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뼈를 일으키는 건 습기입니다 수억 년 전 물에서 태어나 기댈 곳 찾아 뭍으로 온 우리는 태초의 냄새를 기억합니다
음지는 우리의 몫이지요
음습한 골목길, 물에 젖은 하루가 절뚝이며 지나갑니다
언젠가 불렀던 곡조는 밟히고 또 밟혀도 살아납니다 노래가 아닌 그 한 소절을 흘리며 골목 끄트머리로 사라질 때 멀리서 바라본 혼자만의 은밀한 기억을 녹이면 어둡고 축축한 그늘 맛이 납니다
막막함에도 내성이 생기는 걸까요
빛은 어차피 우리의 핏줄이 아니기에
더는 숨길 수 없는 조짐이 파랗게 피어오르면 하나가 됩니다
눅눅하고 미끄러운 예감으로 같은 종족을 알아봅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분노는, 짓밟는 발목을 뿌리치거나 썩은 나무나 그늘진 바위를 덮기도 하지요 이때 우리의 피는 온통 뜨거운 녹색입니다
한 사내가 끊어진 노래를 기타 하나에 담아두고 뒷것이 되었지요
잎과 줄기 구분 없이 바닥이나 틈을 붙잡고 납작한 숨을 쉽니다 피가 마르면, 끝내 사라질지라도
-『중부광역신문』2025.01.01. -
〈이승애 님〉
△ 당선소감 :
해변으로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았습니다.
물결의 등을 잇대어 밀어붙이는 물결로 바다는 쉬지 않고 출렁이고 한사코 달려온 파도는 하얗게 물거품을 쏟아내며 모래톱에 엎어졌습니다. 거대한 바다를 움직이는 저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작은 물결이 바람을 타고 진폭을 증가시켜 큰 파도를 만들며 바다를 끊임없이 가동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물의 표면을 스치는 바람의 동력으로 바다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저 하나의 큰 호흡이 물고기를 키우고 지구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바다의 힘은 꾸준함이었습니다. 시가 보이지 않을 때 그만 멈추고 싶었습니다.
이 지루한 게임에서 지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파도를 생각했습니다. 끝까지 가보는 것 도착지점이 어디인지 나를 밀고 가보는 것. 그 터무니없는 결심이 앞장섰습니다.
뜻밖의 당선 소식에 한동안 가라앉았던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기회를 주신 중부광역신문사와 설렘을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응원을 보내준 선생님과 문우들, 소중한 가족들, 그리고 여러분께 꾸준함으로 보답하겠습니다.
△ 심사평 : "유니크한 발상·언어 구성력 뛰어나…삶 원리를 침목 속성에 은유한 가편"
2025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예년에 비해 많은 투고작들이 들어왔다. 한강의 노벨문학상의 긍정적 여파가 예비 문인들의 활황으로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의 내실도 더욱 탄탄해졌는데, 역량 있는 신인들이 이렇게 많은 작품을 응모해준 사실이 매우 기쁘게 다가왔다. 심사위원들은 꽤 많은 작품들이 빼어난 시선과 언어를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들이 개진한 언어는 시단의 관습이나 주류를 따르지 않고 경험적 구체성을 가지고 있어 이 분들의 정성에 의해 한국 시의 미래가 밝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오랜 숙의 끝에 상대적으로 유니크한 발상과 언어적 구성력을 가진 김미정씨의 시편들에 주목하였고, 그의 '침목'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이 시편은 철로에 놓인 침목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을 삶의 깊은 원리로 은유한 가편이다. 그 안에는 기억의 구체성과 함께 오래도록 버티고 갈라지고 기울어지고 낡아온 시간이 담겨 있고, 나아가 타자를 품은 채 내면으로 신성을 안아들이는 과정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나머지 시편들도 균질성을 거느리고 있어서 더욱 성숙한 시편으로 영남일보 신춘문예의 위상을 높여주기를 기대하게끔 해주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예술성과 구체성을 견지한 사례들이 많았다는 점을 기록하고자 한다.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는 타자들을 큰 애정으로 응시한 작품들도 많았는데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더 빛나는 성과를 기대하면서 투고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당부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