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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은희와 함께 원문보기 글쓴이: 은희
조선의 주먹 황제, 시라소니 이성순. 알 사람들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를테지만, 낭만주먹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는 사상 최강의 주먹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의 주먹왕은 김두한이라 알고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언제나 혼자서 자유롭게 돌아 다니길 즐겼고, 상대가 몇 명이든, 어떤 무기를 들고 덤벼오든 오직 혼자서 맨몸으로 싸웠다. 그리고 그 모든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는 아무 조직도, 받쳐주는 이도 없었으면서 홀로 당당하게 자유로운 행로를 걸었고, 그 누구도 감히 가로 막지 못했다. 신마적과 상하이 박등 쟁쟁한 주먹들도 그와의 대결을 피하기 바빳으며 김두한도 종로, 그것도 자신의 정식 나와바리 우미관에서 시라소니에게 아니키(형님)이라 부르며 무릎을 꿇었다. 모두가 그를 세계 최고의 주먹으로 또 큰 형님으로 여긴것이다. 낭만시대의 종말을 뜻하는 이정재 사단의 집단린치 이후, 시라소니는 그 생애 단 한번의 패배 끝에 주먹계에서 은퇴하게 되지만, 이정재 사단의 오른팔 이었던 유지광은 훗날의 자서전을 통해서 그를 아시아 최고의 주먹 황제라 칭한다. 홀홀 단신으로 만주와 북경 상하이 한반도를 휩쓸며 마적들과 왜병들마저도 두려움에 떨게 하였던 주먹 황제 시라소니. 풍문에 의하면 그는 앉은 자리에서 3미터를 뛰어넘고, 도움닫기로 밭 한고랑을 넘었으며 조그만 집이나 정자와 같은 건물을 가볍게 뛰어 넘어다녔다 한다. 시라소니는 6.25 당시 미군 특전부대에서 잠시 소속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미군 한명이 사람 5명을 엎드리게 하고 그것을 뛰어넘자, 시라소니가 사람 9명을 세워놓고 거의 제자리에서 뛰어넘어 미군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의 대표적인 일화들은 여러가지가 있느나 그 모두가 감히 인간으로서 가능한 정도의 일들인가 싶을 정도의 것들이다 만주와 북경 상하이 등을 홀로 떠돌며 전설을 만들어 낸 그는 중국, 만주 일대의 모든 무술인, 야쿠자 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서 명실상부한 최강의 주먹이으로 인정받았다. 봉천에서 깡패 40명과 싸우기도 하고, 천진에서는 그 마을을 지배하고 횡포를 부리던 야쿠자 조직에게 친구가 잡혀가자 혼자서 찾아가 조직하나를 박살내기도 했다. 그 강함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들 뿐이지만 그가 싸움을 정말 잘하긴 잘 햇엇나 보다. 김두한이 주먹을 떠나고 동대문은 전국을 통일할 생각으로 과거 김두한이 통일했던 지역의 70% 이상을 손에 쥐고 그 전성기를 떨치는데, 그와 유일하게 맞서고 있었던 곳이 바로 서북 청년 모임인 명동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일하게 낭만주먹의 계보를 지키고 있다 믿었기 때문에 정치권의 세력을 등에 업은동대문과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그러나 숫적으로나 여러 모로 명동은 동대문의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동대문이 명동을 쳐들어 오지 못한것이 바로 시라소니의 존재 이유였다. 그 혼자서 명동의 전체 힘에 5할에 해당한다고 했을 정도... 시라소니가 있기에 동대문은 감히 명동에 선전포고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동대문에서 시라소니를 얼마나 무서워 했는지 나오는 대목이 있는데 시라소니가 집단 린치 이후에 국회의원조봉암씨의 보디가드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조봉암씨는 자유당에 의해 심한 견제를 받았는데 그 선장이 동대문의 이정재였다. 이때도 역시 이정재가 조봉암이 연설하는 것을 방해하기위해 트럭 세대에 부하들을 실어 습격하기로 했는데 그 30~40명이 넘는 그 사람들이 조봉암 옆에 졸린 듯 서 잇는 시라소니를 보고 바로 습격을 포기한체 도망갓다고 한다. 린치 이후에도 그를 보고 도망쳣으니 그 강함은 진짜 였나 보다.
<결혼사진>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과연 말이냐 되느냐고 생각하지만 쉽게 생각하면 별로 말이 안 될 것도 없다. 1대 다수의 싸움. 혼자서 30~40명씩을 상대하는 일. 이건 의외로 간단하다. 최대한 적게 맞으면서 단 한방씩만으로 상대를 쓰러트리면 된다. 인간의 몸이란 너무나 간단하여 급소를 제대로 한방만 맞으면 쓰러지게 되 있다. 그러니 그런 급소에 단 한방씩만 맞혀 쓰러트릴 수 있다면 일대 다수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그의 일화는 모두 단 한방만으로, 또, 한번에 3~4명이 나가 떨어졌다는 식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집 같은 건물을 훌쩍 뛰어 다닌다 했는데 이는 성룡의 영화를 보면 성룡이 높은 벽같은 곳도 훌쩍 넘어 다니는 걸 떠올리는 간단할 것이다. 시라소니의 전설과 같은 일화들은 믿기 싫으면 안 믿어도 되지만 불가능하다 매도할 일도 아니다.
참고로 난 이 시라소니 이성순님의 아들인 이의현 목사님이 만든 시라소니 홈페이지에도 가입해 제일 먼저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느 인간을 신으로도 만들어 추앙 하는 건 바로 인간 스스로다. 요즘엔 이 시라소니를 추앙하는 이들이 역사에나 등장하는 관우와도 장비와도 싸워 이길 거라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최배달과 또는 이소룡과 시라소니의 가상 대결을 그리며 논쟁을 토한다. 물론 나도 그것을 마음으로는 믿어 의심치는 않으나, 현실에서 그런 논쟁에 열을 올리고 싶지는 않다. 그 홈페이지엔 이런 논쟁들이 너무도 많아, 어느 순간부턴가 발길을 끊었지만 중요한건 어디까지나 난 그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덧붙여 시라소니 일대기를 다룬 글을 첨부하여 올린다. 저글은 내가 아닌 다른 님이 쓰신 글로 이미 넷상에는 꽤 퍼졌을 듯한 글이다.
1916년 어린 이성순 미륵동 동네 신의주 정복기 보통학교 때부터 유난히도 일본 애들을 팼다 어린 나이에도 왜경의 감시를 받았다 1929년 불곰(친일파 긴상)과의 대결 승리 밀무역에 뛰어 듦 시라소니라는 이름 기차 - 밀수 배 - 거룻배 밀수 중국인 강도들과의 싸움 헌병대와의 싸움 명견 도비와의 싸움 1933년 정경봉(독종 꽈리 주둥이)과의 결투 승리 1934년 누님이 계신 상해를 다녀오다 - 술집 용심봉과의 싸움 승리 친구를 때린 진남포 깡패들과의 싸움 승리 백두산 훈련 호랑이와의 결투 1935년 도박장 습격 1936년 평양 최고의 주먹 박두성을 찾아가 결투, 승리 평양의 이화룡 용강의 아오끼 1937년 신의주 청송회관 용심봉 장손과의 대결 신의주 도피생활 신의주 헌병대장 기차도주 때 일본 헌병 때려뉘다 7월7일 대동아 전쟁 군부반장 하야시(검도3단)와의 대결 - 결투의 의미 4개월후 신의주 일시귀국 어련공판장 중개인 보스와 시비, 항복 받아 냄 1938년 외환 관리법 사건(돈배) 8월 신마적과의 대결 승리 마약장사 야마모토 사건과 18기의 명인 북경의 마오와 대결 승리 1939년 상하이 까페에서 헌병대장과 대결 승리 새끼 손가락 사건 이상대와의 대결 승리 1940년 국제 도박장사건 상해 프랑스 조계지 미국인 탈영병과의 격투 1941년 북경 일번지 까페에서 일본여인 지혜꼬에 관한 사건 1942년 개봉 용정유원지에서 일본 특무 대원과의 결투 1943년 친구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 일본 꼬구라 형무소수감 중 일본 최고의 주먹 이즈마 누임 1945년 7월 해방 15일전 천지외교 공장에서 카네미야 패거리 40명과 대결 승리 8월 15일 해방 1946년 1월 남하 개성당도 2월 종로 우미관에서 최고의 주먹 김두한과 만남 명동파 행동대장 무억을 누름 3월 인천행 인천주먹들 정복사 - 지금도 "시라소니 떴다"라는 소문에 우는 아이들도 조용 11월 서북청년단이 조직 됨 1948년 봄 인천떠나 서울도착 서북 청년단 감찰부장이 되다 10월 동국대부근 일본인 아파트 1949년 이진옥과의 결혼 백범김구 당시 국군 장교이던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 1950년 6월 25일 전쟁(아내 임신4개월) 호림부대(비 정규부대)창설 9월 대원활약 15일 인천 상륙 작전 10월 묵호산간 대관령 적군 30명 기습섬멸 함흥까지 북진 11월 26일 중공군 대공세 1951년 1.4후퇴 봄 부산에서 10명패거리에 매맞는 이정재 구해줌 1952년 김일환과 만나 제주도로 장도영 만남 조봉암 선거 개입 땃벌 때 물리 침 아내와의 재회 1952년 8월 4일 오후 조봉암 김성주와 헤어짐 황병관 살해한 마사이찌 혼냄 3.1부대창설(현공수부대) 부부대장으로 활약 미군장교와의 대결 1953년 이정재와의 사건(린치) 종로5가 보령약국자리 반도병원-필동단칸 집-백병원 입원 1954년 초봄 백병원 나섬 북쪽으로 발길 옮김 팔당 산기슭에서 복수를 준비(칼쓰기, 사격연습, 무술연마) 몇번이나 저격권안에 들어온 이정재, 하나님이 살려 줌(HID 김일환, 내무부장관 한신) 1955년 인천행 질서 부두를 바로잡다 1956년 신익희 선거운동 / 장면 박사로부터 편지 옛 소공동에서 자리잡은 경향신문 사옥에서 만남 선거운동 당선 후 헤어짐 1958년 조병옥 선거운동 1960년 2월2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 서거 이승만 3월의 대통령과부통령 선거에서 야당 대통령 입후보자인 조병옥이 병으로 죽음으로써 쉽게 당선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데모 4월 19일 4.19의거 4월 21일 전 국무위원 사표 제출 4월 25일 대학 교수단 데모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발표 4월 27일 이승만대통령 국회에 사표 제출 4월 28일 과도 내각 수립, 4월 28일 이기붕 일가 자살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 망명으로 끝나게 된다. 1960년 7월 21일 아들 이의현 태어나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한 군인들이 반공과 부패, 부정의 일소 및 국가 재건을 내세우며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혁명 5월 21일 이정재 등 깡패 200여명, 서울 시내 가두에서 군인들이 조리돌림 명현 교회 나가 이장수 목사님에게 권총과 칼을 바침 5월 22일 최고회의, 용공분자 2천여명, 깡패 4천2백여명 검거 발표 8월 17일 이정재(李丁載)에게 사형이 선고되다. . . . . . . 1983년 2월 25일 시라소니 이성순님 소천 지금처럼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도 없었던 배고픈 시절에 양키, 일본인, 운동 선수, 체급, 인원수에 상관없이 다 때려잡았던 시라소니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 적이였던 유지광이가 최고의 주먹이라고 인정했구요. 최첨단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의 오브레임급 이였다고 생각됩니다. 추가해서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주먹 조원섭 관련된 댓글 첨부합니다. 맞네요...제가 이해를 못한 부분이 두목은 김태촌을 만나러 가서 자리를 일찍 떠서 이해를 했는데 이왕규랑 차권이 이해를 못했어요..이해가 가네요..그런데 궁금한것이 여담입니다만. 만약에 두목이 김태촌을 만나러 갔는데 만약 김태촌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제가 알기론 김태촌이 깡으로 대한민국 그누구도 따라올자 없다고 했는데 ..안되겠지요? 그리고 또 한가지는 최고의 싸움꾼 조원섭이 예전 동양최고의 주먹 시라소니보다 월등할정도로 대단한 싸움꾼이라고 하였는데 시라소니 린치 사건을 보면 시라소니 이성순이 혼자서 동대문파 십여명이 넘는 연장으로 무장한 조직원들을 상대로 거의 박살을 내고 마지막에 방심한 탓에 조직원중 한명에게 도끼로 맞은게 화근이되어 다시 동대문사무실로 올라가서 전깃줄에 넘어지는 바람에 린치를 당했는데 조원섭이 같은경우엔 같은 패거리가 7명중에서 두목을 제외한 6명이나 있었고 (물론 이왕규랑 차권은 피했지만) 그 상황이면 시라소니와 버금가는 싸움실력인데 당하고만 있었다는것이 납득이 안갑니다..상황이 시라소니처럼 좁은공간이고 연장도 같고 상황도 비스무리한데 하지만 조원섭은 혼자도 아니고..방심한것도 아니고..제가 궁금한것은 정말 조원섭이가 시라소니 처럼 대단한 사람이었나해서요..비교를 해보면 게임도 안될거같고..2부가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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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천하장사 무송과 대결 승리
시라소니의 박치기에 하얼빈의 주먹짱 만가희의 얼굴전체가 함몰되다
상해 헌병대장 요시무라가 박치기를 맞고 병원에 실려가 3일만에 겨우 깨어남
중국 거지패 오야붕 마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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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일화
고여장
러시아 조계지 소련인 두목과 결투 승리
영국 조계지
11개 조계지 정복사
("영국/러시아 - 독일/프랑스/미국/이탈리아 - 오스티라아/일본"을 포함한 8개국에 "벨기에/스페인/네덜란드"를 더한 11개국)11개국 28개 조계지 최고 주먹들 장악사
마적단 소굴로 들어가 마적단 초토화
이북생활
권총을 든 러시아 대장 총성과 박치기의 대결
HID 대원, 북상하는 아군부대의 최 선방에서 활약
이정재가 이권 도움을 청하고 도와줌으로 린치사건 전까지 생활비를 댐
4월 인천유세 3트럭의 인천 정야원(상이군인들)
이정재와의 만남 - 무릎꿇고 빎과 용서
6월 4일 깡패 965명, 국토개발사업장에 작업 동원
사형은 9월 19일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