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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金春剛 書畵 원문보기 글쓴이: 春剛(金永善)
계절 (季節) |
절기명 (節氣名) |
양력(陽曆) |
음력 陰曆 |
기후(氣候)의 특징(特徵) | |
봄 春 |
立春(입춘) |
2월 |
4~5일 |
1월 |
겨울의 절정에서 봄이 조금씩 움튼다 |
雨水(우수) |
18~20일 |
얼음이 녹고, 초목이 싹트기 시작한다 | |||
驚蟄(경칩) |
3월 |
5~6일 |
2월 |
겨울잠을 자던 벌레들이 깨어난다 | |
春分(춘분) |
20~22일 |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봄기운이 무르익는다 | |||
淸明(청명) |
4월 |
4~5일 |
3월 |
하늘은 맑고, 날씨는 따뜻하다 | |
穀雨(곡우) |
20~21일 |
농사를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 |||
여름夏 |
立夏(입하) |
5월 |
5~6일 |
4월 |
어느새 여름의 문턱에 들어선다 |
小滿(소만) |
20~21일 |
작은 꽃들이 피고, 여름기운이 서서히 감돈다 | |||
芒種(망종) |
6월 |
5~6일 |
5월 |
보리는 익어서 거두고, 모심기를 하게 된다 | |
夏至(하지) |
21~23일 |
낮이 가장 길어지고, 해가 뜨거워 진다 | |||
小暑(소서) |
7월 |
6~8일 |
6월 |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된다 | |
大暑(대서) |
22~23일 |
이윽고 무더위가 최고 절정에 이른다 | |||
가을秋 |
立秋(입추) |
8월 |
7~8일 |
7월 |
더위가 약간 수그러 들면서 가을에 접어든다 |
處暑(처서) |
22~23일 |
아침‧저녁으로 시원해지며 더위가 수그러든다 | |||
白露(백로) |
9월 |
7~8일 |
8월 |
풀잎에 이슬이 맺히며, 가을 기분이 난다 | |
秋分(추분) |
22~24일 |
낮과 밤의 길이가 같으며, 완연한 가을이다 | |||
寒露(한로) |
10월 |
7~9일 |
9월 |
찬 이슬이 맺히고, 날씨가 서늘해 진다 | |
霜降(상강) |
23~24일 |
서리가 내리면서 가을이 깊어간다 | |||
겨울冬 |
立冬(입동) |
11월 |
7~8일 |
10월 |
어느덧 날씨가 추워지며 겨울이 시작된다 |
小雪(소설) |
22~23일 |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 |||
大雪(대설) |
12월 |
6~7일 |
11월 |
큰 눈이 내리며 본격적으로 추워진다 | |
冬至(동지) |
21~23일 |
밤이 가장 길어지며, 겨울의 복판에 든다 | |||
小寒(소한) |
1월 |
5~7일 |
12월 |
한겨울이 닥쳐와 날씨가 몹씨 추워진다 | |
大寒(대한) |
20~21일 |
매섭고 큰 추위가 몰아쳐서 엄동설한이 된다 |
大雪은 소설(小雪)과 동지(冬至) 사이에 있는 음력(陰曆) 11월 절기(節氣)로 태양이 황경 255도에 이른 때이고 양력(陽曆)으로는 12월 7일경입니다. 눈이 많이 내리는 시기라는 의미이지만 실제 추위의 계절은 동지(冬至)를 지나서부터입니다.
옛 문헌에 대설 기간에는 한달새가 울지 않고, 범이 교미하여 새끼를 낳고, 여주{박과의 일년생 넝쿨풀} 열매가 돋아난다고 합니다.
冬至는 대설(大雪)과 소한(小寒) 사이에 있는 음력(陰曆) 11월 중기(中氣)로 태양이 황경 270도에 도달한 날이고 이 날은 태양이 황도의 최남단{남회귀선}에 위치해 낮이 가장 짧은 날이고 양력(陽曆)으로는 12월 22일경입니다. 동지는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의 역법(曆法)에서 역(曆)의 기산점(起算點)이 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더해졌고, 또한 24절기 중에 직접적인 풍습이 가장 많이 있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전통의 풍습에 원단(元旦)과 함께 동지를 으뜸가는 축일(祝日)로 쳐서 궁궐에서도 회례연(會禮宴)을 펼치고 동지사(冬至使)을 중국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민간에서도 동지절식(冬至節食)을 먹었는데, 붉은 팥으로 죽을 쑤어 그 속에 찹쌀로 옹시미 또는 새알심이라는 단자(團子)를 만들어 넣어 먹고 또 역귀(疫鬼)를 쫓는다는 의미로 팥죽 국물을 벽이나 문에 뿌렸습니다.
조선조(朝鮮朝)에서는 이때 새롭게 만들어지는 다음해의 달력을 관상감(觀象監)에서 '동문지보(同文之寶)'라 하여 임금에게 올리고 임금은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대설(大雪)
11월은 중동이라 대설 동지 절기로다
바람 불고 서리 치고 눈 오고 얼음 언다
소설 뒤 대설을 놓은 것은 동지를 앞에 두고 눈다운 눈이 이때쯤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마다 눈이 고르게 오는 것이 아니어서 대설이라고 해도 어느 해는 소설보다 적게 오기도 한다.
"눈은 보리의 이불이다."라는 말이 있다. 눈이 많이 내리면 보리를 덮어 보온 역할을 하므로 동해(凍害)가 적어 보리가 잘 자라기 때문이다.
부네야 네 할 일 메주 쑬 일 남았도다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두소
농사일을 끝내고 한가해지면 가정에선 누런 콩을 쑤어 메주를 만들기 시작한다. 메주를 잘 만들어야 한 해 반찬의 밑천이 되는 장맛이 제대로 나기에 갖은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잘 씻은 콩을 고온에서 단시간 익히는 것이 중요한데 손으로 비벼보아 뭉그러질때까지 충분히 익힌다. 삶은 콩은 소쿠리에 담아 물을 뺀 후 둥글넓적하게 혹은 네모지게 모양을 만든다. 모양을 갖춘 메주를 그대로 며칠 방에 두어 말린 후, 짚을 깔고 서로 붙지 않게 해서 곰팡이가 나도록 띄운다. 알맞게 뜨면 짚을 열십자로 묶어 매달아 둔다. 메주 달 때는 대개 짚을 사용하는데 이는 짚에 효소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좋은 나일론끈이 많지만, 메주를 달 때 유독 짚으로 묶어 다는 이유는 푸른 곰팡이의 번식을 양호하게 하기 위함이다.
간혹 도시에서 자란 새댁들이 물색 모르고 나일론끈으로 달아 메주를 버리기도 하고 장맛을 형편없이 만들기도 한다.
메주를 띄울 때도 곰팡이가 잘 번식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불같은 것을 덮어 주는데 이때도 천연섬유로 된 이불이어야 좋지 나일론 등 합성섬유로 만든 이불은 좋지 못하다. 곰팡이균도 자연친화를 좋아함을 알수 있다.
동지(冬至)
동지는 글자 그대로 겨울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태양이 가장 남쪽으로 기울어져 밤의 길이가 일 년 중 가장 긴 날이다.
이 날이 지나면 하루 낮길이가 1분씩 길어지는데 옛 사람들은 태양이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동지를 설날로 삼기도 했었다.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먹는다.
동지 팥죽은 먼저 사당에 올리고 여러 그릇에 나누어 퍼서 장독, 곳간, 헛간, 방 등에 놓아 둔다. 그리고 대문과 벽, 곳간 등에 뿌리기도 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팥죽의 붉은 색이 잡귀를 몰아내는데 효과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지 팥죽은 잔병을 없애고 건강해지며 액을 면할수 있다고 전해져 이웃간에 서로 나누어 먹었다.
동지 때는 '동지한파'라는 강추위가 오는데 이 추위가 닥치기 전 보리밟기를 한다. 이때는 땅속의 물기가 얼어 부피가 커지면서 지면을 밀어 올리는 서릿발로 인해 보리 뿌리가 떠오르는 것을 막고 보리의 웃자람을 방지하기 위해 과거엔 겨울 방학을 앞두고 학생들을 동원해 대대적인 보리밟기를 하기도 했다.
동짓날 한겨울 기나긴 밤에는 새해를 대비해 복조리와 복주머니를 만들었다.
복조리는 산죽을 쪄와 사등분으로 쪼개어 햇볕에 말리고 물에 담근 뒤 그늘에서 건조시켜 만든다. 쌀에 든 돌이나 이물질을 가려낼 때 사용하는 복조리는 새해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복을 사라며 "복 조리 사려"를 외치며 다녔다. 대보름이 지난 뒤 팔러 다니면 상놈이라 욕을 먹기도 했다. 복조리를 부엌 부뚜막이나 벽면에 걸어두고 한해의 복이 그득 들어오기를 기원했다.
음력 십일월부터는 농한기다. 이때는 가장들보다 아녀자들이 할 일이 더 많다.
간장, 된장, 고추장을 만들기 위한 메주쑤기로 부산할 때다.
무말랭이, 토란 줄기, 호박 오가리 등 각종 마른나물 말리고 거두기에 겨울 짧은 해가 아쉽기만 할 때다.
비닐하우스 농가에서는 비닐하우스 골조설치, 비닐 씌우기, 거름내기, 논갈이 등 중노동이 잇따른다. 과거엔 농한기로 쳤지만 비닐하우스의 등장으로 모내기철보다 더 바쁜 농번기가 되었다. 그래도 우리네 기억 속엔 정겨운 화롯가의 추억이 남아 있다.
오누이들의 정다운 이야기에
어느 집 질화로에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어나던 밤
파묻은 불씨 헤치며 잎담배 피우시며
'고놈 두 눈동자 초롱같애'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
바깥은 연신 눈이 내리고 오늘밤처럼 눈이 내리고…(중략)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겨울밤이면 농부들은 동네 사랑방에 모여 내년 농사에 쓸 새끼를 꼬기도 하고 짚신이며 망태기를 삼기도 했다.
더러 손재주 좋은 이들은 윷놀이와 곡식을 말릴때 쓰는 멍석, 음식을 보관하는 봉새기, 재를 밭에 뿌릴때 쓰는 삼태기, 배낭의 일종인 조루막, 풀 베어 담는 꼴망태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졸음이 몰려올 쯤이면 쌈지담배를 꼬실리다가 이내 아낙네들이 삶아온 고구마를 먹으며 마을 소식들이 오갔다.
내년 소작료 얘기며 부당한 물세 때문에 복장이 터진다는 얘기며 안산 너머 닭실골짝 김서방네는 소작료 때문에 논주인과 다투다 부치던 논을 뺏겨 내년 살길이 막막하다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밖은 눈이 무진장 내리는데 말이다.
안방에서 동네 아낙들과 고구마에 동치미를 들이키며 바느질을 하다 말고 강부잣집 딸년은 시집가 잘 산다는 얘기며, 양달마을 박서방은 술집 작부와 눈이 맞아 도망을 쳤다는 얘기들이 오갔다.
그때 쯤이면 어린 것은 아이스크림 같은 겨울 감홍시를 입이 벌개지도록 칠한 채 먹다 말고 이내 어미 무릎을 베고 잠이 들곤 했다.
이처럼 겨울나기는 눈오는 밤 질하로에 묻어둔 불씨요 밤알처럼 훈훈한 것이었다.
그러나 산업사회라는 험한 상황이 아름다운 겨울의 낭만을 사라지게 했다.
모진 바깥 세상에 시달린 손을 포근하게 묻을 곳이며 얼어붙은 볼을 감싸 녹여주며 거칠어진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정(情)의 원천이던 겨울나기. 쇠죽을 끓여 지글지글 끓던 방에서 밤과 고구마에 동치미를 들이키며 가족끼리, 이웃끼리 도란도란 얘기 나누던 따뜻함이 새삼 그리운 시절이다.
漁父辭/屈原,문인화
굴원이 죄 없이 추방을 당해
강과 못 사이를 쏘다니고
연못가 거닐며 슬픔 노래 읊조리니
얼굴은 시름 겨워 초췌해지고
형용은 비쩍 말라 야위었더라.
어부가 이를 보고 물어 말하길.
"그대는 삼려대부(三閭大父) 아니신가요?
이런 곳엘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굴원이 대답하여 말을 하기를,
"온 세상 모두가 흐려 있는데
나 혼자만이 맑고 깨끗했으며,
뭇 사람들 모두가 취해 있는데
나 혼자만이 맑은 정신 깨어 있어서
그만 이렇게 추방당한 거라오."
어부가 이 말 듣고 말을 하기를,
"성인은 사물에 막힘이 없어
세상과 추이(推移)를 같이 한다오.
세상 사람 모두가 흐려 있다면
어째서 진흙물 흙탕질을 쳐
그 물결 더 높이 일으키질 않으며.
뭇 사람 모두가 취해 있다면
그 술 지게미 배불리 먹고
박주(薄酒)나마 마셔 두지 않고서
어째서 깊이 생각 높이 행동해
스스로 추방을 불러 왔나요?"
굴원이 이 말 듣고 다시 말하,
"내 일찍 이런 말 들은 적이 있다오.
새로 머리 감은 이는 갓 먼지 털어 쓰고
새로 몸을 닦은 이는 옷을 털어 입는다고,
그러니 어찌 이 깨끗한 내 몸으로
저 더러움을 받을 수 있으리요?
차라리 상수(湘水) 물가로 달려 가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낼지언정
어찌 이 희고 깨끗한 내 몸으로
세속의 티끌을 뒤집어 쓸 수 있으리요?"
어부가 듣고서 빙그레 웃고는
돛대를 올리며 가면서 노래하길
'창랑의 물결이 맑을 때라면
이 내 갓끈 씻을 수 있고,
창랑의 물결이 흐릴 때라면
이 내 발이나 씻어보리라.'
마침내 가 버리곤 말이 없구나.
굴원이 이미 쫓겨나 江潭(강담)에서 노닐고 못가를 거닐면서 詩(시)를 읊조릴 적에
안색이 초췌하고 몸이 수척해 있었다.
漁父(어부)가 그를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三閭大夫(삼려대부)가 아닌가? 어인 까닭으로 여기까지 이르렇소?
굴원이 대답했다.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만 홀로 깨끗하고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으니
그래서 추방을 당했소이다.
어부(漁父)가 이에 말했다.
聖人(성인)은 사물에 얽매이거나 막히지 않고 능히 세상을 따라 옮기어 나가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혼탁하면 왜 그 진흙을 휘젖고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으며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있으면 왜 그 술 지게미를 먹고 薄酒(박주)를 마시지 않고는
무슨 까닭으로 깊은 생각과 고상한 행동으로 스스로 추방을 당하셨소?
굴원이 이에 대답하였다.
내 듣기로, 막 머리를 감은 자는 반드시 冠(관)을 퉁겨서 쓰고
막 목욕을 한 자는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 하였소이다.
어찌 몸의 반질반질한 곳에 外物(외물)의 얼룩덜룩한 것을 받겠소?
차라리 湘江(상강)에 뛰어들어 강 물고기의 배속에서 葬事(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 희디흰 純白(순백)으로 世俗(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쓴단 말이요?
漁父(어부)는 빙그레 웃고는 배의 노를 두드려 떠나가며 이에 노래를 불렀다.
滄浪(창랑)의 물 맑으면 내 갓 끈을 씻으리요, 滄浪(창랑)의 물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요.
그는 마침내 떠나가고 굴원은 다시 그와 더불어 말하지 못하였다.
요점 정리
작자 : 굴원(屈原)
갈래 : 사(辭)
성격 : 의지적
표현 : 대화체
주제 : 굴원의 고결하고 청렴 결백한 성품
특징 : 굴원이 추방되어 초췌한 모습으로 강가를 떠돌 때 한 어부와 만나 서로 주고 받은 말을 적어 놓은 로 굴원의 성품과 어부의 삶의 자세가 대조되어 잘 드러나 있다.
출전 : <초사(楚詞)>
내용 연구
삼려 대부 : 중국 춘추 시대 초나라의 벼슬 이름.
어부 : 어부는 세상과 추이를 같이 하며 살아갈 것을 말했으며, 이런 뜻이 창랑가에도 나타나 있다. 창랑가는 도가 행해지면 세상에 나가 뜻을 펼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숨어 살 것을 암시하는 인물이다.
屈原旣放 游於江潭 行吟澤畔 굴원기방 유어강담 행음택반
굴원이 이미 죄에 몰려 遠地(원지)에 追放(추방)되어, 연못의 언덕에 방황하여 걸어가면서 試賦(시부)를 읊조렸다. 放 ;멀리 추방. 江潭 湘江(상강) 가의 연못. 顔色 樵悴 形容 枯槁 안색 초췌 형용 고고
그 안색이 초췌하고 ,형색은 파리한 모습이라 憔悴 : 마음이 괴로워 몸이 파리한. 枯槁 : 생기가 없는 . 漁父 見而問之曰子非三閭大夫與 何故至於斯 어부 견이문지왈자비삼려대부여하고지어사
어부가 이것을 보고 굴원에게 물어 가로되, 그대는 三閭大夫 (삼려대부)가 아닌가? 어떤 연고로 여기에까지 이르렀느냐는 것이다. 三閭大夫 : 楚(초)나라의 왕족인 昭(소)씨. 屈(굴)씨. 景(경)씨 등을 관장하던 장관 자리에 있던 굴원을 이르는 말. 屈原 曰擧世皆濁 我獨淸 衆人 皆醉 굴원 왈거세개탁 아독청 중인 개취
굴원이 이르기를 세상은 모두 흐려 악에 물들어 있는 데, 나 홀로 맑고, 衆人(중인)이 욕심 때문에 迷惑(미혹)되여 醉(취)한 것 같은데, 擧: 모두. 전부. 濁 : 욕심이 많고 더러운. 醉 : 부정 때문에 양심이 흐려지는. 我獨醒 是以見放 아독성 시이견고
나 혼자 이성이 밝게 깨어 있으므로, 이 때문에 죄로 몰려 추방되어 이곳에 왔노라. 醒 : 이성이 밝은. (韻字: 淸. 醒) 漁父 曰聖人 不凝滯於物而能與世推移 어부 왈성인 불응체어물이능여세추이
어부가 이르기를 聖人(성인)은 事物(사물)에 굳어버려 融通性(융통성)이 없게 하지 않고, 세상과 더불어 推移(추이)한다. 凝滯(응체) : 굳어져 통하지 않는 것. 융통성이 없는. 世人 皆濁 何不굴其泥而揚其波 세인 개독 하불굴기니양기파
世人(세인)이 모두 흐려 악에 물들어 있으면, 어찌하여 그 진흙에 더렵혀지고 ,같은 世波(세파)를 올려 그들과 同調(동조)하지 않고, 자기만이 潔白(결백)을 주장하는가. 굴其泥而揚其波 : 세상 사람들에 동조하는. 衆人 皆醉 何不飽其糟而철其리 중인 개취 하불포기조이철기리
많은 사람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워 그 즐거움에 취해 있으면, 어찌하여 그 술 찌꺼기라도 먹고 그 薄酒(박주)라도 마시면서 세인과 더불어 살지 않고 혼자 覺醒(각성)하는가. 飽其糟而철其리 : 세인처럼 취하지 않아도 그 술 찌꺼기나 모주를 마시면서 소극적으로 동조하는 것. 철 : 마실 철. 리 : 모주 술 리.
何故 深思高擧 自今放爲 하고 심사고거 자금고위
무엇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남보다 뛰어나게 고상한 행동을 하여, 스스로 자신을 원지로 추방당하게 하는가. 屈原 曰吾聞之 굴원 왈오문지
굴원이 이르기를 나는 이러한 말을 들었다. 新沐者 必彈冠 新浴者 必振衣 신목자 필탄관 신욕자 필진의
금방 머리를 씻은 사람은 반듯이 관을 털어 쓰고, 몸을 금 방 씻은 자는 반듯이 옷을 털어 입는다고, 新沐 : 금방 머리를 감다. 安能以身之察察 受物之汶汶者乎 안능이신지찰찰 수물지문문자호
맑고 깨끗한 몸에 어찌하여 外物 (외물)의 더러운 羞恥(수치)를 받게 할 수 있겠는가. 察察 : 맑고 깨끗함. 汶汶 : 더러워진 모양. 치욕이 많은.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安能以皓皓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 영부상류 장어가어지복중 안능이호호지백 이몽세속지진애호 :
차라리 상수에 가서 강물에 빠져 물고기 배속에 장사 지낼 지낼지언정 결백한 몸에 어찌 세속의 진애의 더러움을 입을수 있겠는가. 葬於江魚之腹中 : 강호의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내는 것. 굴원은 나중에 상수에 빠져 죽었다. 皓皓 : 희고 맑음.
漁父 莞爾而笑 鼓 而去 어부 완이이소 고예이거
어부는 씽긋 웃으면서 호의를 표시하고 상앗대 소리 요란하게 배를 저어 떠났다. 莞爾 : 씽긋 웃는 것. 鼓설 : 뱃전을 두드리다. 乃歌曰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내가왈창랑지수청해 가이탁오영
그러면서 노래 불러 가로되,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을 것이고,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遂去不復與言 창랑지수탁해 가이탁오족 수거불복여언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가버려 다시 더불어 말하지 않았다. (세상이 道를 행하여 지느냐 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던가 아니면 발을 씻고 떠나 버린다는 뜻)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고대 중국의 대표적인 '초사'가운데 하나이다. 초사는 애절한 정조가 지배적이며 화려한 장식이 뛰어나다. 굴원은 원래 초나라 회왕을 도와 눈부신 정치 활동을 하였으나, 간신의 참소로 호남성의 상수로 추방을 당하였는데, 방랑 생활을 하다가 울분을 참지 못해 물에 몸을 던진 것으로 유명하며, 굴원의 강직한 성품이 어부의 삶의 자세와 대조되어 더욱 빛나고 있다.
어떤 이는 이 시에 등장하는 어부는 당시의 隱士(은사)였다고 전해지나 사실은 굴원이 이러한 인물을 假設(가설)하여, 자기의 절조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삼았다고 생각되어 진다. 또한 굴원 자기 자신의 글인지도 확실치 않으며, 아마도 굴원에 관한 傳誦(전송)을 후세 사람이 그의 작품 집에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이 글에는 그의 성격이 진실되고 분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가 멱라수 에 빠져 죽을 것을 예언한 듯한 구절도 보이는 데 , 그처럼 청렴 결백한 사람이니까 , 당연히 세상에 용납되지 않았고,그 자신도 亡國(망국)의 참상을 참아 보지 못하여 자살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어부와 같은 처세는 그 때와 같은 난세에는 타당한 것이었겠지만 ,굴원의 충성스러운 심정으로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이 전이 그가 후세의 사람들한테서 愛慕(애모)와 동정을 받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감상2
굴원은 초사(楚辭) 문학의 시조로 불리는 인물이다. 초사란 초인(楚人)의 노래란 뜻으로 굴원의 "이소(離騷)", "구가(九歌)", "천문(天問)", "어부" 등이 초사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굴원의 작품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리만큼 애절한 전조를 담고 있어 우리 나라의 고전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서포 김만중이 정철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굴원의 "이소"에 비긴 점은 당시의 문인들이 굴원의 작품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사실이다.
굴원은 너무나 청렴 결백했기 때문에 참소를 당해 멀리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상수(湘水)가로 추방을 당했다 우수에 잠겨 헤매고 있을 때 그는 어부를 만났다. 어부는 굴원에게 세상에 순응해 살아갈 것을 권했으나 굴원은 더러운 세상과 타협해 살아가느니 차라리 강물에 빠져 죽는 것이 낫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랬더니 어부는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으련만 물이 흐려서 발이나 씻으리.'라는 "창랑가"라는 노래를 부르며 사라져 갔다는 내용이다. 끝내 울분을 참지 못하여 멱라수라는 물에 몸을 던졌던 굴원의 깨끗하고 강직한 성품이 어부의 삶의 자세와 대조되어 더욱 빛나고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이 작품은 굴원과 어부의 대화 형식으로 짜여져 있으며, 이를 통해 굴원의 고결하고 강직한 성품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심화 자료
굴원(屈原/BC 343 ?~BC 277 ?)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비극 시인으로 초(楚)의 왕족과 동성(同姓). 이름 평(平). 원 자. 생몰연대는 기본자료인 《사기(史記)》 <굴원전>에 명기(明記)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설이 있으나, 지금은 희곡 《굴원》의 작자인 궈모뤄[郭沫若]의 설에 따른다.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에서 활약하였으나 법령입안(法令立案) 때 궁정의 정적(政敵)들과 충돌하여, 중상모략으로 국왕 곁에서 멀어졌다. 《이소(離騷)》는 그 분함을 노래한 것이라고 《사기》에 적혀 있다.
그는 제(齊)나라와 동맹하여 강국인 진(秦)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파(合縱派)였으나, 연형파(連衡派)인 진나라의 장의(張儀)와 내통한 정적과 왕의 애첩(愛妾)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은 제나라와 단교하고 진나라에 기만당하였으며, 출병(出兵)하여서도 고전할 따름이었다. 진나라와의 화평조건에 따라 자진하여 초나라의 인질이 된 장의마저 석방하였다.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굴원은 귀국하여 장의를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왕의 입진(入秦)도 반대하였으나 역시 헛일이었다. 왕이 진나라에서 객사(客死)하자, 장남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자란은 아버지를 객사하게 한 장본인이었으므로, 굴원은 그를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강 이남의 소택지로 추방되었다.
《어부사(漁父辭)》는 그때의 작품이다. 《사기》에는 <회사부(懷沙賦)>를 싣고 있는데, 이는 절명(絶命)의 노래이다. 한편 자기가 옳고 세속이 그르다고 말하고, 난사(亂辭:최종 악장의 노래)에서는, 죽어서 이 세상의 유(類:법·모범)가 되고 자살로써 간(諫)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있는데, 실제로 창사[長沙]에 있는 멱라수(汨羅水)에 투신하여 죽었다. 그의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굴원(屈原)과 어부사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애국시인으로 이름은 평(平). 원(原)은 자. 일찍부터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그의 시들은 초기 중국 시단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굴원은 양쯔 강[揚子江] 중부 유역의 큰 나라였던 초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났다. 그의 친척이었던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20대에 벌써 좌도(左徒:侍從)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법령입안(法令立案) 때 궁정의 정적인 상관대부(上官大夫)와 충돌해 그의 중상모략으로 면직당하고 국왕 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굴원은 제(齊)와 동맹해 강국인 진(秦)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진의 장의(張儀)와 내통하고 있던 정적과 왕의 애첩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왕은 제와 단교했으나 결국 진에게 기만당하고 진의 포로가 되어 살해당하고 말았다. 회왕이 죽은 뒤 큰아들인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굴원은 회왕을 객사하게 한 자란을 백성들과 함께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 강 이남의 소택지(沼澤地)로 추방되었다. 〈어부사 漁父辭〉는 그때 쓴 작품이다. 그는 유배지에서 무속적 민속의식을 관찰하고 그의 작품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설들을 수집했다. 맨처음 회왕에게 내쫓기어 유배되었을 때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장편 서정시 〈이소 離騷〉를 써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는 '만나다'의 뜻이고 '소'는 '근심'이라는 뜻이니 이소란 곧 '근심을 만나다'라는 뜻이다. 〈이소경 離騷經〉이라 하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높여 부르는 이름이다.
"이것은 위로 당우(唐虞) 3후(三后)의 성왕을 법을 들어 말하고, 아래로는 걸(桀)·주(紂)·예()·요()의 패망함을 들어 말함으로써 군왕이 깨닫고 정도(正道)로 되돌아가 다시금 자기를 불러줄 것을 기원한 것이다."
위의 글은 왕일(王逸)과 주자(朱子)의 〈이소경〉 서문의 한 토막이다. 굴원은 그토록 애타게 자기의 충정을 노래하다가 한 번 용서받은 바 있었으나, 다시금 참소를 받아 경양왕에 의해 멀리 양쯔 강 남쪽 강남지방으로 내쫓기는 몸이 되었다. 애국시인 굴원은 유배에 대한 절망감으로 강가를 하염없이 거닐며 시를 읊조리다가 〈회사(懷沙)의 부(賦)〉를 마지막으로 고결한 성품을 그대로 간직한 채 돌을 안고 미뤄 강[汨罷江:지금의 汨水]에 몸을 던졌다. 중국에서 음력 5월 5일에 벌어지는 유명한 용선(龍船) 축제는 이 애국시인의 유체를 찾던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굴원의 작품들은 고대 중국의 명시선집인 〈초사 楚辭〉에 실려 있다. 이 시집은 후세 시인들이 굴원의 전설적인 삶에 대해 쓴 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한부(漢賦)에 큰 영향을 주었고, 후대에 높이 평가되고 있다. 趙允卿 글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楚辭 (초사)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송옥(宋玉) 등에 의하여 시작된 운문(韻文). 북방문학인 《시경(詩經)》의 뒤를 이어 나온 남방문학의 대표격이며, 이를 본뜬 한(漢)나라 때의 작품들도 포함된다. 샤머니즘이 성행하였던 초나라에서는 많은 신화·전설·가요가 존재하였고, 그러한 토양 속에서 문학적인 형식과 내용을 갖춘 초사작품이 형성되었다. 먼저 천지구조와 역사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 《천문(天問)》, 산천(山川)의 신들에 대한 제사의 노래인 《구가(九歌)》, 몸에서 벗어난 영혼을 불러들이는 《초혼(招魂)》 등 종교의식을 반영한 작품들이 생겼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지상(地上)에 들어오지 못하고 천상(天上)이나 신화적인 이역(異域)을 떠도는 주인공의 자서(自敍)를 다룬 《이소(離騷)》가 완성되어 초사문학의 정점을 이루었다.
《이소》의 주인공의 고뇌에는 중국통일로 향하는 급격한 사회변동의 소용돌이에 내몰린 초나라 사람들의 고통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초사문학은 《구장(九章)》에서 보이듯 긴장이 풀어진 문학으로 변모해 갔고, 《어부(漁父)》 《복거(卜居)》 등에서는 그때까지의 날카로운 문제 제기의 자세를 거의 잃어버렸다. 따라서 초사문학은 한·후한(後漢)시대를 거치면서 종말을 맞게 되었으며, 그 형식과 내용은 뒷날 부(賦) 등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체로 《시경》이 4자구(字句) 중심의 안정된 형식을 갖추고 있었음에 반하여, 초사작품들은 어구가 길고 보다 유동적인 형식 속에 신화·전설 등의 비장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문체의 특징으로는 《구가》의 구절 <욕란탕혜목방 화채의혜약영(浴蘭湯兮沐芳, 華采衣兮若英>에서처럼 3자(字)와 2(3)자 사이나 2자와 2자 사이에 <혜(兮)>를 두는 구법(句法)과, <혜> 대신 구 사이에 <지(之)> <이(以)> <이(而)> 등의 조사를 넣고, 무운구말(無韻句末)에 <혜>를 두는 《이소》식의 구법이 있으며, 《초혼》 《대초(大招)》에서처럼 <사(些)>나 <지(只)>를 구말에 두는 경우도 있다. 이 밖에 편말(編末)에 20구 안팎의 종편사(終編辭)인 <난(亂>을 두는 것도 특징이다. 초사문학의 원전(原典)으로는,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굴원의 《이소》와 25편의 부 및 후인의 작품 등에 자작 1편을 덧붙여 엮은 《초사》를 비롯하여, 후한 왕일(王逸)의 주석서 《초사장구(楚辭章句)》, 남송(南宋) 주희(朱熹)의 《초사집주(楚辭集註)》 등이 있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漁父辭> (어부사, 초나라 굴원 지음)
굴원이 이미 추방되어 강과 호수에 노닐 때에 못가 언덕을 거닐며 (시를) 읊조렸다. 얼굴빛은
무엇 때문에 여기에 이르렀는가?” 하니, 굴원이 말하기를, “온 세상이 모두 흐린데
어부가 말하기를, “성인은 사물에 구속되지 않고 능히 세상의 변화에 함께 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두 취했으면 어찌하여 그 지게미를 먹고 그 술을 마시지 않았는가?
굴원이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고,
차라리 상강의 흐름에 나아가 강물 속 고기의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 희디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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