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초여름을 맞이해서
산야에는 온갖 나무가 푸릇푸릇 잎이 피고
봄에 찬란히 피었던 꽃은 여기저기 지고 있지만,
꽃 진 뒤에 그 싱싱한 신록은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 숲 사이사이 가지가지에 온갖 새들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이리 날고 저리 날으면서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삼라만상이, 푸른 산, 흐르는 물, 한참 무성허게 피고 있는 온갖 나뭇잎, 지저거리는 새소리, 이러헌 것들이
어떠헌 경전에 설법보다도 더 여지없이 최고에 진리법을 설허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십구 년동안 설허신 경전
종이에 쓰여진 경전은 부처님께서 참으로 설하고자
한 법문에 찌께기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참으로 부처님께서 설하고자 한 법문은
종이에 담애... 담겨질 수가 없고, 담겨져 있지도
않습니다. 그 요긴한 법문의 껍데기, 찌께기 그 일부분만이 경전에, 책으로 된 경전에 표현이 되아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왜 부처님께서는
그 설하고자 한 법문을 왜 바로 설해 주시지 못하고
그 일부만을, 그 껍데기만을 설해 주셨으며 그것만이
왜 종이에 올려진 채 지금 우리에게 전해졌을까?
최고에 법은 입을 가지고 설할 수가 없으며
귀를 통해서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법을 설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법을 설하지 않는다면
귀 먹고 눈뜨지 못한 중생은 언제 눈을 뜨고 귀가 열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대자비를, 대자비심을 일으켜서 사십구 년동안을 팔만사천의 법문설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 그 법을 통해서
말로써 설할 수 없는 참 법문을 들어야, 듣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말로써 설할 수 없고 귀로써 들을 수 없는, 경전에도 쓰여지지 않는 진짜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참선을 해서
스스로 그 도리와 계합이 되는 길 밲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결제(結制)날로,
앞으로 석 달 동안 아직은 덥지 안해서 좋지만 앞으로
한 달 두 달 지내며는 그 몸에서 소금물이 줄줄줄줄
흐르고 하체에는 땀이 젖어서 땀띠가 더덕더덕 나고
대단히 견디기 어려운 무더운 여름철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 더위 속에서 신심과 분심과 대의단으로 공부를
알뜰히 다구쳐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
아무리 더웁고 졸음이 온다하더라도 덥고 졸음이
온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가 내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울 수락에, 졸음이 오고 못 견딜 수록에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결제를 헌 스님네는 말할 것도 없고,
댁에서 살림을 허면서 생활 속에서 공부를 해야 할
신남신녀여러분.
세속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너무너무 쫓기고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쁘고 고달프시겠지만,
그것은 이미 내가 해야 할, 내가 갚어야 할 빚이요
나에 의무로서 피할 길이 없어.
그렇다고 해서 내 공부를 아니허면 내 공부는
누가 해주는 것이여?
아무도 내 대신 공부를 해줄 것이, 사람이 없는 것이며,
그러헌 생활에 바쁘다고 해서 이 공부를 아니허면
그러다가 하루하루가 지내가서 퍼뜩 죽음에 문이
돌아올 텐데 그때 후회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앉아서도 ‘이 무엇고?’
서서도 ‘이 무엇고?’
새소리를 들으면 ‘저것이 바로 비로자나부처님께서
나에게 일러주신 법문이다’
이리 생각하고,
누가 나에 속을 뒤집어놓는 듣기 싫은 그런 소리를 헌다하더라도 ‘저것은 보살화현이 나타나서 나에게 경책을, 경책, 채찍을 가해주신 법문이다’ 이리 생각하고,
언제 어데서 무엇을 보건 무엇을 듣건 무슨 일을 당하건 그때그때 그 경계에 속지 말고
그 자리에서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이 무엇고?’
이렇게 공부를 다구쳐 해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첫댓글 일체 중생 참 나를 깨달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 나기를 발원합니다 _()_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