓰러뜨리면 다른 벽들도 하나씩 쓰러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사의 등 뒤에 있는 벽이 그 도미노의 마지막 벽임은 모르고 있습니다. 내 앞의 도미노 벽을 밀어 쓰러뜨리면 그 도미노들이 쓰러지다 결국엔 그 신사 위로 벽이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내가 내보내는 것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연에게 받는 것은 이미 우리가 자연에게 주었던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자연에게 플라스틱과 공해를 주면 자연은 그 플라스틱을 먹은 생선과 여러 질병을 돌려줍니다. 만약 인간이 자연 때문에 힘들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힘들게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이 악해질수록 자연재해나 질병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주는 대로 되돌려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판단 받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웃을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이 나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도 이웃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하는 것이 곧 내가 무엇을 받고 싶은 것인지를 말해줍니다. 사랑받고 싶다면서 이웃을 미워한다면 하느님 정의에 어긋납니다.
한 여인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 여인은 새로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가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가게의 주인은 자기가 믿는 신이었습니다. 신은 그녀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이 무엇을 파는 가게냐고 묻자 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다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인은 외쳤습니다. “제게 행복과 부, 아름다움과 지혜를 주세요.” 그러자 신은 조용히 웃으며 “미안하네. 여기서는 열매를 팔지 않고, 다만 씨앗을 팔 뿐이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느님은 열매를 주시지 않고 씨앗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씨앗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하는 모든 행동이 내가 선택한 씨앗입니다. 만약 성공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웃을 성공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 마음에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성공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웃을 행복하게 하면 됩니다. 개그맨이 자신이 사람들을 웃기고 나서 무엇을 받을까요? 사람들이 행복한 것을 보고 자신도 행복해합니다.
내가 우울하다면 그것은 내가 누군가를 우울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받고 싶다면 그대로 해주면 됩니다. 내가 구원받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웃에게 하는 것이 내가 거두어들일 열매의 씨앗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끔씩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언제부터 사제가 되고 싶었나요?’ 저는 준비된 답변을 하곤 합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손자 중에 한명은 사제가 되면 좋겠다는 할아버지의 유언이 있었고, 제가 할아버지의 유언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아마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기도하는 분위기에서 자랐고, 성당이 놀이터와 같았으니 자연스럽게 사제가 되는 길에 가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질문을 바꾸어서 ‘왜 사제가 되려고 했나요?’라고 물으면 저의 답변은 달라졌을 겁니다. 신학적인 성찰과 고민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독신, 순명, 신앙고백을 서약하면서 교회의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길을 선택하면서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에는 3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걸 물어보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자주 하였습니다. 비유에 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알아듣도록 설명해 주셨습니다. 내가 아는 걸 가르치기 위한 질문이 있습니다. 불가의 선승들이 이런 질문을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질문을 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상대방을 곤란하게 하는 질문도 있습니다. 질문을 통해서 상대방의 논리와 상대방의 의견이 틀렸음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런 질문은 주로 정치인들의 토론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이런 질문에 명쾌하게 답변을 하고, 예상 밖의 질문을 던지면 상대방은 꼬리를 내리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탁자를 뒤엎고, 상인들을 쫓아낸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기존의 질서와 관습을 허물었습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을 통해서 이익을 챙기고, 권력을 잡았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상당히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질문으로 답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죄를 용서하고, 세례를 주었던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권한입니까? 세상으로부터 온 권한입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온 세례자 요한이라면 요한을 죽인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부터 온 세례자 요한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면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에게 답변하십니다. ‘나도 누구로부터 그런 권한을 받았는지 말하지 않겠습니다.’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오늘의 성서 말씀으로 답변하면 좋겠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오늘 감사송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사순절 단상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마라 용서하라”(루카6,37)
어디서부터 종교가 꼬인 것일까?
교회도 아닌 것이 교회라 하고 종교도 아닌 것이 종교라 한다.
신도들을 빼갔다 하고 신도들을 그곳에서 데리고 왔다 한다.
정통은 이단이라 하고 이단은 정통이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사이비라 한다.
서로를 심판하고 서로를 단죄한다
왜 이렇게 되었나?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라 하신다”(루카6,37)
용서가 뭘까? 곰곰히 생각해 본다.
남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용서하기 전에 주님의 뜻대로 내가 잘 살라는 거다.
내가 잘 살면 죄인도 없어 용서할 필요조차 없다.
자기도 잘못 살면서 심판하다가 단죄하다가 나 외에 남을 교회 밖으로 버렸다
버린 사람이 신흥종교를 차렸다
기성종교에게 한방 먹였다
‘너 맛좀 볼래’ 하는 거였다.
심판과 단죄는 하느님의 영역이고 용서하며 살면 된다.
용서는 남의 잘못을 인정하라는 뜻이 아니고 나를 제대로 답게 잘 살라는 뜻이다.
왜 독버섯이 생겨나겠는가?
종교의 엉킨 실타래를 풀자!
종교가 사회악이 되었으니 용서를 할 자격이 있나 환골탈태 하지 않으면 사이비는 정통행세를 할 것 같다.
용서하라 용서하라
죄인이 내 자리 빼앗고 그 자리 차지했다.
용서는 무슨 용서 내가 먼저 잘 살면 되는거지.
예수님 삶이 없이 모두 똑똑이 되어 심판하고 단죄만 하고 있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끔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며 살아가곤 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상처의 치유는 그냥 잊어버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때 비로소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시며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곧 우리가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고, 용서하며 준만큼 그대로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 될 때 우리는 더더욱 많은 자비를 하느님으로부터 얻게 될 것을 믿습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흔들어서 넘치게 주실 겁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하느님을 닮아가려는 사람들은 행동으로 실천할 때에 사랑받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생각구상 연구계획 추진실천 같은 힘을 주셨습니다.
이런 힘을 세속적 욕망이나 조직에 바치기 또는 내세적 희망에 씁니다.
자유행동이라는 이 힘은 하느님 뜻 따를 때 하느님의 자비를 받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바친 것보다 더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게 주실 겁니다.
세상권력 세속욕심 사이비종교나 조직세력에 힘 다 쓰면 영원낭패지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통한 하느님만이 최종 재판관 이십니다.
하느님가족정신 없이 산다면 개인자유행동 힘 사용결과는 낭패 봅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평생 공부’ -기도와 회개, 사랑의 실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류역사를 보면 전쟁사戰爭史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얼마나 전쟁으로 인해 무고한 많은 사람이, 참으로 잔인하게 죽어갔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 인류가 시작되면서 전쟁이 있었습니다. 참 역설적인 것이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전쟁이 계속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일으킨 2차대전때만 해도 무려 2천만의 아시아인이 죽었습니다.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서는 전쟁은 계속중입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작금의 상태도 흡사 내전 상태를 방불케 합니다.
전쟁은 결국 무지의 두려움에서 기인합니다. 무지의 뿌리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병이자 악이 바로 무지입니다. 참 많이 강론 때 강조했던 무지입니다. 우리의 평생 사랑 공부의 목표도 이런 무지의 치유治癒와 퇴치退治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지식 공부보다는 사람이 되는 사랑 공부가 진짜 공부입니다. 수도자 역시 수도원에 ‘무엇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왔다고 정의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일은 동시에 참 내가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이런 면에서 우리 인생은 ‘사랑의 학교’라 할 수 있습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 카톡으로 주고 받은 덕담德談입니다. 제가 요즘 자주 고마운 분들에게 전하는 아름다운 자연을 통한 축복인사입니다.
-“영춘화迎春化 축복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넘 예뻐요!”
“꽃보다 자매님 마음이 더 예뻐요!”
“너무나 송구스러워요!”-
사실 꽃보다 아름다운 영혼이요 마음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새삼 사랑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끝없는 평생 사랑 공부를 통해 참 나를 깨달아 발견해 가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깨달음을 통해 참 나의 발견이요 무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평생과제를 부여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믿는 이들은 물론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평생과제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자비의 모델이자 목표로 주어진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공부는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많은 분들은 이를 일컬어 ‘예닮의 여정’, 즉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의 여정이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파스카의 예수님은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겠는지요? 이어지는 구체적 처방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을 단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입니다. 주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 고백성사를 주다 보면 가장 많이 고백하는 죄들입니다. 바로 모두 무지에서 비롯한 죄임을 깨닫습니다.
자기를 모르기에 판단하고 단죄하고 용서하지 않고 주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들은 절대 남을 판단하지도 단죄하지도 않습니다. 끊임없이 용서하고 나눕니다. 뒷담화나 남말만 안해도 완덕에 도달한 이들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알 수 있을까요? 겸손히 마음을 열고 배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알아가는 것 역시 평생과정입니다. 하여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가 고마운 것입니다. 공동체 형제들 없이 어디서 사랑을 겸손을 섬김을 배웁니까? 어제 읽은 저명한 수도승간의 대화 내용이 생각납니다.
-“성공은 때로 부패할 수 있다.”
“그렇다. 성공은 언제나 부패한다. 너도 알다시피 공동체 삶은 그에 대한 최고의 치료제治療劑이다.”
“나는 너의 치료제로서의 공동체라는 표현이 좋다. 공주수도생활은 너를 겸허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 공동체는 나를 계속 땅바닥에 닿게 한다. 바로 겸손이다.”-
그렇습니다. 공동체의 축복이 참 큽니다. 자기도취의 환상이나 착각을 깸으로 투명한 현실을 살게 하는 공동체입니다. 교만이나 허영으로 자기도 모르게 위로 오를 때 아래로 끌어내리는 공동체입니다. 또 혼자 있으면 배우지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합니다. 사랑도 섬김도 겸손도 모두가 그렇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하면서 끊임없이 나의 부족함을 자각하면서 보고 배웁니다. 그러니 공동체는 섬김의 배움터, 사랑의 배움터, 겸손의 배움터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다니엘의 회개의 기도가 감동적입니다. 공동체를 대표한 공동체적 회개의 기도입니다. 공동체적 회개의 개인기도가 공동체의 회개와 더불어 공동체는 물론 개인도 동시에 정화하고 성화하며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게 거역하였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바 ‘저희’라는 복수 단어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주어가 ‘우리’인 것처럼 여기서도 개인기도이자 동시에 공동체적 기도임을 봅니다. 새삼 우리가 바치는 공동체적 개인기도인 찬미와 감사, 반성과 회개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 지 깨닫게 됩니다.
공동체는 물론 개인에게도 ‘회개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흡사 항구한 ‘회개의 시스템’과도 같은 공동전례기도가 중심이 된 수도원 일과표입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매일,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수행이 ‘회개의 습관화’와 더불어 하느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하여 무지로부터의 해방을 이루어 줍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사랑의 미사은총이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를 만들어 주고 우리 모두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참 사람, 참 자유인으로 살게 해줍니다. 아멘.
<내 눈길 닿는 곳>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눈길 닿는
첫 자리에 나를
놓아야 해요
그곳에서
만나겠지요
부족한 사람을
죄 많은 사람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요
그 사람
빚으신 분 닮아서
자비로울 수 있고
너그러울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힘 있으니까요
그 사람 만났으니
내 눈길 닿는 곳에서
만난 첫 사람
나와 함께
내 눈길 이제
벗들에게 돌려야지요
벗들을 품기 위해
벗들을 살리기 위해
벗들을 사랑하기 위해
벗들과 함께 하기 위해
벗들을 벗들이게끔 하기 위해
내 눈길 닿는 곳
나이든 벗이든
그 누구에게든
그곳에서 하느님 만나야 해요
사랑과 자비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예수님이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로마 5,5 참조).
특히,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마음(심장)을 우리에게 선물로 선사하시고, 그래서 우리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빨대 쓰면 얼굴 주름 많아져요!
최재영 세례자 요한 신부님
『자연이 보내는 손익계산서』라는 책 읽어보셨는지요? 우리가 눈앞의 이익을 얻기 위해 생태계를 파괴하면 자연이 주는 혜택을 장기적으로 얼마나 많이 잃어버리게 되는지를 실제 사례를 들어 설명한 책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카페가 많아졌습니다. 플라스틱 컵에 담은 음료를 플라스틱 빨대로 쭉쭉 빨아 먹으며 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생태계의 위기에 대해 아무리 경고해도 들리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바꾸어 표현해보면 어떨까요? “빨대 쓰면 입술 주위에 주름이 늘어나요!” 이건 사실이니까요. 생물들이 멸종하다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쓰던 플라스틱 빨대가 입가 주름 느는 데 한몫한다면 안 쓸지도 모르지요. 안타깝게도 인간이 그렇게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잔소리를 좀 하십니다.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예수님께도 “안 그러면 너 간 나빠지고 빨리 늙는다!” 이런 표현을 덧붙이길 권해드리고 싶네요. 더 행복한 길을 가라고 권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루카 6, 36-3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신앙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본질적 신앙을 가르치지 못하고 믿음으로써 세상의 복과 죽어서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으로 믿음을 이끌어가고 있다면 예비자 교육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의 기도문을 외우고 습관적이고 형식적으로 깊은 의미도 모르고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본받고, 주님과 함께 사는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렇게 질문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시며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면 머뭇거립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거룩합니까? 하느님은 진, 선, 미의 근원이시며 하나이시고, 자비로우시고 사랑 자체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을 우리의 존재가 드러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다른 복음에는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하시고 “아버지께서 사랑인 것처럼 사랑이 되어라” 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자비, 일치, 사랑이 따라 살고 실천해야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내는 자녀이며 믿음의 삶입니다. 옛날에 구제품으로 전교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배고프고 입을 것 없을 때 먹을 것 주고 입을 것 주고 하니 성당에 나오는 사람, 또 성당에 나가면 기적을 본다고 생각하고 병든 사람,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은 치유 받아서 해결하려고 성당에 나오고 믿음을 산다고 합니다.
우리 교리는 신학적이고 철학적이며 예문은 옛날 구약의 역사를 들고 이야기하지만 가장 중요한 신앙 교육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어떻게 각 사람을 부르시는지를 알고 그에 적응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하느님 아버지가 거룩하심같이 나도 거룩하게 살아 아버지의 이름을 빛내는 삶입니다. “저 사람들의 진리, 선한 아름다움은 어디서 왔을까?” 바로 하느님의 충만함이 마음을 통해 충만하게 나타남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 부자가 되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섬기고, 나누고, 함께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세례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 직, 사제직, 예언 직을 받았습니다. 거저 믿고 따르는 삶이 아니라 믿는 대로 섬기고, 믿는 대로 나누며, 믿는 대로 함께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은총은 받기 위함이 아니라 받은 것을 나누어 주기 위함입니다.
믿는 사람의 얼굴은 빛나는 모습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상담하러 오시는 분은 대부분 어두운 얼굴을 하고 상담실에 들어옵니다. 용서할 수 없어서, 상처를 씻어내지 못해서, 사랑할 수 없어서, 너무나 짐이 무거워서, 이해받지 못해서, 남보다 잘못 살아서 등 많은 문제를 말하다가 용서하고, 상처를 씻어내고, 사랑하게 되고, 짐을 내려놓으면 얼굴이 광채가 납니다. 그러면 상담은 끝나고 신앙의 깊은 면을 이야기합니다. 결국 하느님 아버지는 나의 모든 것이 됩니다. 믿음의 최종 목적은 하느님이 나의 전부가 되는 것이며, 아버지의 거룩함에 동참하여 하느님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이에게 참믿음이 됩니다. 주님께 감사와 찬미의 삶을 살면서 거룩하게 살 것입니다.
'쿨하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어라.'(루카 6장 36~38)
용서하지 못해 속을 끓이면 위가 쓰리고 아프게 되죠.
잠도 안오고 북적거리는 마음이 더 힘들게 합니다.
은혜는 잊어버리고 안 좋은 기억만 골 깊이 새겨두는 약한 인간인 우리 나를 위해서~ 용서합시다.
용서 못하며 써버린 에너지가 나를 성장하게한 거름이 되어 오늘이 있으니 이제 이해하려고도 하지말고 툭 놔 버립시다.
후하게 쿨하게 복을 빌어주면 끝!!
'쿨하게 말하는 순간 해방'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남을 심판, 단죄 하지 말고 주라고 하신다. 받을 때는 당연한 마음으로 줄 때는 아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모습이다. 그것을 반대로 행하라고 하신다. 나는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 산사에 들어와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땅에 나의 모든 것을 내어 놓는 일이다. 힘들지만 행복한 삶이 덤으로 주어짐을 느낀다. 봄의 소리가 새벽녘 발자욱으로 다가 오면서 몸이 긴장한다. 하지만 시작하면 또 끝이 있다는 생각으로 봄을 준비한다.
"나는 모든 것을 내어 놓았다. 그러니 너도 그렇게 하려무나!" 하고 초대하고 계신다. 기도를 마치고 미사를 봉헌하기 전 제대와 십자가 상 예수님이 마음으로 그냥 들어 온다!
되 키우기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하느님은 자비하시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두렵다. 하느님은 내 마음 안에 계시는 줄 알지만 여전히 먼 곳에 계신 것 같다. 하느님은 모든 걸 다 알려주시고 직접 보여주셨다지만 아직 잘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머리와 가슴 사이라더니 정말이다. 지식과 깨달음이 이렇게 다르다. 그러니 아는 게 아는 게 아니다. 깨달음이 없는 지식은 책장에 먼지 쌓여 있는 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인터넷에 물어보면 그런 지식들은 쏟아져 나온다.
하느님이 여전히 두려운 것은 내가 자비롭지 못하기 때문이고 하느님이 아직도 별나라에 계신 것은 내가 이웃을 경계하기 때문일 거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내가 쓰는 되가 하느님을 담는 그릇이다. 공부하고 연구한다고 하느님을 더 많이 아는 게 아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남의 것이 되고 만다. 코헬렛이 오래전에 이미 말한 것처럼 그런 것들은 바람을 손으로 잡는 것 같다. “그러고 나서 내 손이 이룬 그 모든 위업과 일하면서 애쓴 노고를 돌이켜 보았다. 그러나 보라, 이 모든 것이 바람을 잡는 일. 태양 아래에서는 아무 보람이 없다(코헬렛 2,11).” 그런 것들은 내 영혼의 살과 피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교만만 키워 오히려 하느님과 더 멀어진다. 자비롭고 용서하며 사랑해야 하느님을 알고 그분과 가까워진다. 그래야 내가 풍요롭고 평화롭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 모든 죄를 남김없이 고백할 수 있다.
예수님, 저희가 입으로만 주님을 공경하고 그 마음은 멀리 떠나 있음을(마르 7,6; 이사 29,13)) 아십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심판하고 벌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멀리 떠나있음 자체가 이미 심판이고 벌입니다. 제 안에도 자비 용서 사랑이 있지만 잘 사용하지 않아 익숙하지 않습니다. 사용하다 보면 익숙해지겠고 그러면 제 되도 커질 겁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서툴러도 용기 내어 해보게 도와주소서.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군가를 경쟁과 제거의 목표로 삼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며, 누군가에게 복수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활력소를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식을 가진 부모님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가 잘 되기만을 바라고, 누군가가 잘 되는 것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우리가 마주보고 있는 그 누군가는 하나일 터인데, 그 누군가에게서는 원망을 받고 그 누군가에게는 사랑을 받고 삽니다. 자기 하기 나름과도 연관되겠지만, 나와의 상관관계와 관계없이, 주 하느님처럼 나를 용서해 주고 지지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고, 나도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다시
봄(春)입니다.
돌고돌아
다시 돌아가고
돌아오는
우리들 삶입니다.
큰소리 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죄도 심판도
용서도 돌고돌아
고스란히
우리들에게
돌아옵니다.
삶이란 선물앞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언제나
단죄가 아닌
자기성찰입니다.
나를 알아야
너와 우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말이 앞서지 않는
올바른 실천은
단죄를 멈추는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닮고 비판하면서
그 길을 똑같이
답습합니다.
인간이란 존재를
다시금 아프게
묻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나와 너
우리들 모습입니다.
새로운 변화는
단죄와
심판이 아닌
건강한 믿음입니다.
내어주는 사랑
너그러운 자비
따뜻한 미소가
이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는 기쁨의
치유제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죄가 아닌
심판이 아닌
복수가 아닌
사랑으로 이 오늘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보는
은총의 아픈
사순입니다.
너무나 사랑하고 아끼는 애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애인에 대해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말을 누군가가 한다면 어떨까요? 기분이 결코 좋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이야기를 한 사람을 향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전혀 그렇지 않다면서 적극적으로 해명하게 됩니다.
이렇게 변호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말을 쏟아낸다면 어떨까요? 그때에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애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의 말을 인정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내게 말해준 그 사람이 정말로 나쁜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서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정말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다른 이들이 어떻게 말한다고 해도 그 사랑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부정적인 말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자기 이성 친구와 기회가 되면 헤어지려고 마음먹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이성 친구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조심스럽게 합니다. 이때에는 어떨까요? 앞선 사람처럼 철저하게 이성 친구에 대한 변호를 적극적으로 하게 될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공감하면서 이런 말을 해줘서 너무나 고맙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할 것입니다. 헤어지는 정당성을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다른 이들의 말이 더 크게 들릴 때에는 사랑하지 않을 때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말을 크게 듣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듣고 바라보기 때문에 굳이 남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대신 계속해서 주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줌으로 인해서 더 큰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 안에 사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해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심판도, 또 단죄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대신 용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우리이기에, 하느님 당신의 모습과 거룩한 형상이 우리 안에 남겨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들 안에서 그 거룩한 형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와 자비는 주님한테서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한테서 나오는 이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연히 세상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세상의 말이 크게 들리지 않고 대신 주님의 사랑의 말씀만이 내 마음 안에서 크게 들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작고,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인간의 단위는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다. 이 영혼들의 그물망으로부터 사회와, 관계와, 인간의 삶이 생겨난다(토니 쿠슈너).
인생, 내려가는 일?
오십이 되었다는 말에 어떤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도 이제 인생 내려가는 일만 남았네요.”
이런 말을 들으니 ‘정말로 내려가는 인생일까?’라는 씁쓸한 기분과 함께 우울합니다. 그런데 새롭게 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일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 모습이 사람들에게도 좋게 보였는지, “신부님! 굉장히 좋아 보여요.”라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이 들었다 싶으면 얼른 새로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이를 잊고 좋은 힘으로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하긴 최고령 현역 모델로 기네스북에 오른 올해 89세인 카르멘 델로피체는 이렇게 말했지요.
“나이가 들어서 열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열정이 사라져서 나이가 드는 것입니다.”
흘러 넘치도록 주님 자비를 받은 여러분, 자비의 사도가 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제가 피정 중에 제 인생을 깊이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불현듯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떠오르더군요.
‘내 인생, 어쩌면 이렇게 꼬이고 꼬였는가? 왜 이다지도 부끄럽게 살아가고 있는가? 행동 하나 하나 왜 이렇게 한심한가? 왜 나는 오늘도 수십년 전의 악습을 아직도 되풀이하고 있는가?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다. 이런 나를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나 같은 사람에게도 구원은 가능한가?’
그런데 열심히 피정한 결과였던지, 피정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런 생각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 계기는? 그간 제가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하느님 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난 시점부터였습니다.
오랜 세월 저는 하느님을 정의로우신 분, 심판하시고 벌주시는 분으로 여겨왔습니다. 나같은 하찮은 인간, 대죄인과는 상종조차 하지 않으시는 분, 가까이하기에 너무나 먼 당신으로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피정 기간 내내, 마음 독하게 먹고, 성경을 읽고 또 읽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다보니, ‘그게 아니었구나.’ ‘내가 하느님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하는 깨달음이 다가오더군요.
신구약성경 전체는 자비하신 하느님 사랑의 역사를 엮은 책입니다.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루카 복음서 안에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손에 잡힐 듯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를 천천히 읽고 묵상하다보면 우리 죄인들을 따뜻이 어루만지시는 하느님의 뜨거운 자비의 손길을 생생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 죽었던 과부의 외아들을 소생시키는 장면, 죄많은 여인을 용서하시는 장면, 안식일에 등굽은 여인을 치유하시는 장면, 되찾은 아들의 비유, 자캐오와 친구를 맺는 장면...한 대목 한 대목 읽다보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지를 온 몸과 마음으로 절절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가장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확신에 찬 강한 어조로 우리를 자비의 사도가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주실 것이다.”(루카 복음 6장 36절, 38절)
언젠가 우리 모두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 대전에 나아갈텐데, 그 때 거기 가서 깜짝 놀랄 일 세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번째 놀랄 일은? 이 점 때문에 늘 불안했었는데, 늘 노심초사했었는데, 늘 걱정했었는데, 늘 그게 가능할까 했었는데, 내가 딱 천국에 와있다는 것, 그것 때문에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두번째 놀랄 일은? 그 동안 신부님들이나 수녀님들, 교리교사들을 통해서 천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대단한 곳인지는 잘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막상 와보니 그런 설명보다 몇 천배, 몇 만배 더 아름답고, 더 황홀하고, 더 장관이어서 또 깜짝 놀란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놀랄 일은? 천국에 오게 된 기쁜 마음을 겨우 달래며, 천국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몇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상식선에서 여기 와서는 도저히 안될 ‘그분들’이 떡하니 와계셔서, 또 깜짝 놀란다는 것입니다.
평생토록 괴롭혔던 시어머님도 와계시고,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그 돈을 떼먹고 달아난 막달레나씨도 거기 와 계시고, 악연 중의 악연이었던 직장 상사도 거기 와 계시고...
농담같지만 진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자비는 큽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한 개인의 구원도 중요시 여기지만, 공동체적 구원도 크게 강조합니다.
함께 동고동락하며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미운 정 고운정 다 들었던 사람들, 우리 모두 나약한 존재들이기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받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다 제외되고 나만 딱 천국에 와있으면, 그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자비하신 하느님 눈에는 나도 구원의 대상이지만, 지지리도 못나 보이고, 결점 투성이인 이웃들, 달라도 너무나 다른 그들도 구원의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도 나와 너무나 다른 그들을 위해 기도하려는 노력, 그들과 화해하려는 노력, 그들과 다시 한번 새롭게 시작하려는 노력을 되풀이해야겠습니다.
부활 신앙이 나를 더 자비롭게 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그의 아버지는 살아생전 보물처럼 노트를 쓰곤 하였습니다. 다른 일엔 일체 비밀이 없으셨지만 오직 노트에 대해서는 함구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노트를 펴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노트에 적힌 것은 가족들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이름이었습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생각했던 그는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아버지의 노트를 보고 있구나.”
그의 모습을 본 어머니가 그에게 다가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이 노트를 아세요?”
어머니는 그 노트를 들고 한장 한장씩 넘기면서 추억에 잠기시는 듯 했습니다.
“이건 너희 아버지의 기도 노트란다. 매일 밤 한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며 조용히 기도를 올리곤 하셨지.”
청년은 다시 낯선 이름들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분들은 누구신가요?”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신 분들이란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위해 꾸준히 기도한다면 용서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용서가 안 된다는 말은 핑계일 뿐입니다. 고정원씨는 자신의 일가족을 모두 살해한 유영철도 용서하였습니다. 용서는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고, 하려고 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하려고 하는지, 하지 않으려고 하는지는 그 행위를 통한 나의 이익에 달려있습니다. 사람은 각자가 이익을 남기려는 목적으로 행위를 합니다. 자녀를 낳는 고통도 자녀를 낳음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이 더 크지 않다면 감수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 근본적인 이기주의자입니다. 어떤 누구도 이것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결국 십자가를 지러 오신 것이 당신의 행복 때문이었습니다. 하늘나라에 편하게 계시며 인간이 지옥에 가는 것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워 당신이 차리라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음식을 해 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식이 굶는 것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힘들지만 음식을 해주는 것이 자신에게 더 행복하기 때문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너만을 위해 평생을 살았어.”라는 말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누구나 다 자신을 위해 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도 마찬가지 이유로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용서도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이지 타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안 하는 이유는 용서를 안 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큰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함으로써 오는 자만심이 자신을 즐겁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말하면 실제로는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이 정말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고정원씨처럼 밤새 원수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하려면 먼저 그 용서가 더 나에게 더 큰 이득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부활신앙이란 십자가의 희생만이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결국 더 큰 행복을 위한 투자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자비란 ‘심판하지 않는 것’, ‘용서하는 것’, 그리고 ‘주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심판하지 않아야 심판받지 않고, 용서해야 용서 받으며, 주어야 더 많이 받는다는 말씀을 뒤에 꼭 붙이십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십자가를 지면 부활은 반드시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이 부활신앙이 우리를 투자하게 만듭니다. 더 큰 이득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면 더 많이 주신다는 믿음이 생긴다면 십일조를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비롭다고 해서 절대 손해 보는 일이 없다는 믿음이 더 자신을 자비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물물은 퍼내야 새롭게 차게 되어있습니다. 자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엄청난 자비와 사람들로부터 오는 자비를 원한다면 나도 자비에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주에 있었던 일입니다. 피정을 마치고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맛있게 먹고 나오는데 묵주와 묵주 주머니가 없었습니다. 묵주를 찾고 있는데 스마트 폰도 없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묵주는 15년 동안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녀님께서 제게 주신 묵주였습니다. 스마트 폰이 없는 것이 생각나면서 묵주를 찾으려는 마음보다는 스마트 폰을 찾고 싶은 마음이 앞섰습니다. 스마트 폰에 여러 정보가 있고, 스마트 폰이 없으면 생활에 불편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묵주기도를 하는 시간보다 스마트 폰을 보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묵주와 스마트 폰은 피정하던 방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묵주를 찾은 것도 기뻤지만 스마트 폰을 찾은 것이 더 기뻤습니다.
저를 위해서 늘 기도해 주시는 작은 아버님이 며칠 전에 보내준 문자가 생각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힘들 때 포기하는 것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힘들 때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딱 들어맞는 것은, 열쇠와 자물쇠밖에 없습니다. 서로 조금씩 맞추며 사는 것이, 가장 쉬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무거운 짐입니다. 악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은 결코 살아서 선을 볼 수 없습니다. 성난 말에 성난 말로 대꾸하지 마십시오. 말다툼은 언제나 두 번째의 성난 말에서 비롯됩니다. 의인 이란 향나무처럼 자기를 찍는 도끼에도 향을 뿜는 사람입니다.” 신앙에서는 15년 동안 함께 했던 묵주가 더 소중한 것입니다. 제가 힘들 때 저와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스마트 폰이 더 중요했습니다. 세상과 연결해 주는 통로였고, 이웃과 연결해 주는 통로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비움’을 이야기 합니다. 욕망과 욕심을 내려놓으면 사람이 보인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 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나옹 선사의 가르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내 눈길 닿는 곳>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눈길 닿는
첫 자리에 나를
놓아야 해요
그곳에서
만나겠지요
부족한 사람을
죄 많은 사람을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요
그 사람
빚으신 분 닮아서
자비로울 수 있고
너그러울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힘 있으니까요
그 사람 만났으니
내 눈길 닿는 곳에서
만난 첫 사람
나와 함께
내 눈길 이제
벗들에게 돌려야지요
벗들을 품기 위해
벗들을 살리기 위해
벗들을 사랑하기 위해
벗들과 함께 하기 위해
벗들을 벗들이게끔 하기 위해
내 눈길 닿는 곳
나이든 벗이든
그 누구에게든
그곳에서 하느님 만나야 해요.
모세와 그리스도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예비자 교리’에서(Cat. 3,24-27: SCh 50,165-167)
유다인들은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유다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보았던 기적들보다 더 크고 더 영광스러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파라오와 그의 군대들이 익사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악마와 그 군대들이 물에 삼켜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다인들은 바다를 통과했고 여러분은 죽음을 통과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의 지배에서 해방되었고 여러분은 악마의 지배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외국의 멍에를 벗어 던졌고 여러분은 훨씬 더 비참한 죄악의 노예 상태를 벗어 던졌습니다.
여러분들이 영광스럽게도 그들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유다인들은 동료 노예였고 한 민족이었던 모세의 변모된 영광스러운 모습을 직접 바라볼 수 없었지만, 여러분은 영광에 싸인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오로는 “우리가 주님 얼굴의 영광을 직접 보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시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은 모세의 은혜를 통하여 주님과 함께 걸었지만 이제 여러분은 모세의 은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순종을 통해서 주님과 함께 걷습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이집트 다음에 사막이 있었지만 여러분에게는 여정이 끝나면 하늘 나라가 있습니다. 그들의 안내자와 위대한 지도자는 모세였고 이제 우리의 안내자와 위대한 지도자는 다른 모세 곧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옛적에 모세의 특징은 무엇이었습니까? 성서가 말하는 것과 같이 “모세는 땅 위에 사는 사람 가운데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모세에 대해서도 같은 특징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그분과 같은 본성을 지니신 감미로운 성령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때 모세는 하늘로 향해 손을 쳐들어 천사들의 빵인 만나를 내리게 했습니다. 우리의 모세께서는 당신 손을 하늘로 쳐드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양식을 가져다 주십니다. 옛 모세는 바위를 쳐서 물을 흐르게 하였고 이분은 영적인 식탁을 쳐서 성령의 물을 흐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 식탁은 한가운데 있는 어떤 샘과 같습니다. 흩어져 있는 양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그 샘에서 구원의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은총으로 넘쳐흐르는 이와 같은 풍성한 생명의 샘을 가지고 있으며 또 갖가지 은총으로 넘치는 식탁을 가지고 있으므로, 알맞은 때에 우리를 도와줄 은총과 자비를 받기 위해 진실한 마음과 순수한 양심을 가지고 그리로 나아갑시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시고 구세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비를 통하여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함께 성부께 영광과 영예와 권세가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자비’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 또는 그렇게 여겨서 베푸는 혜택.
‘자비’는 내가 잘못하여 죽어야 마땅한데 누군가 나를 대신하여 베푸는 혜택을 말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
이는 남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겨 베풀어 살게하는 혜택이며, 이는 곧 ‘자비’이다
눈여겨 보아라. 주님께서 심판하시고 단죄하시고 용서하시고, 어떻게 당신을 내어 주셨는가를, 당산께서 몸소 이를 행하셨나를 제자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심이다.
제자들아 너희도 자비로운자 되어 살라 이르신다. 그렇게 살면 주님께서 너희에게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
KBS2TV 주말 드라마 ‘하나뿐인 내편’이 종영되었다. 시종일관 끝장이란 비난 속에 마지막까지 시청자들에게 인기몰이를 더했다. 사랑과 용서는 인간관계의 끝장을 풀어 준다. 모두가 주인공에게 미움과 증오로 단죄하며 끝장으로 끌고 가지만 주인공의 사랑은 자비가 되어 모두가 생명으로 살아났다.
‘자비’는 ‘은혜’와 버금간다. 우리는 주님이시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 하느님, 예수님께로부터 ‘은혜’ 와 ‘자비’를 힘입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오늘 따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신 말씀을 살고 싶다.
하늘의 법은 기본이 사랑인데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세상심판과 하늘심판에서 세상심판의 규준이나 그 원천은 무엇입니까.
악에 대한 세상심판의 최고 결과는 죽음이고 하늘심판은 지옥입니다.
세상의 법이 정당화 되려면 하늘심판에 규준과 원천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 법은 사람이 정하는데 그 사람이 하늘을 모르니 틀릴 수밖에요.
하늘무시하고 정한 법들은 북한엔 물론 남한도 근원적인 것 많습니다.
세상법이 감히 하늘 초대받은 운명 재천 목숨을 좌우하는 것들부터죠.
하늘의 법은 기본이 사랑인데 세상은 보복하는 것이 진리인줄 압니다.
용서와 사랑으로 평화 맛보며 사는 원리 알리려면 선교가 시급합니다.
자비로운 사랑
노우재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복음 6장 36-38절)
하느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십니다. 불쌍한 이들을 보며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가련한 이들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비로운 사랑입니다. 자비는 죄인들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죄는 고통을 가져옵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이웃에게 고통을 줍니다. 죄 짓는 순간에는 의식 못해도, 내 죄는 먼저 나를 피폐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이 내게 죄를 지으면 나는 고통스러워집니다. 세상도 죄를 짓습니다. 불의한 사회는 선량한 이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죄와 고통에 짓눌려 있습니다. 죄를 지으며 고통을 주고, 죄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습니다.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나 보이려고, 아무 문제없어 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숨기고 서로 피하려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도 잘난 모습만 보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느님을 멀리하려 듭니다. 어리석은 짓입니다.
나는 나의 비참함을 가지고 자비로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비참함에 가장 민감하십니다. 심판하고 단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십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십니다. 그분을 만나면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이웃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이가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그 얼굴, 그 이름, 그 말'(루카 6장 36~38)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너희가 용서하면 용서받고 너희가 되질하는대로 받을 것이다
이해를 하려고 밤잠을 설치며 애를 써도 이해가 안되면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수학 문제를 풀듯 이해를 용서에 적용시킬 것이 아닙니다
내게 상처 준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고 사는것이 쉬운 사람은 없습니다
피하고 싶고 피하게 되고 그러다 우연히 부딪치면 애써 견디던 마음이 무너져 순식간에 그늘이 드리워지게 됩니다
그 얼굴, 그 이름, 그 말이 다시 생각나서 아파하고 눈물 흘리고 가슴 답답한 날들 그 날들을 억지로 제거하려 하지 말고 고난받은 예수님처럼 견디어 내다보면 특별한 은총이 주어집니다
용서가 쉽지 않다는걸 알게 되고 용서를 하게 되는 날이 오고 그 얼굴을 봐도 편안하게 웃는 날을 맞이하게 되니, 내가 잘못 했을때 고개 숙이는 것과 용서를 청하는 것의 깊이 또한 달라집니다
나를 넘어뜨린 사람이 있었기에 오늘 내가 있게 되었고 고맙습니다
지난 일이 내게 은총이 되었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 36)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축복 가득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루카 6, 36~38)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 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자비롭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에게는 누군가 잘못이 있다해도 그 사람에게 가서는 용서받을 수 있고 또 나의 약점과 단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잘 이해해 주실 분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은 우리가 잘못을 하더라도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한 두 번만의 용서가 아니라 무한정 언제든지 우리가 회개만 한다면 용서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비롭다고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주님 앞에 갈 때, 많은 부족함과 단점과 실수들을 가지고 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다가설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또 새롭게 살도록 격려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비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도록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6, 38~38)에 보면, 자비를 닮는 방법이 여러 가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는 일, 남을 단죄하지 않는 일, 용서하는 일, 그리고 남에게 베푸는 일, 이런 일들을 잘 한다면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화 될 것입니다.
첫째,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루카 6, 37)
내가 남을 심판한다는 것은 나의 어떤 기준을 가지고 그 사람의 잘잘못을 나름대로 저울질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그 사람도 어떤 정당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심판은 잘못 될 수도 있고 또 그 사람의 상황과 처지를 알았다면 판단을 바꿀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남을 심판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두번 째로 남을 단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루카 6, 37)
단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의 기준으로 "그 사람은 잘못한 일을 한 것이다" 라고 간주함으로써, 그 사람의 상황과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판단기준으로 그 사람을 죄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그러한 죄를 저질은 배경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단죄하지 않고, 오직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용서하라고 했습니다.(루카 6, 37)
용서한다는 것은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을 했다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감당하고 그 사람의 실수와 나를 괴롭힌 것에 대해서 그 사람이 용서를 청하고 회개한다면 기꺼이 용서를 베풀 때, 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닮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주라고 했습니다. (루카 6, 38)
준다고 하는 것은 베푸는 것이죠. 베푼다는 것은 자비로운 일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지만, 그 사람의 처지를 보면서 나누고 베풀 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자비로운 일입니다. 나눔에는 물질의 나눔, 시간의 나눔, 마음의 나눔, 그 밖에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일, 이런 것도 나눔이라고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일들, 즉 남을 심판 하지 않는 일, 남을 단죄하지 않는 일, 그리고 용서하는 일, 베푸는 일, 이것들을 생활 중에 잘 실천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닮는 사람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오늘 복음에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 나는 어떻게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누가 참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인가? -자비로운 사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 저녁 성체강복후 퇴장시 성가 445장이 새삼스런 감동이었습니다. 들을 때 마다 떠오르는 꼭 30년전 1989년 7월 11일 베네딕도 성인 대축일, 왜관 수도원 성전에서 사제서품식 미사시 입당성가 445장입니다. 이 성가를 들으며 입장할 때의 감동과 눈물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합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그분만을 따릅니다.”-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예수님만을 따랐는지 반성할 뿐 아니라 죽는 그날까지 그분을 충실히, 항구히 따르겠다는 자각과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라' 하셨지, '나를 믿으라', '나를 사랑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지, 결코 ‘내가 너희를 사랑할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참으로 사랑하고 신뢰했던 수제자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씩 확인하신 다음 이어지는 신신당부는 ‘내 양들을 돌보라, 사랑하라.’는 당부였고 최종 명령은 ‘너는 나를 따라라.’ 였습니다. 바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따르라, 서로 사랑하라.' 교회공동체에, 수도수도공동체에 부름 받은 우리들입니다. 새삼 교회공동체는, 수도공동체는 사랑의 학교임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고 섬기라 불러주신 사랑의 학교라는 것입니다.
아니 종파를 초월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회 전체 역시 사랑의 학교라 칭하고 싶습니다. 알든 모르는, 의식하든 못하든 모두가 하느님 사랑의 학교에 몸담고 있는 학생들이라는 것입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에 평생 재학생인 우리들입니다.
꽃의 색깔, 향기, 모양, 크기가 다 다르듯 사람마다 사랑의 색깔도, 향기도, 모양도, 크기도 각양각색임을 깨닫습니다. 참 신비롭고 깊은 것이 똑같은 사랑이지만 색깔, 향기, 모양, 크기는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랑의 신비'입니다. 하나의 햇빛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일곱가지 색깔로 드러나는 무지개 현상과도 흡사합니다.
고백상담실이자 집무실의 낡고 고장난 커텐을 멋있는 새 커텐으로 교체해준 수도형제의 형제애가 고마웠습니다. 소임의 사랑 실천에 충실한 모습도 참 아름답습니다. 수도원 게시판에 붙은 ‘집안 관리 및 수선 요청서’에 보면 수선 요청시 수리되어 결과를 나타내는 ‘OK’라는 처리 내용을 볼 때 마다 기분이 좋습니다. 아마 수년간 처리가 끝나 뗐다 붙인 신청서를 모은다면 수백장은 될 것입니다.
집안 관리 소임 형제는 물론이고 각자 소임지에서 자기 소임의 책임을 다함으로 주님을 따르는 수도형제들입니다. 주님 사랑의 표현이, 형제 사랑의 표현이, 주님 따름의 표현이 바로 맡은 바 소임의 책임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공동체의 아름다움입니다. 바로 이 사랑의 학교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랑과 섬김의 모범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말씀하신 예수님이 바로 그 자비의 모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자비 실천을 구체화합니다. 결코 추상명사의 애매한 사랑이 아니라 형제공동체에서 구체적 실천의 동사인 사랑입니다.
“1.남을 심판하지 마라, 2.남을 단죄하지 마라, 3.용서하여라, 4.주어라.”
바로 이런 이들이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은 자비로운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자비를 실천할 때 하느님은 물론 사람들로부터도 심판받지 않고 단죄받지 않고 용서받으며 넘치도록 후하게 받습니다. 참으로 이런 사랑 실천을 위한 기도와 회개가 필수적으로 전제됨을 깨닫습니다. 바로 그 모범이 제1독서의 다니엘 예언자입니다. 다니엘 예언자의 진정성 넘치는 기도와 회개가 감동적입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베푸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이 가득합니다. 주님, 저희 얼굴에 부끄러움이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참 아름다운 기도요 회개입니다. 이렇게 참으로 기도하고 회개할 때 회복되는 사랑이요, 이런 사랑은 주님 사랑과 형제애의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어제 보속으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란 시를 읽은 수녀님 두 분의 이구동성의 고백, “아름답다!”는 반응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은총의 사순시기 기도와 회개, 그리고 항구하고도 충실한 주님 사랑과 형제애의 실천으로 참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시집살이를 심하게 한 사람일수록 더 며느리에게 심하게 시집살이를 시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생각 같아서는 힘겹게 살아왔다면 다른 이들에게 더 너그럽고 양해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실제로는 안 그런가 봅니다. 마치 보상을 받듯이, 복수를 하듯이, 더 혹독하게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이도 있는가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해해주고 믿어주고 지지해주며, 이끌어주고 함께하며 밀어주면, 상대에 따라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배반을 당한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가운데에서는 자비로운 주 하느님을 조금이라도 닮는 것 같아서 기쁘고 평안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나?
곽승룡 비오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자비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속성을 말한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자비 용어들이 존재하는데, 먼저 여성적인 자비는 히브리말로 라하밈(Rahamim)인데 어원은 ‘자궁’을 말한다. 인간의 모든 존재는 어머니 품 곧 아기주머니(Rahamim) 속에서 10개월을 지낸다. 그러므로 자비는 생명을 품어 안는 것을 말한다.
또한 히브리말에서 남성적인 의미를 말하는 자비가 헤세드(hesed)인데, 그 뜻은 책임감을 말한다. 헤세드(hesed)는 남성이 지켜야 하는 책임인데, 집안의 가장이 다하는 책무로서의 자비다.
이처럼 아버지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은 상대를 품어주는 포옹, 상대를 위하는 책임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도 생명을 넉넉하게 안아주는 행위를 하고, 상대방을 위해 책임질 것을 다하는 것이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를 실천하는 것인 듯싶다.
그래서일까 자비로운 사람은 그 마음이 상대방을 위해 세밀히 배려하는 자일 텐데, 상대방의 감정이나 태도에 민감한 분이고 자상한 사람인 듯싶다.
또한 예를 들어 자비로운 사람은 가난한 자를 도우려는 사람이고, 고통 속에 있는 자를 위로하고 그들의 억울함과 원의를 들어주는 자이다.
또 엄마가 늙고 걷지도 못하며, 병 들어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면 마음이 힐링된다. 엄마는 나를 엄마의 몸(라하밈) 속에서 10개월을 그리고 육아를 하면서 당신 가슴에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것처럼, 나도 엄마를 내 마음으로 안아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듯싶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비로운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바로 마음공부를 하면서 마음수련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마음을 챙기고, 알아차려야 한다. 그러면 마음은 어떤 곳 일까. 마음은 감성들의 상징적 공간이고 느낌들의 집이다. 또한 성경에서 마음은 모든 내적 생활과 연관되어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루카6,37)
현실에서 우리는 심판하는 말을 참으로 많이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르다”는 표현보다 “틀리다”하는 말을 적지 않게 한다. 그래서 “맛이 틀리네요”를 “맛이 다르네요” 하면 어떨까. 기도할 때도 우리는 “주님, 제가 교만했어요.”라고 표현하기보다 “주님! 제가 말을 많이 했어요.”라고 사실과 펙트를 말하면 어떨까. 자신이 생활하며 만나는 분야에서 펙트와 사실 또는 진실을 표현하면 어떨까. 이를 위해 먼저 나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하기를 시작하면 어떨까. 그러면 이웃을 위해서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는 세상<루카,6/36-3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은 세상을 보기 좋게 만드시고 악을 모르시는 분이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눈을 지니고 세상을 보면 원수는 있을 수 없지만 인간의 눈은 편견 차별 온갖 욕망 등 죄와 관련 된 눈으로 세상을 보면 미운 사람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 죄를 지은 사람 등 많은 사람을 판단하여 바른 세상을 만드려고 하지만 그 판단이 더 나쁜 세상을 만들고 더 큰 재앙을 만들어 냅니다.
원수 관계가 잘못 판단으로 생길 수 있고 별거 아닌 것이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행동하나 말하나 실수나 오해로 일어 날수 있어 우선은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고 용서 할 수 없다는 것을 용서 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무리를 보고 “ 아버지 저들이 하는 바를 저들이 모르니 용서해 주세요 ” 하였듯이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아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불란서에서 혁명이 일어나 서로 죽기고 죽게 될 때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죄인을 처형시키려 단두대를 만든 사람이 후에 자기가 단두대에 목이 잘려 죽게된 사연입니다. 원수 맺어 해치려는 사람이 파 놓은 웅덩이에 자기가 빠지는 일도 있습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더 큰 재앙을 불러옵니다.
주의 기도문은 저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 하듯이 하느님의 용서를 바라는 기도는 바로 우리의 눈은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형제를 보고 원수 같은 사람을 보아야 한다는 하느님의 깊은 뜻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잘 내는 사람 적은 일에도 회를 내는 사람 신경질 부리는 사람 짜증을 잘 내는 사람입니다.
진복팔단에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고 하셨듯이 온유한사람이 세상을 다스리고 모든 사라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남편과의 불화 불편을 이야기 하면서 모살겠다고 말하시기에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자기도 회를 내고 대들고 짜증을 내였다고 하면서 내 탓 입니다. 하는 말로 상담은 해결되어 평화로이 가정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오래전에 이혼한 남편이 밉고 저주스러워 밤잠을 설치고 우울증에 걸려 고생하기에 그 병을 곤치는 방법은 그 남편을 용서하고 사랑하면 낳는 병이라고 하여 원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서 사랑하라 하였든니 얼마 후 모든 병이 다 치유 받았다고 소식이 왔습니다.
저는 아침이며 일어나기 전 눈과 입과 귀에 십자가를 놓으며 하느님의 눈으로 하느님의 귀로 하느님의 입으로 말 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며 일어나 하루 생활 속에 늘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도록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모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눈을 가지고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기도합니다.
오, 사랑은 새싹이다.
최민석 신부님
추운 겨울의 끝자락 3월 중순이다. 꽁꽁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온 새싹들의 소리가 들린다. 대지의 심장 뛰는 소리다. 마음 한 가운데 차가운 곳에서 고개를 드는 따뜻한 봄의 소리 가슴을 따뜻 수 있을까. 흙을 뚫고 쑥 올라오고 있는 저것 새싹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고 삼월은 봄을 불러내고 있다.
내가 그 새싹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새싹이 아니라 마른 잎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날 다시 보았을 때 그것은 마른 잎 가운데 솟아나는 파란 새순은 새싹이상이다. 한 송이 푸른 꽃으로 보인다. 마른 잎의 들풀은 나의 산책길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던 친구다. 지금 여기 저기 쑥쑥 피어오르는 새싹은 내 영혼을 만져주는 영혼의 친구다. 그 위로가 자유와 평화 그리고 은혜로 온 몸을 따뜻하게 한다.
다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봄에 누군가가 까닭 없이 그리워지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친구들을 만나 온 세상이 떠나가도록 웃어나 볼까나 이 봄엔 누구에게나 따뜻한 마음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대가 만약 끝내 사랑한다 말하지 않으면 그대 가슴에 하늘 꽃이라도 되어 피어나고 싶다.
봄이 되니 산과 들 그리고 강변에 파릇파릇 새순 올라오는 것이 너무 너무 앙증스럽다. 새순은 아무데나 고개 내밀지 않는다. 햇살이 데운 자리 이슬이 닦은 자리 세상에서 가장 맑고 따뜻한 자리만 골라 한 알 진주로 돋아난다. 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푸르고 붉은 새싹들, 꽃과 풀과 나무의 여린 새싹들. 아이들의 손 같다. 새싹들의 손 마주잡아 인사 나누고 싶어진다.
지나는 산책길에서 만나는 새싹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게 보인다. 쑥쑥 자란다는 쑥도 여기저기 얼굴을 내민다. 봄비도 내렸는데 잎 새도 꽃잎도 예쁘게 피워 올려서 생명 주신 하느님께 보답 하려나보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듯, 봄이 오고 햇살이 밝아지면 따스한 기운이 가슴에 밀려온다. 지그시 눈을 감으니 울컥 눈물이 난다.
오늘 따라 까닭 없이 눈물이 난다. 살아있음의 행복이 이런 것인가. 햇빛 아래 새순 돋는 것 보니 눈물이 난다. 멀리서 들리는 낮은 새들의 소리가 들린다. 문득 흘러간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아, 사랑은 타버린 불꽃, 아아, 사랑은 한 줄기 바람인 것을, 아아, 까맣게 잊으려 해도, 왜 나는 너를 잊지 못 하나, 오 내 사랑, 내 사랑, 오 내 사랑 영원토록, 못 잊어, 못 잊어.”
살아 갈수록, 살아갈수록 지금 여기 살아있는 축복이 온 몸으로 다가온다. 먹빛 서러운 나날이 있기도 했었다. 얼음 같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때가 있었다. 밤마다 눈물 글썽이며 별들을 헤아리며 몇 날을 보내기도 했다. 나의 인생이 온통 안개로 다가왔고 날마다 언 입술 갖다 댄 햇살이 홀로 가슴앓이 하던 날 껴안아 주시던 긴긴 기나긴 겨울을 견디던 날 그 날들이 지나갔다.
이제 새 생명 노래를 부를 때가 되었다고 말한 것 같다. 파릇파릇한 풀들이 고갤 내민 사랑, 그 따사로움에 돌아누울 수 없다. 기인 하품하며 기지개 켜고 낮과 밤 한치 앞을 볼 수 없지만 그냥 지금 이대로 있는 그대로 다시 살고 싶다. 꽁꽁 언 추위로 고갤 내밀 수 없었던 그날은 지나가고 봄날이 온 거다. 밤마다 눈물 글썽이는 그 많은 별들이 사랑이었다.
13세기 중세 신비주의자 루미의 글이다. 내가 내 수첩에 메모해 놓았던 <여인숙>이라는 짧은 글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일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거나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들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 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나는 루미의 이 글을 읽을 때마다 공감한다. 그렇다. 어둠이 어둠인지 모르고 살아온 사람은 모른다. 아픔도 없이 겨울을 보낸 사람은 모른다. 작은 빛줄기만 보여도 나 이렇게 재재발거리며 달려 나가는 까닭은 지금 나 여기 이대로 살아있음이 좋아서다. 이 따뜻한 봄날 나는 진심으로 나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겨울을 잘 견디어 낸 너를 사랑한다.
자비와 용서, 판단과 단죄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은 두 가지 단어를 무척 사랑하십니다. 곧 자비와 용서입니다. 이 두 개의 말은 단 하나의 것에 대한 두 가지 표현입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뽑아버려야 할 두 가지 태도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바로 판단하는 것과 단죄하는 것입니다. 이 태도들은 우리를 마음의 완고함으로 이끌고 이웃들의 재판관으로 만듭니다. 유일한 재판관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더 우리가 용서를 사용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용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다니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유배의 탓이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죄를 지은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특히 임금들, 고관들,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이 하느님의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죄가 가득하다고 고백합니다.
유다사람, 예루살렘 주민들, 가까이, 또는 멀리 사는 사람들 모두 하느님께 죄를 짓고 배신 때문에 내쫒기는 신세가 되었기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하다고 또한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비에 용서를 청 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자비를 바라면서 다시 하느님을 거슬린 지난 잘못을 고백합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다니 9,9-1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주님께서 이어서 ‘남을 심판하지 말 것과 단죄하지 말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용서하고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심판받지 않고 단죄 받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야 또한 용서 받을 것이고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베푸는 신앙인인 받는 보상에 대해서 알려주십니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6,38)
참된 신앙인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오늘 다니엘 예언자가 고백했듯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사람이겠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으로 이웃을 심판하고 단죄하기 보다 먼저 자신의 죄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겠지요.
그리고 이웃에게 너그럽고 무언가를 베푸는 사람 아니겠어요?
그러한 사람은 우선 마음이 따뜻하고 너그러운 사람이고 이웃이 많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한 사람이겠지요.
거룩한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 자신을 둘러보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틀에 박히고 찌들고 굳을 대로 굳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회개하는 오늘이면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이미 발을 들여 놓은 것이지요.
남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이제는 자신을 향하며 부끄러움을 아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약하지만 순수한 마음 가득히 주님 수난을 새길 수 있으면 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1-22).”
사람을 심판하는 권한은 예수님만이 가지고 계신 권한입니다. (이 권한은 사람을 심판하거나 심판하지 않을 권한입니다.)
누구를 심판할 것인지, 또는 심판하지 않을 것인지는 예수님께서 정하십니다.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따라서 아무도 자기 마음대로 자기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면 안 되고, 반대로 자기는 심판받게 될 것이라고 미리 포기해도 안 됩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예수님께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이들’ 속에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다른 사람의 심판 여부를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런 짓은 예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심판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요한 12,46-48).”
사람을 심판해서 멸망시키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구원해서 생명을 주는 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죄인들에 대한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죄인들 자신들이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것이 곧 심판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하시기도 전에 죄인들 자신들이 심판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말씀인데, 그 말씀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 자체가 심판을 선택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마태 12,20).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희망이신 분입니다(마태 12,21).
자기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구원의 길’이 완전히 차단되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나’도 ‘나’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나도 그 사람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라는 말씀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자비, 용서, 사랑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남을 심판(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은 심판(단죄) 받을 죄를 짓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도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은 용서와 사랑을 받을 자격을 갖추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미 나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미 주어져 있지만, 그것을 잘 받는 일은 내가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남을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이미 나에게 주어진 용서와 사랑을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주셨는데도 내가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사실 누구든지, 또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남을 용서하는 일’과 ‘회개’는 밀접하게 연결되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남을 용서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남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보아도 내버려두라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우리는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보았다면 그를 꾸짖고 타이르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형제애 실천’입니다.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방관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남을 심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의 심판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 12,4-5).” 나를 심판하실 분은 예수님(하느님)뿐입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또한
용서받아야 할
삶을 살아가는 어리석고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십자가와 함께
용서의 첫발걸음을
내딛게됩니다.
불완전한
한 사람이 용서의
십자가 앞에서
어쩔수 없는
우리자신의 상처
끊임없이
솟아나는 분노와
마주하게 됩니다.
연약한
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한 사람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우리자신의 한계점에
이르게 됩니다.
용서의 문을
열어주시는 분은
언제나 십자가의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을
향해야 하는 용서는
잃어버린 우리자신의
사랑을 되찾아줍니다.
사랑이 아픈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의 여정은
용서의 여정으로
치유됩니다.
고통의 신비 안에서
용서의 신비를
배우고 실천하는
용서의 사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용서는 생명을
새롭게 살게하는
가장 중요한
해방입니다.
큰 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절망과 두려움에 빠졌지요. 너무나 힘들어하는 이 사람에게 이웃들이 위로를 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희망이 담겨있는 책, 경쾌한 음악이 담긴 CD 등을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로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했는데, 그 순간 이 사람이 “저 너무 힘드니까 그냥 가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쫓겨나듯 병실을 나온 사람들 중의 한 명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자기 생각해서 병문안까지 왔는데 어떻게 쫓아낼 수 있어?”
또 한 명도 맞장구를 치면서 말합니다.
“아프면 자기의 원래 성격이 나오는 거야. 저 사람, 좋은 사람인줄 알았더니만 원래 이기적인 사람인가 봐.”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이 환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면서 이 환자는 세상에서 제일 못된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못된 사람이라는 것은 누가 만든 것일까요? 사실 병문안을 온 사람들로 인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분명히 위로와 힘을 주려고 찾아온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상대방의 입장이 아닌, 나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면서 나쁜 마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결국 어떻게 하라는 말씀일까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라는 황금률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모습이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면서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계속해서 받아 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하느님의 자비를 잊어버리고, 남에게는 엄격한 모습을 취하고 있을까요?
좋은 마음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좋은 마음이 좋은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하심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시 심판이나 단죄를 받지 않으며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 것도 없네.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세상에 왔지(헤르만 헤세).
하루의 행복(‘좋은 글’ 중에서)
이른 새벽 눈을 뜨면 나에게 주어진 하루가 있음을 감사하렵니다.
밥과 몇 가지 반찬... 풍성한 식탁은 아니어도 오늘 내가 허기를 달랠 수 있는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음을 감사하렵니다.
누군가 나에게 경우에 맞지 않게 행동할 지라도 그 사람으로 인하여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음을 감사하렵니다.
태양의 따스한 손길을 감사하고, 바람의 싱그러운 속삭임을 감사하고, 나의 마음을 풀어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음을 또한 감사하렵니다.
오늘 하루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 태어났음을 커다란 축복으로 여기고 가느다란 별빛 하나, 소소한 빗방울 하나에서도 눈물겨운 감동과 환희를 느낄 수 있는 맑은 영혼의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믿고 사랑하는 것이고 나에게 확신을 갖는 일입니다.
가치 있는 인생을 살면서 가치 있는 사랑을 하는 것이 최고의 삶이고, 행복이라고 합니다.
하루의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의미 있는 하루를 만드시길 바랍니다.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우리는 얼마 전 ‘고소∙고발남’이란 칭호를 받으며 야권의 떠오르는 모든 사람들의 저격수 노릇을 했던 한 국회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자신은 성희롱, 여성비하발언 등의 문제로 당에서 쫓겨나야 했던 사람이었음에도, 자신보다는 남들의 약점을 찾아내느라 온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그래서 자기편이 아닌 모든 사람들, 즉 대학교수, 개그맨, 시장 할 것 없이 모조리 흠집을 잡고 고소를 하는 등으로 자신의 이름을 띄웠습니다.
얼마 전엔 서울시장의 아들 병역 문제를 들고 나와 새로 당선된 시장을 괴롭혔습니다. 그가 제시한 증거물이 누구에게서 받은 것인지는 몰라도 매우 설득적이었고 그래서 언론도 시장에게 화살을 돌리는 분위기였습니다. 여기에 힘을 얻은 그 의원은 이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가서 자신의 주장이 거짓으로 판명되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병무청에 제출된 MRI가 시장 아들의 것이 맞음이 밝혀졌고 그는 약속대로 의원직을 사퇴해야만 했습니다.
그에게 당하는 당사자가 아닌데도 저는 그 사람을 보며 ‘왜 짧은 인생을 저렇게 남을 못살게 굴며 살아갈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명문대 법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도 다닌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르는 사람이어서 결국 자신이 쏜 총에 자신이 맞아 쓰러지게 된 것입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우리는 성당 제대 앞이나 성모님상 앞에 아름답게 꽃이 장식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이 꽃을 장식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성모님께 아름다운 꽃을 봉헌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꽃을 보고 행복해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그 꽃을 봉헌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또한 어린 아기를 매우 예쁜 옷으로 입혀줍니다. 그러나 아기들은 그 옷이 예쁜지 안 예쁜지 아직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예쁜 옷을 장만해서 입혀주면 결국 누가 그 옷을 입은 아이를 보면서 기뻐하게 될까요? 바로 그 옷을 입혀준 자신들입니다.
상대를 예쁘게 해 주면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남을 예쁘게 해 주기는커녕 남이 조금만 예뻐지려 해도 질투하고 그것에 흠집을 놓으려 할까요?
결국 그렇게 구겨진 모습을 바라보며 얼굴 찌푸려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인데 말이죠. 남에게 눈물 나게 하려면 자신은 피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너무나 훌륭한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이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이 선인들의 지혜를 무시하고 상대를 무너뜨려야 자신이 더 커지는 줄 압니다.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어머니들 대부분이 이런 고해를 합니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야단을 너무 심하게 쳤습니다.”
아이들이 잘못하면 화도 나고 야단도 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고해거리가 될까요? 그러고 나니 마음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기분 좋을 어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신자들 앞에서 말실수를 하거나 짜증을 내고 나면 오랜 양심의 가책이 느껴집니다. 신자들이 그것들을 너무나 잘 받아들여도, 마음 한 구석에선 ‘조금만 더 참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듭니다.
일주일 동안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성모상 앞에 있던 작은 국화꽃 화분을 보니 꽃들이 머리를 직각으로 숙이고 땅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잎들도 검게 말라 다시 살아날 수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래서 제가 화분 선물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말라 죽어가는 것을 보기가 싫어서일 것입니다. 그래도 물을 좀 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반 정도의 꽃들이 머리를 들었습니다. 그 날 오후에는 80%, 그 다음 날은 모두가 다시 살았습니다. 잎도 다시 푸르러졌습니다. 고개 숙여졌던 제 마음도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상대를 통해 행복해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상대에게 불행과 고통과 미움과 비방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되질하여 주는 그대로 우리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만 다녀왔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만나셨던 아인카렘,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 어린 시절을 보내셨던 나자렛, 40일간 단식을 하시고, 유혹을 받으셨던 광야, 거룩하게 변모하신 타볼 산, 베드로가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닭 울음 성당,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던 최후의 만찬 성당,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골고타 언덕, 무덤 성당, 밤을 세워 기도하셨던 겟세마니 동산, 복음을 전하셨고,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던 갈릴래아 호수를 다녀왔습니다. 함께 했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래아로 가시오.’ 갈릴래아는 일상의 삶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복음을 전하던 곳입니다. 부활은 일상의 삶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지순례의 은총을 듬뿍 받고, 저 역시도 일상의 삶에서 제게 주어진 소명을 충실하게 지키려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집에 있는 커튼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집에 커튼이 있으면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커튼이 있으면 우아함이 느껴집니다. 커튼은 추위를 막아주기도 하고, 커튼은 해를 가려주기도 합니다. 커튼을 닫는 것만으로도, 커튼을 여는 것만으로도 방의 분위기는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를 또한 커튼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변을 따뜻하게 해 주고, 부드럽게 해주고, 분위기를 살려주는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픔과 슬픔은 감싸주고, 기쁨과 희망은 열어주면 좋겠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복음을 전하였고, 나눔과 겸손 그리고 가난과 희생을 이야기 하였던 예수님은 하느님을 모독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로마의 식민통치를 반대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자유와 해방은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셨던 십자가와 섬김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외롭게 십자가를 지고 가셔야 했을 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비움’을 이야기 합니다. 욕망과 욕심을 내려놓으면 사람이 보인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 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나옹 선사의 가르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수행의 궁극목표.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둥글게 사는 것-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수행의 궁극목표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둥글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평생공부, 평생과제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지난 주 토요일 복음말씀과 대동소이합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완전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길은 자비행 하나뿐입니다. 바로 자비로운 사람이 완전한 사람입니다. 애당초 타고나길 자비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부단한 평생수행을 필요로 합니다.
무지無知의 병이 문제입니다. 무지의 사람입니다. 무지에서 기인한 두려움, 탐욕, 교만, 어리석음입니다. 인간의 폭력성, 잔인성, 공격성 모두 무지에서 파생된 부정적 성향입니다. 무지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자비뿐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것도 자비의 빛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필생공부가 자비를 실천하는 일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될 때, 무지의 병도 치유되어 지혜로운 사람, 겸손한 사람, 온유한 사람, 평화로운 사람, 순수하고 진실한 사람,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자비를 상징하는 데는 둥근 원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완전함, 온전함을 상징하는 둥근 원입니다. 바로 사랑으로 둥글게 익어 충만해 질 때 원숙圓熟, 원만圓滿한 모습입니다. 위 한자뜻이 얼마나 좋은지요. 잘 익은 가을의 둥근 열매들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역시 우리 인생도 둥글게 익어가는 ‘자비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가을 인생에 접어든 분들, 자비의 열매는 둥글게 잘 익어가는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여 어제는 ‘둥글게 살자!’를 강론 제목으로 삼았고 좌우명으로 택하여 집무실 게시판에 써 붙였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은 하느님뿐입니다. 하여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기위한 끊임없는 사랑의 소통인 기도입니다. 오늘 제1독서 다니엘이 동포들을 위하여 바치는 기도는 얼마나 아름답고 진지한지요. 무려 천년이상 사순시기에 읽혀진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완전함과 인간의 불완전함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잘 알아 듣지 못한 인간들의 무지에 대한 슬픔과 회개가 담겨진 기도입니다. 사순시기 다니엘 예언자가 기도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당신은 의로우십니다.”
이런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 무지의 현대인들입니다. 경배敬拜, 경애敬愛, 경외敬畏, 경건敬虔, 공경恭敬, 효경孝敬 등 ‘경敬’이 사라진 세속화된 오늘날 현실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회복되는 ‘경敬의 심성이요 진정한 회개입니다.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금과옥조의 회개 기도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진정성 가득 담긴 마음으로 회개의 기도를 바칠 때 무지의 병도 치유되어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또 하나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시편23장 1절’을 통한 기도법을 알려 드립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에 이어, “주님은 나의 목자, 두려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무서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걱정할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부러울 것 없어라.”, 이렇게 말마디를 바꾸어 끊임없이 고백의 기도를 바쳐보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어진 목자 주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기도에 이은 구체적 자비의 실천이 우리를 자비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그 처방을 제시합니다. 1.남을 심판하지 마십시오, 2.남을 단죄하지 마십시오, 몰라서 무지로 인해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것입니다. 정말 자기를 아는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은 절대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자비-순수-지혜-겸손은 하나입니다.
반대로 3.용서하십시오, 4.주십시오. 이래야 지혜롭고 겸손하고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주님께 용서도 받고 넘치도록 후하게 받습니다. 아, 이게 구체적으로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는 길입니다. 멀리있는 것 같으나 가장 가까이 있는 자비에 이르는 실천지침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자비의 실천이란 평생수행공부가 우리 모두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사랑의 둥근 성체를 모실 때 마다 ‘둥글게 살자!’는 각오를 새로이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곧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로부터 입은 그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이는 사실,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전자는 ‘심판, 단죄하지 말라’는 부정의 지침이요, 소극적인 지침입니다. 후자는 ‘용서하고 베풀어 주어라’는 긍정의 지침이요, 적극적인 지침입니다.
시리아의 에프렘은 “남을 심판,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을 ‘자신을 위해 앙갚음하지 말라’는 뜻으로 풀이했습니다. 곧 타인에 대한 보복과 복수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 단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곧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악을 피하여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내려놓게 되면, 이미 자신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 흘러나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먼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0,21)
사실,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푸는 일, 그것은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고 ‘먼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죄인임을 알아야 하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곧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곧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잇는 자신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았음을 체험하게 되면 자신도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고 있을 때, 사실은 타인을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죄인으로 여기고 있는 반면에. 동시에 자신은 부당한 처사를 받은 억울한 의인으로 여기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마치 자신이 용서를 베풀어야 할 자로 여기게 되지만, 사실은 자신이 먼저 용서를 받아야 할 자임과 자신이 죄를 용서받은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질 것입니다. 곧 용서받았기에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우리는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해기 전에,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경청과 동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 살레시오회 안에서 오랜 세월 전해져 내려오는 소중한 전통 하나가 있습니다. 매년 연초가 되면 총장 신부님께서는 전 세계 살레시오 가족들에게 세뱃돈 주시듯이, 한 해 동안 생활의 지표로 살아갈 덕담을 건네주시는 데, 이름하여 ‘스트렌나’(Strenna) 라고 합니다.
2018년도 생활지표에는 두 가지 핵심 주제어가 있는데, 바로 경청과 동반입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필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암(癌)이라는 한자어의 구조를 유심히 살펴보다가, 왜 암에 쉽게 노출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암이라는 한자어 중심부에는 입 구(口)자가 세개가 있습니다. 바로 밑에는 산 산(山)자가 있습니다.
풀어보니 그렇군요. 입 세 개를 산에다가 파묻었습니다. 그리고 뚜껑까지 덮어버렸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에 담아놓고, 제때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니, 그리고 제대로 된 의사 소통의 부재로, 결국 경청을 통한 동반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니 암에 노출되는 것 같습니다.
경청과 동반 가만히 생각해보니, 하느님 자비의 또 다른 얼굴인 듯 합니다. 약자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 그들의 지니고 있는 내면의 상처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그들의 깊은 슬픔에 공감해주는 것, 홀로 두지 말고 옆에서 나란히 함께 걸어주는 것,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경청과 동반의 모습이었습니다.
경청과 동반에 있어 돈보스코는 탁월한 귀재였습니다.
돈보스코는 수많은 일들과 만남 등 살인적인 하루 일정을 보내셨지만, 청소년들을 위해서는 언제나 마음의 문과 사무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계셨습니다. 때로 겪게 되는 그들의 무례한 행동 앞에서도 불편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유롭게 질문하고 편안하게 자신을 표현하게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돈보스코는 아이들과 개별적으로 만날 때, 고위 관료나 저명한 사회 인사들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존경심을 지녔습니다. 자신은 작은 의자에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안락의자를 권했습니다. 그들이 말을 할 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인 듯, 최대한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돈보스코는 참으로 시대를 앞서 살아가셨습니다. 아시는 바 처럼 돈보스코 시대 당시, 청소년들은 인간 취급도 못받았습니다. 굴뚝 청소의 도구처럼 활용되었고 때로 매매까지 되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돈보스코는 최선을 다해 환대했고, 그들의 하찮아보이는 말들을 경청했고, 따뜻하게 동반했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이 찾아오면 돈보스코처럼 극진히 환대해야겠습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야겠습니다. 더없이 환한 얼굴로 예의바르게 인사해야겠습니다. 가장 좋은 자리를 권해야곘습니다. 자세를 바로 하고,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마음을 읽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경청한다는 것은 그저 듣기만 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경청은 상대방의 기쁨과 희망, 고통과 좌절에 대해 주의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예술입니다. 듣는 데 그치지 않고 한 존재 전체에 대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 귀를 기울이는 노력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회상하고 나누는 삶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너무 허술하게 복구합니다. 이때 다니엘은 동포들을 대신하여 다음과 같이 죄를 고백합니다.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의로우시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다니 9,5. 7)
다니엘은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주 하느님"(9,9)을 회상하고 부르며 자비를 청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죄악에서 돌아서지도 않고, 호의를 간청하지도 않았음을 고백합니다(9,13). 그리고 백성들의 의로운 업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크신 자비 때문에 올리는 간청을 들으시어, 용서해주시라고 기도합니다(9,18-19). 우리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 6,36-38) 이 말씀은 결국 하느님의 자비를 품는 것이 바로 거룩함의 소명임을 알려줍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올라야 산은 '자비의 산'입니다. 주님 사랑의 창조물인 우리 삶의 목적도 방향도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존재하고 사랑을 먹고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사랑은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요. 우리가 자비에서 멀어져 죄악과 불의를 저지르며 제멋대로 사는 것은 주님의 자비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그분의 자비를 기억해야 합니다. 자비를 기억할 때 우리는 자비의 샘물을 다시 마실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자비를 기억할 때 자신이 주님의 자비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깨닫게 되겠지요. 바로 그 순간 자비의 산에 오르는 회개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지니고 그분의 자비로운 처사를 본받도록(6,36) 힘써야겠습니다. 자비의 사람은 동료의 불행을 같이 아파하고 같이 슬퍼할 줄 압니다. 자비의 사람은 이웃의 필요에 기꺼이 자신을 내놓습니다. 그는 자비와 선과 의로움의 주인인양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습니다. 먼저 ‘용서하고 주는 사람’은 종말에 더 후하게 받게 될 것입니다(6,37-38).
또한 자비란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 공유하는 것임을 상기해야겠습니다. 자비는 하느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비는 사회적 관계에서도 공유되고 실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자비의 사람이 되려면 사회정의와 공동선에 헌신해야 합니다.
오늘도 서로를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먼저 용서하고 내어줌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고 공유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자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자비는
악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롭기 위해서
더욱 더 선해져야 합니다.
자비는
불의에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 불의를 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롭기 위해서
더욱 더 정의로워져야 합니다.
자비는
무죄를 강변하는 죄인에게 단호하되
참회하는 죄인은 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롭기 위해서
더욱 더 너그러워져야 합니다.
자비는
죄인의 죄에 눈감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서 죄를 벗겨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롭기 위해서
더욱 더 깨끗해져야 합니다.
자비는
가짐의 쾌락을 즐기는 이에게
베풂의 기쁨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롭기 위해서
더욱 더 나누어야 합니다.
자비는
자비이신 하느님께서
사람을 통해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롭기 위해서
하느님을 곱게 품어야 합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6,37)
김종오 신부님
우리에게 억울한 상처를 남긴 사람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더 나은 삶과 행복을 위하여 용서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우리에게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나 사건은 잊지 말고 용서를 해야 합니다. (Don't Forget but Forgive.) 9만 2천여 명의 여성들과 아이들이 학살된 독일 라벤스브룩 집단 처형장에서 죽은 아이 옆에 용서에 관한 기도문 하나가 포장지 종이에 휘갈겨 쓰인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주님, 좋은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 기억하지 마시고 나쁜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기억하소서. 또한 그들이 저희에게 준 고통만을 기억하지 마시고 그 고통으로 인해 저희가 맺은 우정과 충성심, 겸손함, 용기, 관대함의 열매와,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을 통해서 성장한 마음의 위대함도 생각하소서. 그리하여 마지막 심판 날에 저희가 맺은 이 모든 열매들이 저희에게 고통을 준 그 사람들을 용서하는 원천이 되게 하소서.” (내 삶을 변화시키는 치유의 8단계)
상처 입은 고통이 얼마나 아픈가를 알기에 우리는 너무 빨리 용서하라고 함부로 그들에게 말하는 것은 늘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는 누구보다 자신에게 더 큰 행복을 주기에 주님께서는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용서가 어려운 것은 자주 우리가 치유되지 않은 감정을 안고 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하려면 우리가 상처를 입은 감정을 인식하고, 인식한 감정을 표현하고, 수용하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특히 분노의 감정을 속에 눌러 두면 억압된 분노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시간이 흐르면 우울은 곧 우울증이라는 질병으로 발전되기도 합니다. 용서는 누구보다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자비의 길
인영균 끌레멘스 수사신부님
자비, 심판, 단죄, 용서, 줌, 받음... 오늘 복음 (루카 6,36-38)에서 주님이 사용하신 단어들입니다. 이 단어들은 모두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 만큼 ‘관계’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모두 관계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다가 죽습니다.
관계를 더 깊게 하고 더 넓게 하는 것은 바로 자비, 용서, 내어줌입니다. 이것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반대는 심판과 단죄입니다. 이는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앞에는 늘 두 개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이며 숙명이며 현실입니다. 생명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느냐는 우리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대전제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며 어머니이신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다시 하느님의 자비이신 예수님께, 특히 주님의 성심께 우리 삶을 봉헌합니다. 예수 성심의 자비 안에서 나의 삶이 자비와 용서와 내어줌을 따라 가도록 기도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스페인 성 베네딕도회 라바날 델 까미노 수도원에서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다니엘 예언자는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다니 9,7) 라고 말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되돌아보면, 내가 지금까지 뭐하고 살았나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돌아보면, 잘 한 일은 별로 생각이 안 나고 잘못한 일들이 꼬리를 지어 생각이 나서 나 자신이 부끄럽고 괴롭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지금까지 내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교회와 형제자매들이 나를 용서해주시고 너그러이 받아주셔서 오늘까지 이렇게 살아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자비로워지기를 논하기 전에 나를 자비롭게 용서해주시는 주 하느님과 형제자매님들께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이 감사드리며, 이 사순절에 새롭게 조금씩 갚으면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부끄럽게나마 가져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이 말씀은,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자비를 이웃과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으려면 먼저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미 받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이웃과 나누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제자들의 모습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자비 없는’, 즉 무자비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어떤 사마리아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루카 9,52-55).”
여기서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의 모습은 무자비한 심판관의 모습과 같습니다.
두 사도의 말에는 “나는 무조건 옳다.” 라는 독선(獨善)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독선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죄인들을 심판하려고 하는 오만함이 생겼고, 독선과 오만에서 무자비한 태도가 생겼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두 사도를 꾸짖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옳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나는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심판하는 권한은, 또 사람을 심판하는 권한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따라서 자기 마음대로 “옳은 내가 이웃의 틀린 점을 심판하겠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오만이고, 큰 죄입니다.)
죄인으로서 하느님의 큰 자비를 생생하게 체험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나는 전에는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모르고 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를 자비롭게 대해 주셨습니다. ...... 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이와 같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앞으로 당신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나를 본보기로 보여 주시려고 먼저 나에게 한량없는 관용을 베푸신 것입니다(1티모 1,13-16.공동번역).”
만일에 하느님께서 박해자 사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고 그를 심판하셨다면, 그리고 천벌을 내리셨다면?
그러면 우리 교회는 위대한 사도 바오로를 얻지 못했을 텐데,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라는 신앙고백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모순되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이 힘을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교회가(신앙인이) 자비보다 정의를 앞세워서 세상을 심판하려고 한다면?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메시아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자비만 강조하다가 세상이 점점 더 악한 쪽으로 가면 어떻게 하나? 정의의 실현은 언제 이루어지나?”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악을 모른 척 하여라.”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악을 물리쳐야 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단, 그 방법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천벌이 내리기를 빌어도 안 되고, 저주를 해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형제를 타이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죄인을 꾸짖거나 타이르는 것은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용서하기 위해서이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그 일은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꾸짖고 타이르는 일마저도 하지 않고 악행을 내버려 두는 것은, 자비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함께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은 처지의 죄인입니다. 최종 심판은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로마 14,10).”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14,4).”
(내가 의인이어서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죄인이기 때문이고, 또 그가 나의 형제이고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자비는 죄인인 내가 받은 은총을 다른 죄인에게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중요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그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자비를 바탕으로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남을 심판하지 말며 단죄하지 말 것을 주님께서 아울러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종합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시지요.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신앙인이라도 베풀지 않고 받는 것만을 바라는 사람도 꽤 있다는 것입니다. 고치기가 쉽지많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구원관은 율법준수인데, 다니엘 예언서 저자는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사람 뿐 아니라 세계를 유랑하는 디아스포라 사람들을 포함해서 자신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하느님께 속죄의 기도를 바칩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다니 9,4-5)
그러면서도 자비로운 하느님 앞에 자신의 죄를 연 이어서 고백합니다.
그 뒷면에는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것이지요.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9-10절)
유대교의 바탕은 율법준수에 구원의 가능성을 두는데 이 점만 보면 인간적인 노력에서 서로 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니엘 예언자의 기도를 보면 유대교에서도 죄를 사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신 것입니다.
불교에서 중생은 삶의 번뇌의 고리에서 끊임없는 수행을 통해서 열반의 세계인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 자신의 죄에서 스스로 자유롭게 벗어나지 못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도 전적인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면서도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업에도 그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개혁적인 개신교가 ‘오직 은총’이라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는 어려운 가운데에서 베푸는 ‘선행’에도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넓으면 얼마나 넓고 가진 것이 있으면 무한하겠어요?
그러나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자비하신 것을 닮아 부족한 가운 데에서 나누고 고통과 번민 중에서도 이웃에게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을 나눌 때에 신앙인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인도의 빈민촌 캘커타의 어려움을 알리면서 늘 강조하는 것은 쓰다 남은 것이 아닌 ‘나 쓰기에도 힘든 가운데에서 나눈 것’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수녀님은 알지도 못하는 먼 곳 인도의 빈민촌이라는 이웃보다는 먼저 ‘내 가까운 이웃에게 먼저 베풀라.’고 귀뜸하던 말이 떠오릅니다.
사순절을 보내며 우리는 먼저 좋으신 하느님께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족과 내 이웃에게 넉넉한 마음과 하나라도 베푸는 데에 인색하지 않는지 반성하고 회개하는 우리자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심판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금 듣게됩니다.
사랑을 지키기위해
예수님께서는
심판대신 용서를
일깨워주십니다.
용서를 거부할수록
더욱 거세어지는
우리의 심판입니다.
심판의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게하는
것이 용서의 사순시기입니다.
심판의 대상으로는
결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게됩니다.
심판의 돌을
예수님께서
고스란히 맞고
계십니다.
심판 앞에
구원은 없습니다.
심판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가 심판을
멈추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보려는
이들을 위해
따뜻이 기도하는
용서의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짧디 짧은 우리의
시간입니다.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심판이 아닌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없다면
구원도 없습니다.
심판을 멈출 때
비로소 소중한
사람이 보일 것입니다.
심판이 아닌
용서를 주소서.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 중에 하나는 바로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유명한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쓴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의 단점을 찾으면 사람이 짐승이 되지만 남을 사랑하면 진짜 사람이 된다. 상처를 오래 기억하면 짐승이 되지만 상처를 잊으려고 노력하면 사람이 된다.”
인간인 우리는 당연히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데 혹시 짐승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무엇보다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해성사 중에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는데,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용서가 가장 높은 가치라는 것을 알면서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다른 이에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어. 용서할 수 없어.’라는 생각 때문에, 소중하고 높은 가치를 알면서도 실천하기가 힘든 것이지요. 그러나 내 자신에게 어떤 가치인가를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어떤 부부가 젊었을 때부터 아주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 부부의 목표는 큰 부자가 되어서 편안한 노후를 사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이제 노년에 가까워지면서 거의 그 목표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80평 주상복합 아파트를 구입했고, 아침에 일어나 분위기 있게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최첨단 오디오 세트와 커피 머신을 구입해서 베란다를 테라스 카페로 꾸몄습니다. 이 부부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남편이 회사 출근하다가 집에 무엇을 놓고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방향을 바꿔서 집으로 들어갔지요. 그곳에서 남편은 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글쎄 가정부가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 한 잔을 뽑아 베란다의 테라스 카페에서 집 안의 모든 시설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는 바빠서 이렇게 모든 것을 꾸며놓았지만 하나도 이용하고 있지 못한데, 정작 가정부가 그 모든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이지요.
앞서 사랑이나 용서의 실천이 남에게 주목되어 있기 때문에 실천하기 힘들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내 자신이 누릴 혜택에 주목한다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사랑이나 용서의 실천을 통한 행복을 우리들에게 주시겠다고 하는데, 그 혜택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이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이가 어른의 불완전함을 깨달으면 청소년이 된다. 어른을 용서할 줄 알면 어른이 된다. 그리고 자신을 용서할 줄 알면 지혜로운 자가 된다(앨든 나우랜드).
아버지의 노트(‘따뜻한 하루’ 중에서)
아버지는 살아생전 자신이 쓰는 노트를 보물처럼 여기셨습니다. 다른 일엔 일체 비밀이 없으셨지만 오직 노트에 대해서는 함구하셨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비로소 나는 노트를 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트에 적힌 것은 남몰래 말 못한 비밀이나, 비상금 목록이 아닌 가족들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이름이었습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생각했던 나는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다가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노트를 보고 있구나.”
“어머니는 이 노트를 아세요?”
어머니는 그 노트를 들고 한장 한장씩 넘기면서 추억에 잠기시는 듯했습니다.
“이건 너희 아버지가 기도할 때 쓰던 노트란다. 매일 밤 가족들과 친구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조용히 기도하곤 하셨지.”
어머니의 뜻밖의 이야기에 놀란 나는 낯선 이름들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이분들은 누구신가요?”
“아버지에게 상처를 주신 분들이란다. 아버지는 매일 그들을 용서하는 기도도 하셨단다.”
용서할 수 없다는 말만 할뿐 정작 그런 힘을 달라고 왜 기도하지 않을까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특히 용서하기 힘든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더욱 더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그러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보십시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제는 의정부 한마음 수련장에서 3시간 강의가 있었고, 미아동 성당에서 2시간 강의가 있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를 필요로 하는 분들이 있다면 함께 하려고 합니다. 한마음 수련장에서 강의를 마치고, 잠시 시간을 내서 의정부에 사시는 어머니에게 다녀왔습니다. 저는 잠시 시간을 내서 어머니를 뵈었는데, 어머니는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뵈니 죄송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다음에는 잠시 시간을 내서 찾아뵙는 것이 아니고, 온전한 시간을 내서 찾아뵈려고 합니다.
조조의 아들 조식이 지었다는 7보시가 있습니다. 7걸음 안에 형 조비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만들지 못하면 죽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생 조식이 지은 시입니다. 형은 동생의 시를 듣고서 마음이 움직였고, 동생을 살려주었다고 합니다.
“煮豆燃豆? (자두연두기 - 콩대를 때서 콩을 삶으니)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 솥 속의 콩은 울고 있다)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 본래 한 뿌리에서 났건만)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 어찌 이리 급하게 삶아대느뇨)”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세상입니다. 분명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합니다. 그래야 정의가 바로서고,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으로는 드러나기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옳은 길을 갈 때면 격려해 주셨고, 우리가 그른 길을 갈 때면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셨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친한 친구와 구슬치기를 하다가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저의 목을 조르고 있었고, 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놔!’ 그러면서 서로 먼저 놓지를 못하고 한참을 울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서로를 향해서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습니다. 눈물을 멈추고 사이좋은 친구가 되어서 다시 구슬치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가끔씩 어릴 때 그 사건을 생각합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씩 친구들과 다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어릴 때처럼 상대방의 급소를 잡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곤 합니다. 내가 먼저 자존심을 버리면 쉽게 끝나는 일들도 오래 가는 것을 봅니다. 신자들의 모습에서도 가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별 것 아닌 일인데 화해를 하지 못하고 한동안 어색한 침묵으로 상대방이 먼저 용서를 청하기를 바라는 것을 봅니다.
진리는 옳은 것도, 그른 것도 내려놓을 수 있어야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느 시인이 표현한 것처럼 겨울이 떠나야 봄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봄이 오기에 겨울이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봄과 겨울은 서로 다투거나, 갈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겨울과 봄이 만나는 것입니다. 겨울은 봄에게 눈 소식을 알려주고, 봄은 겨울에게 꽃 편지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려 주십니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우리의 궁극 평생 목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의 평생 궁극 목표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너무 단순하고 분명한 목표입니다. 우리는 지난 토요일 마태복음의 결론을 들었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5,43).
여기서의 완전함은 완벽주의의 완전함이 아니라 전인적이자 통합적인 온전함을 뜻합니다. 오늘 루카복음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예외 없이 믿는 모든 이들에게 부과된 평생과제입니다. 자비행을 통해 완전해지고 거룩해 지는 사람입니다. 결국 거룩함, 완전함, 자비로움은 결국은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얼굴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온 누리에 미칩니다. 의인이든 죄인이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차별 없이 모든 이들에게 미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십니다. 모두를 비추는 햇빛은, 모두에게 내리는 비는 하느님 자비의 참 적절한 상징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온누리를 따사로이 비추는 하느님의 햇빛같은 사랑, 온누리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같은 사랑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입니다.
생명을 주는, 자유롭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상의 은총, 무상의 사랑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 놓았던 봄비라는 시도 생각이 납니다.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를 보며 쓴 시입니다.
-마음을/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사랑/내 딸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무조건 ‘봄비’로 하겠다.-
성덕의 잣대는 자비입니다.
하느님 자비를 상징하는 봄비같은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복음이, 제1독서의 다니엘이 그 구체적 방법을 알려줍니다.
1.남을 심판하지 마라.
2.남을 단죄하지 마라.
우선적으로 둘입니다. 정말 남의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뒷담화를 하지 않는 사람이 완덕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수녀님들 고백성사 ‘하나마나란’ 말이 있는데, 사실 수녀님들 고백성사 주다보면 대동소이합니다. 거의가 관계 사이의 죄들로 판단하고 비난하고 무시한 언행들입니다.
정말 자비로운 사람들의 특징은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하고 교만한 이들이 남을 판단하지, 자기를 아는 지혜롭고 겸손한 이들은 결코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판단하고 단죄하기 보다는
“아, 그럴수도 있겠다, 아, 그것이 그의 현실이요 한계구나.” 저절로 이해하고 수용하고 용서합니다.
3.용서하여라.
4.주어라.
먼저 번 두가지 명령이 ‘하지 마라.’는 부정적 명령이었다면 이 둘은 긍정적 명령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끊임없이 용서하고 내어 주는 무사無私한 사랑이 바로 너그럽고 넉넉하고 자비로운 하느님다운 사랑입니다.
마치 밑빠진 독에 물붓듯 하는 사랑입니다. 콩나물 시루에 붓는 생명의 물은 줄줄 새는 것 같아도 콩나물은 무럭무럭 자라듯 용서하고 내어주는 사랑 속에 치유되어 건강을 회복하는 영혼들입니다.
상대방이 치유되기 이전에 이미 용서하고 내어주는 내가 먼저 치유됩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6.38).
사실 사랑의 눈만 열리면 얼마나 받은 것이 많은 우리들인지 깨달을 것입니다. 온통 하느님 사랑의 선물들로 가득한 일상입니다. 이런 감사의 깨달음이 저절로 받은 것을 주는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의 자비행의 구체적 실천 지침 넷을 가르쳐 주었고 제1독서는 끊임없는 회개와 기도의 필요성을 가르쳐 줍니다.
동포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다니엘을 본받아 끊임없이 회개의 기도를 바치라는 것입니다. 진정성 가득 담긴 다니엘의 기도는 그대로 사순시기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입니다.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다니엘9,8-9).
저절로 자비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이런 겸손한 회개의 기도가 점차 하느님을 닮아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는 사람, 용서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비단 이런 회개의 기도뿐 아니라 우리가 매일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은총이 우리를 점차 자비로운 사람, 거룩한 사람,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더욱 당신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멘.
아직도 뒷담화를 하시나요?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직자의 어려운 점을 농담 삼아 얘기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면 “너무 직선적이야”하고 지적하지 않으면“너무 타협을 하는구만!”하고 말합니다. 강론을 할 때 원고를 보고 하면,“너무 딱딱하고 재미없어”하고 원고 없이 하면,“왠지 깊이가 없는 것 같애”하고 말합니다. 여러 예화를 들면 “성경말씀은 도대체 하질 않는구만!”하고 예화를 안 하면“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면 “인기 끌려고 그러는구만!”하며 부자와 가까이 하면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하고 너무 귀족적이야!”하고 말합니다. 이래저래 한 소리 들으니 성직자가 고집스러워지나 봅니다.
누구에게 칭찬을 받는 것은 자기의 역할에 관계없이 좋아라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꾸중을 듣는다든지 비판을 받게 된다면 아무래도 기분이 상하며 마음에 화를 쌓게 됩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나의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바른 인생길 알려는 사람은 훈계를 달갑게 받고 미련한 사람은 책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잠언12,1). 상대의 비판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충고로 그를 구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받기 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넓고 깊은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국 그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시지만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면 혜택을 입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는 이웃을 비판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교부 푀멘은“비판과 험담의 주제에 있어서는 그것들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마음속에서 파헤칠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확실하게 분별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판과 험담하는 입은 스스로 멸망할 것입니다.” 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직도 뒷담화를 하시나요? 이웃을 비방하고 험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구에게 충고를 하려거든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지만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상대를 너그럽게 받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심판하지 말라 " 단죄하지 말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곧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로부터 입은 그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이는 사실,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전자는 ‘심판, 단죄하지 말라’는 부정의 지침이요, 소극적인 지침입니다. 후자는 ‘용서하고 베풀어 주어라’는 긍정의 지침이요, 적극적인 지침입니다.
시리아의 에프렘은 “남을 심판, 단죄하지 말라”는 말씀을 ‘자신을 위해 앙갚음하지 말라’는 뜻으로 풀이했습니다. 곧 타인에 대한 보복과 복수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 단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곧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악을 피하여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내려놓게 되면, 이미 자신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 흘러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 들어온 용서와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 베풀어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먼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결코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선이 악을 비추고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0,21)
그렇습니다. 먼저 입은 하느님의 호의가 내 안에서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가 잘되기를 바라고, 그가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곧 그를 ‘위하는 마음’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흘러나오게 됩니
사실,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푸는 일, 그것은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고 ‘먼저’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멘.
이제 박근혜 씨를 용서해야 하는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난 토요일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마태오복음과 달리 오늘 루카복음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용서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말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더 가까울까 생각할 때 저는 당연히 자비와 용서의 주님을 우리도 닮으라는 오늘 루카복음의 말씀이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하느님처럼 우리도 완전한 자 되라는 말씀은 불가능한 말씀이고, 설혹 그리 말씀하셨다 해도 사랑에 있어서 완전한 자 되라는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이고 실제로 지난 토요일 마태오복음도 완전을 얘기하면서 원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고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잖아요.
어쨌거나 오늘 루카복음은 자비와 용서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제 생각에 죄지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로 자비와 용서이고, 특히 내게 큰 죄지은 원수에 대한 사랑이 자비와 용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마태오복음의 생각과 연결시키면 사랑 중에서 죄인과 원수까지 용서하는 자비야말로 가장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다시 요즘 시국 문제로 돌아가 성찰해보겠습니다. 며칠 전 제가 박근혜 대통령, 지금은 한 인간인 박근혜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용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죄지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비로우시니 그분처럼 되어야 하는 우리도 박근혜 씨를 자비로이 용서해야 하고 더 이상 조사도 재판도 말고, 죄 값 치루는 것도 하지 말아야 되나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비로워야 하지만 용서는 그에게 달린 것이고 그래서 그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용서도 해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자비가 박근혜 씨를 용서 한다면 그것은 그가 죄를 인정하고 부끄러워하고 뉘우치고 용서청할 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가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는데도 우리가 용서치 못하고 용서도 않는 무자비한 사람도 되지 말아야 하지만 죄를 뉘우치지 않는데도 용서 하는 무자비한 사람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박근혜 씨한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죄를 뉘우치지 않으면서 하느님께 하느님 당신은 자비로우시니 저를 용서하시라고 자비를 강요해선 안 됩니다.
죄를 뉘우치고 고치게 하는 것이 사랑이고 자비이지 죄를 깔아뭉개고 그대로 살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자비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정하지도 않고 뉘우치지 않으며 고치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박근혜 씨나 우리나 다 용서를 바라서는 안 되고, 뉘우치지 않는데도 용서하는 것이 자비라고 생각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그것은 사랑도 자비도 아니고 무자비입니다. 죄를 부끄러워하게 하고 뉘우치게 하는 것이 사랑이고 자비를 청하고 용서를 청하게 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비롭다면 그가 진정 자기 죄를 뉘우치고 용서 청하도록 기도는 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용서를 청할 때에는 우리도 용서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오늘 다니엘서처럼 우리 죄를 진정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며 용서와 자비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처럼, 그리고 먼저 실행하는 자비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6,36-38)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유는 자비입니다. 자비로움은 우리의 빼놓을 수 없는 고유한 내면의 색깔이요 영적 유전자이지요. 우리는 세상의 엄청난 재물을 소유하고, 권세를 누리고, 탁월한 지식과 재능을 지녔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님”(1코린 13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들은 어떻게 자비의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자비의 사람이 되려면, 자비가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었고, 그분의 사랑을 먹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자비의 사람이 되려면,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다니 9,5)라고 죄를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안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자신이 자비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인정해야겠지요. 바로 그 자리에서 다니엘처럼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6,36) 자비를 실행하라 하십니다. 우리는 사랑을 갈망하고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늘 하느님의 방식으로 철저히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실행해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사랑으로 포장한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집착과 억압, 지나친 간섭이 얼마나 많이 이루어집니까? 부모들 가운데는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뜻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녀에게 강요하여 성취하려는 이들도 있지요. 또한 하느님처럼 자비로워야 한다면 편애도 경계해야겠지요. 편애는 또다른 소외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비의 사람은 자비를 바라기보다 자신이 ‘먼저’ 자비를 행해야 합니다. 누구든 사랑을 하고 싶은 욕구와 더불어 사랑 받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 목숨을 내놓으신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을 단죄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으며, 먼저 용서하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도록 힘써야겠습니다(6,36-38).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자비로부터 멀어진 자신의 어둠을 인정하고, 하느님 자비를 회상하며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겠습니다. 내 기준과 틀을 내려놓고, 먼저 다가가 서로를 품고 화해와 일치를 이루어나감으로써,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인간다운 삶이 펼쳐지는 이 땅이 되도록, 마음과 힘을 모았으면 합니다.
남을 용서하여라.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자비는 훌륭한 덕으로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최고로 어울리는 덕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거룩한 이에게나 악인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다.(마태 5,45 참조) 이 자비는 하느님의 속성임을 항상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37절) 남을 심판하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의무건만, 남의 일에 참견하느라 바쁘다. 남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격도 없으면서 이웃을 단죄하면, 단죄 받는 것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허물을 찾거나 들추는 대신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다.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130,3)라고 고백한 시편 저자는 그래서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인간의 나약함을 내세우며 다시 용서의 탄원을 드린다.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하소서.”(시편 103,14) 그러니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하는 그대로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마태 7,2 참조)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 주고 정의와 용서와 은총으로 심판해야 한다.
이것은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일단 올바로 심판한 사람은 은총에 따라 용서해야 한다. 그러면 정의에 따라 심판받을 때, 은총으로 용서받을 자격을 지니게 될 것이다. 정의에 따르지 않고 자기를 위해 보복하려는 심판을 하지 마라는 뜻이다. 자신을 위해 앙갚음하는 심판은 안 된다는 것이다. 심판을 하기보다는 훈계하거나 충고하라는 뜻이다.
“용서하여라.”(37절) “주어라.”(38절) 용서하고 베푸는 것, 이것은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한다. 그러므로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고, 가난한 이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선을 베풀고, 용서하며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자선을 받고 용서 받으며 너그러운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의 곳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더 많이 주실 것이며,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충분히 주시는 하느님께서 아낌없이 후하게 갚아주신다고 하신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라고 하셨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좀 더 자비롭고 매사에 남을 용서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과 함께 여정을 함께 하는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자.
되질하는 그대로 받는다.
윤경재 요셉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6~38)
아프리카 부족을 연구하던 한 인류학자가 어떤 부족 아이들을 모아놓고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맛보기 어려운 싱싱한 과일을 한 바구니 담아놓고 멀리 나무 그늘아래 두었습니다. 그러고는 제일 먼저 달려간 아이에게 그 맛난 과일을 전부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인류학자의 예상과 달리 모든 아이들은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바구니에 다다르자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며 맛있다고, 난생처음 먹어본다고 하며 나누어 먹었습니다.
인류학자는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누구든지 일등으로 도착한 사람에게 전부 주려고 했는데 왜 손잡고 같이 뛰었니?”
그러자 아이들 입에서 합창하듯 ‘우분트(Ubunt)’라는 말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머지 다른 아이들이 다 슬픈데 어떻게 나만 기쁠 수 있는 거죠?”
나중에 그 뜻을 알아본 인류학자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습니다. ‘우분트(Ubunt)’라는 말은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작년에 절찬리에 방영되었던 TV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습니다. 오지 의료봉사를 나갔다가 지진 현장에서 부상자를 치료하는 장면과 아랍 지도자를 응급 수술하는 외과의 강모현의 자세는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의사는 환자가 성인이든지 범죄자이든지 가리지 않고 부러진 뼈를 맞추고 병든 장기를 수술해주며, 자신이 배운 지식과 기술을 다해 치료에 임합니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하고 묻는다면 그들은 “그런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내가 할 일도 아니고, 또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타인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는 더 이상 의사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몇몇 직업인에게 보통 사람들과 다른 윤리 잣대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런 윤리 잣대가 다른 사람들과 상관없는 그들만의 기준일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나 다 실천하여도 좋을 것입니다.
심판과 단죄는 내가 내릴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 수긍하고 타인에게 맡겨버릴 줄 아는 겸손이야말로 영적 생활의 출발점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태도를 인욕(忍辱)이라고 부릅니다. 인욕은 단순히 화가 나는 것을 참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맡겨버리는 자세입니다. 능동적으로 인욕 할 때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이 사라져 불평불만이 없어지고 예의범절도 저절로 따라옵니다.
어느 수도원에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이 계셨습니다. 그 중 한 제자가 남의 물건을 탐내다가 훔쳤고 곧 발각되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를 쫓아내자고 하였으나 스승은 만류하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며칠 뒤 그는 또 다른 사람의 물건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제자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아우성쳤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모두 현명하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고 있으니 어디서든 너희가 내키는 곳에서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는 이 불쌍한 자를 가르칠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 그러니 나는 이 자를 계속 가르칠 작정이다.”
이 말씀을 들은 도둑질한 제자는 눈물로 참회하였고, 다른 제자들도 크게 감명을 받아 열심히 가르침을 따르고 수행하였답니다.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다니엘은 예레미야 예언자에 내렸던 하느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채 채워야 하는 햇수가 일흔 해라는 사실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그 햇수라는 것은 바빌론 유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단식하며 자루 옷을 두르고 재를 쓴 채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는 우선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해서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선민으로서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다니 9,4ㄴ-6)
그는 지난 날 왕과 고관들에 이어서 조상들, 백성, 유다사람, 예루살렘 주님들에 이르기 까지 예언자를 통하여 전하는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우리지 않았고 따르지 않았던 지난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며 하느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느님이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의지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예언자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루카는 신앙인에게 어렵고도 중요한 용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래서 대전제가 되는 하느님의 자비를 들어 사람이 갖추어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해 가르치신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5-37)
신앙생활에 이보다 중요한 말씀이 있을까요?
우리가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야 우리는 이웃에 대해서 함부로 심판하지도 단죄하지도 않을 것이지요. 그리고 이웃이 나에게 저자를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여유도 가질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지 못하고 또 깨닫지도 못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말에도 상처도 받고 때로는 너그러움보다는 옹졸한 마음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 만큼 우리는 섬세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사소한 남의 말에 의해서도 쉽게 상처받는 우리이지만 우리의 말 때문에 상처 받는 이웃을 알지 못하고 지나칠 때도 있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어리석은 논리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살고 있지요.
‘나는 내 이웃에게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이웃은 나에게 무례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상처를 준 것이 아니라 그가 속이 좁아서 상처를 받은 것.’이라는 내 편의 논리를 아무런 비판 없이 쓸 때가 있습니다.
거울이 무엇이 끼어 있으면, 또 물기가 서려 있으면 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지요.
그러나 거울을 잘 닦으면 내 모습을 있는대로 볼 수 있듯이 내가 끊임없이 말씀을 묵상하고 나의 허물을 살피면서 덕을 닦아야 나의 모습을 있는대로 볼 수 있지요.
물론 나의 모습을 부정적으로만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볼 때, 나는 나의 객관적인 모습을 보고 또 나의 소중함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겸손의 아름다움은 나를 더도 덜도 아닌 나의 있는 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가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주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철이 덜 들었을 때에, 손해를 보시는 부모님이, 남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친구가 못 마땅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간 지금에서야 부모님의 얼굴에서 친구의 모습에서 행복과 넉넉함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베풀고 너그러운 마음에서 우리는 여유롭고 평화로우며 기쁨의 주님의 마음을 나누며, 그 자리에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다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 삶에서
가장 빠른 것이
단죄이며
우리 삶안에
가장 힘든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라는 단어보다
인간을 잘 설명하고
있는 단어는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에 화답하는 길은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영혼의 길이
용서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하느님 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질서입니다.
용서는 우리모두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고 만나는
은총의 아픈 시간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익어가게 하는
가장 놀라운
선물이 됩니다.
미움과 분노의
지배로부터
우리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없는
우리 삶에
예수님께서는
용서로 오셨습니다.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 바로
제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가난이 남긴 후유증으로 키가 170센티미터인데도 몸무게가 37킬로그램을 넘은 적이 없을 만큼 병약했습니다. 특히 결핵으로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지요. 그러다가 1967년부터 열여섯 해 동안 예배당 문간방에 살면서 교회의 종을 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 문간방은 책들이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했고, 남은 공간은 몸을 웅크려야 겨우 누울 수 있는 1평방미터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사람들은 그를 그저 가난하고 병든 종지기로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2007년, 이분이 세상을 떠난 후에 재산을 정리하니 10억여 원의 자산이 있었고, 90여 편의 작품에서 한 달에 수천만 원의 인세가 들어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혀 가난하지 않지만 철저히 가난했던 사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한 달에 5만 원이면 충분하다며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신 분, 그리고 자신의 전 재산을 북한의 굶는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하셨던 분은 누구일까요? ‘강아지똥’과 ‘몽실언니’를 쓴 작가 권정생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정말로 대단하신 분이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은 가난을 선택하려고 하지 않지요. 자신의 만족을 이룬 다음에야 다른 사람을 돕겠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권정생 선생님은 아니었습니다. 자신보다 더 소외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고 후원하면서 평생을 사신 것입니다. 이분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의로운 사람, 용기 있는 사람, 절제를 실천하는 사람, 끊임없는 노력 등을 통해서 다른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이런 이들이 존경과 사랑을 받을까요? 이러한 덕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이 되라는 또 다른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말씀에 뒤이어 심판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우리들의 가장 잘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용서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닮고자 한다면서도 계속되는 판단과 단죄의 모습을 가리키시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심판자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계속해서 보여주시면서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웃을 심판할까요? 다른 이의 죄를 찾거나 이웃의 허물을 들추느라 바쁜 대신에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면서 살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를 닮는 것이며,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과 사랑을 받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자 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십시오. 혹시라도 누군가의 죄를 지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남의 허물을 들추고 이야기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모습에서 벗어나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닮는데 최선을 다하는 오늘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1분 전만큼 먼 시간은 없다(짐 비숍).
용서가 어려운 이유
어떤 분께서 용서가 어려운 이유에 대해 이렇게 다섯 가지로 정리하더군요.
1. 용서는 곧 잘못된 행동을 용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용서는 상대방이 우리 인생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상대방을 미워하면 우리에게 어느 정도 통제력과 능력, 힘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4. 용서하면 다시 상처받을 거라고 느낀다.
5. 우리는 가해자에게 벌을 주고 싶어 한다.
모두 초점을 잘못 맞췄다. 용서는 용서받는 사람의 몫이 아니다. 당신의 마음이 수축하는 것을 멈추는,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용서를 하면 마음속에 품은 치명적인 원한과 분노의 감정을 놓아주고 마침내 당신을 해방시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용서는 일어난 사건을 없던 일로 지워 버리는 것도, 가해자에게 이익을 안겨 주는 일도 아니다. 단지 내가 지고 있던 고통과 미움의 짐을 덜어 놓는 행위일 뿐이다.
모두가 두 배 되는 인생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심판은 악과 선을 구분하는데 사용하지 사람을 구분하는 데 쓰지 맙시다. 단죄는 윤리 상태를 판정하는 것이지 죄인으로 단정하는 데 쓰지 맙시다. 단절은 악행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지 사람을 끊어버리는 데 쓰지 맙시다.
용서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나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 보약입니다. 화해는 사람과 평화를 나누고 나의 몸과 마음 건강을 길러주는 건강식입니다. 일치는 사람과 하나 되어 힘도 능력도 행복도 모두가 두 배 되는 인생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루카 6,37)”
삶의 목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목표를 잃어 방황입니다. 살아갈수록 목표가 분명해야 힘을 모을 수 있고 방황하지 않습니다. 구체적 목표라기 보다는 인생의 궁극 목표입니다.
어제 70세가 넘은 자매와의 면담성사시 마지막 조언입니다.
"이제 성인이 되는 길뿐이 없습니다.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십시오, 아주 확실한 목표입니다. 이래야 삶이 허무하지 않습니다.“
성인이 되는 목표보다 더 좋은 목표도 없습니다. 바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성인이 되는 지름길이요 우리의 평생목표입니다. 그러니 삶의 모든 계기를 하느님의 자비를 배워가는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자비의 마음은 연민의 마음이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엾이 여기는 마음,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가만히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존재 자체가 가난임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약하고 부족한 인간인지요. 이런 자각에서 샘솟는 연민의 사랑, 자비심입니다.
주님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구체적 네가지 지침을 주십니다.
1.남을 심판하지 마라.
2.남을 단죄하지 마라.
3.용서하여라.
4.주어라.
남을 심판하지 않은 이가, 남을 단죄하지 않는 이가, 용서하는 이가, 주는 이가 바로 자비로운 사람이요 그대로 하느님을 닮은 성인들입니다.
몰라서 심판과 단죄이지, 하느님을 알고 나와 너를 알수록 심판하지 않고 끊임없이 용서하며 나눌 것입니다.
이렇게 자비로워야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바로 이게 우리의 평생 목표인 성인이 되는 구체적 실행지침입니다.
하느님과의 우정을, 친교를 깊이하면서 저절로 하느님을 닮아갈 때 자비로운 사람이, 성인이 됩니다. 이또한 평생과정입니다.
회개하는 기도의 사람, 다니엘 예언자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대로 오늘 미사에 참여한 우리의 기도입니다.
이렇게 부단히 회개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할 때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입어 저절로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하여 이 은총의 사순시기, 우리의 집중적 수행이 회개와 자비의 수행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많은 병 중에 '홧병'이 있습니다. 홧병은 보통 감정의 기복이 심한 경우에 잘 나타난다고 합니다. 또한 가족 간의 갈등, 대인과의 갈등, 억울한 감정이 심화될 때 홧병으로 이어지고 결국 제때 치료하지 못하면 우울증, 가슴앓이, 만성 스트레스 등 신체적인 병으로 발전합니다. 홧병의 치료는 안타깝게도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기 전에는 별다른 치유방법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 한해 동안 11만 5 천여 명이 치료를 받았다니 울화통 터지는 일이 많은가 봅니다. 마음을 키워서 화를 다스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일을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가 이미 용서를 받았고 앞으로도 용서를 받아야 할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마음의 품이 커질 것입니다.
성직자의 어려운 점을 농담 삼아 얘기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면 “너무 직선적이야”하고, 지적하지 않으면“너무 타협을 하는구만!”하고 말합니다. 강론을 할 때 원고를 보고 하면,“너무 딱딱하고 재미없어”하고 원고 없이 하면,“왠지 깊이가 없는 것 같애”하고 말합니다. 여러 예화를 들면 “성경말씀은 도대체 하질 않는구만!”하고 예화를 안 하면“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면 “인기 끌려고 그러는구만!”하며 부자와 가까이 하면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하고 너무 귀족적이야!”하고 말합니다. 이래저래 한 소리 들으니 성직자가 고집스러워지나 봅니다.
누구에게 칭찬을 받는 것은 자기의 역할에 관계없이 좋아라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꾸중을 듣는다든지 비판을 받게 된다면 아무래도 기분이 상하며 마음에 화를 쌓게 됩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그는 나를 바로 보게 도와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바른 인생길 알려는 사람은 훈계를 달갑게 받고 미련한 사람은 책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잠언12,1). 상대의 비판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충고로 그를 구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받기 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넓고 깊은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국 그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시지만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면 혜택을 입을 수 없습니다. 은총은 풍부한데 담을 그릇이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요?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는 이웃을 비판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교부 푀멘은“비판과 험담의 주제에 있어서는 그것들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마음속에서 파헤칠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확실하게 분별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판과 험담하는 입은 스스로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비방하고 험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구에게 충고를 하려거든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주고 아프게 하였다면 그 사람이 악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보다 약해서 악의 세력에 이용당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지요. 악의 세력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선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선한능력이 크게 드러나게 되고 악의 세력은 발붙일 곳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그렇다고 선한사람이라도 그를 우상처럼 섬기지는 마라.”'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주에는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70대의 동생이 80대의 형과 형수를 엽총으로 죽이고, 본인도 자살을 하였습니다. 원인은 지역 개발을 통한 보상금이었다고 합니다. 형은 동생에게 보상금을 나누어 줄 생각이 없었고, 동생은 그런 형을 원망하였다고 합니다. 돈이 없었다면 형제가 그렇게 다툴 일도 없었고, 인생의 끝자락을 비극적으로 마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세상을 떠나면 하나도 가져갈 수 없는 욕망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모 단체에서 ‘종북사제 100인’에 대한 명단을 발표하였다고 합니다. 북한을 따른다는 뜻일 것입니다. 북한은 공산주의 사회이고, 북한은 가톨릭을 탄압한 사회이고, 지금 북한에는 사제가 없습니다. 그런 북한을 따른 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아마도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신 분,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신 분, 개발과 이익을 따르기 보다는 환경의 보존을 더 중요하게 여긴 분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명단에는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동료들도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도시 빈민들을 위한 사목을 하였던 친구입니다. 따뜻하고, 편안한 일을 마다하고, 굳이 힘들고 어려운 길을 선택한 친구들입니다. 그런 친구들이 종북사제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니 마음이 아픕니다. 사상과 이념의 잣대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복음을 전하였고, 나눔과 겸손 그리고 가난과 희생을 이야기 하였던 예수님은 하느님을 모독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로마의 식민통치를 반대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자유와 해방은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셨던 십자가와 섬김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외롭게 십자가를 지고 가셔야 했을 것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비움’을 이야기 합니다. 욕망과 욕심을 내려놓으면 사람이 보인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 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오늘 나옹 선사의 가르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루카 6,38)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줄 때보다 받을 때 더 좋아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받는 것은 결국 내가 준 것 또는 베푼 것을 다른 때에 다른 방식으로 돌려받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주고 베푸는 것은 내가 언젠가는 이자를 붙여서 되돌려받게 될 저축예금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회만 되면 주려고 해야합니다.
기회만 되면 나누고 베풀려고 해야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분이시라고 믿습니다.
오늘도 주고 베푸는 가운데 기쁨의 미소를 머금는 그런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따뜻한 사랑의 모닥불이 되어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최첨단 정보시스템의 발달로 소통 수단이 극도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소통이 끼리끼리에 국한되고,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일 여유를 찾지 못하며, 따뜻한 배려와 관대한 마음을 만나기가 어려워지는 듯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기는 했으나 너무 허술하게 복구를 했었다. 이때 다니엘은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의로우시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남습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다니 9,5. 7. 8)라고 죄를 고백하면서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한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느님 당신은 과거에 우리를 어떻게 돌보신 분입니까?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며 이끌어오신 분입니까? 하느님의 과거 업적을 상기시켜드리면서 용서해 주시고, 다시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다니엘처럼 하느님의 자비를 회상하고,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며 용서를 청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의 자세이며 하느님과 일치하는 길이다. 용서를 청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용서를 받은 다음에 감사드리는 것이 우리 인간의 올바른 태도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비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 남을 용서해주며 남에게 가진 것을 주라고 가르치시면서 우리의 유전자가 사랑임을 상기시켜주신다. 나아가 남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우리가 먼저 행하라고 하신다. 우리의 관대함과 사랑의 실천, 선행의 기준은 오직 하느님뿐이심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자비롭다는 것도 선을 행한다는 것도 ‘다른 사람보다 더’ 행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자비와 선 자체이신 하느님과 같이 행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자비도 선행을 많이 하다고 해도 늘 부족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겸허한 마음을 지닐 때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다른 이들에게 건네줄 수 있을 것이다. 자비란 하느님으로부터 오기에 베푸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자비가 사회적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사회 정의이다. 사랑과 정의는 뗄 수 없는 짝이다. 사랑으로 정의로운 사회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이유가 무엇일까?
제자직의 본질은 하느님의 본성인 자비를 지니는 것이고 그분의 자비로운 처사를 본받는 것이다(6,36). 제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처럼 먼저 ‘내놓아야’ 하며 그래야 종말에 더 후하게 받게 된다(6,38).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동료의 불행을 같이 아파하고 슬픔을 같이 느끼며, 이웃의 필요에 개방되어 있으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과 자선, 도움과 봉사를 제공하고, 이웃을 비판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며 서로 책망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랑의 사람이 되려면 ‘먼저’ 용서하고 내어주고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오직 ‘사랑이요 선이신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며, 사랑의 동기가 아닌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판단을 하느님께 맡겨드려야 한다.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기보다는 인내심과 관대함을 갖고 남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판단은 우월감이나 지배하려는 의도로 해서는 안 되며, 사랑 때문에 그리고 선을 증진시키고 나누기 위해서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거나 자기 잣대로 판단하기보다는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필리 2,6) 다른 이들에게 더 너그러워야 할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할 수 없을 것이다(집회 28,4 참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거듭되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사랑으로 자비를 베푸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것이다(에페 2,7 참조). 각자 멈추어 진심으로 통회하여 자비를 얻고 그 자비를 나누도록 하자. 우리 모두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늘 회상하며 '따뜻한 사랑의 모닥불'이 되어 서로에게 ‘좀더’ 관대하고 ‘먼저’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자비로운 사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난 사순 1주 토요일 복음은 마태오복음으로서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으로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이는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와 “나 주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나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레위기의 말씀들을 마태오와 루카 복음사가가 나름대로 바꾼 것일 겁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은 하느님을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묘사하고, 우리도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은 완전하신 하느님보다 훨씬 친밀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여유롭고 풍성하며 인간미를 풍기게 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시고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왠지 완벽주의적인 것처럼 들려서 우리를 숨 막히고, 경직되고, 날카롭고, 까다롭게 만들 것 같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 저의 수도생활 초기 10년은 이 완벽주의 때문에 망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말을 잘 쓰지 않지만 제가 수도생활 시작할 때만 해도 수도자들은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가난을 청빈이라고 했는데 저는 청빈의 덕에 집착을 했지요. 프란치스코 하면 가난뱅이라고 했기에 청빈에 더 집착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제가 왜 청빈을 추구하지 않고 집착을 했다고 하느냐 하면 바로 제가 완벽주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완벽주의 때문에 지금하고 비교하면 매우 가난하게 살았지만 프란치스코하고 비교하면 너무도 가난하지 않은 저였기에 그런 저를 용서할 수 없었고, 저만이 아니라 가난하지 않은 형제들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완벽주의에 머물 때 우리는 주님께서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라고 말씀하셔도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 안에는 늘 자신과 형제들에 대한 불만, 미움, 분노가 있었고, 급기야는 나 같은 놈은 수도생활을 할 자격이 없다고 절망케 되고, 그래서 결국 수도원을 떠나게 되었지요.
수도원을 나가서 방황을 하다가 복음을 통해서 저의 잘못에 대해 깨닫고 하느님과 수도원의 너그러움 덕분에 다시 수도원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때 저는 완벽주의적인 완덕은 중요치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니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완벽주의란 사랑이 결코 아니고 그저 욕심이고 집착일 뿐입니다. 그리고 저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완벽주의는 완덕에 나아가게 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포기케 만듭니다.
완덕은 사랑에서 가능하고 은총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완덕을 사랑해야 완전에 집착치 않고 자신에 대해서 겸손해야 은총을 받아 완덕을 추구하지요.
그러므로 이제 저는 완전하신 하느님을 믿지 않고 사랑이신 하느님, 자비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저도 사랑하고 좋은 의미에서 저에게 너그럽고 자비롭겠습니다. 저한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그러하겠습니다.
굳이 완전하겠다면 마태오복음이 의도하듯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갈망하고 닮으려고 하겠습니다.
“주어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다니엘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시기에 하느님 부르심을 받고 활동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유배의 생활로 이어졌다고 한탄합니다.
다니엘은 하느님께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합니다.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다니 9,5-6)
그것은 이미 다른 예언자들도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며 왕과 지도자들의 잘못된 이런 죄를 지적했었습니다. 다니엘은 하느님을 거역했던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삶의 지혜를 당부하십니다. ‘베풀고 살라’는 말씀이시지요. 다시말해서 자비를 베풀고 너그러움을 베풀며 살라는 당부이십니다.
우리가 흔히 이웃을 거슬러 잘못을 저지르는 죄는 쉽게 판단하며 단죄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 ‘남을 단죄하지 마라,’ ‘주어라.’ ‘용서하라,’라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러면 주님으로부터 단죄 받지 않고 용서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이 세상에서 고치기 어려운 병 중에 하나가 ‘인색한 병’일 것이지요.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서, 또 믿음의 공동체에서 어떤 위치에서 봉사직을 했다고 해서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의 사촌이 ‘얌체’이고 자기는 소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말로만 남을 시키기 좋아하는 부류’인데 못 고치데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주님 사랑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생활하면서 깨닫게 됩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결국 '자기 욕심'으로 가더라구요. 다니엘이 조상들의 죄를 고백했듯이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는 내 이웃을 거스른 죄를 고백하며 회개의 은혜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채웁시다. 금년도 ‘좋은 생각’ 1월호(48-49)를 읽다가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좋은 말은 진실한 말, 따뜻한 말, 필요한 말’일고 하네요. 저자도 이 말을 20 여년을 간직하며 살고 있는데 어디서 들었는데, 출처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진 마음으로, 행복한 마음으로 지내야 하겠지요?
그래서 내 이웃의 아픔에 함께 하고 내 이웃의 기쁨에 함께 하는 깨끗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작은 것이라고 나누고 작은 잘못이라도 회개하는 사순절의 멋진 월요일을 만듭시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서로를 이끌고
밀어줘야 할 우리가
오히려 서로를
분주하게 심판합니다.
죄의 시작은
심판의 시작이며
심판의 시작은
고통과 앙갚음의
또다른 시작입니다.
심판은 원죄의 비극처럼
서로를 아프게 물어뜯습니다.
우리의 습관적
심판의 악순환을
다시 성찰하게 되는
뜻 깊은 사순시기입니다.
심판의 결과물은
언제나 주님께
나아가려는
모든 노력들을
물거품이 되게합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의 존재를
인정하여 주십니다.
심판과 단죄는
결코 자비와 용서로
우리를 이끌 수 없음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리석음의
악순환을 멈춘다는 건
심판을 우리가
멈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갈 길은
심판의 길이 아니라
용서의 길입니다.
다시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들을 위해
심판의 돌이 아닌
기도의 아름다운
마음을 나누는
은총의 사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몇 년 전에 1,000여명의 신자들 앞에서 강의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선 이 강의 제안을 받고서는 얼마나 긴장을 했었는지 모릅니다. 그전에는 기껏해야 2~300명의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했었는데, 몇 배가 넘는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해야 했으니까요. 강의 날짜가 다가오면서 나중에는 두려워 죽을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밤늦게까지 강의안을 썼다 지웠다 하면서 끙끙댔었지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나는 교우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까봐 내 스스로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아닐까?”
저에게 강의를 부탁했던 이유는 저의 체험과 묵상한 것들을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 기본 목적을 잃어버리고, 단지 내 자신이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만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내가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부차적으로 받는 선물일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충실하게 강의를 준비하고 이 강의를 통해 교우들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그만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으니 강의 준비가 제대로 될 수가 없었지요. 또 걱정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즉, 내가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것이 더 우선해야 함을 이때 깨달았습니다. 열심히 저의 묵상을 나눌 때, 내가 원하던 평가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주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따라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속성을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 속성이 바로 ‘자비’였고, 그래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첫째 복수심을 없애라고, 둘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라면서 이를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앞선 저의 경험에서와 같이, 이러한 자비의 실천을 통해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게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문제는 ‘나’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를 드러내기 위해 다른 이의 죄를 찾거나 이웃의 허물을 들추느라 바쁜 생활을 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을 제대로 된 사람, 주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완전하지 못한 우리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주님 앞에 계속해서 부끄러운 존재가 될 수밖에 없으며, 오늘 복음 말씀처럼 주님의 용서도 또 주님의 은총과 사랑도 받을 수 없음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꽃이 피었다. 햇빛이 머물던 자리에는 열매가 맺혔다. 그러니 바람 한 줌이 햇빛 한 자락이 지나간 세월이 부질없는 것만은 아니다(최갑수).
원하는 것을 말하라(앤디 코프, 앤디 휘태커, ‘자체 발광의 기술’ 중에서)
사람들이 살면서 피하고자 하는 일을 계속 끌어당기는 이유는 부정문을 처리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끊임없이 말한다.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아.” “살이 안 쪘으면 좋겠어.”
말을 몇 마리 가진 이웃이 있었는데 하필 그가 말을 풀어 놓는 곳에 학교 버스가 정차해 학생들이 말들에게 과자를 주곤 했다. 말들은 초코바나 감자 칩을 매우 좋아했다.
시간이 지나자 말들은 눈에 띄게 살이 쪘다. 보다 못한 주인은 “말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마시오.”라고 쓴 표지판을 세웠다. 하지만 아이들은 계속 먹을 주었다. 그러자 주인은 표지판 문구를 바꿨다. ‘제발, 말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마시오!’라고 썼다. 그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행사에서 그를 만났다. 내가 긍정 심리학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것을 알던 그는 나에게 문제를 털어놓았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말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까요?” 나는 웃으면서 종이에 몇 마디를 적어 건넸다. 그는 종이를 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돼요! 정말 이걸로 문제가 해결될까요?”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며칠 뒤 문제는 해결되었다. 말들은 평상시의 체중으로 돌아왔고 털에도 윤기가 흘렀다. 그의 목장 앞을 지나가면 이렇게 쓰인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사과와 당근만 먹어요.”
단순하면서도 긍정적인 메시지다.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말이 아니라 이루어지길 바라는 일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효과가 있다.
좋은 내용이어서 그대로 옮겨 보았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우리의 기도도 이렇게 단순하면서 긍정적인 기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악을 이기는 길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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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9,8)
오늘 1독서로 읽히는 다니엘서의 구절입니다.
이 구절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몇 가지의 생각들이 동시에 떠오르며 지나갑니다.
먼저 우리 민족의 역사가 떠올랐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죄의 연대성이 떠올랐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도 떠올랐습니다.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두고, 이 나라, 이 민족에 대한 아픔을 생각해봅니다.
미화하거나 과장함 없이,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돌이켜볼 수 있다면, 우리 민족 역시 얼마나 많은 회개와 보속의 시간이 필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되짚어보고 싶지도 않은 숱한 살육의 역사.
외세의 침략은 차치하고, 동족들끼리도 수없이 많은 아픔과 생채기를 주고받으며 살아온 역사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 조그만 땅덩어리는 허리가 잘린 모습으로, 같은 핏줄조차 서로 만나지 못한 채로 60년이 지났습니다.
정치적 권력의 횡포로 얼마나 무수한 양민들이 목숨을 빼앗긴 역사입니까?
경제적 권력의 폭력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역사입니까?
가난을 벗어나겠다는 미명하에, 숱한 젊은이들이 용병으로 팔려나간 쓰라린 역사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도시 전체를 폭도로 몰아 천인공노할 학살이 자행되었고 그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 많은 고통의 상처를 교훈으로 물려받은 오늘의 세대는 어떻습니까?
나열하기조차 어려운 온갖 종류의 죄로 물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 많은 희생을 지불하고 얻어낸 민주화의 시계는 거꾸로 돌아가는 듯 하고, 물질이 마음을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어느 한 구석 건강해 보이는 곳이 없는 듯 합니다.
누구의 탓을 할 때가 아닙니다.
탓을 돌리는 역사를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고, 그 결과는 똑 같은 죄의 악순환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치가 썩었다면 그런 정치꾼들에게 표를 준 우리 모두의 도덕적 수준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자세가 우선입니다..
그리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투신적 삶을 보여야 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세상이 아무리 형편없이 돌아가더라도, 아름다운 사람들은 존재해왔고, 존재합니다.
그 아름다운 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사랑하는 민족, 이웃, 친구, 가족이 지은 죄라면 자신의 죄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역시 이와 같은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되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우리의 되가 좀 더 올바른 되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전삼용 요셉 신부님
도스토예프스키는 지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 때문에 천국에서도 도저히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없었던 한 천사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천사는 한 사람이라도 더 천국에 들여보내기 위해 여러 차례 지옥에 있는 사람에게 내려가서 그들을 지옥에서 놓아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할만한 선행을 하나라도 기억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선한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부인이 “거지에게 양파를 하나 준 적이 있어요.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요.”라고 말했습니다. “선한일이고 말고요.” 천사가 하늘나라의 문서 보관소에 올라가서 부인에 관한 서류를 찾아보니 과연 양파에 관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는 양파를 하나갖고 지옥에 있는 부인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이걸 손으로 붙잡으세요. 그러면 나는 이 쪽 끝을 붙잡을 테니. 같이 천국으로 날아 올라갑시다.”
양파가 두 사람의 몸무게를 잘 지탱해주어 그 부인은 천사와 함께 날아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지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보자 부인의 옷과 팔과다리를 붙잡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인에게 매달린 사람들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인 아래 달라붙어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본 부인은 많은 사람들 때문에 양파의 껍질이 벗겨져 자기가 떨어질까 봐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팔꿈치로 다른 사람들을 밀면서 말했습니다.
“당신들 같이 선한 일을 하나도 한 적이 없는 죄인들은 지옥에 남아 있어야 해요.”
그 순간 양파 껍질이 뚝 떨어졌습니다. 천사는 그 때야 깨달았습니다.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죄인이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남을 심판하면 그 잣대로 우리도 심판받고 남을 심판하지 않으면 우리도 심판받지 않는다는 진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해서 다 그렇게 살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남을 심판하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느님은 ‘자비이시고 정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그 잣대로 우리를 심판해서는 누구하나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심판하셔야 하지만, 동시에 자비이시기 때문에 당신 잣대가 아닌 각자 자신이 사용하는 잣대로 우리를 평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노상강도가 나옵니다. 그는 앗티카라는 지방에 살면서 자기 영지를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아 결박하여 자신이 가진 쇠 침대에 누입니다. 그래서 여행자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 길이대로 잘라서 죽이고, 작으면 침대 길이만큼 늘려서 죽였습니다.
그러다가 테세우스라는 영웅이 그 프로크루스테스를 잡게 되었고 그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가 가지고 있던 철 침대에 뉘여서 그가 했던 똑 같은 방법으로 그를 죽였습니다.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대화는 매우 유명합니다. 무학대사를 보고 “당신은 돼지 같소.”라고 할 때, 무학대사는 “임금님은 부처님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연유를 물으니,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남을 심판하는 이유는 그렇게 심판 받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안 좋은 것이 있으니 그것을 통해 상대의 안 좋은 것을 보는 것입니다. 개나 고양이에게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에 꽃의 아름다움을 알 수 없고, 또 ‘착함’이란 것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가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어도 그것이 선행임을 알지 못합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존경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을 존경해주고 인정해 주어야 하는데, 그 반대로 남을 내려누르고 판단하며 스스로 높아지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거울과 같기 때문입니다. 내가 웃어주면 세상도 웃어주고 내가 찡그리면 세상도 찡그립니다. 내가 사랑해주면 넘치는 사랑이 옵니다. 아주 단순한 부메랑의 진리, 이제 내가 세상을 향해 무엇을 던져야 하는지 명확해 졌습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나는 심판하고 단죄하는 전문가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쁘다 밉다 좋다 싫다 같은 감정표현을 강하게 하면 삶이 힘듭니다.
그냥 대충 넘어가고 될 대로 되라며 통 크게 생각이면 그만큼 편해지지요.
나의 삶에 감정을 앞세우면 힘들고, 뒤로하면 덜 힘들어 살기 편해지고요.
그렇듯 대인관계에서도 감정을 뒤로하고 의리로 살면 평온할 겁니다.
남을 심판하고 단죄 한다는 건, 내가 심판하고 단죄하는 전문가란 뜻이지요.
미워할 줄 아는 내가 되어간다는 것, 실은 이게 더 문제라 생각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
<뿌린 대로 거둔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
이 말씀은 "뿌린 대로 거둔다." 라는 속담, 또는 '인과응보, 자업자득' 같은 사자성어와 비슷한데, 차이점이 있다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주권으로 그렇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선을 행하면 상을 주실 것이고, 악을 행하면 벌을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삶'은 나중에 받게 될 심판을 '예약'하는 것과 같고, 사실상 심판의 결과는 자기 자신이 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억울할 것도 없고 불공정하다고 불평할 수도 없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에서 '탈렌트의 비유'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이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어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탈렌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을 도로 받으십시오(마태 25,24)."
이 말은 "주인님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시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투자했다가 손해를 볼까 두려워서 최소한 원금이라도 보전하려고 탈렌트를 숨겨 두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선을 행하려고 했는데 그 일이 악한 결과를 만드는 일이 과연 있을까? 어떻든 그 종은 뭔가를 하다가 잘못되는 것을 피하려고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종의 말은 주인에 대해서 오해를 했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주인은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았음을 꾸짖습니다(마태 25,26-27).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안 한 것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심판'과 '단죄' 라는 말은 사적인 복수를 뜻합니다.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복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복수하려는 마음을 참는 것은 어렵긴 하지만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참을 수 있는데도 안 참고 복수를 해버리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복수심을 참는 것은 할 수 있어도 용서를 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를 용서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정말로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라면 예수님께서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용서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과 용서를 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가 안 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로마 12,19)." 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면 하느님의 정의와 심판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없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저마다 자기가 정의의 심판을 집행하겠다고 나선다면, 세상은 그날로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악과 불의와 맞서 싸우는 것은, 그리고 선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그 방법이 악하면 안 되고, 또 개인적인 앙갚음이 되면 안 됩니다.
그 문제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우리는 악에 굴복하면 안 되고, 악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선(善)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공적인 사법제도를 부정하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법이 제대로 집행될 것입니다. 범죄자의 처벌과 교화는 사법기관에 맡기면 됩니다.
용서와 자비란, 죄를 지어도 그냥 내버려두는 일이 아닙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그런데 이 말씀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는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뜻을 생각하면 모순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회개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용서하기 위해서, 또는 이미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도 있고, 회개시키려고 용서할 수도 있는데, 순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죄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용서를 청하려면 먼저 회개해야 하고, 회개한다면 스스로 보속을 해야(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전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평생 지켜야 하는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지 못할 때가 많아 부끄러운 때가 있지요다. 복음 정신에 대해서 무수히 말하고 떠들어 대면서도 막상 그것을 지켜야 할 기회가 오면 다른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가까운 부부사이에서도 싸움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내 입장 챙기기’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에게 베풀어라.’ ‘남의 입장이 되어보라.’라는 말을 왜 모르겠어요. 이제는 귀가 더덕이가 앉을 지경인데도, 먼저 나를, 또 내 입장을 챙기기 바쁩니다.
어디 부부사이 뿐이겠어요? 아이들에게도 많이 건네는 잔소리의 말도 같은 맥락이지요 이런 말들을 전하는 것은 내 기분, 내 입장에서만 하는 이기심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우리를 가르치시면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마태 6,36-37)
뒤 늦게 깨닫게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손해를 보는 것으로 부터 주님의 복음을 하나라도 실천하면 이미 ‘기쁨과 평화’가 내 주위로 다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내 입장에서 판단하고 내 입장에서 말을 하다보면 어느새 상대방도 마찬가지이지만 내 마음도 갈등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남에게 후하고 너그럽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갖는 신앙의 큰 덕목이라고 하겠습니다.
나이들어 가면서 기쁜 것은 머리카락이 가늘어 지는 것 만큼 내 고집이나 성격도 엷어지고 주위의 환경이나 사람들에 맞추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전 같으면 되건 말건 고집을 부릴 텐데 상대방을 바라보며 그 쪽 편으로 모든 것이 기우러 지고, 그들의 원하는 것을 따라주는 것입니다.
영명축일이 오면 은근히 걱정되는 것은 어떻게 축하를 받는냐 하는 것입니다. 남을 축하해 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받는 것보다는 훨씬 가볍고 부담이 없는 것인데, 웬지 받는 것은 서툽니다.
회장단에서 주일 미사에 오는 교우들을 위해 국수잔치를 하겠다는 더군다나 첫째 미사에 오는 교우들을 포함해서 10시 미사 교중 미사 교우들을 위한 잔치를 하겠다는 무리하는 계획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망설였습니다.
본당신부를 설득하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며 그 의견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주일이 축제의 분위기이고 교우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고집 부리지 않은 것을 주님께 감사했습니다.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빠져서 결국 넓은 면적의 대머리가 되는 것도 주님께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만큼 고집도 줄어들테니까요.
사실 본당신부의 영명축일보다 먼저 St. Patrick‘s Day를 맞는 성인 본인께 감사드려야지요.
주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베푼다는 것은 부유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나누어 주려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요.
내가 나누어 주면 손해이고 나에게 오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때, 비로서 얻는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고 당신의 상처와 수치까지도 내어주시는데, 사실 우리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의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아량을 배우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좋으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며 또 이웃과 나누라고 하십니다. 후하게 남에게 베풀고 후하게 남에게 너그러운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색한 마음이 아닌 하느님처럼 어디에도 바라지 않는 바람처럼 베푸는 하루가 됩시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일곱가지 베푸는 덕목을 함께 볼까요?
1. 안시(眼施): 눈을 베풀라는 가르침은 남을 공격하는 눈이 아니라 인자함을 베푸는 뜻을 말합니다.
2. 화안시(和顔施): 화사한 얼굴을 베풀라는 가르침이지요. 다정다감(多情多感)의 얼굴은 그를 만나는 누구에게나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주는 것입니다.
3. 언시(言施): 말을 베푼다는 뜻은 나쁜 말(분노, 거짓말, 욕설, 험담, 잡담)이 아니고 친정하고 따뜻하고 배려하는 말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웃에게 친절한 말을 베푸는 것은 어려움이 그들에게 용기와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4. 신시(身施): 몸으로 베풀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이웃의 일, 짐을 들어 주기, 설거지 해주기, 함께 눈을 쳐주기 등이 많지요. 그리고 나도 얻는 것이 있네요. 배가 들어가도록 땀이 나는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5. 심시(心施): 마음으로 잘 베풀지 못하는 중생을 가르치는 말씀이지요. 남이 잘되도록 바라는 마음, 자기를 낮추고 남을 올리는 넉넉한 마음을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과 많은 연관이 있습니다.
6. 좌시(座施): 자리를 양보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자를 권하는 것, 좀더 편한 자리는 이웃에게 자신음 불편한 자리로 내려가는 것도 한 가지입니다. 자기가 누리는 좋고 안정된 자리를 이웃에게 기쁜 마음으로 물려주는 것도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지요?
7.찰시(察施): 상대방의 마음을 살피고 그가 원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을 의미하지요. 우리는 모든 이를 다 도울 수는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성실하게 남을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불가에서도 이 베푼다는 ‘보시 (普施)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살면서 차근차근히 행동으로 옮기려 노력하는 데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단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선행을 하려 노력하며 우리가 멈추지 않고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됫박을 바꾸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들은 생각은 나의 됫박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왠고 하면 오늘 주님께서 우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우리가 되질을 받을 거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선 어떤 되이냐 우리는 봐야 합니다. 우리의 되가 미움의 되이면 그 되로 미움을 받을 것이고, 우리의 되가 복수의 되이면 그 되로 앙갚음 받을 것이며, 우리의 되가 단죄의 되이면 그 되로 단죄 받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의 되는 얼마나 큰지를 봐야 합니다. 나쁜 것을 주고받는 것이라면 그 되를 작게 하거나 부숴버려야 하겠지만 좋은 것을 주고받는 것이라면 그 되는 되도록 큰 것으로 바꿔야겠지요.
그렇습니다.
됫박이 커야 많이 받습니다. 음식을 해도 손이 큰 사람이 있고, 무엇을 줘도 펑펑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주변에는 사람도 많고, 그런 사람은 준 것만큼 받는 것도 많습니다. 이는 <주거니 받거니>를 잘해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항아리 물을 비워야 새물로 채울 수 있듯, 또는 논 이쪽으로 물을 빼면 저쪽에서 물이 들어오듯 사실 돈도 그렇고 인간사 많은 것들이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러니 쩨쩨하고 인색한 됫박이란 됫박이 작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건 그리고 그것이 크건 작건, 그것을 움켜쥐고 있음으로 돌고 도는 흐름이 막혔거나 아예 끊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작고 인색한 됫박을 크고 넉넉한 됫박으로 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작은 됫박을 큰 됫박으로 바꾸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의 인간적인 됫박을 아예 하느님의 됫박으로 바꾸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손이 크고, 통이 큰 사람의 됫박이 아니라 사랑의 됫박이고, 하느님 사랑처럼 큰 사랑의 됫박인 것입니다. 아니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한량없는 하느님 사랑의 됫박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나쁜 것을 주고받는 됫박이 아니 되어야 하겠지만 좋은 것을 주고받을 지라도 그것이 사랑이 되게 해야 의미가 있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이 되게 해야 더 의미가 있습니다.
이때 작은 것을 조금 줘도 사랑으로 주기에 사랑이 발생하고, 그것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주면 하느님이 발생할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사랑의 됫박으로 주면 쩨쩨하고 인색하지 않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의 됫박은 그 됫박이 크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많이 주는 것, 곧 수량적으로 많이 주는 것이 아니라 다 주는 것, 아낌없이 그리고 자기 것으로 남김없이 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의 됫박은 늘 빈 됫박입니다. 그러나 비어있어도 늘 또 채워지고 충만한 됫박입니다.
오늘 우리 됫박을 바꿔볼까요?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생명의 원천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단죄받을 수 없는
고귀한 생명입니다.
저마다의 생명이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자비입니다.
우리의 단죄와 심판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갔습니까.
참된 정화는
심판과 단죄를
멈추는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은
자비와 용서로
저마다 소중해집니다.
오늘을 살아있게
하는 것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나와 너의 관계가
심판과 단죄의 관계가 아니라
용서를 주고받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할지를
성찰하고 결심하는
은총의 사순시기였으면
좋겠습니다.
심판은 심판으로
단죄는 단죄로 다가오지만
용서와 자비는
또 다른 용서와 자비로
우리의 오늘을
우리의 삶을
우리의 관계를
부활의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예전에 군대의 훈련소에서 했던 수류탄 투척 훈련이 기억납니다. 훈련을 시키는 교관과 조교들은 수류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잔뜩 겁을 주고, 얼마나 위험한 지를 보여주지요. 그리고 직접 수류탄을 던지는 훈련을 시킵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되었고, 저는 겁이 났습니다. 혹시라도 잡고 있는 이 수류탄을 내 발 밑에 실수로 떨어트리면 어떻게 될까 라는 불안감과 함께 손바닥이 미끌미끌 할 정도로 땀이 나는 것입니다. 잠시 뒤 조교의 투척 사인을 받고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고 던질 때, 저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던졌습니다. 멀리 던지지 못해서 그 파편이 제 쪽으로 날아올 수도 있으니까요.
갑자기 군대에서 수류탄 훈련 했던 일이 생각났던 이유는 용서(Forgive)의 원뜻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원뜻이 ‘풀어 놔주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단순히 툭 떨어트려서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풀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게 잘못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잘못했던 죄까지 모두 나로부터 멀리 떨어질 수 있도록 풀어줘야 한다는 것이지요.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내게 잘못한 사람과 그 사람의 죄까지도 꽉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정적인 기억들이 생생한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수류탄을 멀리 던지듯이, 용서라는 잘못한 사람과 그 죄를 모두 멀리 집어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이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이 바로 용서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마지막 순간에 서 있을 때,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남을 용서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용서와 화해를 모르면 아무리 잘나가는 인생이라 해도 불행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용서를 이야기해주십니다. 우리들이 먼저 용서를 해야 우리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용서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요.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내가 행하는 데로 그대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판하면 심판받고, 단죄하면 단죄받을 것이며, 용서하면 용서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요?
실제로 용서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복수를 꿈꾸는 사람도 많지요. 하지만 그런 복수의 삶이 과연 행복할까요? 하느님께서 분명히 갚아주십니다. 그 사람이 행한 그대로 하느님께서는 갚아주시기 때문에, 심판의 판단을 내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수류탄을 던지듯 과감하게 멀리 집어 던지십시오. 그리고 참된 용서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 용서와 사랑으로 행복의 나라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아주 소박한 손길이 사람을 변화하고 성장하게 한다(에드워드 머로).
주님께 몰입합시다.
본당신부님들이 대체적으로 신학생들을 믿고 많은 일들을 시킵니다. 왜냐하면 본당의 다른 청년들도 있지만, 청년들에게 시키면 일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거든요. 그에 반해서 신학생들은 본당신부님의 말을 잘 듣는 것뿐만 아니라 일처리를 깔끔하게 잘합니다. 똑같은 나이인데도 일하는 모습이 다른 것은 왜 일까요?
몰입하는 것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신학생들은 교회의 사람이 되기 위해 교회의 일에 집중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청년들은 교회의 일뿐만 아니라 사회의 일까지도 해야 하는 상황이라 그렇게 집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몰입의 차이에 따라서 일의 결과도 이렇게 달라집니다. 주님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내가 얼마나 주님께 몰입하느냐에 따라서 주님을 체험하는 것도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순 제2주간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얼마나 주님께 몰입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해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 몰입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것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절대로 주님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6,38)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우리는 결국 자신이 중심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게 되어있다.
자기의 잣대나 저울을 가지고 판단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이라면, 그 잣대나 저울의 눈금을 좀 더 올바르고 정확하게 만들기 위한 싸움이 절대적이다. 그것이 도덕적 자아실현의 길이기 때문이다.
상대적 소신이 많은 세상이다.
문제는 이 상대적 소신이 또 다른 상대적 소신을 만나면 부딪힌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눈앞에 보인다면 불편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이 참으로 유치하기 그지 없다.
우리의 잣대와 저울은 절대로 정확할 수 없다.
이 잣대와 저울의 특징 중 하나는 ‘다르다’는 것과 ‘틀리다’는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측정하는 버릇이 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온갖 종류의 차별과 다양한 폭력은 바로 이 잣대와 저울에서 나왔다.
심지어는 하느님의 이름을 들이대며 온갖 차별을 양산해 온 역사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계셨을 하느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오늘 복음의 메시지는 간단하고 분명하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그분의 가르침이 모든 판단을 위한 잣대와 저울이 되도록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즉, 모든 것을 바라볼 때, 우리의 빗나갈 수 있는 잣대와 저울에 의지하려는 것보다는, 먼저 그분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복음적 삶이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어리석음이 만들어놓은 다양한 차별로 인해서,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다.
우리가 늘 명심해야 할 것은,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서 주신 저마다의 존엄성에 대해 상처를 낼 자격을 가진 이는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루카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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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예쁜 그림이다”라고 가볍게 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보니, 단순한 어린이의 예사 그림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발뒤꿈치를 들고 쓰고 있는 낙서의 내용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너를 만나고 싶다.”
그리고 두 아이의 해맑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다음에는 철조망이,
그 다음에는 탱크와 비행기가, 마지막으로 탱크가 포탄이 아닌 꽃을 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결국, 이 동심 어린 그림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자비를 닮은 아들!
김경진 신부님
우리는 흔히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또는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는 대부분의 자녀가 그 부모의 성품과 인격 등을 닮는다는 얘기겠지요.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하느님을 진정 아빠,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성품인 자비를 닮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보았던 <개구쟁이 스머프>라는 만화에는 여러 성격의 스머프가 나오는데, 그중에서 늘 투덜대기만 하는 스머프가 있습니다. 그런데 투덜이 스머프는 만화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커가면서 알았습니다. 때로는 저 자신이, 또 때로는 우리 중에 그 누군가가 투덜이 스머프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불평, 불만들은 아무에게도 평화를 주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조차도 편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불만이 있는 상태에서 타인에게 만족과 편안함을 가져다줄 여유는 당연히 생각하기 어렵겠지요. 특히 개인적인 감정을 보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해 불편한 감정을 묻어두면 냄새나고 어색한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것은 정말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힘이 잠재된 능력을 끌어올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먼저 주님에게 사랑받고, 용서받고, 이해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다고,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보다는 먼저 사랑하고 이해하며 불평 대신 화목을 조성하는 지혜를 주님께 청해 봅니다. 그것이 내가 투덜이 스머프가 되지 않는 비결입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귀엽고 사랑스러운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백발노인이 산모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위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테니 말하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망설임 없이 이 아이가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아이’가 되길 소망했습니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소망대로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받는 사랑에 익숙한 나머지 작은 일 하나에도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했습니다. 결국 그의 삶은 점차 비참과 황폐로 변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의 백발노인이 다시 나타나서 그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한 그가 말했습니다.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사랑을 받으며 산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위험한 건 없습니다. 받는 사랑에 익숙해지면 그 사랑에 의지하게 되고 결국 그 사랑의 노예가 됩니다. 자신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사랑을 원한다면 먼저 베푸는 것이 얻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은 부메랑과 같다고 하나 봅니다. 지금 당장 돌아오지는 않지만 그 사랑은 분명 엄청나게 커져서 되돌아옵니다.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요 진리입니다.
-“행복을 전하는 우체통” 中에서-
태양은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빛과 따듯함을 세상에 주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주려고 해서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세상에 베풀고 있는 것이고, 그 대가도 그대로 세상으로부터 받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베풀면 좋은 것으로 되돌려 받고, 나쁜 것을 베풀면 나쁜 것으로 되돌려 받습니다.
해 바라기를 보십시오. 해바라기는 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자기 머리를 돌리며 해를 바라봅니다. 밤이 되면 머리를 다시 돌려서 해가 뜨는 동쪽으로 머리를 옮겨놓습니다. 태양을 사랑하고 태양을 닮았습니다. 왜 태양은 이 해바라기에게 그렇게 사랑과 관심을 받을까요? 이 해바라기가 필요한 것을 주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그 덕분으로 해바라기의 관심과 사랑을 되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 늘 복음은 온통 ‘부메랑’이 떠오르는 말씀들입니다. 자비를 베풀면 자비를 받고, 심판하면 심판 받고, 단죄하면 단죄 받고, 되질해서 주는 그 되로 되돌려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안다면, 제대로 안다면 행복하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을 주면 행복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면 되고, 웃고 싶은 사람은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주면 됩니다.
4.19 혁명이 나자 3.15부정 선거에 관련된 어느 교도소 소장 한 분이 잡혀 들어갔습니다. 이 소장이 현직에 있을 때 출정하는 피의자들에게 수갑과 오랏줄을 꽁꽁 묶도록 간수들에게 항상 명령하고 했답니다. 그래서 별명이 ‘꽁꽁 묶어라 소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죄인으로 잡혀 와서 자신이 묶이게 되었는데 간수들이 미운 생각이 들어 아주 꽁꽁 묶었습니다.
그때 ‘꽁꽁 묶어라 소장’ 이 애원하기를 간수에게 “담당님 제발 꽁꽁 묶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간수는 대답하기를 “소장님, 소장님이 항상 꽁꽁 묶어라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묶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는 대로 받는다는 진리, 이것만 깊이 깨닫는다면 재물도 풍요해질 수 있고, 사랑도 많이 받을 수 있고, 항상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베풀고, 항상 사랑하고, 항상 행복하게 해 줍시다. 항상 몇 배로 되돌아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준 것을 받고, 준 것만큼 받는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Q: 나는 무엇을 받게 될까?
A: 준 것을 받게 된다.
이것이 오늘 저의 묵상 알갱이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는 준 것을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욕을 하면 욕을 먹습니다.
칭찬을 하면 칭찬을 받습니다.
욕을 먹고도 칭찬을 한다면 욕을 참 잘한다는 비야냥의 칭찬이거나 욕을 먹어도 칭찬밖에 할 수 없는 성인의 칭찬일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다 같다고 할 수 있으니 욕먹고도 칭찬할 정도로 선하지 않고 칭찬받고 욕할 정도로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무엇인고 하면 준 것을 받는다고 할 때, 인간에게만 준 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준 대로 받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욕을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욕을 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 입에서는 절대 욕이 나오지 않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마치 산울림으로 되돌아오듯 우리에게서 나온 대로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되더라도 주는 대로 받는 것이지요.
그것은 마치 창과 같아서 사랑의 창은 사랑이 드나들고 미움의 창은 미움이 드나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의 말씀에는 <준 것을 받는다>는 말씀도 있지만 <준 것만큼 받는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우리는 두 개의 되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주는 되는 작고 받는 되는 크고 그럴 수가 없습니다.
주는 되나 받는 되나 똑같고, 주는 되로 받는 것이기에 준 것만큼 받습니다.
어렸을 적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사랑이 많다고 심리학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풍성히 받아 사랑의 그릇이 커진 사람은 그 큰 그릇에 가득 찬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을 할 것입니다.
빗물을 받아 밥물과 씻을 물을 쓰던 시절, 빗물을 많이 받기 위해 큰 항아리를 마련해 추녀 끝에 놓듯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사랑 많이 받기 위해 오늘 우리도 큰 사랑 항아리 하나 기도의 추녀 끝에 마련해 놓도록 합시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저마다 다릅니다.
삶의 조건과 상황 또한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정직한 고백은
그 사람을 심판하기엔
아직도 그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자신도
우리자신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데
그 누구를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죄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하느님의 자녀를
평가절하하는 어리석음을
이제는 멈추어야합니다.
또한 지나친 관여와 간섭,
개입은 또다른 심판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합니다.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할줄 아는 사람은
이웃-형제도 진정으로 존중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기다려주고 지켜봐주는
기도의 시간이
어찌보면 더 큰 사랑이 됩니다.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은
상대도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자신에게 필요한 되질은
‘감사의 되질’입니다.
우리 자신부터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갖고 산다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심판하는
그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함께 성장해 가야합니다.
나를 받아들이지 못함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함과 같습니다.
늘 심판하는 눈을
이제는 외부에서 내면으로 돌려
우리의 마음을
진실된 사랑의 마음으로 바꿀 때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함께 살아야 할 모든 이들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이웃들이 됩니까.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고 해서
다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너무 나의 기준에만
맞추려하는 우리의 이기심과
자기중심이 문제입니다.
되질당하는 콩처럼
우리 존재가 더 작아지고
겸손해지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심판할 사람이 많다는 것은
우리자신이 심판당 할 것도 많다는 것을
기억하여야합니다.
심판은
문제해결책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심판은
하느님자녀들 사이의
건강한 소통방법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서로의 존재를 거부하지 않는
정중한 인정입니다.
자신만의 이익과 만족만을 쫓는
묵은 방법의 되질이 아니라
성숙과 성장이라는
기도와 감사라는
새로운 되질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낡고 오래된 심판을 버려야
새롭고도 맑은 사랑의 눈이 트일수 있습니다.
결혼 조건은 무엇일까요? 사랑만으로 결혼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사랑만으로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현실이 현실인 만큼 까다로운 결혼조건을 내세우는 것이 현명한 모습이랍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말하는 남자 결혼조건 순위는 첫째가 경제력, 둘째가 성격, 셋째가 안정된 직장이라고 합니다. 반면 남자가 말하는 여자 결혼조건 순위는 첫째가 외모, 둘째가 성격이랍니다.
이렇게 결혼조건에 만족하면 사랑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까요? 요즘 점점 한국 사회의 이혼율이 높아진다고 하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그 조건 때문에 나중에 헤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조건에 적합해서 선택한 사랑이지만, 이 조건이 헤어지게 만드는 이유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조건, 저런 조건을 내세워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을 골라서 사랑하기가 쉽던가요? 그러한 사랑은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사랑은 조건을 먼저 내세울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으로 할 때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조건 실천하는 사랑이 나에게도 똑같이 완전한 사랑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세속적인 조건을 통해서는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의 어렸을 때를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값비싼 장난감을 선물로 받았었습니다. 너무나도 기쁘고 신났지요.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선물에 행복을 느낄까요? 아닙니다. 당시에 그렇게 기뻐했던 그 선물을 지금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떻게 생겼던 장난감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했던 사랑의 추억만이 지속적인 행복을 제게 가져다주더군요.
주님께서는 조건이 사랑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특히 우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용서를 이야기하시며 조건 없는 사랑의 실천을 이러한 이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무조건 심판하지 말 것이며, 무조건 단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무조건 용서해야 하며, 무조건 줄 수 있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행하는 것들을 통해 내가 온전히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의 관점에서는 손해 보는 것 같고 억울한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들이 가지 않은 그 하늘나라에서 몇 배로 되 값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조건 없이 우리들을 사랑하셨던 주님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조건을 내세우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사랑이 아닌 아낌없이 내어주는 참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친구를 용서하는 것보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다.(윌리엄 블레이크)
부자가 되고 싶다면...
피터 번스타인이 포브스 선정 부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부자들의 이혼율은 30퍼센트에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 전체 이혼율 50퍼센트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지요. 미국 부자들은 걸핏하면 이혼을 한다는 통념과 전혀 다른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 전체 이혼율보다 낮은 이혼율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삼성경제연구소가 CEO회원 48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98퍼센트가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배우자의 내조가 있었다.”고 응답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가정 안에서의 사랑이 직장에서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가 되길 원한다면? 먼저 나의 배우자와 조건을 내세우는 사랑이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준다는 것
신헌문 신부님
몇 년 전 소임이동 때문에 짐을 꾸리던 중 우연히 라디오를 듣게 되었습니다.
메조소프라노 김청자 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춘천이 고향인 그녀는 선교사 신부님들로부터 음악을 배워 성악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70년대 말 유행가처럼 많이 불렸던 가곡 ‘비목’을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입니다. 대학교수로 활동을 하던 그녀는 해외여행을 하다 아프리카를 여행하게 되었고, 그곳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열심히 공연을 하여 그 수익금으로 아프리카에 우물을 파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년퇴임을 하게 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정리하여 아프리카로 아주 간다고 합니다. 재봉틀과 오르간을 사서 그곳의 청소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기술을 가르쳐서 가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 싶다
합니다. 아프리카의 짙은 녹색과 검은 피부, 그리고 하얀 눈동자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합니다. 하나뿐인 아들도 어머니의 재산에 욕심을 내지 않고 오히려 “어머니 축하합니다!” 하더랍니다. 자신의 노후대책은 펀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바치는 것, 아프리카에 ‘제2의 김청자’를 만들어 그 청아한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아프리카에 몽땅 주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넘치도록 받고 있는 듯 목소리에 행복이 가득했습니다.
내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탈렌트는 무엇인가요?
작은 되? 큰 되?
김태완 신부님
하느님과 같아지라니… 하지만 투정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어렵사리 발걸음을 떼어봤더니 예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다. 예수님 제자가 된 탓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탓에 손해만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우리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우쳐 주십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되질하는 그 되로 되받을 것이기에 마음 한구석 위안이 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갚아주신답니다. 후하게 갚아주신답니다. 우리의 되가 큰 되이면 그 큰 되로 듬뿍듬뿍 퍼주실 것이고, 우리의 되가 작은 되이면 그 작은 되로 우리의 은총 자루가 가득 찰 때까지 몇 번이고 듬뿍듬뿍 퍼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입니다.
하느님의 수고를 덜어드립시다. 후하게 갚아주시기 위해 우리의 보잘것없는 작은 되로 몇 번이고 되질하실 하느님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립시다. ‘이 정도면 됩니다. 그만 주셔도 됩니다.’ 적당히 사양할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작은 되를 큰 되로 바꿔 드립시다. 심판과 단죄가 아닌 자비와 용서, 그것도 적당히 자비하고, 적당히 용서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그렇게 합시다. 우리의 되를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바꿔 드리는 것입니다.
또 힘이 듭니다. 그래도 노력합니다. 이것이 희생이요 극기의 공로가 됩니다.
용서의 됫박을 만들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란 죄에 대한 망각이 아니다.
용서란 죄에 대한 묵인도 아니다.
용서란 죄에 대한 관대함도 아니다.
용서란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지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죄에 방종케 하는 게 아니다.
죄로부터 그를 살려내는 것이 그 목적이지 죄 때문에 죽든 말든 내버려두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에 실패함은 거짓 용서를 하기 때문입니다.
거짓 용서를 용서로 착각하기 때문인데 특히 자기를 거짓 용서하고서는 용서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살다보면 다 죄 짓고 사는 거지 하면서 죄를 묵인하는 것이 용서라고 생각하고 죄를 눈감아주고는 용서했다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를 했는데도 뭔가 찜찜합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생명을 살아야 용서가 진정 이루어진 것인데 여전히 죄의 상태에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일을 보고 뒤처리 하지 않는 것과 같고, 보지 않고 살거나 못 본 체 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기를 용서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용서의 체험이 있어야 남에 대해서도 용서할 수 있는데 죄에 대한 이런 태도 때문에 나도 남도 용서를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됫박이 형성되지 않았으니 되질을 아예 할 수 없습니다.
용서를 되질해 줄 수도, 용서를 되질해 받을 수도 없습니다.
어색한 칭찬, 익숙한 비판
송동림 신부님
어렸을 때 칭찬 · 인정 · 애정을 충분히 받으면 건강한 자존감, 건전한 자신감, 이상적인 대인관계 형성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데, 나는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만큼 공부나 운동, 예능 등에 두각을 드러낸 적도 없고, 부모님이나 선생님들한테 존재 자체로 칭찬을 받은 기억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어렴풋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께 인사를 잘해야 한다.’ 는 어머니의 말씀이 귀에 익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사를 하면서 가끔 칭찬을 받은 기억이 전부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칭찬에 익숙하지 않아 누군가 칭찬을 하면 어색해한다. 상황에 따라 상대방의 칭찬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편안히 그 기분을 느껴보면 좋으련만 ‘그저 예의상 형식적으로 건네는 말씀일 것이다.’ 하면서 애써 부정한다.
칭찬은 최선을 다하게 하고, 특히 인간을 변화시키는 데 좋은 자극이 된다. 그러기에 칭찬의 필요성과 중요성과 그 위력을 아는 지금은 가능한 어린이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칭찬할 만한 모습을 보려 하고 칭찬을 하려고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는 말씀을 건네신다. 사실 심판과 단죄에는 부정적 시선이 전제되어 있어서 많은 경우 비판이 뒤따른다. 물론 비판에도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개인이 먼저 배우고, 가족 또는 이웃에게 우선적으로 가르쳐야 할 부분은 심판이나 비판보다는 칭찬과 칭송이고, 단죄나 정죄보다는 인정과 애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아가 교인이나 교회를 비판하는 법보다는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우고 또한 배우게 하는 것이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기인 듯하다.
하느님의 자리
한모세 수사님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길 원하시면서(36절), 하느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 분인지를 먼저 보여주십니다.
루카복음 6장 27절 이하부터 오늘 복음까지 대응 구조를 이루고 있는 내용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행위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에게 잘해 주고,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뺨을 때리는 이에게 다른 뺨을 내어 주고, 달라는 이에게는 모두 내어 주는 것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해 주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게서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신"(35절) 분이심을 구체적으로 알게 됩니다.
이에 비해, 이어지는 37절과 38절은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기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구체적인 태도를 지시해 주고 있습니다.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용서하고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명령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할 때, 부모는 당연히 아이의 잘못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 절대적인 판단은 오로지 하느님께 유보되어 있으며, 진정한 용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예수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느님의 자비가 무엇인지를 깨닫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뿌린 대로>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3월 5일의 복음 말씀에서 '뿌린 대로 거둔다.' 라는 속담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 속담에서 다시 생각나는 것이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마태 13,27)"
또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길에 떨어진 씨, 바위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 가운데로 떨어진 씨도 생각납니다.
뿌린 대로 거둘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일을 하다가 실망하고 지치는 일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사랑을 뿌렸는데 배신을 얻게 되면 사랑할 용기를 잃게 됩니다.
자비를 베풀었는데 이용만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비를 베푸는 일을 계속할 힘을 잃게 됩니다.
용서를 베풀었더니 회개하기는커녕 더 큰 악을 행하는 것을 보게 되면 용서할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인간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뿌린 대로 거두지 못할 때가 생기는 실제 현실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3-4)."
이 말씀은 '사람에게서 받으려고 생색내지 마라.
사람에게서 받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라는 약속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3월 5일의 복음 말씀을 다시 생각하면, '뿌린 대로 거둔다.' 라는 뜻은 맞더라도 어디에 뿌려서 어디서 거둘 것인지는 좀 더 묵상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뿌린 대로 저 세상에서 그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일들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그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인간에게 뿌려서 인간에게서 거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서학에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종말론적 동태보상법'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신학 용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가 한 일의 성과를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합니다. (생색내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어떤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푼 다음에 그 사랑과 자비가 어떤 결실을 맺는지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바라는 대로 좋은 결실을 맺는 것을 보게 되면 좋은 일인데, 만일에 바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된다면 실망하게 되고, 지치게 됩니다.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때에는 그 사람이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용서받을 때만 해도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워하던 그 사람이 돌아서서는 자기는 원래 잘못한 것이 없었다고 말하고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분이 소년 가장 돕기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어떤 소년을 후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자기의 후원을 받는 그 학생이 받은 도움에 감사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소년의 집에 가보았더니 보내준 후원금으로 컴퓨터 게임CD만 잔뜩 사서 쌓아놓고 하루 종일 게임만 하고 있더랍니다.
너무 실망한 그분은, '내가 왜 이런 후원을 해야 하나.' 라는 생각으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는...
사람은 사람에게 실망할 때가 많지만, 하느님은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뿌린 대로 거두지 못하더라도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정확하게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받으려고 하지 말고 계속해라.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니."
여러분, 놀부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천국? 지옥? 당연히 지옥으로 떨어졌겠지요. 아무튼 놀부가 지옥에 갔는데, 집행관이 똥물과 깨끗한 물이 담겨 있는 두 개의 그릇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두 그릇 중에서 상대방 얼굴에 바를 그릇을 선택하라.”
놀부는 당연히 똥물이 담긴 그릇을 들고 상대방의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재미있는 것도 시키는 이 지옥도 괜찮구나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똥물을 상대방의 얼굴에 다 바르자, 집행관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부터 상대방의 얼굴을 핥아라.”
준대로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최고의 것을 받고자 한다면 최고의 것을 주어야 하고, 최악의 것을 받고자 한다면 최악의 것을 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받고자 하십니까? 그리고 나는 다른 이웃들에게 어떤 것을 주고 있나요? 스스로는 최고의 것을 받으려고 하면서도, 최악의 것을 이웃에게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에게 소중한 가치라고 하면, 사랑, 용서, 자비, 평화 등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소중한 가치가 당연히 내 안에 간직되어야 하는 가치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내가 그러한 가치들을 내 이웃에게 베풀지 않으면, 내 것이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이웃에게 최고의 가치를 선물하기 위해서는 남과 비교하는 마음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장미꽃이 어느 날 호박꽃에게 “호박꽃도 꽃이냐?”하면서 빈정댑니다. 그러자 호박꽃은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너는 호박이라도 열리냐?”
이렇게 비교한다는 것은 슬플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가치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기쁨과 함께 소중한 가치를 나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들은 김연아 선수의 멋진 피겨스케이팅 장면을 보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장면을 보면서, “왜 나는 저렇게 타지 못할까? 왜 내 자녀는 저렇지 못할까?”하면서 비교한다면 기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연기 그 자체만을 바라볼 때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비교를 통해서 중요한 가치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모습 안에서만 우리들은 기쁨 속에서 소중한 가치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생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으로,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으로 다가온다(라 브뤼에르).
두 주인('좋은 글' 중에서)
개 한 마리가 두 사람을 따라가는 상황에서 그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동안에는 그 개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갈림길에 이르러서 한 사람은 이 길로 다른 사람은 저 길로 갈 때, 그 개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세속적이고 신앙적이기도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주인이 하느님인지 세상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갈림길에 이르면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길로 부르시고 세상은 저 길로 부를 때, 그 사람의 주인이 하느님이라면 그는 세상을 버리고 믿음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주인이 세상이라면 그는 하느님과 양심과 신앙을 버리고 세상과 욕심을 따를 것입니다.
그대로 따라 하다.
김효준 신부님
운전면허학원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운전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면허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운전공식’도 가르쳐줍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어쨌든 가르쳐준 공식대로 똑같이 따라 하면, 어렵지 않게 시험에 합격할 수 있습니다.
수학에는 수학공식이 있고, 과학에는 과학공식이 있습니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공식에 대입해서 문제를 풀면 쉽게 답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인들의 삶을 본받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기는데, 하느님처럼 되라니요? 절대 풀 수 없는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문제를 풀 수 있는 쉬운 공식을 알려주십니다.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이 공식에 따라 살면,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고, 성인의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대로 따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라는 물음은 무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공식에 따라서 그대로 살다 보면, 그런 물음의 답은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압도적이면서도 낮추는 자비로운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난 토요일, 마태오복음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루카복음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자비로운 사람이란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고 그 반대로 용서하고 주는 사람이란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이렇게 초대하시는데, 우리가 정말 그렇게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되려고 하면 될 수 있는 것이고, 노력을 좀 하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린다면, 되려고는 해야겠지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곧 주님께서 초대하셨으니 되려는 의지는 가져야겠지만 나의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버지 당신의 자비를 주십사고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비란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가져야 가능한 것인데 애초 우리는 하느님 같은 사랑이 없습니다.
기껏 사랑이라고 가진 것이 자비로울 수 있는 사랑은 아니고 좋아하는 것을 바라고 가지려는 사랑 정도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정도입니다.
이런 정도의 사랑이니까 당연히 좋아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자비로운 사랑은 이런 풋내기 사랑보다 월등할 뿐 아니라 사랑 중에서 가장 압도적이고 가장 월등한 것입니다.
본래 자비롭다는 것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가 아니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줄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랑을 가져야 용서도 하고 필요로 하는 무엇을 남에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애가 무슨 짓을 해도, 손자가 할아버지 수염을 끌어당겨도 “허허 그놈 참!”하고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판단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으려면 한없이 낮추어야 합니다.
판단과 단죄는 윗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실은 하느님께만 유보된 것이니 만약 누가 남을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자신이 그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것이고 자기는 죄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러므로 판단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음은 자신을 낮게 여기고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고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판단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 자비로운 사랑은 압도적이면서도 낮추는 사랑인 것입니다.
주는 대로 받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바티칸 박물관에 들어가면 브라만테가 설계한 팔각정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칼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잘라 손으로 들고 있는 조각상이 있습니다.
머리가 잘려진 여자는 메두사입니다.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인으로 나옵니다. 그는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정작 포세이돈을 좋아하던 처녀신 아테나가 있었습니다. 포세이돈은 메두사와 아테나의 신전에서 사랑을 나눔으로써 아테나는 그것을 목격하고 크게 화가 나 메두사에게 저주를 내립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뱀으로 만들어버렸고 그녀의 눈을 보는 누구든 돌이 되게 해 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영웅 페르세우스를 보내어 메두사를 죽이게 합니다.
페르세우스는 아테나가 준 방패로 메두사의 얼굴을 반사시켜 자신이 자신의 얼굴을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목을 벤 것입니다.
저는 이 동상을 볼 때마다 결국 다른 사람을 통하여 보이는 모습이 나의 모습임을 재차 느낍니다. 메두사는 결국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고 그렇게 죽게 된 것입니다.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이웃에게 화가 나는 것은 결국 나의 모습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주는 대로 받는다는 이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주는 대로 받는다는 아주 단순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삶에 적용시키며 살기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랑 하여라. 그러면 사랑 받을 것이다.’
사랑을 받고 싶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하여라. 용서받을 것이다.’
용서는 받고 싶지만 용서하기 싫은 경우도 있습니다.
‘판단하지 마라.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남에게 판단 받는 것을 누구도 좋아하지 않지만 살아가면서 많은 판단을 하고 삽니다.
사람에게 있는 가장 큰 착각 중의 하나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상대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란 착각입니다.
따라서 내가 다른 사람을 자주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나를 그렇게 판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대가 판단을 하지 않아도 불안하고 두렵기까지 하고 자신의 단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부자유스럽게 됩니다. 자기가 판단하며 사는 것 때문에 그대로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판단하며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미워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가족처럼 느껴져서 말이나 행동에서 편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면 얻게 되는 보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사랑만 받으셨습니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사랑하면 사랑으로 보답하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는 사람들은 너무 육체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체에서 나오는 것은 육체적인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한 영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께는 기대가 실망으로 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믿고 의탁하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다 잘 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는다면 그 믿음은 온전히 삶의 편안함으로 보상받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이고 믿기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 의미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께 잘못하고 있는 것이 많다면 하느님께서도 내 믿음대로 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스스로 내리기 때문에 불안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음 차원이기 때문에 이성으로는 바꿀 수 없는 판단입니다.
따라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좋은 것만 주십니다. 주님은 정의 자체이시기 때문에 받는 대로 돌려주십니다.
항상 내가 주는 대로 돌아온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내가 받고 싶은 것을 주며 살도록 합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따님 장례식 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녁기도를 하러 성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사무실에 손님이 계시길래 어떤 분인가 하고 들어갔더니 연미사를 신청하러 오신 할머님이셨습니다. 그냥 인사만 하고 나오려다가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할머님은 망연자실, 자포자기한 모습, 기력이 하나도 없는 얼굴이셨기에 제가 여쭈었습니다. "할머님, 댁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목 메인 할머님의 말씀을 듣던 저는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할 말을 다 잃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따님 장례식을 치룬 날이었답니다. 이제 겨우 40대 중반인 딸, 남한테 죽어도 싫은 소리 못하는 착하기만 했던 딸, 평생 가족들 뒷바라지하느라 생긴 스트레스성 병으로 세상을 떠난 딸을 생각하니 너무도 억울해서 못살겠다고 하셨습니다.
딸 장례식에 가서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노라고, 하루 종일 분을 삭이느라고 여기저기 다니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가슴이 찢어지는 할머님의 고통을 앞에서 "힘내시라" "기도하겠다"는 말조차 꺼내기가 조심스러웠습니다.
할머님은 아마도 요 근래 밥 한술 제대로 뜨시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시다가 쓰러지시겠다 싶어서 아이들 식사시간인데, 가셔서 밥 한술이라도 뜨고 가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마지못해 따라오셨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시끌시끌한 아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본 할머님은 힘겹게 밥을 좀 드셨습니다. 한 마음씨 예쁜 아이가 할머님께서 뭔지 모르지만 힘들어하신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반찬을 더 가져오고 국도 좀 더 떠드리는 등 곰살맞게 할머니 시중을 들어드렸습니다. 얼마나 기특하던지요.
이 세상에는 한없이 깊은 슬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나 십자가에 속울음 우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지요?
할머님의 주체 못할 큰 슬픔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의 속마음 안으로 들어가 본다면, 그가 안고 살아가는 남모르는 슬픔이나 고통, 짙은 상처를 알게 된다면 섣불리 상대방을 판단할 수 없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비판하지 말. 남을 단죄하지 마라. 남을 용서하여라. 남에게 주어라."
결국 자비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평생 동안 지고 온 무거운 십자가를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오늘 오후에는 한 아이와 함께 추모의 집을 찾았습니다. 작년 이맘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골이 보관되어 있는 납골당엘 갔습니다. 아버지의 유골 앞에서 아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굵은 눈물만 뚝뚝 떨어트렸습니다. 아이의 처지가 너무나 딱했습니다. 이제 겨우 15세인데, 엄마는 어디 계신 줄도 모르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유일한 연고자인 형은 행방이 묘연하고...
아이가 한 평생 지고 갈 외로움이나 허전함, 상처나 번민을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짠해왔는지 모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 원한다면 이웃의 상처를 주목해야만 합니다. 그의 말 못할 고통, 깊은 슬픔, 남모르는 사연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켜야만 용서가 시작됩니다.
결국 용서는 한 인간 존재를 연민의 눈, 측은지심의 눈,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시작됩니다.
어느 마을에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늘 천당 가기를 빌었지요.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를 받아주기로 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걸었어요. 이제 절대로 남을 비판하지 않겠다는 조건, 한 번이라도 다른 이를 비판하면 천당에서 내쫓겠다는 조건을 걸었지요. 그는 무엇을 보더라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렇게 천당에 가게 되어 식당에 들어가니 한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숟가락을 놔두고 포크로 국물을 떠먹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겨우겨우 참았답니다.
그 다음날 길을 가는데 한 사람이 물을 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을 보니 밑에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한소리 해주려다가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았습니다.
그렇게 입에서 말이 나오는 것을 참고 참아 다시 길을 가고 있는데 마차가 개울에 빠져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한 사람은 이쪽에서 꺼낸다고 잡아당기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저쪽에서 당긴다고 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참다 참다 도저히 답답해 참을 수가 없어 급기야 비판을 했지요.
“어이구, 이 바보들아! 수레를 빼내려면 한 명은 잡아당기고, 한 명은 밀어주어야지…….”
그 순간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오더니 약속을 어겼으니 쫓겨나야 한다면서 다시 한 번 그 장면을 보라고 했습니다. 그 장면들을 본 그 사람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장면에 나와서 행동하고 있는 사람, 즉 포크로 국물을 떠먹고 있는 사람, 밑 빠진 독에 물을 긷고 있는 사람, 수레를 꺼내려는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바보라고 비판을 하고 있었지만, 그 비판의 대상은 바로 자기라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 비판의 내용들을 잘 보면 결국은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나 역시도 그렇게 잘못된 모습을 똑같이 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대로 하고 있는 듯 한 착각 속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이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를 이렇게 정리해서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내가 하는 행동에 따라서 나 역시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더 많은 것을 받을 수 있는 베푸는 길, 나눔의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이 따뜻하게 전달되고 차디찬 마음이 차디차게 전달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진정한 나눔이 가득한 사순시기가 되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잔소리하는 대로가 아니라 격려해주는 대로 된다.(영국 속담)
마음을 바꾸면(‘좋은 글’ 중에서)
삶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 원인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일은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으로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물질의 삶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을 바꾸려면
먼저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근심에 젖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늘 근심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용기 없고 기죽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일을 해도 실패하기 쉬우며
다른 사람한테 의지를 하게 됩니다.
희망과 자신감,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분명한 목적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는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어 갈 수 있습니다.
반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릴 적 놀이 중에 ‘반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놀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그냥 남이 자신에게 안 좋은 말을 하면 ‘반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다른 친구에게 바보라고 했다면 그 친구는 재빠르게 ‘반사’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그 말을 한 사람이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다시 반사’라고 외치면 상대는 ‘또 반사’라고 합니다. 이렇게 바보라는 말은 서로 자신이 바보임을 인정하지 않는 둘 사이를 왔다갔다 거립니다.
오늘 예수님은 복음에서 이 반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주는 대로 받는다는 아주 단순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삶에 적용시키며 살기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랑 하여라. 그러면 사랑 받을 것이다.’
사랑을 받고 싶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하여라.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판단하지 마라.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많은 판단을 하고 삽니다. 그러면서 남이 나를 판단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이 ‘반사’의 원리는 이웃이 바로 나의 거울이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즉, 내가 이웃을 판단하는 것은 결국 이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숨겨놓은 안 좋은 점들을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친구가 다른 친구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저는 그들이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둘은 참 닮은 데가 많아.”
그 친구는 움찔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눈치를 챈 것 같았습니다. 내가 비록 행동하면서 살지는 않아도 내 안에 숨겨진, 혹은 억눌려진 안 좋은 면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나타날 때 그것을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판단하는 꼴입니다.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유다를 비롯해 사도들, 그 분께 은총을 받은 사람들까지 그 분을 배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마음 안엔 배신의 마음이 전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을 슬픈 연민어린 눈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내 안에 죄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죄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저는 로마에서 자칭 ‘바티칸 베테랑 가이드’라고 자부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가이드와는 달리 신학적인 면까지 첨가하여 가이드를 해 주기 때문입니다.
바티칸 박물관에 들어가면 브라만테가 설계한 팔각정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칼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잘라 손으로 들고 있는 조각상이 있습니다.
머리가 잘려진 여자는 메두사입니다.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인으로 나옵니다. 그는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정작 포세이돈을 좋아하던 처녀신 아테나가 있었습니다. 포세이돈은 메두사와 아테나의 신전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고 아테나는 그것을 목격함으로써 크게 화가 나 메두사에게 저주를 내립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뱀으로 만들어버렸고 그녀의 눈을 보는 누구든 돌이 되게 해 버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영웅 페르세우스를 보내어 메두사를 죽이게 합니다.
페르세우스는 아테나가 준 방패로 메두사의 얼굴을 반사시켜 자신이 자신의 얼굴을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목을 벤 것입니다.
저는 이 동상을 볼 때마다 결국 다른 사람을 통하여 보이는 모습이 나의 모습임을 재차 느낍니다. 메두사는 결국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고 그렇게 죽게 된 것입니다.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이웃에게 화가 나는 것은 결국 나의 모습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주는 대로 받는다는 이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합시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자비와 용서의 됫박을 키워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참으로 맞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같은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에게 존댓말 하는 분에게 막말할 수 없더라고요.
어떻게 해서든 잘해 줄려는 분에게는 무심할 수 없고요.
대부분 나는 지지리도 복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인복이 많다고 하는 분을 보게 됩니다.
그분은 자기는 별로 해준 것이 없는데 운이 좋아 주위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뜻으로 겸손하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 주위에 많은 것이 사실은 그분이 모두에게 잘 해주기 때문이지요.
그분의 삶을 잘 들여다보면 별로 해준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좋은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옆에 있는 제가 볼 때 뭔가 있기만 하면 그저 줄려고 하고 그것도 사람을 가리지 않고 그저 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것을 줬는데도 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준 것이 없다고 생각해야 계속 줄 수 있지요.
많이 줬다고 생각하면 더 주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많이 주고 받지는 못했다고 생각하면 더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섭섭한 마음까지 들 테니까요.
생각해보면 이치가 그렇습니다.
조금 주었는데도 많이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됫박, 그 사람의 통은 그 정도로 작은 것입니다.
반대로 많이 주었는데도 적게 주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됫박, 그 사람의 통은 그 정도로 큰 것입니다.
한 되가 큰 사람이 있고 한 되는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한 되가 큰 사람은 통이 작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람은 통이 그 정도니 받는 것도 최고로 많이 받아야 한 되밖에 못 받겠지요!
한 되가 작은 사람은 통이 큰 사람이니 받는 것도 그만큼 많이 받겠지요.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이 관계가 혹간 깨질 수도 있습니다.
많이 주었는데도 그만큼 되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짠돌이기에 그럴 수도 있고 상대가 그럴 능력이 못되기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북한을 위해서 일을 하다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퍼주기만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고 좋은 뜻 가지고 하다가도 너무하다 싶어 그만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주었다고도 생각지 않고 되받을 기대도 하지 않고 계속 돕는 통 큰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관계에서는 되질 해준 대로 받지 못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경우는 그의 되가 나보다 작기에 그대로 되받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되가 우리의 되보다 훨씬 크시기에 큰 되로 되돌려 주십니다.
우리의 되가 작아서 더 이상 못 받지 하느님께서는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는 말씀대로 넘치게 되돌려주십니다.
자비도,
용서도.
그러니 우리도 자비의 됫박, 용서의 됫박을 크게 키워야 하겠습니다.
1923년 시카고의 에지워터비치 호텔에서 호화로운 사교모임이 열렸습니다. 당시의 미국 경제를 주름잡던 젊은 갑부 아홉 명이 사교클럽을 만들어서 서로의 성공을 축하하는 모임이었지요. 이들은 서로의 후견인이 되어 서로를 보장하는 관계를 맺었습니다. 만일 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남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돕는다면, 이들의 경제력은 무너질 수 없는 철옹성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서 자신들의 부를 누리기 위한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방탕한 인생을 즐겼습니다.
이 첫 모임이 있은 후 25년 뒤, 이들의 성공과 부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궁금해진 한 작가가 이들의 삶을 추적했습니다.
당시 증권사 사장이었던 리처드 위트니는 교도소에서 수감되어 있던 중 사망하였고, 철강회사 사장이었던 찰스 슈워드는 파산한 후 화병으로 사망하였으며, 가스회사 사장이었던 하워드 홉슨은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가 우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밀 도매상이었던 아서 카터는 거리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장관 출신인 엘보트 월과 사업가 사무엘 인쉘은 범죄자로 지목되어 도망 다니다가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은 모두 자살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불과 25년도 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물질적인 것으로는 행복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밖에 없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사랑하지 않을 이유만을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일이 많다는 핑계로, 시간이 없다는 말로 사랑하는 일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또한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피곤한 것이 남에게 화를 낼 이유가 되지 않겠지요. 그리고 바쁘다는 것 역시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실천은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그 보상을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서 직접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이유……. 그 이유가 합당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의 구원을 생각한다면 그 어떤 이유도 합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사랑해야 할 이유가 너무나도 많은 세상입니다.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마음 비우기(이영래, '행복한 동행' 중에서)
내 나이 29세에 드디어 차를 갖게 되었다. 평소에 가 보고 싶었던 곳에도 가고 음악도 크게 틀어 놓은 채 운전하는, 상상 속에서만 꿈꿔 왔던 일이 이제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애마를 타고 처음 거리에 나선 날 사고가 났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내 차는 크게 부서졌다. 그 뒤로는 운전하는 게 무서워졌고 행여 누가 차에 흠집이라도 내지 않을까 주차장에도 몇 번씩 내려가 확인했다.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차를 놓고 가고 퇴근길에 눈이 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렇게 한 달을 자동차에 집착하다 보니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어느 날인가 예전에 읽었던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수필이 떠올랐다. 선물로 받은 난이 신경 쓰여 밖에 나가서도 난 걱정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친구에게 그 난을 선물하고 나니 서운함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의 내 상황과 똑같은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나는 자동차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자동차에게 소유당한 것이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은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부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더 욕심을 내고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후덕한 인생
허찬란 신부님
MBTI 성격 유형 검사에서 ESFP란 결과가 나왔습니다. 애니어그램을 했더니 1번 유형이 나왔습니다. 종합해보면 제 성격은 일을 무지 벌이는데다 완벽을 추구하는 유형인데 그래도 사람을 대할 때는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경향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후덕을 가르치십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사목을 잘 한다는 것에 대해서 성찰을 많이 합니다.
우리 농촌 살리기 일을 해보았고 성전 신축도 하였습니다. 외적으로는 사람들 속에서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영성의 부족과 내면의 양심성찰에 대한 갈망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참 사목을 잘 몰라서가 아닐까 자문해봅니다. 사제란 어떤 사람일까요?
가르치는 자, 설교하는 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 면담과 치유기도 그리고 고해성사를 주는 영적인 아버지입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영적인 친교가 잘 다져진 사제는 이웃에게도 따뜻한 사목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의 후한 은총을 선물로 받으며 위로와 보람을 느껴야 하는 이가 바로 사제입니다. 바쁘다는 말의 남발이 아닌 조용하지만, 사제란 직분과 사제 영성 속에서 참 사목의 의미를 실천하며 후덕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성숙한 비판
이동훈 신부님
요즘 인터넷에 뜬 지나친 악성 댓글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인기 연예인뿐 아니라 학생들한테까지 그 피해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익명성을 무기로 온갖 험담과 악담을 퍼붓는 이들 때문에 피해자는 자살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글에는 진실을 알려는 열정도, 상대방이 잘못을 반성하고 좀더 나은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염려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무조건 상대방을 헐뜯고 비방함으로써 일방적으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할 뿐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 말씀은 단순히 남에 대한 비판, 판단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위선적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태 7,4-5). 부조리를 없애고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비판은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비판보다는 비방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터넷의 악성 댓글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방은 적대적 언어다. 상대방이 없는 곳에서 욕하는 것이다. 비방은 험담이 되고 중상모략으로 발전한다. 정직하게 비판하지 않고 뒤에서 하는 비방은 발전이 없다. 비방하는 자리에 함께하는 것도 비방이라고 볼 수 있다. 비방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침묵을 자기 의견에 대한 동조라고 생각하고는 ‘다들 그렇더라’며 확대한다. 이렇게 뒤에서 비방하는 것을 막아주고 끊어주는 것이 용기며 인격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판하는 용기와 비방하지 않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
다른 이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직접 만나 타일러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다(마태 18,15-17 참조). 이는 심판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이 구원되기를 바라면서 지적하는 것이다(야고 5,20 참조). 우리는 사랑으로 진실을 말해야 한다(에페 4,15 참조).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해야 하며 끈기를 다해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해야 한다. 그것이 말씀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다(2티모 4,2 참조).
용서의 삶
김훈일 신부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선처를 구하는 사람을 용서해 주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다 알 만큼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찾아와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 큰 상처를 받고 복수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우리가 그 잘못에 대해 책임이 있는 상대방을 용서해야 할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상처와 분노를 가슴에 품고 있으면 그것이 밤낮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게 할 뿐 하느님과 이웃을 바라보지 않게 합니다. 결국 자신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진 분노와 증오는 결국 자신을 파괴하고 죄를 더 크게 확대할 뿐입니다. 죄 없고 흠 없는 주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고통받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의 승리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용기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선악의 판단이나 심판의 두려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부족한 사람은 용서하기도 힘든 법입니다. 그러니 애써 마음에서 일어나지도 않는 용서를 하려 애쓰지 말고 우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사랑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배워 가면서 작은 일에서부터 이해와 용서를 키워 가야 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은 하느님을 통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이웃을 나와 같은 처지로 사랑하게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도 이렇게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사랑을 배우는 길입니다. 우리는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하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의 열매가 얼마나 큰지 보여 주셨습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주제에 꿈도 크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한 아이를 저희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법정에 직접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아이의 재판을 맡았던 담당 판사님은 다른 판사님과 달라도 보통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아이에게 장래희망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요!"하고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그때 저는 속으로 "짜식, 주제에 꿈도 크네. 사고나 더 이상 치지 마라"고 비웃었는데, 판사님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판사님께서는 "그래 너는 아주 좋은 꿈을 가지고 있구나. 네 꿈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런 좋은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런데 자꾸 오면 되겠니? 그리고 뒤에 서 계신 어머님이나 신부님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런 고생이시냐? 어머님은 혼자서 너를 키우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시는데, 네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래서 되겠니?"
그 순간 제 옆에 서 계시던 아이의 어머니가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고, 그 소리를 들은 아이도 따라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다시 한번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따뜻하고 진실한 마음, 자비로운 마음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아무리 막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비참해 보이고 가능성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기다려주는 인내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한밤중이라도 떠나간 한 마리 어린양을 찾아 길을 나서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우리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가장 우선적인 일은 하느님의 마음을 알려는 노력입니다. 결국 그분이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가를 알려는 노력입니다.
물론 우리의 하느님은 불의 앞에 진노도 하시고 때로 "도저히 안되겠다" 싶을 때는 가차없이 책벌도 하시는 정의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정의의 배경에조차 우리 인간을 너무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가는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이 자리잡고 계십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존경하고 그분 앞에 복종할 수는 있지만 그분을 사랑할 수 없을 때,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이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은 우리 일생일대를 건 과제입니다.
그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신앙인이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의 영성생활이 한 단계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순간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머릿속이 환해지는 영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형제들과 가끔씩 ‘머릿속이 환해지는’ 영화를 한편씩 보고 있습니다. 물론 수도자답게 수도원 시청각실에서, 비디오를 빌려서 봅니다. 교육자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영화, 폭력이나 선정성이 없는 영화, 그래서 다시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주는 좋은 영화를 골라야하니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주로 이런 영화를 보지요. ‘여선생 VS 여제자’ ‘선생 김봉두’ ‘내 마음의 풍금’ 등등.
‘12세 관람가’의 영화, ‘야한 장면이 하나도 없는’ 영화, ‘단 한명도 죽지 않는 영화’들이기에 밋밋할 수도 있겠지만, 조폭들의 무가치한 일상을 영웅적으로 그린, 그래서 우리 청소년들을 자기도 모르게 폭력성에로 몰고 가는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무가치한 영화들보다는 백배 더 낫습니다.
오늘은 ‘패왕별희’의 감독으로 유명해진 첸 카이커 감독이 제작한 ‘투게더’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정말 제대로 골랐더군요. 시종일관 진한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참부모란, 참스승이란 이런 모습이로구나, 하는 것을 잘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우스꽝스런 모습의 아버지 리우청의 모습이 계속 제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시장에서 일하는 아버지, 어색한 구식양복, 어울리지 않는 원색 와이셔츠에, 전혀 아닌 빨간 모자를 쓴 아버지, 아들 입장에서 보면 조금은 창피한 ‘촌뜨기’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도 쓰지 않는 아버지지만, 아들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칩니다. 어릴 적부터 바이올린 신동이란 말을 듣고 자란 아들 ‘샤오천’의 장밋빛 미래를 위해 아버지는 그야말로 ‘전력투구’합니다. 아들이 훌륭한 교수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합니다. 아들의 성공적인 미래를 위해서라면 자신은 바보가 되어도 좋은 아버지입니다. 아들에게 입히기 위해 직접 뜨개질을 하는 아버지입니다. 아들의 오디션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까봐 공연장에조차 나가지 않는 아버지입니다. 결국 아들의 성공을 위해 아들을 떠나가는 아버지입니다.
중요한 무대를 앞둔 어느 날, 지도교수는 바이올린 연주가 잘 안 된다는 소년에게 “네 연주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처음 자신을 찾아왔을 때, ‘꼭 제자로 삼아 달라’고 신신당부하면서 밝힌 소년의 출생내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느 추운 겨울, 북경역을 지나던 아버지 리우청은 바이올린과 함께 한쪽 구석에 누워있던 갓난아기 샤오천을 발견합니다. 착해빠진 아버지는 추위와 배고픔에 자지러질듯 울어대는 아기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하늘이 준 인연으로 여기고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얼어 죽어가던 아기, 생모로부터 버림받은 아기, 세상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북경 역에 누워있던 아기를 끌어안고, 그 아기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은 완전히 포기하는 아버지 리우청의 모습에서 저는 하느님 자비의 한 자락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한 평생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흘러넘치는 하느님의 자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분의 인내, 풍요로운 그분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기뻐서 펄쩍 펄쩍 뛸 것입니다.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 흘릴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알게 되는 순간,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자비를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자비를 맛보기 전까지 우리 삶은 큰 변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크신 자비를 깨닫는 순간 우리 삶은 변화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충만한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알게 되는 그 순간부터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크신 하느님 자비의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면 다들 그저 불쌍한 존재, 측은한 존재,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밖에 없는 사랑스런 존재일 뿐입니다.
당신 뜻대로
박요한 신부님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남을 비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고 남을 용서하는 것.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완전한 인간이나 가능한 것이지 나처럼 부족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사순시기 동안 너무나 어려운 것들을 요구하시는 것 같아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게다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고 하십니다. 하긴 나도 나름대로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트집잡히는 일 없이 완벽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가끔은 완벽해지고자 하는 마음을 접어두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마지못해 유혹에 지는 것처럼.
“아버지, 당신이 자비로우신 것같이 저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용서해 주신 것같이 저도 용서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것같이 저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저를 당신께 내어드리니 제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살게 하소서.”
† 황금률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자비로움 †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복음은 루가복음이 전하는 황금률이다(38절). 이는 마태오복음이 산상설교(5장-7장)의 결론에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으로 제시하는 황금률(7,12)과 같은 것이다.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가 루가복음에서는 평지설교(6,20-49 참조)에 해당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루가복음의 황금률도 평지설교의 결론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피력하시는 산상설교나 평지설교에서 그 가르침을 꿰뚫는 정신은 황금률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므로 '너희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는 것이다.
사실은 황금률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복음에 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마태오복음: 마음, 목숨, 뜻; 마르코복음: 목숨, 생각, 힘; 루가복음: 마음, 목숨, 힘, 생각)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라"(신명 6,5)는 하느님사랑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아껴라"(레위 19,18)는 이웃사랑, 즉 사랑의 이중계명이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으로 제시하고 있으나(마태 22,36-40; 마르 12,28-33), 루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10,25-28) 제시하고 있다.
요한도 하느님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새계명'으로(13,34) 제시한다. 물론 모두 다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황금률의 정신을 가지고 첫째가는 계명인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한다면 신약의 모든 율법을 준수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사랑은 늘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하며,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표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숨겨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남을 비판하지 않는 것, 남을 단죄하지 않는 것, 남을 용서하는 것, 남에게 주는 것' 등이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황금률의 정신을 지키는 수준에 머물거나 단순한 사랑실천으로 만족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거래의 법칙이 있다. 그것은 준 만큼 받게 되고, 받은 만큼 주게 되는 법칙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칙은 다르다. 하느님께서는 받은 만큼만 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38절) 우리에게 안겨주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후한 처사는 하느님의 자비로움 때문이다. 따라서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는 예수님의 요구가 평지설교의 새로운 핵심으로 부각된다.
이는 마태오복음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옳게' 사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5,48)는 엄청난 요구와도 같은 것이다.
이는 또한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13,34)는 새계명과도 같다.
하느님의 자비로움과 완전함,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모두가 원수까지도 예외 없이 사랑하는 무조건적이고 끊임없는 하느님의 사랑에 기인한다. 오늘은 하느님의 후덕(厚德)한 자비로움에 받은 것보다 적게 돌려주려 하고, 준 것보다 은근히 더 받으려는 우리의 간사한 마음을 비추어보아야 할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38)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우리는 마태오 복음에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들었고 오늘 루가 복음에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을 들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완전하신 아버지",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시다. 이분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이다. 자녀는 부모의 품성을 이어받는다. 즉 자녀는 부모를 닮는다. 따라서 내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라면 나에게 완전하신 아버지, 자비로운 아버지의 품성이 있고 그 영이 나에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하느님을 닮으려고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자녀이니까.
그럼 자비로운 아버지란 어떤 분이신가?
"자비로운 아버지"란 부성과 모성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의 품성은 부성과 모성을 함께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그래서 완전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전달해주시어 우리와의 부자관계를 맺게 해주신 아버지이시다. 즉 당신 생명의 씨앗을 우리에게 전해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우리를 양육시켜 주시고 우리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신다. 한편 하느님은 우리를 낳아 주시는 어머니이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도록 우리를 낳아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의 귀염둥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부성과 모성을 겸비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히 자비로우신 것이다. 이 사랑은 오직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신 사랑이시고 자비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를 낳아주셨고 길러주시는 아버지요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은 자비의 근원이 "너희가" 아니라 "너희의 아버지이시다." 이라는 뜻이다. 즉 자비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비의 근원은 너희가 아니라 너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나 혼자서는 안 되는 것이고 반드시 자비의 원천이신 아버지와 함께 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즉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자비의 원천이신 아버지로부터 자비의 선물을 받아야 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원칙에서 그 다음 구절을 보면 하느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라는 말은 자비로운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어떤가?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주지 못한다." 왜 그런가? 자비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처럼 부성과 모성애가 없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심만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으며 그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다. 그리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주고자 한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왜 그런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느 자식이라도 잘못되는 것을 원치 않고, 어느 자식도 미워하지 않는다. 모두가 잘되기를 바라고 모두가 서로 화목하게 사랑하며 지내기를 바라고 어떤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용서해주신다. 자신들은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해도 땀흘려 지은 농사를 자식들에게 보내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부모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런 행위를 하지 못한다. 그것은 부모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요, 사랑이다. 이런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부모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 자식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은혜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부모의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사람의 마음에선 온 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예수님은 그 어떤 사람도 비록 당신을 배반하는 제자일지라도 그리고 당신을 향하여 욕하고 침뱉고 창으로 찔러대는 병사들도 그리고 당신을 사형에 처하는 빌라도도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단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가 23,34)라고 끝까지 용서하시고 마침내는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의 마음에는 부성과 모성애의 한없는 자비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은 자비로움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하나의 원칙이 세워졌다면 이 원칙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이 나와야 한다. 그 다음 말씀은 바로 이런 원칙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제시해주신 것이다. 즉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남을 심판하는 일과 단죄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용서하고 베풀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왜 남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자비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남을 제대로 심판할 수 없다. 우리가 남을 심판할 때 그 심판의 기준은 자비가 아니라 자기 이익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심판하고 단죄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을 심판할 때 그 사람의 마음을 보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보고 심판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잘못 단죄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심판에는 한계가 있다. 심판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심판은 완전하신 아버지만이 올바르게 심판하실 수 있다.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심판과 단죄가 아니라 용서와 베푸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잘못 심판하고 단죄함으로써 내가 받는 고통과 억울함이 많이 있듯이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을 잘못 심판하고 단죄하였기 때문에 용서받아야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심판과 단죄가 아니라 용서와 베푸는 일이다. 그것이 곧 나의 잘못을 끊임없이 용서해주시고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는 것이다.
† 비판과 단죄는 교만과 우월감 †
-두올-
우리는 그 동안 마태 5-6장을 통해서 주님께서 산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교훈들을 묵상해 왔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늘나라 백성들의 특징과 성격(8복), 2) 하늘나라 백성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과 같은 존재이다, 3) 하늘나라 백성의 의(율사와 바리사이보다 더 나은 의: 6가지 예), 4) 위선을 피하고 하느님 앞에서 참된 경건 생활을 할 수 있는 법(보속, 기도, 금식), 5) 주기도문, 6) 하늘나라 백성들이 세상에서 빠지기 쉬운 두 가지 위험(세속주의, 세상에 대한 염려).....으로 크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침내 산상설교의 마지막 장인 7장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7장에서 또 다른 주님의 가르침들을 만나게 됩니다. 마태 7장에는 비판 금지, 기도, 생명의 길, 거짓 선생과 예언자, 그리고 말씀 실천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7장에 나오는 이런 주님의 가르침을 하나씩 자세히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교훈 중에서 루가복음 6,36-38과 연계하여 첫 번째 가르침인 "남을 판단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I.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루가 6,37. 마태 7,1)
인간은 누구나 남으로부터 비판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특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비판을 싫어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상대주의가 강조되고 특정 교리를 지지하기 보다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다원화된 사회, 비경계화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에 있어서 중요한 단어는 비판보다는 대화와 타협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통일과 평화를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과 동시에 한쪽에서는 자기 주장을 외치는 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회교도는 기독교를 향해 테러도 불사하고 있으며, 기독교는 이에 대해 무력으로 응징하려 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티나 사람들은 자살 테러단을 조직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있고, 이스라엘은 이에 대해 무력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곳곳에서 지역주의를 벗어나서 대화와 타협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소리가 높습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자기의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역주의에 호소하는 일들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쨌든 현대에는 비난이나 비판보다는 평화와 화합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쪽이나 저쪽에 서 있는 사람보다는,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이 인기가 높습니다. 사람들은 적당하게 중간에 서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 현대인 중에 일부는 비판을 금지하는 주님의 가르침을 선호합니다. 그들은 이 가르침을 근거로 해서 "그리소도인들이 어떤 비판이나 판단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이웃에 대해서도 부드럽고 관대히 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평화를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중요한 것은 판단이나 비판이 아니라, 연합과 친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루가 6장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비판이나 판단을 금해야 한다'는 내용은 과연 무조건적 수용을 의마하는 것일까요?
1. 그리스도인은 모든 비판을 금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복음의 교훈은 결코 '모든 비판과 판단을 금지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서를 조금만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이러한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금방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 7,6)을 보면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못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판단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람이 "개나 돼지"인줄 분별하고 그들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또 (마태 7,15)을 보면 이렇게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이 말씀 역시 우리가 분별력을 가지고 예언자들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의 열매를 통해서 그들을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교회에서도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타이름과 증언'의 필요성을 인정해 주셨습니다(마태 18,15-20). 이러한 '타이름과 증언'은 교회가 비 진리에 대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또 구약성서를 보아도 이러한 예가 나옵니다. 하느님은 율법을 통해 재판관을 세우시고 그들로 하여금 죄와 악을 억제하고 올바름(의)를 실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재판관들은 사건을 심리하고 분별력을 사용해서 사건의 시비를 가리고 정의를 시행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 신약성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교리에 대해서도 판단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 1,8)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미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른 복음에 대해서 올바른 분별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바오로가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디도 3,10)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단자는 한두 번 경고해 보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그와 관계를 끊으시오."
또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요한 역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적이 오리라는 말을 들어왔는데 벌써 그리스도의 적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거짓 선생과 적그리스도를 분별하고 조심하도록"을 지시했으며(요한1서). 요한 2서에 "만일 누가 여러분을 찾아가서 이 교훈과 다른 것을 전하거든 그를 집 안으로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마십시오!"고 지시했습니다. 또 주님은 사람을 판단할 때?"겉모양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공정하게 판단하여라!"고 하셨습니다(요한 7,24).
이러한 모든 성귀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판단을 금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눌복음의 가르침을 가기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판단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루가 6,36. 마태 7,1-5)에서 주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비판'은 "정당한 판단"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금하신 비판은 "서로를 비판하는 단죄 의식"이었습니다. 복음 중에서 우리말로 "비판"이라고 번역된 말("크리노")은 원래 "재판", "송사", 또는 "심판한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는 것처럼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에서 금지한 비판이 올바른 비평(critic)이나 감상(appreciation)을 포함하는 내용이 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형제를 심판(judgement)하고 단죄하는 일을 금하셨던 것입니다.
II. 단죄 의식과 우월감(루가 6,37)
주님은 제자들에게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주님께선 결코 올바른 비평(critic)이나 감상(appreciation)을 금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금하신 것은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서 형제를 심판(judgement)하고 단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실 때에 주님은 어느 정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의식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위선적 가식적인 신앙생활로 살아오면서, 자기를 의롭게 생각하고 이웃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고 이웃을 단죄했습니다.
(루가 18,9-14)을 읽어보면 이에 대한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비유는 "자기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 즉 바리사이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루가 18,9).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은 바리사이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당시에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였습니다. 이때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하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일 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기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이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바리사이 사람들은 스스로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단죄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들은 남의 결점을 말하는 것을 즐기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비판과 단죄 의식을 금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죄 의식은 바리사이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비판과 단죄 의식은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역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성서를 읽다 보면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을 주님께 데려온 일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그 여인에 대해 단죄심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 8,7) 이 말을 듣고 분노하여 여인을 돌로 치려던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어른부터 아이까지 모두 돌아갔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는 행위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남을 비판하고,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기도 전에 그들을 단죄하고 심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 8:7)
1. 단죄는 우월감에서 나온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우월감(교만, 소영웅심)을 가지고 남을 단죄하는 졸렬한 마음(영)입니다. 남을 단죄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을 올바르다 또는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단죄의 배후에는 반드시 자기 우월감과 교만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영을 가진 사람들은 비난을 통해 남의 인격을 해치는 일을 자행하며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경멸하는 짓을 밥 먹듯이 합니다. 남을 단죄하는 사람들은 정당한 비평(critic) 대신, 혹평하는(hypercritical) 말을 많이 합니다.
물론 자아도취에 빠져 있지 않은 사람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웃을 정당하게 비평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평은 필요하며 또 바람직한 일로서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평은 올바른 감상(appreciation)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단죄 의식을 가진 사람은 남을 악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비난하기 위해 남을 비평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사람들의 결점을 잡기 위해 접근하며, 비난 거리를 발견하면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가차없이 공격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난을 통해서 자신이 의롭다는 대리 만족을 느끼곤 합니다.
작년에 한XX당 전XX 대변인이 법무부장관 강XX과 청와대 민정수석 문XX씨가 호텔에서 1시간을 회동한 일을 가지고...'국민정서를 오염시키는 논평을 하는 것을 뉴스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과연 올바른 비평인가 아니면 비난하기 위한 비평인가? 우리는 이런 몹쓸 사회를 만드는 거짓말쟁이들이 곳곳에 산재하면서 우리의 깨끗한 영을 더럽히려고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바랍니다." 그러나 단죄의 영을 가진 사람은 이웃의 결점과 흠을 발견하는 일에서 만족을 누립니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을 가진 사람은 흠을 발견하지 못하면 낙심합니다. 또 바오로는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먹고 마시는 일(날)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 안에는 먹고 마시는 문제와 날짜에 대한 문제로 인해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형제들을 서로 단죄하고 비난했습니다. 이때에 바오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바오로는 이러한 문제는 각자 자기 신앙 양심을 따라 행동하되,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수용하고 인정하라고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신앙 양심을 따라 한 행동은 하느님께서 친히 판단하여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단죄의 영을 가진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를 중요하게 만들어서 비난하고 다투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여러 가지 단죄 의식들
또 사람들은 남이 잘되는 것에 시기를 하여 그들을 비난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높이며, 남이 잘될 때에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영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낮출 수 없기 때문에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은 남이 잘되는 것을 보고 배가 아파서, 그들의 흠을 찾아내어 그들을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또 우리들은 종종 편견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남을 비평할 때에 객관적인 원리나 원칙을 따르지 않고, 주관적인 생각으로 형제들을 비난합니다. 이러한 비평은 대부분 참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인신 공격으로 끝이 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종종 남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전에 미리 판단해 버리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지도 않고 남을 정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때로 승급하거나 감정에 치우쳐서 남의 변명을 듣거나 그들의 정상을 참작할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대부분 성급하게 이웃을 판단을 내리고 단죄하게 됩니다. 이러한 비판이나 성급한 판단은 모두 주님께서 금하신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상마무리 : 왜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가?
주님은 제자들에게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당시에 바리사이인들은 자신을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이웃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남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일을 금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주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이웃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여 그들을 깎아 내리기 위해서 비난을 위한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 정당한 원칙도 없이 편견을 가지고 감정에 치우쳐서 남을 비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건의 전말을 듣기도 전에 경솔하게 남을 단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단죄의 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러한 단죄의 영으로부터 벗어나야 할까요?
첫째,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남에게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또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비판의 표적이 되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남을 칭찬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지 않지만,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엄중한 비판을 합니다. 우리는 종종 남을 비판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나중에 자기의 비리가 발각되어 수치를 당하는 경우를 목격할 때가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남을 비판하지 않았었다면 그들도 큰 비난을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또 남에게 비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은 사람뿐 아니라 하느님께도 심판을 받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에 우리가 형제를 비판한 일에 대해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이러한 예가 나옵니다. 주님의 비유 중에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종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후에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용서하지 않고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가 큰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형제가 지은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고 단죄합니다. 이러한 일은 10,000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감옥에 가둔 것처럼 잔인한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 18,21-35).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 뿐 아니라, 하느님께 심판받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형제를 비판하고 단죄하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둘째, 남을 비판의 기준이 우리를 비판하는 기준이 된다.
마태 7,2에서는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비판을 금해야 하는 이유는 남을 비판한 그 기준이 우리를 비판하는 기준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경우 다른 사람들 역시 그 기준을 가지고 우리를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웃 사람들이 잘못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우리 역시 그러한 잘못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우리가 비판한 기준에 의해 우리도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면서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로마 2,1)."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단죄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같은 실수를 행하면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미 남을 비판한 경우에는 우리의 실수도 역시 용서를 받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선생들을 향해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야고 3,1)." 야고보는 자신을 포함한 선생들을 향해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남을 심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계했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남을 판단할 기회가 많습니다. 선생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옳은 길을 제시하고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학생들의 잘못에 대해서 책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들 역시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도 같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경우 선생들은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더 큰 심판을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교사나, 교수, 또는 판사나, 성직자들이 법을 어기면 일반인들보다 더 큰 정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가르치는 위치에 선 사람들은 특히 남을 정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셋째, 우리는 남을 비판을 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
마태 7,3에서는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오늘복음에서는 이 내용은 없음).
너무나 정확하고 합당한 지적이십니다. 솔직히 말해 이 복음만 묵상하면 '나의 부끄러움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는 남을 판단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여기서 티는 톱밥과 같이 작은 것이지만, 들보는 집의 지붕에 올리는 통나무와 같이 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대들보와 같이 큰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티끌 만한 죄를 지은 형제를 비판하고 단죄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100억을 도둑질 한 사람이 100만원 도둑질한 사람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자신을 관찰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더럽고 간사하며 교활한 사람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 허물을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단죄하기 전에 먼저 거울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남을 단죄할 수 있을 만큼 하느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고 있는가 ?" 아마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참된 예술가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비평하는 이상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게 마련입니다. 참된 비평가는 남의 작품 뿐 아니라 자기의 작품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엄격하게 비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남을 판단할 때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지만, 자신을 판단할 때에는 매우 관대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우리의 판단력은 매우 부정확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전체를 볼 수도 없고, 사람들의 마음을 읽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부분적인 자료를 가지고 이웃을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판단력은 부정확할 수밖에 없으며, 편견이나 감정에 의해 그릇된 판단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뿐 아니라 남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남을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을 판단하는 일을 중지하고 모든 판단을 공정하신 하느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들처럼 편견이나 감정에 치우쳐서 잘못 판단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형제를 판단하지 말고, 모든 판단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모든 것을 가장 정확하고 공정하게 판단해 주실 것입니다. 사람을 심판하는 권세는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입니다. 형제를 단죄하는 일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월권 행위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형제가 실수하는 것을 보면 판단을 하느님께 맡기고, 자신도 그러한 실수에 빠지지 않도록 겸손한 마음으로 이 사순시기를 보내야 하겠습니다. (아멘)
아주 중요한 공지사항이 있습니다. 제가 자리를 오랫동안 비웁니다. 오늘 3월 21일부터 4월 4일까지 성지순례와 피정 강의가 있거든요. 따라서 3월 22일부터 4월 3일까지 저의 모든 활동이 잠시 정지됩니다. 새벽 묵상 메일. 당연히 발송되지 않고요. 등업 역시 힘들 것 같습니다. 컴퓨터를 들고 갈 것도 아니기 때문에... 참, 미사 봉헌 역시 4월 3일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모두들 건강히 새벽 카페 잘 지켜주시길 바라며,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저 역시 여러분 모두를 위해 성지에서 기도하겠습니다. 그럼 새벽묵상글 시작합니다.
매번 음반 제의를 퇴짜 당하던 무명 가수가 있었습니다. 그날 역시 한 음반사로부터 음반 취입을 거절당하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런데 허리가 굽어 제대로 걷지 못하는 할아버지께서 이 무명 가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젊은이, 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길 건너는 것을 좀 도와줄 수 있겠나?”
음반 취입을 거절당해서 무척 기분이 안 좋았지만, 할아버지의 볼품없는 행색이 더 안타까워 이 무명 가수는 얼른 할아버지를 부축했습니다. 그리고 길을 다 건널 무렵, 할아버지께서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가? 이제 기분이 좀 나아졌지?”
할아버지가 갑자기 기분을 묻는지 어리둥절했지만, 생각해보니 정말로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아서 “네, 조금 나아진 것 같습니다.”라고 답변을 했지요. 바로 그 순간 할아버지께서는 굽은 허리를 쫙 펴고 똑바로 사는 것이 아닙니까? 깜짝 놀라자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세요.
“사실 나는 무척이나 건강하다네. 하지만 자네 얼굴을 보니 온간 근심이 다 들어있더구먼. 그래서 내가 잠깐 연기를 했지.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 때 한결 기분이 좋아지거든. 사람이 느끼는 행복은 상대적이니까 말일세.”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황이 나쁘더라도 나보다 못한 상대를 만나게 되면 어떠합니까? 오히려 지금 자신의 현재 모습에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어렵고 힘든 상황에 닥쳐 올 때 우리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즉, 그 상황을 벗어나 진실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자기보다 더 나쁜 상황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어떠합니까? ‘내 코가 석자인데 누굴 도와?’라고 말하면서 철저하게 쉽게 들어갈 수도 있는 행복의 길에서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래서 이 세상에서 실천하기 힘든 사항들을 말씀하시지요. 남을 심판하지 말 것, 남을 단죄하지 말 것, 용서할 것, 줄 것. 남에게 먼저 실천하면 왠지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남이 먼저 내게 행할 때에야 나도 좀 해 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지요. 또는 내게 언젠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때에만 내가 먼저 위 사항들을 실천하는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진정으로 행복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기억하면서 오히려 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되어야지만, 주님의 길에 더욱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위치를 찾기만 하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밀레).
생각을 끄집어라(‘좋은생각’ 중에서)
지금처럼 건물의 담벼락에 그림 그릴 엄두를 못 내던 오래전, 어느 중학교 담에 귀여운 만화 캐릭터가 그려졌다. 사실 그 학교에는 큰 고민거리가 있었다. 학교 앞 도로에 제한속도를 크게 표시해 놓아도 등하굣길 교통사고가 줄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선생님과 학생들이 머리를 맞대고 좋은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때 뜻밖의 의견이 하나 나왔다. “담에 어른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 눈에 잘 띄어 사고가 줄 거예요.” 그 의견을 내놓은 아이는 상기였다. 상기는 소위 말하는 문제아였다.
선생님은 상기에게 “네가 한 번 그려 볼래?” 하고 그 일을 맡겼다. 상기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미키마우스, 톰과 제리, 아기 공룡 둘리 등을 그렸다. 운전하는 사람은 어른들이니까 어른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만화 캐릭터를 그린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어른들은 담에 그려진 재미있는 그림을 보며 차의 속도를 줄였고, 그들의 마음 또한 밝아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생각을 한 아이는 상기 말고도 여러 명이었다. 그러나 생각을 겉으로 끄집어낸 사람은 상기뿐이었다.
한 마을에 이웃으로 나란히 살면서도 서로 너무 다르게 사는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오순도순 무척 행복하게 사는 데 비해 다른 한 집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식구들끼리 다투는 것이었어요.
어느 날, 매일 분란이 끊이지 않는 집에서 다정한 집안을 본받기 위해서 찾아갔습니다.
“저희는 식구들끼리 늘 다투기만 하는데, 어떻게 하면 이 집처럼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희는 별로 다툴 일이 없던데요?”
마침 그 집 딸이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과일 접시를 꺼내다가 그만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그만 조심하지 못하고…….”
옆에 있던 엄마가 같이 유리조각을 주워 담으면서 말합니다.
“아니다. 엄마가 하필이면 그런 곳에 접시를 두었구나.”
옆에서 엄마의 말을 듣고 있던 아버지가 말합니다.
“아니오. 내가 아까 보니까 접시를 놓아둔 모양이 위태해서 위험하다고 생각했는데도 바로 놓아두지 못해서 그랬소. 미안하오.”
이웃집의 사람은 그 집 식구들의 대화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고 합니다.
행복의 이유는 바로 자신에게 있습니다. ‘내 탓이오.’라는 마음을 가지고서 자신을 낮추어 나갈 때, 그 공동체는 싸움보다는 화합과 평화를 간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내 탓이오.’보다는 ‘네 탓이오.’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화합과 평화보다는 분열과 다툼이 더 많은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들은 남과 떨어지려 해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즉,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혼자 살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인해 우리들은 점점 불행의 삶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남과 내가 얼마나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네 탓이오.’라는 마음보다는 ‘내 탓이오.’라는 더욱 더 필요합니다. 그래야 화합과 평화를 가져오게 되고, 그래야 우리들 각자가 원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행복하십니까? 행복하지 않다면 내 주변을 바라보십시오. 내 주변에 행복을 가져다주었을 때, 나 역시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이웃에게 따뜻한 관심을 가집시다.
ET 할아버지(‘좋은생각’ 중에서)
“... 저기가 어디야, 아름답구먼. 나 이제 급히 감세.”
‘ET 할아버지’로 불리며 불꽃처럼 살다 2006년 12월 세상을 떠난 대안 교육가 채규철 선생이 세상을 향해 남긴 마지막 인사다. ‘ET 할아버지’는 온몸에 화상을 입어 외계인 같다며 아이들이 붙인 별명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타 버린 사람’이라며 자신의 별명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1961년 충난 홍성에 있는 풀무학교에서 교사직을 시작한 그는 장기려 박사와 함께 ‘청십자 의료조합’을 설립하면서부터 복지운동가로 활약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통사고로 차가 불길에 휩싸이며 3도 화상을 입었다. 30여 차례의 수술을 거쳐 목숨은 건졌지만 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고 코와 입도 제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 깊은 수렁을 빠져나왔다. 비록 청력을 잃고, 한 눈은 멀고, 녹아내린 손은 갈퀴처럼 돼 버렸지만 “보이지 않는 눈으로는 마음을 보고, 귀는 안경을 걸칠 수 있을 만큼은 남아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웃음으로 상처를 덮었다.
그리고 다시 청십자 의료조합 일을 시작했고 소외된 이웃을 위한 ‘한벗회’, ‘사랑의 장기기증본부’를 만들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1986년, 경기도 가평에 대안학교 ‘두밀리 자연학교’를 세우며 도시 아이들에게 자연과 벗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험난한 역경을 딛고 일어나 ‘이미 타 버린 몸’에서 나오는 열정으로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선사했던 그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삶에는 ‘F'가 두 개 필요해. ‘Forget(잊어버려라), Forgive(용서해라).’ 만약 사고가 난 뒤 그 고통을 잊지 않았으면 나 지금처럼 못 살았어. 잊어야 그 자리에 또 새 걸 채우지. 또 이미 지나간 일에 누구 잘못이 어디 있어. 내가 먼저 용서해야 나도 용서받는 거야.”
2001년 9월의 911테러를 기억하십니까? 미국 뉴욕에서 있었던 테러는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지요. 테러가 있은 지 12시간이 지났을 때, 그 사실을 생생하게 알리기 위해서 어느 텔레비전의 뉴스 기자가 자기 손에 서류 한 묶음을 들고 그 참사 현장에 서 있었습니다. 이 서류들은 기자가 무너진 쌍둥이 빌딩에서 나온 잔해들과 함께 흩어져 있었던 서류들을 길거리에서 주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 서류는 모두 세 장이었는데, 첫 번째 장은 어느 회사의 재무 보고서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이는 사업 계획서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종이는 어떤 사람의 은퇴 계획서라고 합니다.
이 세 장의 종이. 분명히 이 종이를 작성한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종이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재무 보고서, 사업 계획서, 은퇴 계획서. 반드시 필요한 계획서이며, 그래서 누군가가 이 계획서를 손상시키기면 분명히 화를 내기에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수 천 명의 생명을 잃고 난 다음, 이 서류들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12시간 전에는 제일 중요한 서류였을지는 모르겠지만, 12시간이 지난 후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종잇조각으로 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계획서는 바로 사람들과 함께 했을 때 의미를 갖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의 계획서란 있으나 마나이니까요.
지금 여러분들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과연 그 일이 몇 시간이 흐른 뒤에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우리들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그렇게 영원한 것에 두지 않습니다. 순간의 만족에 두고 있기 때문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제일 마지막 자리에 위치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 안에서 가장 어렵다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지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또 남을 단죄하지 말라고, 그리고 용서받기 위해서는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미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을 어떻게 심판하지도 단죄하지도 또 더 나아가서 용서까지 하라니, 말이 쉽지 가능할까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나의 용서만이 정말로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즉 주님으로부터의 용서를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실천하기 힘든 말씀을 강한 어조로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나의 심판, 나의 단죄, 나의 미움……. 그런 것들이 과연 나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되시면 과감하게 행하십시오. 뒷일은 책임 못 지겠습니다.
나를 위해서 용서합시다.
쓸데없는 걱정이 마음에 가득할 때(용혜원)
걱정거리를 늘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일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닥칠 때마다 걱정거리를 만들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걱정거리를 즐기고 있다면
이미 마음이 병들어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두통을 만들고 심장을 조여들게 하는
모든 걱정거리들을 과감하게 던져버리고
절망에 빠져 남을 탓하며 고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이겨낼 수 있을 때
행복은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 어떤 걱정도 우리의 마음속에
단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마음은 늘 따뜻합니다
쓸데없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근심이나 걱정에서 벗어나
마음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생각의 혈관이 건강해야 삶에 만족함을 누리고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생각이 더럽혀지면 마음과 행동도 더러워집니다
마음에 걱정을 만들기보다
행복을 만드는 습관을 가질 때
평안이 가득해지고 삶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전에 어떤 자매님들의 대화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대화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언니, 제가 요즘 고민이 있어요. 몇 호에 사시는 아주머니 있잖아요. 글쎄 그 아주머니가 저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다닌다는거에요. 그 아주머니를 평생 보지 않을 것도 아니고……. 성질 같아서는 한번 엎어 버리고도 싶고……. 저 어떻게 해야 하지요?”
이러한 말씀에 상대 자매님은 아주 간단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냥 엎어 버려. 나는 그런 아줌마를 그냥 안 놔둬.”
글쎄요. 고민을 가지고 있었던 자매님께서 과연 그 말씀대로 엎어 버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엎어 버렸다고 그 고민이 과연 해결되었을까요?
많이 들으셨을만한 이야기 하나 전해 드립니다.
버섯을 캐는 남자 둘이서 숲을 걷다가 한 사람이 무심코 땅위에 떨어진 과일을 밟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일이 갑자기 두 배로 커지는 것이었어요.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나이가 그 모양이 의심스러워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밟았지요. 그랬더니 다시 두 배로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상히 여겨서, 이번에는 들고 있던 작대기로 서로 돌아가며 그 과일을 힘껏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그 과일이 더 커져서 아예 숲의 길을 막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수염을 하얗게 기른 도사가 나타나서 말합니다.
“자꾸 건드리지 말아라. 그것은 싸움이라는 이름의 과일이다. 맞서지 않으면 처음 그대로이나, 상대하여 맞서면 계속 커지는 이상한 과일이지.”
맞습니다. 싸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놔두면 그대로지만, 내가 상대를 하면서 그 사람에게 이기려고 하면 할수록 그 관계는 더욱 더 멀어지는 것은 물론 나의 길까지도 막아버린다는 것이지요. 즉, 편안한 마음이 아니라 불편한 마음이, 사랑의 마음이 아니라 미움의 마음이 자리잡음으로써 모든 것을 힘들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저는 이곳 갑곶성지에 오시는 순례객들에게 우리 모두 현대의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꼭 전해 드립니다. 물론 현대에는 주님을 믿는다고 피를 흘리면서 순교를 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현대에도 순교자는 분명히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셨던 말씀은 사랑이었고, 사랑이란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반대로 미움이란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군가를 비판하고 단죄하고 미워한다면 그 모습은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모습이고, 과거로 친다면 이것이 바로 배교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정말로 밉고, 그 사람이 내게 너무나 못될 짓을 많이 합니다. 이 사람만 없으면 내가 좀 살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사랑 가득한 주님을 생각하면서 이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은 물론 어떤 물질적인 도움까지 전해주려 한다면, 이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모습이고 과거로 친다면 이것이 바로 순교자의 삶이라는 것이지요.
나만을 생각하는 그래서 미움으로 가득찬 배교자의 삶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대신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을 하는 현대의 순교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판하고, 단죄하고, 미워했던 나의 이웃을 위해 지금 당장 기도합시다.
용서(U.샤퍼)
조금 더
감정을 자제했어야 했는데
그대를
너무 모질게 대했던 것
지금 늦기는 했지만
용서를 청합니다
물론
그 자리에서 용서를 청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생각뿐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하지 라는 생각 역시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미움의 감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지는 것
그것을
잊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약이라는
옛 어른들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모른척 덮어두자는 것뿐
용서가 없으면
미움의 앙금은
여전히 저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불시에 떠올라
서로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미움을 키워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대를 용서하고
나 또한 그대의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우리의 사랑도
커갈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