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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나오미는 모압 출신 룻과 함께 돌아와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
<롯기의 시작 1,1.3-6.14ㄴ-16.22>
판관들이 다스리던 시대에, 나라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사람이 모압 지방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려고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3 그러다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어서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게 되었다.
4 이들은 모압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파이고 다른 여자의 이름은 룻이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십 년쯤 살았다.
5 그러다가 두 사람도 죽었다.
그래서 나오미는 두 자식과 남편을 여읜 채 혼자 남게 되었다.
6 나오미는 며느리들과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나 돌아가기로 하였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돌보시어 그들에게 양식을 베푸셨다는 소식을 모압 지방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14 오르파는 시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며 입 맞추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15 나오미가 말하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제 겨레와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
16 그러자 룻이 말하였다.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22 이렇게 하여 나오미는 모압 출신 며느리 룻과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왔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것은 보리 수확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 복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명함>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 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마태 5,45)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주님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 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
(1요한 4,20-21)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견고한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의 명함입니다.
다른 명함은 거짓이며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분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13.35 참조)
우리는 지치지 말고 일치로 향하는 길과 서로를 갈라놓는 장애와 장벽을 넘어 하나가 되는 다리를 만들고 또 만들라는 부름 받았습니다.
"믿는 이들은 언제나 상호 존중과 대화로서, ‘주님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경쟁은 누가 더 큰 사랑을 내어놓을 수 있는지를 찾는 것'(요한 바오로 2세, 2001.09.27 강론)임을 알고, 모범이 되어 서로 도와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호경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를 긋는 동작을 통해서 위로부터 아래로의 하느님과 나의 사랑을, 동시에 옆으로의 이웃과 나의 사랑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성 베르나르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물, 그것은 사랑입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므로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현대인이 묵상을 못하는 이유는 내가 요리를 못하는 이유와 같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을 묻습니다.
율법은 613개뿐만 아니라 관습법까지 합치면 수만 가지가 넘었는데,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라고 대답하십니다.
많은 율법 가운데 ‘정신’이 되는 율법이 두 개만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것과 관련된 수많은 율법 조항이 생기게 만들어 정작 중요한 정신을 잃게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사람이 되신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는 범죄까지 저지르게 했습니다.
현 시대는 이런 사탄의 계략이 바뀌었을까요?
똑같습니다.
워낙 잘 먹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정보라도 그것이 소화되어 내 삶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입니다.
사탄은 이것을 알아서 좋은 정보들이 소화되지 않도록 엄청나게 쏟아붓습니다.
사람들은 정보만 수집할 뿐 그것의 정신을 뽑아내어 내 것으로 삼지 못합니다.
학습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먹고 소화하고 배출하는 것처럼, 입력하고 이해하고 표출하는 것입니다.
배우고 익히고 시험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정보만 입력하는 것을 공부라고 여기면 그 정보들은 결국 내가 생각 없이 살게 만드는 독이 됩니다.
묵상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 뇌의 앞부분을 이용하여 생각하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이 작업은 마치 소가 풀을 뜯고 되새김질을 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가 요리를 못하는 것은 재주가 없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해보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요리하지 않아도 항상 남이 해 놓은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실력을 쌓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묵상기도’가 되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이미 정리된 정보들이 너무 많아서 굳이 생각하는 노고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에 가장 큰 일조를 하는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은 생각 없는 인간을 만들기에 가장 좋은 사탄의 도구입니다.
저는 현대의 ‘666’(그리스도의 적)이 ‘스마트폰’이라 생각합니다.
스마트폰은 정보를 소화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이미 정리된 정보를 홍수처럼 쏟아부어 사람이 전두엽을 사용할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게 만드는 전두엽을 퇴화시켜버립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게임을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자기가 눈으로 보는 정보는 곧바로 후두엽으로 갑니다.
머리 뒤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정보가 나의 것이 되어 행동으로 표출이 되려면 전두엽으로 와서 분해되고 소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생각하면 늦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습득된 몸의 반응으로 바로 총을 쏘거나 총알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게 ‘입력-숙고-표출’의 단계에서 ‘입력-표출’의 단계로 간소화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영화를 본다고 가정해봅시다.
영화의 화면은 너무 빠릅니다.
그래서 한 화면의 내용을 깊이 숙고할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다음 화면의 정보를 입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영화만 보고 산다면 머리가 텅 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그랬습니다.
너무 정보가 많아서 하나도 소화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정신도 에너지입니다.
에너지가 여러 곳에 분산되면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야구를 할 때나 테니스를 칠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공을 끝까지 봐!”입니다.
보는 것이 어떻게 그 복잡한 동작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끝까지 보지 않으면 헛스윙을 하거나 빗맞습니다.
지금까지 연습한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말은 “공을 끝까지 보자!”입니다.
이처럼 그것에 통달한 사람들은 거기에서 모든 것이 다 따라올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말 하나를 찾아내고 오직 그 생각만 합니다.
그렇게 내 전두엽의 작용으로 묵상이 된 것을 단순하게 가르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는 원래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게 되어 있기에 동시에 주의를 여러 곳으로 분산시킬 수는 없습니다.
멀티태스킹을 한다는 말은 빠르게 주의를 여기에서 저기로 옮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을 반복하다 보면 이것에도, 저것에도 집중할 수 없습니다.
뇌도 다른 것에 할당한 주의를 하나로 끌어오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힘을 쓸 때, “하나, 둘, 셋!” 하는 것과 같습니다.
“셋!”에 힘을 줄 때까지 “하나, 둘!”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을 이것, 저것 분산해서 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에너지 낭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탄이 우리의 머리를 텅 비게 만들어 심지어 묵상도 하지 못하는 뇌로 만드는지 그 계략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현대에 주의력을 가장 분산하게 만드는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은 사용하지 않고 옆에만 두어도 뇌가 힘들어합니다.
그것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게 에너지를 쓰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기가 물지 않고 윙윙거리기만 해도 신경이 쓰이는 것과 같습니다.
스마트폰은 일할 때는 다른 방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카톡에 답을 하는 것도 시간을 정해놓고 한꺼번에 하는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생각 없이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스마트폰이나 게임, 유튜브 동영상 등을 많이 보면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파묻혀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도 못 하는 그런 자녀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반면 책을 읽으면 한 주제에 오래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에 전두엽이 활성화되어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됩니다.
사탄이 이 세상에서 생각 없이 인생을 허비하며 살게 만들기 위해 쓰는 가장 악랄한 방법이 정보의 홍수에 빠져 멀티태스킹 하며 살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힘들지만 책을 읽으며 천천히 그 주제를 묵상하는 연습을 합시다.
나의 묵상이 단순한 가르침으로 표출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나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수원교구 꾸르실료의 지도를 맡고 있습니다.
꾸르실료는 본래 온전한 교리도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하던 당시 스페인 교회를 바로잡으려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육 안에는 교리를 가르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이미 남이 써 놓은 강의를 그대로 외워서 하지 말고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에 강의를 해보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반응은 ‘우리가 어떻게?’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다들 잘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입력된 것만 그대로 반복하는 패턴이었다면 이제는 ‘묵상’이라는 것을 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한 주제로 한 시간 이상 생각할 수 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체험과 연결될 수 있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 율법이나 교리가 비로소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수많은 정보의 공격들을 꼭 끊을 필요가 있습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모님의 보호 아래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아빠스 성인은 12세기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그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12세기를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졌다.”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그의 지혜와 경륜은 하늘을 찔렀는데, 당대 교황님들을 비롯해 많은 왕들이 그에게 조언과 상담을 청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라며 우러러 보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 수도생활 쇄신의 선구자, 교회 분열을 저지하는 든든한 보루, 탁월한 성서학자, 위대한 명설교자, 그러면서도 겸손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동시에 살아갔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마지막 교부’ 또는 ‘꿀과 같은 혀를 가진 박사’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090년 프랑스 귀족 가문의 촉망받는 자녀로 태어난 베르나르도는 다정다감하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22살의 나이에 시토회에 입회해서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출중한 인품과 지도력, 그리고 놀라운 언변과 감수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입회하기 전 그는 여러 형제들과 친구들을 영적으로 잘 지도하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0명이나 되는 동료들을 하나로 모았고, 의기투합한 그들은 당시 개혁파 수도원으로 ‘뜨고 있던’ 시토회에 동반 입회를 하게 됩니다.
초기 양성 기간을 마친 그는 장상의 지시에 따라 동료 수도자 12명과 함께 그 유명한 클레르보 계곡으로 내려갑니다.
척박한 황무지였던 클레르보에 작고 소박한 수도원을 건립한 베르나르도는 오랜 기간 동안 철저한 고행과 단식, 집필과 일에 전념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았고, 숨을 쉬었으며, 또 그 결실을 형제들과 나누었습니다.
점차 클레르보는 수도생활 개혁의 원천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메마른 골짜기였던 클레르보는 점차 빛과 생명의 계곡, 기쁨과 구원의 골짜기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르나르도의 성덕에 감화를 받고 클레르보로 몰려왔습니다.
베르나르도는 가톨릭교회 쇄신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교황청의 폐단과 고위성직자들의 세속화를 신랄하게 경고했습니다.
교회당국으로부터 공인받은 순회 설교자로서 수많은 지역을 다니며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했습니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스스로에게 그 유명한 질문 한 가지를 던졌습니다.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그는 틈만 나면 외쳤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이 은총의 길이기도 하지만 성모님께로 나아가는 길 역시 은총으로 가는 길입니다.
성모님의 보호 아래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의 손을 잡고 계실 때는 실패할 수 없습니다.”
- 살레시오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 각성, 정신차림>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마태 22,37ㄴ-40)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은 복음은 물론 신구약을 통틀은 성경 전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잘 분석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데, 정신 없는 율법과 예언서의 준수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당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문제를 삼았던 것이지요.
정신 없는 율법이라!
사랑 없는 율법이라!
살다 보면 '정신 없이 살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고, 그런 느낌이 들 때 또한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정신 없이 살면 안 되고, 나간 정신은 바짝 다시 차려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했으니 나간 정신을 다시 차린다는 것은 사랑을 되찾는 것입니다.
사실 올해 들어서 전보다 더 자주 지난 일을 돌아보게 되고, 요즘 들어서 무슨 일을 하다가도 문득 '지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케 되는데, 왜 이런 생각을 할까 생각해 보면 제가 사랑을 놓치고 무엇을 할 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선교 협동조합 일이나 여기밥상을 할 때 문득 이거 지금 사업으로 하는 건가, 아니면 사랑으로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재미로 하는 건가, 의미로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살짝 괴로워지며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하지만, 이내 이래서는 안되지 하는 각성을 하게도 되면서 다시 사랑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신 없이 무엇을 하다가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그 일에 다시 사랑을 불어넣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의미 있는 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백성사와 기도가 이런 사랑 각성제가 되고 정신차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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