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장마 첫날
제주부터 시작된 장마가 뭍으로 건너와 강수가 예보된 유월 하순 토요일이다. 밤새 참아준 비가 연방 내릴 듯해도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물속에 잠긴 둥치 갯버들 숲을 이뤄 / 물고기 알을 슬어 치어가 헤엄치는 / 명도가 다소 탁해도 청정무구 연지다 // 한여름 다가오자 연잎은 폭풍 성장 / 표면적 넓게 펼쳐 어깨를 맞대 가며 / 꽃대가 봉긋 솟아서 불국정토 펼친다” ‘연지 연꽃’
앞 단락 인용절 시조는 근교로 나가는 버스 안에서 즉석으로 운율을 다듬어 지기들에게 사진과 곁들여 안부를 전했다. 어제 아침 동판지를 두른 산책에서 봤던 연꽃을 글감으로 삼았다. 타고 가는 버스가 주남저수지를 비켜 가 연꽃 단지가 눈에 선했다. 사실 이 작품 말고 ‘능소화에서’ 라는 작품을 준비했는데 그것은 후일로 미루었다. 온천수에 몸을 담그려고 길을 나선 걸음이다.
우천이 예상된 주말에 길을 어디로 나서느냐 두어 개 선택지로 망설여졌다. 비가 점심나절까지만 참으면 거제 국사봉으로 올라 곰취를 따올까 싶었다. 지난 4월 하순 곰취 채집 이후 새로운 잎이 돋아 자라 내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테다. 장맛비가 오기 전에 청도 운문사 솔바람 길을 걸어 보고도 싶었다. 올봄부터 사찰 문화재 관람료가 폐지되어 산문을 지키는 이도 없어졌다.
동선이 먼 선택지는 산책 걸음에서 제외하고 온천장으로 가서 대중탕에 몸을 담글 참이다. 스무날 전엔 부곡까지 다녀왔으나 거기는 한나절이라 동선이 짧은 북면으로 향했다. 북면으로 가는 버스 노선은 감계를 거쳐 가는 차편이 많으나 드물게 동읍을 거쳐 본포를 둘러 가는 30번을 탔다. 그래서 앞서 남긴 주남저수지 연꽃이 떠올라 아침 시조를 엮어서 지기들에게 문자로 보냈다.
새벽 첫차로 운행하는 시내버스를 타고 가도 대중탕에는 먼저 와 목욕을 끝내고 나온 이들이 보였다. 승용차를 이용하면 감계에 사는 이들은 십 분이면 닿을 거리라 여름이라도 대중탕 손님은 끊이질 않았다. 연전에 귀촌을 앞둔 친구가 필요로 하던 표고목 벌목을 도와주다 예상하지 못한 무릎 부상으로 여태 불편을 겪어 온천장에 들러 몸을 담가주면 나아지는 듯해 가끔 찾고 있다.
한 시간 남짓 걸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바깥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예상된 강수여서 목욕 후 일정은 시내로 들어가 도서관에 머물 생각이었다. 대중탕 앞 노점상 할머니는 파라솔을 펼쳐 강수와 무관하게 영업을 시작하려 했다. 손두부와 도토리묵을 비롯해 몇 가지 파는 물건이 있었더랬다. 전에도 한두 번 팔아준 옥수수빵은 보이질 않았는데 잠시 뒤 배달되어 온다고 했다.
할머니는 손님이 마수로 하나 팔아주십사는 눈빛이라 발길을 그냥 돌릴 수 없어 다른 물건은 없는지 살펴봤다. 쌓아둔 봉지에 든 내용물이 뭔지 여쭈니 젤리라고 해서 하나 샀다. 이어 두리번거리자 스티로폼 상자 뚜껑을 열더니 삶은 옥수수를 꺼내, 그것도 사서 배낭에 챙겨 넣었다. 자주 찾지 않은 마금산 온천장인데 내가 이만큼이나마 사 주어야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지 싶었다.
버스 정류소에서 시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더니 새벽 첫차로 본포를 둘러 왔던 노선을 다시 탔다. 빗방울이 스친 창밖으로 포기를 불려가는 벼들이 싱그럽고 산기슭에는 감나무과수원이 펼쳐졌다. 갯버들이 에워싼 주남저수지와 저지대에 경작하는 연밭이 보였다. 시내로 복귀해 충혼탑 사거리에 내려 교육단지로 드니 현직 시절 거제 부임 직전 근무 여학교를 거쳐 도서관으로 갔다.
열람실로 올라 집에서 못다 읽은 한시 해설서를 펼쳐 읽었다. 당송 시대 두보와 소동파를 대면하고 고려와 조선 시대 시인의 숨결과 호흡을 같이했다. 여성 신분의 한계에도 속내를 당당히 한시로 읊은 매창이나 황진이를 만나기도 했다. 점심은 어제 먹다 남긴 술빵 부스러기로 때우고 오후는 산 사나이가 쓴 산행기를 펼쳐 읽고 나서 글쓰기에 도움이 될 서책까지 섭렵하고 나왔다. 24.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