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 6일,
경찰, 반민특위 습격사건
6월 6일. 사람들은 흔히 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분들을 기억하는 현충일로 알고 있다. 그런데 1949년 6월
6일. 우리 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바로 ‘반민특위습격사건’이다.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의 약칭으로, 1948년부터 1949년
까지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설치했던 특별위원회였다. 제헌국회는
정부 수립을 앞두고 애국선열의 넋을 위로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해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헌법에 두었다. 이에 따라 제헌국회는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 제정에
착수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1948년 9월 22일에 공포되었
으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같은 해 10월 22일에 설치되었다.
반민특위는 각 도에서 지명된 국회의원 총 10명을 조사위원으로 삼았다. 또한 이들의 효율적 활동을
위해서 중앙사무국과 각 도에 지방사무국을 두었고, 반민족행위자의 기소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검찰부
와 특별재판부도 구성되었다. 즉 반민특위는 헌법에 의하여 제정된 기구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등이
함께 구성하였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가진 기관이었다는 것이다.
1949년 당시 남대문로에 있던 반민특위 청사. 이후 이 건물은 국민은행 건물로 사용돼 왔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중앙청의 사무실에서 중앙사무국의 조사관과 서기의 취임식을 마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먼저 친일파를 선정하기 위한 예비 조사에 들어가 7,000여 명의 친일파 일람표를
작성하고, 친일파의 체포 준비에 들어갔다. 특히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친일파 가운데 도피를 꾀하는
자의 체포에 주력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와 관심을 받았고, 반민특위 역시 이러한
지지 속에서 친일파 주요 인사들을 연이어서 체포하였다.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된 사람들이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반민특위 재판 모습
그러나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귀국 직후 그는 ‘선(先) 정부수립
후(後) 친일파 숙청’을 주장했으며, 정부수립 후에는 국론분열이나 민심혼란을 이유로 다시 반대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반민법 제정과정에서부터 비협조적이었으며,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 이후에는
탄압과 방해책동으로 일관했다. 반면에 대법원장 김병로는 반민특위의 활동은 불법이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반민법이 공포된 1948년 9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서는 내무부 주관 하에 ‘반공 국민대회’가 열렸는데
형식상은 반공대회였으나 실지로는 반민법 반대 국민대회였다. 이날 대회에서 윤치영(尹致暎) 내무장관
이승만 대통령의 축사를 낭독한 후 “해방 이후 처음 보는 애국적 대회”라고 극구 칭찬했다. 반면 국회는
이날 반공대회가 국회를 적구(赤狗)로 모독하고 반민법을 반대하기 위한 대회라고 규정하며 이승만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승만 정부는 반민법 반대 국민여론을 조장하는 한편 반민법의 김을 빼기위해 개정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 1949년 1월초부터 특위가 와해된 8월말까지 총 80여 회의 국무
회의를 열었는데 이 중 11회에 걸쳐 반민법 개정을 논의한 바 있다. 또 이승만 정부의 특위 방해공작은
비열할 정도였다. 특위가 엄연히 법적 기구임에도 조사활동비 등 필요한 예산을 제대로 배정하지
않았으며, 필요한 자료요청도 “침수” “분명치 않음” 등을 이유로 거부하기 일쑤였다.
한편 친일세력들은 특위 요인 암살을 통해 특위를 무력화를 기도했었다. 반민법 공포 직후인 1948년
10월경 노덕술, 최난수 등 친일경찰들은 특별검찰관 노일환, 김웅진, 특별재판관 김장렬 등을 납치한 후
강제로 ‘나는 38선 이남에서 국회의원 노릇을 하는 것보다 이북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는 취지의 성명서를
자필로 써 신문사 등에 보내고는 38선으로 가는 도중에 이들을 살해해 애국청년들이 살해한 것으로
가장하려 했었다.
그러나 이 음모는 이들이 고용하려 했던 테러리스트 백민태(白民泰)가 암살대상자 명단을 본 후 두려움을
느껴 조헌영 의원 등에게 이 계획을 고백하면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암살대상자 명단에는 이들 외에도
대법원장 김병로, 검찰총장 권승렬, 국회의장 신익희 등 거물인사 다수가 포함돼 있어 이 음모에는 노덕술
이상의 상충부에서 개입됐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러나 주모자인 노덕술 등은 증거불충분
으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5월 들어 사태는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소장파 이문원 의원 등 3명이 남로당과의 연루혐의로 체포된 데
이어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터졌다. 앞서 6월 4일 특위는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 종로
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 등 친일경찰들을 반민법 제7조 해당자로 체포하였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6월 6일 새벽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지휘하는 50여 명의 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
하였다. 건물 주변은 기마경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윤기병은 장탄한 권총을 휘두르면서 소리 질렀다.
"여기 있는 놈들 모조리 끌고 가라!"
총을 든 경찰관들은 닥치는대로 특위 직원들을 붙잡아 두둘겨 패면서 쓰리쿼터(M37 트럭)에 실었다. 여기
저기서 주먹과 발길질이 날라오면서 욕설을 해댔다. 모두 35명이 끌려 가고 통신기기와 호신용 무기, 서류
전체를 압수해갔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국법을 수행 중인 국가요원들에게 이러고도 너희들이 무사할 것 같으냐?"
이날 오후 서울시경 간부들은 회의를 열고 특위 간부 쇄신, 특경대 해산, 경찰 신분보장 등을 요구
하였으며,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48시간 이내에 총사퇴를 하겠다고 밝혔다.
참고로 자료에 따르면 경찰의 경우 1946년 10월까지 임명된 서울 시내 10개 경찰서장 중 9명이 친일
경찰 출신이었다. 특히 이들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고문한 악질 친일파들이었다.
오히려 미 군정의 비호 아래 승진하며 한국 경찰의 핵심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한편 특위습격사건이 발생한 당일 특위는 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 3부 연석회의에서
“현재 공무원으로 있는 반민법 제5조 해당자들을 즉시 무장해제 시키고 반민자로 수감할 것”을 결의했다.
반민법 제5조란 『일본치하에 고등관 3등급 이상, 훈 5등 이상을 받은 관공리 또는 헌병, 헌병보, 고
등경찰의 직에 있던 자는 본법의 공소시효 경과 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다. 단, 기술관은 제외한다』
는 내용으로 친일경찰 및 정부 내 장·차관 등 고위인사 가운데 친일 전력자들을 타깃으로 한 것이었다.
앞서 특위는 1월 14일 이승만에게 반민법 제5조 대상자를 1월말까지 공직에서 자진 추방시킬 요청하였
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형 악재가 줄을 이었다. 6월 중순 소위 ‘국회프락치사건’
이 터져 특별검찰관 노일환과 서용길이 구속되면서 특위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는 반민특위를
주도했던 소장파 의원들을 남로당의 프락치라고 체포한 사건으로, 특히 반민특위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노일환, 박윤원, 김약수, 서용길 등 소장파 국회의원들을 빨갱이라고 누명 씌워 구속시켰다.
이어 6월 27일 소장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백범 김구가 피살되면서 특위는 극도로 위축되기 시작했다. 이런
틈을 타서 이승만 측은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7월 6일 이인이 제출한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함
으로써 당초 1950년 6월 20일까지로 돼 있던 공소시효가 1949년 8월말로 단축되고 말았다.
이에 반발하여 김상덕 위원장을 포함하여 위원 전원, 특별재판관 3인, 특별검찰관 3인이 사표를 제출
하였다. 이로써 친일청산에 강한 의지를 가졌던 특위 요인들은 모두 물러나고 이인, 송필만, 김익진, 유진홍
등 친일청산 반대론자나 혹은 친일의 흠이 있는 자들이 특위를 장악하게 됐다. 이들은 8월말로 예정된
특위 해산을 앞두고 업무 정리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국민적 염원을 담아 출범한 반민특위는 이승만과 그의 주변 친일세력들의 줄기찬 방해책동으로 업무개시
8개월 만인 1949년 9월 22일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로써 친일파 청산은 후세들에게 역사적 과제로
남겨졌고, 이후 한국사회는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다.
이승만의 이런 친일 반역적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인을 서슴지 않는
후안 무치한 행동들 조차 역사의 심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이
과연 일본에게 반성할 줄 모르는 민족이라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인가???
다른 나라의 경우는??
프랑스의 경우, 나치협력자들이 감형되거나 피선거권을 얻기도 했지만 약 70%의 구 정치인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드골대통령은 기업인, 출판계, 작가, 지식인, 영화 배우, 가수, 학자, 정치인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 12만 7천 7백 51명이 재판에 회부, 6천 7백 6십여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이 가운데 사형이 집행된 사람은 7백 6십여 명이었다.
독일군의 아이를 낳은 한 프랑스 여인이 삭발당한 채 쫓겨나는 모습
중국의 경우, 1945년 11월 23일, <한간(漢奸)처리안건조례>를 공포, 1947년 10월까지 국민당 관할 지역
각 성시(省市)의 고등법원에서 재판한 한간 관련 안건은 약 25,000건이었으며, 그 중 369명이 사형,
979명이 무기징역, 13,570명이 유기징역, 14명이 벌금형에 각각 처해졌다.
독읠의 경우, 독일은 지금도 나치전범에 대한 색출과 처단을 그치지 않고 있다. 독일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통해 나치 전범 12명을 사형시켰고, 연합군 점령 종료 후에도 나치 전범을 계속 추적해 10만 건
이상의 용의자를 수사, 6,000건 이상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몇 년 전, 93세 나치 전범 용의자가 체포됐다는 뉴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할 충격을 주기도 했다. 지난
1970년 빌리 브란트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에 무릎을 꿇고 헌화하는 사진이 공개
되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1998년 헬무트 콜 총리는 “독일은 나치 만행을 잊어서도 안 되고,
잊으려 하지도 않는다.”면서 지속적인 사과의 말을 하기도 했다.
네델란드의 경우, 1940년 5월부터 1945년 5월까지 5년간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은 네델란드는 <특별법원>,
<인민재판소>에서 맡아 네델란드 괴벨스라 불린 친독언론인 막스 블록쩔 등 154명에 사형을 선고, 이들
중 39명은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무기징역 148명, 15 ~ 20년 징역형 578명, 10 ~ 15년 징역형 4,589명
등 중형을 선고하고, 인민재판소도 10년 미만의 징역형 531명 등을 선고하여 반민족행위자들을 엄벌하였다.
폴란드는 1942년부터 반역자와 협력자들을 처벌하는 특별군사재판소와 특별민사재판소를 운영하였다.
이들 재판소에서는 약 5,000건의 재판에서 약 3,000건의 사형선고를 내리고, 약 2,500명의 사형을 집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