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금대는 원래 대문산 혹은 견문산으로 불리던 작은 산으로 그 밑에는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되는 곳이며 산세가 평탄하면서도
남한강 쪽으로 나 있는 기암절벽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경치가 탁월한 국민관광지이다.
1400여년전 신라 진흥왕 때에 가야국의 악성 우륵이 이곳에 와 풍치를 상미하며 항상 산상대석에 앉아서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해서 지금까지 탄금대라 불리고 있다.
임진 왜란 때에는 신입장군이 배수진으로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최후를 마친 곳이기도 하다. 산 정상 부위까지 포장이 잘
되어 있고 역사적 뒷이야기 이외에 넓은 야외음악당과 충주문화원, 권태응 선생의 감자꽃 노래비,충혼탑,궁도장,신립장군의
애환이 담긴 열두대와 순절비, 탄금대토성, 대흥사등이 자리 잡고 있다.
탄금대유래비
1400여년전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한 우륵이 우거지를 찾아든곳이 이곳이다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가야금을 탄곳이라해서 탄금대라 이름 하였다고한다,
충혼탑 전경
충혼탑
이 탑에 봉안된 영령들은 해방 후 특히 6.25사변 때 국가의 방패가 되었던 충주지방의 전몰군경들이다. 충혼탑은 충주
상이군용사분회와 대한 제대장병 보도분회에서 호국영령들의 애국충정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1956년 9월 유서 깊은 전적지인
이 곳 탄금대에 건립했다.
특히 충혼탑이라는 글씨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친필이며 매년 현충일에 이 곳에서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탄금대기 비
이비에는 탄금대의 유래외 위치의 지리적 조건 등 이곳 위치의 중요성과 유래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다
탄금정
콘크리트로 지어진 정자입니다 가는곳마다 회색의 쓰레기 더미가 있어 애석히 생각합니다. 지난과거에는 그랬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전통의 건축방식이 채택되기를 기원합니다
열두대
신립장군이 활을 식히기위해 열두번을 오르내려 열두대라 칭했다고 합니다
열두대에서본 남한강 풍경
열두대에서본 남한강 풍경
신립장군 순절비
조선 선조(朝鮮 宣祖)때 한성판윤(漢城判尹)이었던 신립(申砬)이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이곳에서 싸우게된
동기와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장공의 시호가 내려진 내력의 비문이 적혀있다
************고구려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 부락에 있는 이 비석은 1979년 충주 지방의 문화재 애호 단체인 예성 문화연구회에서 찾아내어,
단국대학교 박물관의 학술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고구려 시대의 비석이다.
비석의 높이 1.44m,폭 0.55m---0.59m이고,두께는 0.37-0.38m인데 화강암으로 만들어 진 비석이다.
1981년 3월18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비석의 모양이나 새겨진 글씨체와 형식으로 보아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비와 비슷하며, 4면 모두에 글씨를 새긴 비석이다.
비석의 앞면은 10행 23자이고,왼쪽면은 7행 23자로 보여진다.
비석에 새긴 글씨는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씻기어서 모두 읽을 수는 없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국경문제로 다투다가 화해를
한 기념으로 이 곳에 세원 진 듯하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을 하면서 고구려가 형님이되고 신라가
아우국가가 된다는 기록과,고구려의 영토가 소백산맥을 경계로 조령과 죽령에 이르게 된 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 장수왕
때의 업적을 적은 것으로 판단되며 당시 영토 확장에 대한 정계비(국경을 정하여 적은 비석)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비석의 중요성은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가 전달되는 과정을 연구 하는데에도 있다. 비문중에 고구려가 신라에게
의복을 준다는 내용도 있는데, 의복외에도 관리의 명칭이나 제도가 이런 기회에 자연스럽게 알려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충주중원지방이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은 옛날의 기록에도 있으나 이 비석으로 인하여 다시 확인되었고 이 비석이 서 있는 곳이
고구려와 신라를 통하던 중요한 통로였다는 것을 알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구려비 전경
고구려비각
고구려비 정면과측면 국보 제205호
높이 203cm,폭 55cm이다. 1979년 4월 5일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立石) 마을에서 조사되어 알려졌다.
형태는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며,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있다. 4면 모두에 글을 새긴 4면비이며,
글자는 전면이 10줄에 23자씩이고, 좌측면은 7줄에 23자씩, 우측면은 6줄이며 뒷면은 9줄로 추정되고 있는데, 글자의
지름은 3∼5cm이다.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발견 이후로 가장 큰 고구려비 발견이라는 점과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석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더구나 고구려의 금석문(金石文)이 남아 있는 것은 광개토대왕비
등 그 수가 적기때문에 이 곳 중원지방에 완전한 돌비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다.
글씨나 글에 고구려인의 독자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비가 만들어진 연대는 423년 장수왕 때로 추정하고 있다.
5월에 고려대왕상왕공(高麗大王相王公)과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수천(守天)하기
위해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太子) 공(共)…상(尙)…상공간노(上共看奴) 주부(主簿) 도덕(道德)'등이
…로 가서 궤영( 營)에 이르렀다. '태자(太子) 공?(共)…상(尙)…상공간(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의 의복을 내리고 '겅립처(建立處) 용자사지(用者賜之) 수자(隨者) … 노객인(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를 내렸다. 동이 매금이 늦게 돌아와 매금토내(寐錦土內)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공(共)이] 고구려 국토내의 대위(大位)·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를 궤영에서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매금(東夷寐錦)의 상하가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를 내렸다. 전부(前部)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와
주부 도덕(道德)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보노(補奴) …'
와 개로(盖盧)가 공히 신라 영토내의 주민을 모아서 …로 움직였다.
【해설】중원 고구려비는 1979년 충북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立石部落 입구에서 발견되었으며, 한반도 내의 유일한 고구려 .
비석이다. 모양은 광개토왕릉비를 축소한 것과 같은 사각 石柱形으로 되어 있는데, 비문의 마멸이 심하다. 이 비의 발견으로
5세기 고구려에 대해 신라가 종속적이었으며, 신라 영토 내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한 사실도 확인 하게 되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중앙탑)************
이 지방에서는 흔히 중앙탑으로 불려지고 있는 7층의 이 석탑은 중원지방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 유산이다.
이 탑은 현재 국보 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탑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전설이 유래되고 있다.
하나는 이 곳 충주에 왕기가 있다고 하여 이를 제압코자 이 탑을 건립했다고
하며, 또 하나의 설에는 신라 때 고승인 김생이 이웃 반송산에 사찰을 건립하고 고대의 참고 서적을 보관하기 위해 건물을
짓고 탑을 세웠다하며, 마지막으로 통일신라 원성왕 때 신라의 중앙을 표시하기위해 같은 보폭을 가진 건각자
( 걸음을 잘 걷는 사람)를 남과 북에서 동시에 출발시키면 꼭이 곳에서 만났기에 이 탑을 세워 신라 국토의 중앙임을 표시했다고
한다.
탑의 건립시기는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고 있으나 탑의 조성양식을 보아 전설이 유래되는 원성왕 때인 8세기경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 14.5m의 웅장한 이 탑은 전체가 7층으로 되어 있고 상륜부에는 노반과 양화까지잘 보존되어 있고 기단부에는
양 우주외에도 4개의 탱주를 세우고 있으며 탑신부는 몇 개의 석재로 조립했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탑신과 옥개석의 높이와
폭이 좁아지는 안정감을 보여주고 있다.
옥개석의 받침은 각층이 모두 5단으로 이루어 져 있고 옥개석 각 층 마다 낙수홈이 파여져 있다.1917년 이 탑을 해체 보수할
때에 제6층의 탑신과 기단 밑에서 사리 장치가 발견되었는데 사리공내에서 은으로 만든 사리병과 그 안에서 유리로 만든 사리병이
발견되었고 경판이 2매가 출토되었는데 이 경판은 고려경(高麗經)으로서 탑의 창건 후 2차적인 사리장치를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이 탑의 주변일대가 절터로서 많은 석조물 등이 파손되어 산재해 있으며 특히 고구려 계통의 양식을 가진 연화문 와당을
비롯한 수 많은 종류의 기와가 출토되고 있고 학계에 주목 받고 있으나 사찰명과 창건연대를 규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명문와당(글자가 새겨져 있는 기와)이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아 아직까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중앙탑은 국내에 현존하는 통일신라 석탑으로 가장 큰 규모의 석탑임에 틀림없다.
중앙탑 국보 제6호
최근에는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 무렵 충주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중앙탑(中央塔)을 항공촬영을 하여 분석해 본바,
정확하게 우리나라 국토의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어 지리학계에 화제가 되고 있다.
또한 이 탑의 주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되는 석등과 기와 등이 출토되고 있으며,
넓은 조각공원과 남한강수석박물관, 그리고 충주박물관 등이 위치하고 있어 충주지역 문화유산의 얼이 깃들여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