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봐야 할 책이 있는가 하면 또 꼭 보아야 할 영화도 있다. 이것을 영화 마니아들은 '필견(必見) 무비(Movie)'라는 말을 쓴다고 한다. '귀향'도 그런 영화 중의 하나이다. 한 많은 슬픈 영혼이 나비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영화가 귀향이다. 나는 3.1절 97주년이 되는 날 영화관을 찾았다.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는 이런 날 보는 것이 제격이다 싶었다.
팔방미인 소리를 듣는 조정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그가 연출과 감독 제작까지 맡아 14년 만에 완성한 영화가 '귀향'이라고 하니 그동안의 우여곡절을 어림할 수 있겠다. 歸鄕(귀향)이 아니다. 귀향(鬼鄕)이다. 영혼이 고향으로 돌아 옴, 그래서 영어 제목도 'Spirit's Homecoming'이다. 많은 사람들의 대단한 열정이 종합된 작품이다. 조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것이 나눔의 집(생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후원 시설)에 봉사를 간 게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귀향의 두 주인공 정민 영희. 신인 배우로서 맡은 역을 잘 소화해 주었다
영화는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대표적으로 희극과 비극 그리고 이것을 결합한 희비극으로 나누기도 한다. '귀향'은 비극(悲劇)에 속할 것이다. 나라 잃은 시대, 힘없는 백성은 당하고만 살아야 했던 일제 강점기 말이 배경이다. 식민지배에서 겪어야 했던 십대 중반 소녀들의 슬픈 이야기이다. 이중 삼중의 압박 속에서 신음해야 했던 우리의 소녀들! 거짓과 사술(詐術)이 판치던 당시 어린 소녀들을 속여 전장(戰場)으로 내 몬 불의한 힘들!
경남 거창의 한 농촌 마을에서 단란하게 살아가던 정민. 아빠 지게 타고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경남 거창의 한 농촌 마을에서 부모와 오붓하게 살던 어린 정민(강하나 분)이 일본군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다. 십대 중반의 비슷한 또래 소녀들과 함께. 중국의 변방 전장에서 일본군의 성 노리개가 되어 생활하던 소녀들의 소원은 오직 하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간혹 탈출을 시도하는 위안부들이 있기도 하나 발각되면 곧 총살형을 당해야 했다. 그들은 늘 죽음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인생이다. 전장의 일본군 위안소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사상(捨象)하도록 하자.
일본군 위안소 고통의 현장에서. 하루에 많게는 30명의 일본군에게 몸을 맡겨야 했던 위안부들
일본의 패망, 철수하는 일본군은 위안부들을 죽여 불에 태운다. 독립군의 습격으로 죽음의 현장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정민과 영희(서미지 분)는 고된 탈출을 시작한다. 그러나 총을 맞고도 사력을 다 해 쫓아온 일본군 류스케(임상철 분)에게 정민은 목숨을 잃고 만다. 그 불쌍한 영혼, 정민의 혼령(魂靈)이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을 만나는 것으로 이 영화는 대미를 장식한다.
일본군이 패망하고 도주하기 직전 일본군 '위안부'들을 총살시키려는 장면
일본군 '위안부'는 우리에게 생소한 말이 아니다. 아프고 슬픈 역사의 이면에 신음하는 영혼들이 무척 많았다. 일본의 한 학자(中央大學 吉見義明)에 의하면 약 2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중 238명이 돌아왔고 지금 생존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는 마흔 네 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는 이분들을 지켜 주지 못했지만 지금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이런 의무감이 사람들로 하여금 영화 '귀향'을 보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귀향'은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만든 영화다. 준비에서 제작까지 14년의 기간도 기간이지만 25억의 제작비도 뜻있는 국민들의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으로 마련했다. 거기에 참여한 사람이 자그마치 7만 5,270 명이다. 출연 배우들도 재능기부로 힘을 보태어 제작에 부담을 줄였을 뿐 아니라 한 배우는 집을 팔아 자금을 충당했다고 한다. 어려운 조건에서 제작한 작품이어서 더 관심이 간다. 영화 '귀향'은 공동 작품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개런티 문제가 걸려 기성 배우를 캐스팅할 수 없었겠지만 신인 배우들을 대거 등장시킨 것이 결과적으로 잘 된 것 같다. 10대 중반의 소녀들이 '위안부' 역을 능수능란하게 연기했다면 이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강하나(정민 역), 최리(은경 역), 서미지(영희 역) 등 신인들의 풋풋한 연기가 '귀향'을 영화답게 만든 동인이 되었다. 물론 손숙(영옥 역), 정인기(정민 아버지 역), 오지혜(정민 어머니 역), 황화순(무속인 송희 역) 등 관록 있는 배우들이 신인들의 단점을 튼실하게 잘 받쳐준 것도 밝혀 두어야 할 것이다.
일본군의 의해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는 정민. 정민 역을 맡은 강하나는 신인 배우로 신선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영화관은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다. 영화의 목적은 여러 가지다. 울고 웃으며 스트레스를 푸는 장이기도 하고 또 영화를 보고 배움을 받는 깨우침의 장이 되기도 한다. '귀향'은 슬픈 역사의 이면(裏面) 그 어디에 위치해 있을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3.1절에 내가 찾은 영화관엔 남녀노소로 가득했다. 자녀들과 함께 온 어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가족 동반이다. 관람의 폭이 그만큼 넓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귀향'은 우리에게 이웃을 생각하고 사회를 돌아보며 나아가 민족까지 품으라는 메시지를 준다.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해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성공 가능성이 많지 않다고 보았다. 영화는 재미있어야 하고 그래야 관객을 모을 수 있는 것인데, 일본군 '위안부'는 그런 것을 충족시키기에 적합하지 않은 소재였다. 역사적 사실, 그것도 가녀린 소녀들을 제국주의 전쟁의 도구로 사용한 다큐멘터리물을 영화화하는 것에는 많은 모험이 따른다. '귀향'은 거기에 보기 좋게 반기를 든 작품이다. 영화에서 재미 이외에 또 다른 것을 찾는 관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작품이다. 그 다른 것이 바로 '의미'이다. 의미는 바로 인간애 사회애 조국애 등을 종합한 휴머니즘으로 연결된다.
상영 시간 127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는 일제 말 우리 민족의 빈핍한 삶의 모든 것이 농축되어 있었다. 고난과 증오가 있었고 절망과 좌절이 있었다. 그 속에 또 사랑과 연민 그리고 그리움도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장식되는 엔딩 크레딧(Ending Credit)은 일대 장관이다. 제작진과 출연 배우뿐 아니라 크라우드펀딩에 참여한 국내외 7만5천 여 명의 명단에서 느끼는 감흥은 여느 영화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에 불이 켜지면 자리를 떠는 관객이 많다. 그렇게 하지 말기를 부탁한다. 화면 상단 좌우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린 수십 장의 그림을 보는 복을 놓치지 말기 바란다. 이 그림들 중 강일출 할머니가 직접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은 일본군 위안부의 가엾은 희생을 '귀향'이란 영화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작품이다.
일본군 '위안부' 강일출 할머니가 그린 '태워지는 처녀들'. 영화 '귀향'을 제작하게 되는 모멘텀을 제공했다
많은 관객이 영화 '귀향'으로 몰린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다. 이유가 뭘까? 몇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한 바탕 홍역을 치렀다. 염려했던 것들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올해 사용될 초등학교 6학년 사회(역사)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 사진과 설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또 일본과 10억 엔으로 '위안부' 문제를 합의한 데서 오는 국민적 불만이 이 영화에 관심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일본은 지금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며 우경화가 심화되고 있다. 여기에 맞물려 우리나라도 극우 세력이 활보하고 있는 형국이다. 많은 국민들이 영화 '귀향'에 열광함으로써 이런 잘못된 조류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균형 잃은 일방통행의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못 된다. 민주주의는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를 추구하는 제도이다. 영화로 이 점을 강조한 조정래 감독과 출연진 그리고 제작진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