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AD1231년 봄. 카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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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발굽아래 밟히는 흙은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곧 대지위에서 펼쳐질 살육을 미리 예견한 것인지 아님 그의 눈이 결국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인지는 알 수없었다.
“어이, 그러다가 떨어지겠어.”
동감이다. 딴 생각을 하며 말을 몰다보니 어느덧 그의 얼굴은 거의 말발굽에서 차인 흙이 튀길 정도로 땅에 가까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볍게 몸을 돌려 안장위에 몸을 꼿꼿이 세웠다.
“무슨 생각을 하며 달리는 건가? 그러니까...”
“전방에 적 출현!”
선두에 앞서 달리던 정찰병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고 그 역시 동료들 사이에 형성된 보편적인 행동에 편승하며 정면에 시선을 돌렸다.
시야를 가득 메운 흙먼지. 흙먼지들의 돌격인가 하는 그의 의문에 대답하듯 흙먼지를 뚫고 빠르게 달려오는 단기의 기마병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두기, 네기,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기병대가 그들을 향해 돌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헛숨을 삼키는 소리, 공포심을 숨기기 위한 듯한 함성이 곳곳에서 새어나오고, 그는 본능적으로 말고삐를 쥔 왼손으로 성호를 그었다.
“전원 앞으로 창.”
어디선가 명령이 흘러나왔고, 일순간 내밀어 지는 거창의 숲에 찔린 듯 곳곳에서 새어나오던 중얼거림이 뚝 그쳤다.
“전원 돌격 앞으로. 성모마리아여, 우리를 가호하소서!”
말배를 걷어차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왔을 함성은 순식간에 기병중대 전체에 전염되는 퍼졌고 그의 입에서도 힘찬, 그러나 비명과도 같은 함성이 터져나왔다.
그는 러시아 국왕 블라디미르 2세의 골칫덩어리인 대가 센 귀족들 중의 한명이었고, 대평원의 한 귀퉁이에 손바닥만한 영지를 가진 보얄 이었으며, 눈앞의 적을 향해 돌격하는 순간에도 딴생각을 할 정도로 신경이 굵은 전형적인 슬라브인이었다.
점차 빠르게 다가오면서 눈앞의 ‘적’들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온 몸을 빈틈없이 갑옷으로 감싼 듯 누런빛의 몸을 전투마 치고는 작아 보이는, 그러나 지면을 걷어차는 힘이 일반적인 전투마 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진 않아 보이는 말에 얹은 채 돌격해오는 족속들.
“타타르 놈들...”
그들에 관한 소문은 오직 피비린내와 성스러운 교회에 대한 약탈로 버무려진 것뿐이었다.
벌써 그들의 말발굽이 지나쳐간 몇몇 마을들이 연기와 재로 화한 후에야 보얄들은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왕의 소집령에 응했다.
그 역시 왕의 깃발아래 뒤늦게 모여든 보얄들의 한명이었고, 타타르인들이 강해봐야 어설픈 총각의 침대 위 방사만도 못할 것이라는 지독한 낙관론자들의 무리 속에 있었다.
더 이상의 잡생각은 필요없다.
그는 고개를 휘저으며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양측의 기병대는 가까워질대로 가까워져 이젠 돌격해오는 타타르인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알아볼 정도였고 그의 코가 정확하다면 타타르인들의 지독한 냄새 역시 스멀스멀 콧구멍을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곧 무지막지한 충돌이 온몸을 휘감을 것에 생각이 넘어가자 그는 오른손에 든 창을 거세게 꼬나 쥐어 옆구리에 끼었다.
다시 정면에 시선을 두었을 때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타타르인들의 대열이 양익으로 나뉘고 있었다.
결국 아무것도 없는 전방을 향해 돌격해버린 꼴이 된 러시아 기병대의 대열 곳곳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고 중대장의-완벽하게 당황한 목소리의-명령이 들려왔다.
“반전!”
이미 가속도가 붙을 대로 붙어버린 말이 한번에 방향을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러시아 기병대의 대열이 무너지며 그들은 크게 호를 그리며 간신히 반전할 수 있었다.
온갖 고생-욕설과 무지막지하게 당긴 말고삐-끝에 다시 돌격해오는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타타르인들은 러시아 기병대의 양익으로 달리면서 활시위를 놓았다.
그는 순간 눈앞에 거대한 검은 구름이 나타났다고 믿었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기병대에 속한 무명의 보얄이 애써 부정하려고한 몽골군의 화살비는 곧 러시아 기병대의 대열 곳곳을 파고들어 살육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첫댓글 이야... 이거 재밌네요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