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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격자봉(433m)
1.산행구간 : 보옥리-뽀래기재-누룩바위-격자봉-수리봉-큰길재-부용리
2.산행일자 : 2012. 01.29(일요일)
3.산행거리 : 00km
4.산행참가자 : 지인들과
5.코스별 산행시각
◎ 한옥 민박 출발(예송리)(08:50)
◎ 세연정 입구(09:05)
◎ 세연정 택시 출발(09:15)
◎ 보옥리 탐방로 입구(09:40)
◎ 보옥교 산행출발/뽀래기재1.6km,예송리6.0km(09:45)
◎ 백련사지 갈림길/뽀래기재1.2km,보옥리0.4km,백련사지0.07km,(10:00)
◎ 이정표/뽀래기재0.5km,보옥리1.1km,백련사지0.57km(10:21)
◎ 뽀래기재(10:35)
◎ 전망대(10:52)
◎ 이정표/예송리3.9km,격자봉1.1km,뽀래기재0.5km(11:00)
◎ 부용동 갈림길/격자봉0.6km,뽀래기재1.0km,부용동1.2km(11:13)
◎ 누룩바위(11:19~30)
◎ 격자봉(433m)소안11/수리봉0.9km,예송리2.8km,뽀래기재1.6km(11:42)
◎ 이정표/수리봉0.4km,격자봉0.5km,뽀래기재2.1km(11:54)
◎ 수리봉(403m)격자봉0.9km,예송리1.9km(12:03)
◎ 큰길재(12:30)
◎ 곡수당(12:55)
◎ 부용마을(13:04)
◎ 부용리 마을회관(13:10)
◎ 보길초등학교/세연정 (13:38)
◎ 세연정(13:40~14:00)
◎ 주차장(14:05)
◎ 노화 동천항(15:00)
◎ 완도 화흥포행 동천항 출발 (15:40)
◎ 완도 화흥포(16:20)
◎ 완도 전망대(16:30~17:00)
◎ 완도 광주식당(17:10~18:00)
◎ 울산 출발(18:20)
6.산행기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유적지를 품은 보길도
그리고 고산 윤선도 이름 지었다는 격자봉
그 보길도를 가기 위해 지난 모임에 예정에 잇었던 제주도및 추자도 여행을 계획하던중 제주 배편이 지난 설봉호 화재로 인해 하루걸러 다니는 바람에 취소 되고 다시 방향을 보길도로 바뀌게 됩니다.
보길도는 완도에서 남서쪽으로 32km 떨어져 있으며 해남반도 땅끝에서는 남으로 12km 떨어져 있다고 하는군요.
동서 12km, 남북 8km에 면적이 32.98제곱km인 섬 전체가 온통 상록수림에 덮혀 있는데요.
섬 중앙에는 분지가 형성돼 있는데요 일찌기 고산 윤선도가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던 중 심한 태풍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들렀다가 수려한 산수에 매료되어 이곳 이름을 부용리이라고 짓고 머물 것을 결심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0여년을 머물면서 세연정 낙서재 등 건물 25동을 짓고 전원 생활을 즐겼으며 그의 유명한 작품 어부사시사"도 이곳에서 태어났다는군요
출발 D-day로 잡았던 1월 28일부터 1박2일 보길도....
울산을 06시 출발합니다.
우여곡절속에 빠지게 된 한팀을 제외하고 부산에서 합류한 한팀과 3팀 여섯명입니다.
어제 늦게 빌린 승합차는 목적지 완도를 향하여 달리는데..
지난 진도여행과 마찬가지로 하동에 내려서 제첩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갑니다.
그리고 다시 순천을 지나 목적지까지는 5시간만인 11시지나 완도읍내에 도착 예정대로 점심식사를 위해 인터넷에 셔핑한결과대로 아시나요라는 식당을 찾아 소문대로 전복회덮빕을 시킵니다.
이른 점심이라서인지 소문과 달리 썩 괜찮다는 말을 할수 없네요
그져 그렇게 전복이 씹힌다는 말밖에요
다시 차는 화흥포로 향합니다.
12시 5분여 지나서 도착하는데 배는 정박해있고 차량및 사람들도 타는 중이고...
어랴 12시 30분인걸로 알고 왔는데 어떻게 된거지라며
매표소에서 매표를 하고는 제빨리 배에 올라타는데 곧바로 출발하는군요
농협에서 운행하는 청해진 카페리입니다.
그리고 이배는 청해진 카페리3호는 승용차 52대, 그리고 또는 15톤 덤프트럭 8대와 승용차 16대를 동시 수용 가능 하다는 설몀...
또 배안에는 동,하계시즌에는 운향시간이 다르다는 안내문도 있네요
한번쯤은 확인하고 올 필요도 있네요
완도 하면 전복이듯이 뱃길 주변에 전복양식장이 지천을 이루고 있네요
완도 상황봉을 뒤로하고 약 40여분만에 도착하는 노화 동천항....
민가도 없는 그져 항구에 여객선사 터미널만이 있고...
그리고 차는 노하읍를 지나 보길대교로 들어 섭니다.
잠시 갓길에 주차를 하고 보길대교를 카메라에 담고는 다시 출발합니다.
장사도를 지나 들어 서는 보길도 청별항....
이곳 청별항은 땅끝마을에서 출발하는 배가 도착하는다는 보길도 청별항..
곧바로 민박을 정해놓은 예송리 마을로 들어 섭니다.
저녁에 먹을 전복에 대해서 잠시 두루기로 한것이기 때문이죠
마을 전체가 아마도 민박집인듯한 예송리...
그가운데 우리는 예약한 황토한옥팬션으로 올라섭니다.
양지바른 아담한 한옥..
주인장의 서글서글한 눈웃음과 께끗한 방의 이미지..
그렇게 둘러 보고 전복에 대해서 여러 가지 주문을 하고는 보길도 관광에 나섭니다.
다시 차를 돌려 예송리를 빠져 나갑니다.
잠시후 차는 통리 해수욕장을 지나 중리 백도리를 지나 1689년 제주도로 유배가던 중 풍랑을 만나 자신의처지를 한탄한 한시를 해안 절벽에 새겨 놓은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를 찾아 갑니다.
얼마후 공사중인 주차장 주변...
바닷기 한쪽켠에 주차를 하고 산책길 다라 들어 서는데 입구에 우암 송시열의 암각시문 설명이 있네요.
八十三歲翁(팔십삼세옹)
蒼波만里中(창파만리중)
一言胡大罪(일언호대죄)
三黜亦云窮(삼출역운궁)
北極空瞻日(북극공점일)
南溟但信風(남명단신풍)
貂구구恩在(초구구은재)
感激泣孤衷(감격읍고충)
여든 셋 늙은 몸이
푸른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구나
한 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번이나 쫓겨난이도 또한 힘들었을것이다.
대궐에 계신 님을 속절없이 우러르며
다만 남녁 바다의 순풍만을 믿을수밖에
담비갖옷 내리신 옛은혜 있으니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시문 앞으로 큰바위 아랫부분에 글이 써 있지만 누군가에 의해 탁본을 했는지 글씨를 알아 볼수가 없네요
우암 송시열과 고산 윤선도......
이곳 보길도는 두사람의 정치적 사상이 남인과 서인이라는 전혀 다른 길을 간 두 사람의 보길도....
어떻게 설명 해야할까....
두 사람은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었으며 같은 시대인으로는 드물게 80을 넘게 살면서 다섯 임금을 섬겼는데 두 사람간에 벌어진 치열한 정치적 논쟁은 당시의 극명한 정치적 상황을 말해주죠.
나이로 본다면 고산은 선조 20년(1587년)에 태어났고 우암은 선조 40년(1607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고산이 20세 더 많은 셈이었입니다.
주자학 중심세력인 사림에서 퇴계 이황의 동인(영남지역)과 율곡이이의 서인(경기 충청지역)에서 동인은 퇴계계열(고산 윤선도)의 남인과 북인의 남명계열로 분리 됩니다.
그리고 서인은 우암계열의 노론과 윤증계열의 소림으로 분리 되어 지는데요
여기서 문제가 불거 지기 시작합니다.
먼저 효종이 사망했을 때 윤선도 등 남인들이 3년 상을 주장하는 것에 비해 송시열은 기년 복(1년 상)을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게 남인 윤선도와 서인 송시열 간에 정치적 논쟁을 사활을 건 문제였는데요.
인조의 부인이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또 논쟁이 벌어졌는데 당시 집권당이 서인들이었기 때문인지 서인들이 주장하는 1년 복으로 정리되면서 서인들이 승리로 끝났죠.
하지만 적통에 대한 논란이 매우 예민할 수밖에 없듯이 남인들은 정치적 대 반격을 가하는데 예송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비화시키며 상소를 올린 인물이 고산 윤선도였는데요.
시간은 흘러 현종이 집권을 하고 효종의 비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나므로 인해 발생한 2차 예송논쟁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남인들로 인해 서인들이 정권에서 몰락하고 남인들이 정권을 잡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철저하게 서인들로부터 탄압 받았던 남인들의 서인들에 대한 복수인데요 일종의 만년 야당인 남인이 모처럼 정권을 잡는 것이기도 하였죠.
이후에도 서인들과 남인들은 또다시 집권을 놓고 쟁패를 거듭하는데 서인의 최고의 권력자인 송시열도 숙종 때에는 예송논쟁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됩니다.
숙종때 장희빈이 낳은 아들의 적통을 놓고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싸운 시기인데요,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희빈을 통해 얻은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정하는데 이 원자에 대한 정통성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나선 인물이 송시열이었죠.
그리고 왕권에 대한 정면 도전....
죽음을 걸어야 했던 송시열은 공신에 대한 예우로 죽음은 면하고 제주도로 유배 길에 오르지만 결국 그는 다시 국문을 받기 위해 올라오던 도중 송시열은 숙종15년(1689년) 82세에 사약을 마시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죠
어째튼 정치적 상황이 만들어 낸 비극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여기서 고산 윤선도 이야기는 이 이야기 말미에 정리를 해보겟습니다.
다시 뒤돌아 나옵니다.
그리고 차를 타고 청별항을 지나 땅끝전망대에 도착합니다.
예정한 망월봉 오르는길을 찾기 위해 선창마을쪽으로 내려서지만 들머리 입구가 보이질 않네요
해서 돌아갈적에 확인을 하기로 하고 보옥리 공룡알 해변으로 향합니다.
바닷가 돌들이 모두 공룡알 타조알처름 둘글고 커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바닷가 돌들은 작고 이쁘고 그러 한데 이곳은 돌이 둥글고 커보입니다.
해서 공룡알 해변인가 봅니다.
다시 돌아 나옵니다.
뽀족산으로 향합니다.
들머리는 뽀죡산 산장 담장 바깥쪽입니다.
돌길을 만들어 농은 길따라 잠시 올라서면 들머리에는 시그널이 팔랑거리고...
그리고 이어지는 오솔길은 동백나무로 숲을 이루는 터널 속입니다.
그렇게 가파른 길따라 잠시 올라서면 처음으로 전망대가 나오는데 소나무도 한그루 있고...그리고 공룡알 해변과 주변 바닷가 그리고 격자봉, 망월봉이 시야에 들어 옵니다.
쇠파이프를 박아 놓은 길따라 잠시 올라서면 등산로는 계단으로 변하고 그리고 암릉길따라 올라서는데...
잠시후 돌탑을 지나 나무 사잇길로 올라서면 195m의 뽀죡산 정상입니다.
이렇다할 정상석은 없지만 조망하나는 탁월 합니다.
모옥리 마을이 한눈에 내려더 보이고...
망월봉 격자봉 산이 시야에 들어 오네요
일볼의 모습이 좋다는데 아직 일몰시간은 많이 남았지만 구름이 잔뜩 끼여 있어 일몰을 포기하고 내려섭니다.
그리고 잠시후 다시 보옥리에 도착 하루 일정을 끝내고 황토 한옥 팬션 민박집으로 돌아 옵니다.
6개의 방으로 쥔장이 황토집을 좋아해서 하나 더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전복회와 찜으로 보길도의 첫밤을 그렇게 보냄니다.
완도대교를 지납니다.
주도로 왼쪽에 통행이 불가능한 콰이강의 다리, 그리고 그옆에 아치형 도로를 건설 하고 있습니다.
전복 회덮밥(아시나요 식당)
노화 동천항입니다.
완도 화흥포항에서는 서둘러 타는 관계로 사진을 남기질 못했네요 에고...
보길대교(노화에서 장사도)
2000년 6월 16일 ~ 2008년 3월 15일의 공사기간이랍니다.8년이란 세월이죠
황토 한옥 팬션
우암 송시열 의 신세 한탄 (?)
땅끝 전망대...
195m의 뽀족산
전복찜...
구워 먹는것 보담 쪄 먹는것이 훨 낳습니다.
◎ 한옥 민박 출발(예송리)(08:50)
1월 29일
예정시간보다 1시간 넘어서 황토 한옥 팬션 민박집을 나섭니다.
전복죽 끓여 먹고 하다 보니 시간 늦은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예송리를 벗어나 잠시추 청별항에 도착 버스시간을 물어 보니 12시에 있다는군요
할수 없습니다.
해서 차를 세연정 입구인 어부사시사 탑이 있는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택시를 콜합니다.
◎ 보옥리 탐방로 입구(09:40)
두대를 보내 달라니 몇명이냐하더니 갤로퍼 한대 보낼테니 6명이 다같이 타고 가라는군요..
이런.ㅅㅂ...
잠시후 성애가 낀 갤로퍼...택시가 아니고 자가용 입니다.
말그대로 불법인셈이죠
하지만 방법이 없네요
그리고 차를 몰고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는 중간 중간 기사 입에서는 담배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끊을래도 잘 않된다는 기사
그렇게 보옥리 산길 들머리까지 태워다 주네요
그리고 약속한 택시비 15000원를 주고는 산행을 출발합니다.
산길...........
동백꽃
백련사지 갈림길
◎ 뽀래기재(10:35)
잠시 단체사진이지만 찍사를 뺀 다섯명의 단체....
다리이름이 보옥교 입니다.
들머리에 있는 다리 이름입니다.
뽀래기재1.6km,예송리6.0km이라는 이정표도 있고...
곧바로 산길로 들어 서는데 고사리과에 속하는 고사리나무가 지천입니다.
그리고 동백나무가 터널을 만들어 놓았는데요 일부는 피워 있기도 하고, 일부는 봉우리만 가득한채로 필 시기만을 남겨 놓았습니다.
또 전체가 상록수림으로 덮혀 있는데요
능선쪽에만 활엽수나무가 자라고 있고
또 사스레피 나무와 동백나무의 혼합된 사철나무...
이곳 보길도 에는 200여종 이상의 난대림이 자란다는군요
잠시후 백련사지 가는 길림길에 섭니다.
뽀래기재1.2km,보옥리0.4km,백련사지0.07km이라는 이정표도 있고...
그리고 자료에 의하면 탑이 하나 있는데 다녀 오실분 있으면 다녀 오라지만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산객 두분이다녀 오면서 탑과 돌도 있다는 죠크도 합니다.
다시 출발합니다.
이어지는길은 역시나 하늘을 볼수 없을만큼 터널을 이루고 있는 동백나무...
큰길재에서 부용리로 빠지려면 서너시간이며 족하니 그리 바쁠필요도 없습니다.
그져 발걸음이 가는데로..
그리고 마음이 가는데로 흐느적 거리다 시간되면 내려서면 되고요 이런게 간혹 좋을때가 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렇게 올라서는길은 뽀래기재입니다.
보옥리가 엣날에 뽀래기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해서 주변에 뽀래기 공룡알 해변이라고도 하며 또 뾰족산이라고도 하구요 해서 뽀래기재라고도 합니다.
망월산에서 내려서는 뽀래기재...
그리고 부용마을의 식수원인 저수지로 내려서는 사거리입니다.
이러다할 이정표도 없고 의자와 지도만이 덩그러니...
나무를 싸고 있는 콩란
전망대에서 보는 망월봉
전망대에서 보는 뽀족산
운치있는 산길
산길
부용동으로 가는 갈림길
누룩바위
누룩바위앞
누룩바위
◎ 격자봉(433m)소안11/수리봉0.9km,예송리2.8km,뽀래기재1.6km(11:42)
이곳에서오른쪽 격자봉으로 올라섭니다.널고 넓은 올라오는 길과 대조적으로 동백나무 팽나무, 사스레피 숲속입니다.
콩란도 나무마다 바위 마다 지천을 이루고 있고...
잠시후 전망대에 올라서는데...
뽀족산이 발아래 놓여 있네요
다시 이어지는 산길..
원시림처름 생긴 산길..
숲길마다 돌과 어우러진 산길...
그리고 부드러운 능선길..
얼마후 부용동 가는 길 즉 삼거리에 올라섭니다.
격자봉0.6km,뽀래기재1.0km,부용동1.2km의 이정표도 있고..
우리가 내려서야 할길은 큰길재까지이니 돌아볼 이유가 없네요
그리고 다시 출발한느데요 잠시후 누룩바위에도착합니다.
잠시 쉬어 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잠시후 이어지는 산길..
걷기 쉬운 산길
얼마후 이곳의 최고 봉우리인 격자봉에 올라섭니다.
433m의 격자봉
한쪽곁에는 소안11이라는 삼각점도 있고..
또 그앞에 준희 선배의 팻말도 붙혀 있네요
그리고 그앞에는 수리봉0.9km,예송리2.8km,뽀래기재1.6km이라는 이정표도 있고.....
격자봉(430m)는 보길도의 주봉으로 산 이름으로 고산 윤선도가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원래이름은 격자봉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적자봉으로 변하였다 하는데요 아직도 일부에서는 격자봉이라고 불리어 지고 있습니다.
잠시쉬다 다시 출발합니다.
준.희 선배의 격자봉 팻말
◎ 수리봉(403m)격자봉0.9km,예송리1.9km(12:03)
수리봉까지 가서는 줄곧 내리막길이라며....
이어지는 능선길...잠시후
수리봉0.4km,격자봉0.5km,뽀래기재2.1km의 이정표을 지나 406m의 수리봉에 올라서는데...
돌탑도 두개 있고
예송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어제 쉬었던 민박집도 시야에 들어 오고..
또 청별항까지 이어지는 능선길도....
수리봉에서 보는 예송리
동백길
◎ 큰길재(12:30)
이저지는길은 큰길재까지 이어지는 내리막길..
때로는 급경사길도..
때론 바위길도..
그리고 예송리로 갈라지는 큰길재에 내려섭니다.
억새밭의 안부에 벤치와 지도 그림판...
동백나무길
곡수당쪽으로 날머리
곡수당 상연지로 흘러내리도록.....
◎ 곡수당(12:55)
잠시 쉬다 부용리 마을 방면으로 내려섭니다.
너무나 편안한길..
그져 그만입니다.
약 30여분간의 내리막길
날머리는 곡수당 입니다.
작은 개울을 중심으로 초당, 석정 ,석가산, 평대, 연지, 다리, 화계등이 좌우로 조성되어 있었던 곳으로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공부및 휴식하는 공간으로 조성된곳이라 하는군요
하루 세번 다리를 건너 고산에게 문안을 드렸다는 일삼교
그리고 항상 모지라도 넘치지 않게 일정하게 넘어 흐르는 상연지...
그리고 그 윗쪽으로 낙서재가 잇는데요 낙서재는 고산 윤선도가 1637년 들어 와 1670년 돌아가실때까지 살았던 곳이라는군요
다시 내려섭니다.
동천석실
부용리
부용리
◎ 보길초등학교/세연정 (13:38)
부용마을 입니다.
고산 윤선도가 수려한 산수에 매료되어 이곳 이름을 부용리이라고 짓고 머물 것을 결심했던 곳이라는 부용마을
무엇보다 돌탑이 눈에 들어 옵니다.
정성스럽게 쌓아 놓은 돌탑...
하늘과 통하는 산중의 방이라는 동천석실
부용동을 한눈에 바라볼수 잇는곳에 정자를 설치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었다는 동천석실
시간관계상 올라가보지는 못하고 부용리 마을에서 동천석실은 눈으로만 지켜보고 길따라 걸음을 시작합니다.
걷기 시작한지 30여분
보길 초등학교에 도착 곧바로 고산 윤선도의 사적비(사적 제368호)인 세연정으로 들어 섭니다.
◎ 세연정(13:40~14:00)
세연정은 우리나라 조경유적중 특이한 곳으로, 고산의 독특한 발상이 잘 나타난 곳이죠,
개울에 보(굴뚝다리)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조성된 세연지에서 어부사시사가 창작되기도 했습니다.
윤선도는 현종 12년인 1671년 보길도에서 8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까지 일생은 파라만장햇던 시절이었습니다.
병자호란 직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것을 개탄하며 다시는 세상을 보지 않을 결심으로 제주도로 향하던 윤선도는 폭풍을 만나 잠시 보길도에 머문 후 섬의 수려한 풍광에 반해 이곳에 거처를 삼았다고 하죠.
그리고 8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세연정과 동천석실 등 자신만의 낙원을 만들어 놓고 시를 읊으며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정철·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의 한 사람으로, 서인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했었죠.
자는 약이 호는 고산 해옹으로 부정공 유심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8세 때 백부인 관찰공 유기의 양자로 가서 해남윤씨의 대종을 잇기도 합니다.
1616년(광해군 8) 이이첨의 난정과 박승종·유희분의 망군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해, 경원 기장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납니다.
고향인 해남에서 조용히 지내던 중 1628년(인조 6) 봉림 인평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이르기까지 주요요직을 맡는데요.
조정 내 노론파의 질시가 심해져 1635년 고향에 돌아와 은거합니다.
그러던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복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으나,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환도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에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으로 유배를 당해 다음해 풀려나는데요
보길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시 노래 춤를 즐기며 살았으며, 효종이 즉위한 이래 여러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산릉문제와 조대비복제(趙大妃服制)문제가 대두되었는데요.
남인파인 윤선도는 송시열 등 노론파에 맞서 상소로써 항쟁했으나 과격하다고 하여 삼수로 유배를 당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된 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현종 12) 낙서재(樂書齋)에서 세상을 마쳤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위의 우암 송시열과는 예송문제등으로 당쟁에 휘말린 사람으로 보길도에 그흔적이 있다는데 대해서는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또 고산 윤선도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는데요
이 시문집의 하별집에 시조 및 단가 75수가 〈산중신곡〉 18수, 〈산중속신곡〉 2수, 기타 6수, 〈어부사시사〉 40수, 〈몽천요〉 5수, 〈우후요〉 1수 순서로 실려 전해져 내려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중신곡〉 18수 가운데 〈오우가 五友歌〉는 물·돌·소나무·대나무·달을 읊은 시조로 널리 불리어 졌죠.
또 〈어부사시사〉는 효종 때 부용동에 들어가 은거할 무렵에 지은 것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을 각각 10수씩 읊었다고 합니다.
어부사시사는 지은이가 65세 때 벼슬을 그만두고 전라남도 보길도 부용동에 들어가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지은 노래인데요.
세상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과 한몸이 되어 강호한정(江湖閑情)에 빠지는 것이 주제입니다.
4계절을 각 10수씩 40수로 하고 여음이 붙어 있다.
여음은 배를 띄우는 것에서부터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따라 말을 붙였는데요.
그 漁父四時詞 중 한수만 소개해보면은요
봄
앞개에 안개 걷고 뒷산에 해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물러 나고 밀물이 밀려 온다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강촌이 온갖 꽃이 먼빛이 더욱 좋다.
여름
궂은비 멈춰 가고 시냇물이 맑아 온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낚싯대를 둘러 메니 깊은 흥이 절로 난다.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산수의 영개를 그 누가 그려낸고
가을
물외의 맑은 일이 어부생애 아니던가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어옹을 웃지마라 그림마다 그렸더라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사철 흥촉 한가지나 가을강이 제일 좋아
겨울
구름 걷은후에 햇볕이 두터웠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천지가 막혔으니 바다만이 여전하다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한없는 물결이 김을 편듯 고요하다.
라는 싯귀입니다.
이는 세연정 아래 유적지 주차장 에 세워진 돌탑에도 나와 있네요.
사투암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데 발받침 역활을 하였다고 .........
혹약암
극경의 건에 나오는 혹약제연 이란효사에서 따온말로 뛸듯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으로 마치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라는 뜻
세연정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곳이라는.....
고산 윤선도가 1637년 보길도에 들어 와서 부용동을 발견할때 지은 정자라고...
◎ 노화 동천항(15:00)
그렇게 산행은 끝내고 노화 동천항에서 완도로 복귀를 위해서 보길 대교를 건넙니다.
그리고 노하 읍을 지나 동천항으로 오는길에 밭에서 시금치캐는 할머니를보고 혹 시금치를 살수 있느냐는 이야기에 할머니는 한봉지씩(10,000원) 캐어서 가지고 가라는것입니다.
해서 잠시 무도 내려 시금치를 한봉지씩 캐어 담아 동천항으로 돌아 오는데...
배가 한대 정박중이라 매표소에 들어 서니 소안 가는배이니까 15시 40분에 다시 돌아 온다고 하는군요
터미널
완도 화흥포항
◎ 완도 타워(16:30~17:00)
그렇게 얼마후 15시 30분 소안 가는배는 다시 돌아 오고 그리고 승선홰서 40여분만에 완도 화흥포 도착..
완도 타워로 향합니다.
완도까지 왔으니 완도 타워는 둘러 보는것도 당연하거널......
그렇게 1인당 2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잠시 둘러 봅니다.'
2008년 준공 되었는데요
첨탐까지76m로 지상2층과 전망층으로 구성 되어 있는데요 1층에는 특산품 전시장과 휴게시설등으로 구성 되어 있으며 그리고 2층에는 이고장이 낳은 인물편으로 장보고대사와 촤경주 선수의 모형을 하여 사진촬영을 할수 잇는 공간을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3층에는 전망대 역활을 하고 있구요
광주식당
◎ 울산 출발(18:20)
잠시 둘러 보고 남도의 한정식을 맞보고 가기 위해서 완도의 광주식당을 찾아 가기로 합니다.
농협 하나로 마트 뒷쪽에 있는 음식점 골목에 있네요,
초저녁이라서인지, 아니면 일요일이라서인지 손님들도 뜸하고 한산하기 그지 없는 음식점 골목...
인터넷등에서 소개한집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실내에는 방송 3사에서 소개했다는 안내판까지 소개 되어 있군요
방안으로 들어 서는데 말그대로 넓은 홀에 테이블이 놓여 있고 ...
그리고 주인장께서 한정식은 1인분에 20,000원을 받는다며 15,000원 받는다는 인터넷 소식은 옛말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고쳐 달라고 몇번이나 이야기 했다는데 아직도 고쳐지질 않아 그렇게 알고 오신 손님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는동안 이곳의 막걸리를 맞보기 위해 말걸리가 있냐니 막걸리는 없다는 이야기에 막걸리를 사러 나가 보는데 이동네 사람은 말걸리를 먹지 않는지 마트, 그리고 슈퍼 몇군데를 둘러 보고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는 슈퍼에서 유통기간 하루 지난 막걸리를 사가지고 돌아 옵니다.
약간은 짠맛의 남도 한정식...
그렇게 남도 한정식에 막걸리를 더해서 1박2일의 남도 보길도 여행을 마치고 울산으로의 귀향을 서두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