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특선🌟🌲
#배비장전(4)
양반의 목구멍
드디어 자기집이 보였다.
다리는 더 풀려 그데로 쓰러질것만 같았다.
하늘을 덮을 듯이 큰 홰나무와 고색 창연한 자기집을 보니 어서 들어가 사랑방에 몸을 눞히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더욱 더 갈지자 걸음으로 천천히 걷는다.
아무리 급해도 뛰지말라는 집안에 내려오는 가풍이었다.
어흠 어흠.
헛기침을 하며 자기집 대문을 바라보았다.
쪽 대문이 다 쓰러져가는 기둥에 위태위태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 대문짝도 네 귀가 퉁구러져 이가 맞지않고 대문 구실을 잃은지 오래였다.
벽은 떨어져 군데군데 구멍이 뚫렸다.
높은 댓돌위 사랑방은 미닫이 문이 그나마 온전한데 그 앞 쪽마루는 늙은이 이빠진듯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집은 어엿한 청기와집, 본래의 청기와가 아니라 이끼가 새파랗게 끼고 풀이 군데군데 돋아있어 청기와로 보였을 뿐이다.
김경은 일부러 태연한척 하며 없는 기운을 북돋우며 시한수를 읊어본다.
木觅南望 汉江分(목멱남망 한강부)
높은 산마루터기 내 집에서 멀리 한강을 바라다 보니
水尽南天 不见云(수진남천 불견운)
갈라진 강물 남쪽 끝이 아득하게 구름도 없는 하늘에 맞다아 있네.
白日青天 倒水中(백일청천 도수중)
푸른 하늘이 물속에 거꾸로 비끼었는데
潭潭鱼游 白云间(표표어유 백운간)
마치 흰구름 사이에 노닐 듯 쇠똥 개똥이 떠 있구나.
목멱은 김경이 살고 있는 남산의 옛 이름이며, 마침 집앞에 고인 웅덩이에 쇠똥 개똥이 둥둥 뜬 광경을 보고
외출에서 수모를 격고 돌아온 마음을 달래려고 읊음.
김경은 칠언시를 읊조리고 사랑방으로 들어섰다.
조금전의 호기롭던 싯귀와는 달리 그의 행동은 무척 옹졸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선다.
아내를 보기가 부끄럽고 창피스러워 무섭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아내 박씨 부인은 남편이 돌아온 것을 벌써부터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양반집 부인으로서 남편을 마중나가지는 못했지만 늙은 몸종이 뻔질나게 드나들며 서방님이 돌아오길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돌아온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마님, 서방님께서 돌아오셨어요.
하고 몸종의 전갈이 있었지만 남편 김경은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몸종이 또 다시 들어와 여쭌다.
진사님은 팔베게를 베시고 누워계십니다.
주무시는 사랑방에 귀를 기울여 가만히 들어보니 아기가 몸이 불편해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 같았어요.
그래도 박씨부인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무릅위에 올려놓은 누더기 옷을 말없이 바늘로 꿰어매고 있었다.
마님 저녁을 지어야 할텐데요?
늙은 몸종이 몸이 달아 모기 소리만히게 했다.
벌써 어둑어둑해 오는 황혼 무렵이었다.
세간살이 하나 없는 토방엔 어둠이 일찍부터 그림자를 드리우며 소리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박씨부인은 눈을 내리깔고 몸종이 성화를 할쩍마다 바늘 끝으로 자기의 손톱밑을 쿡쿡 찔렀다.
찌르고 찔러서 피가 맺히고 단단하게 굳은 살이다.
그렇게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났다.
방안은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등잔에 켤 들기름도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마님!
세번째로 몸종이 입을 열었을 때 박씨부인은 가만히 일어서더니 선반위에 놓인 작은 함지박 속에서 노란 송화가루 봉지를 꺼내서 그의 몸종에 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할멈, 이 가루를 물에 타서 서방님께 갖다 드리도록해요.
그리고 송키가 남았으면 그것이나 맹물에 푹 삶아요
몸종은 한숨을쉬며 송화가루 봉지를 들고 부엌으로 나갔다.
박씨 부인은 다시 몸종을 부르더니
이리조요, 내가 갖다 드릴테니 할멈은 좀 누워 계서요"
하고는 부엌으로 나가서는 맹물에 송화가루를 타서 사랑방으로 들고 들어갔다.
박씨 부인이 사랑방 문앞에 발자욱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신랑 김경이 "어흠"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도 배가고파 참을 한계가 지났던것이다.
설마 마누라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굶기기야 할라구?
하는 막연한 바램을 갖고 있기도 했다.
주무셔요
아! 누군가 했더니 부인이시구려 어서 이리 들어와요.
박씨부인은 문 밖에서 잠자코 듣고 있다가 맹물에 풀은 송화가루 그릇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김경은 애써 외면하고 아내가 갖고온 음식에 초연한척 한다.
어디 편찮으세요?
아니 정자골 정승지댁에서 가양주를 몇 잔 마셨더니 취기에 잠이 깜박 들었던 모양이요.
그래서 마침 자리끼라도 한 대접 부탁할까하고 생각했는데 부인이 손수 나오셨구려.
벅씨부인은 씁슬하니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띈다.
박씨부인도 몸이 삐쩍 마르고 얼굴은 부황기로 누루퉁퉁하게 부어있었지만 남편의 앙상한 몰골을 보자 가슴이 미어졌다.
목이 타시면 이거라도 마셔보셔요, 서방님이 잘 잡수신다면 저도 기뻐요.
하고는 멀건 사기대접을 내려 놓았다.
김경은 사기대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자골 정승지를 찾아갔다가 청지기에 비웃음만 당하고 헛걸음으로 돌아왔으나, 고기 안주에 독한 술까지 얻어 먹고 왔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와서 실토할 수도 없었다.
눈을 지긋이 감고 비위가 뒤집히는 송화가루탄 맹물을 한모금 마셨다.
쌉살하고 비린내가 확 올라왔다.
왜 다 드시지 않으세요?
박씨부인은 김경이 반도 안마시고 물대접을 내려놓자 상냥하게 물었다.
부인은 남편의 심정을 모를리가 없었다.
그러나 부부지간 이라도 체통없이 그런것을 물을 수도 없는 그들이었다.
다만 안타까운 심정을 빗대어서 말할 뿐이다.
오늘 나가신 일은 잘 되셨나요?
글쌔...
설마를 믿는 것이 여인의 심정이다.
아무리 여중군자(女中君子)라도 먹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글쌔하는 남편 말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는,여보, 이젠 꼼짝없이 굶게 생겼어요 무슨 방도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겠어요?
하고 말했다.
글쌔...
김경의 말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 실망을 주는것은 즉 자기자신에게도 실망을 주는 것이다 그는 글쌔 하며 자기 마음을 자기가 달래듯 우물쭈물만 하고 있었다.
박씨부인의 얼굴이 그 순간 굳어졌다.
어느새 떠 올랐는지 찢어진 미다지 문틈으로 달빛이 흘러들어와 부인의 얼굴을 연푸르게 물들였다.
여보박씨부인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왜 그러시오?
마당에 있는 홰나무를 뱁시다.
홰나무를?
네, 그나무를 베어 팔면 장작 서너바리는 나오겠죠...
굶어 죽는것 보단 나무를 베어서...
글쌔...
김경은 쓴 입맛을 다시면서 쌈지를 뒤졌지만 그곳에는 담배 한잎 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박씨부인은 옷고름으로 눈두덕을 누른다.
다만 말없는 달빛만이 이 가련한 부부를 비춰주고 있었다.
(옮김)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