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신> 관념의 사물화 / 임보 (시인)
로메다 님, 이미지 찾는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지요?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린다고 하지 않던가요? 이미지도 열심히 찾는 이에게 머리를 내밉니다.
나는 전에 소재를 양분하여 우리의 몸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객체적 소재'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정황들을 '주체적 소재'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이미지를 찾았던 것은 객체적 소재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다른 한 편인 주체적 소재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외부의 세상 못지 않게 복잡다단합니다. 얼마나 많은 욕망과 감정이 뒤얽혀 있습니까?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慾)의 소위7정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부침하면서 우리의 감정을 지배합니다. 이러한 감정과 욕망들이 또한 시의 중요한 소재입니다. 아니, 어쩌면 객체적 소재들 못지 않게 이러한 주체적 소재들― 곧 감정 때문에 시를 쓰게 된 경우가 더 많을 지도 모릅니다. 시의 주류가 서정시인 것만 보아도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감정들을 어떻게 표현해 낼 것인가?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무척 화가 난 상태라고 가정합시다. 분기충천(憤氣衝天)이란 말이 있는데 분한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쳐 오르는 그런 상태 말입니다. 그런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독자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요? 다음의 두 가지 표현을 비교해 봅시다.
가) "나는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척 무척 분하다!" 나) "나의 가슴은 분노의 용암이 넘쳐흐르고 있다!"
어느 표현이 더 절실하게 느껴집니까? 물론 가)보다는 나)이겠지요. 가)는 관념적인 설명이지만, 나)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분노'라는 손에 잡히지 않은 추상적인 정황을 화산이 폭발할 때 흐르는 '용암'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끌어다 표현했습니다. 관념보다는 이미지가 우리의 가슴에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시론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는'관념의 사물화(事物化)'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미지 찾기 연습을 다시 시작해 봅시다. 우선 <기쁨[喜]>의 감정을 적절히 표출해 낼 수 있는 이미지를 찾아봅시다. 기쁨의 유형과 정도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요.
'이제 막 벙그는 백합' '환하게 비치는 아침 햇살' '그리운 이가 보내온 편지' '…………'
당신이 과거에 체험했던 것 가운데서 기쁨의 감정을 유발했던 사물들을 하나씩 붙잡아내 보십시오. 당신의 체험 가운데서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 이제는 당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쁨의 사물'들을 만들어 보십시오. 머리를 짜고 짜서 당신의 상상력으로 100개를 채우는 데 도전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慾)의 어떠한 감정도 당신의 상상력에 의해 효율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J. C. Ransom이라고 하는 문학이론가는 시의 유형을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가) 관념시(platonic poetry) 나) 사물시(physical poetry) 다) 형이상의 시(meta-physical poetry)
가)는 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읊은 시입니다. 주체적 소재가 중심이 된 것입니다. 나)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노래한 작품입니다. 객체적 소재가 대상이 됩니다. Ransom은 주관에 기우는 가)나, 객관에 치우치는 나)의 시를 별로 달갑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를 이상적인 시로 설정했습니다. 다)는 가)와 나)의 통합입니다. 즉 관념의 사물화가 구현된 작품을 이상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시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이미지)을 빌어서 비유의 구조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관념시라고 다 부정만 할 것은 아닙니다. 교훈적인 시들 가운데는 관념시가 적지 않습니다.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기기란 다 하여라 떠나간 후면 애닲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 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옛 시조들은 대개 관념시들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들을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사물시 가운데서도 황홀한 이미지들이 표상된 수작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정지용 「호수 2」라는 작품입니다. 호수에서 헤엄치고 있는 오리의 동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리가 목이 간지러워 호수를 목에 감고 마치 훌라후프처럼 돌리고 있다는 기발한 이미지입니다. 전에 보내드린 바 있는 「능소화」라는 내 졸시도 <화냥년>이라는 단순한 하나의 이미지만으로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랜섬의 말처럼 모든 시가 관념의 사물화를 지향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제나 소재의 성격에 따라 관념시가 효율적인 경우도 있고 또한 사물시가 더 적절할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다음 편지에는 잡아낸 이미지를 어떻게 시로 전개해 갈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물 속에서 경이로운 이미지들을 열심히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 임보 교수 시창작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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