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의 마산고 -- 이제하(李祭夏)의 소설 ‘태평양’
마산고 동문이라면 누구이든, 그들 기억 속에 모교인 마산고는 뚜렷한 한 형상으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예민한 감수성 속에 꿈과 이상을 키우고, 때로는 방황의 엇 바람 속을 휘저어 다니기도 했던 그 시절의 모교는 아련한 추억이자, 오늘의 현실에서 나를 다시 한번 뒤돌아보게 하는 시험장 같은 곳이기도 하다.
젊음과 패기, 꿈과 방황과 시름의 용광로 같았던 우리의 모교를 문학이 가만 놔두었을 리 없다. 문학 속의 마산고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 문학사에서 특정한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한 문학작품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마산고는 걸출한 동문 소설가의 소설작품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이제하 동문(15회)의 소설 ‘태평양’이 그 것이다.
1964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마산고에서 6.25라는 파괴적인 역사 속에서 조숙해진 소년들과, 자신의 육신은 지병으로 허물어져 가면서도 이들의 시대적 불안과 반항심리를 감싸 안으며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 주고자 했던 스승의 마산고에서의 만남을 그린 작가 자신의 자전적 소설이다.
발표당시 독특한 소재와 작가의 초현실주의 소설기법으로 주목을 받았던 이 소설은, 지난 1987년 한국일보사가 시리즈로 연재한 ‘문학기행’에 우리 소설문학사에 길이 남을 주옥같은 작품들과 함께 소개돼 다시 한번 관심을 끌었다.
‘문학기행’은 당시 한국일보 장명수문화부장의 기획아래 김훈.박래부기자가 작품들의 소재가 된 지방을 오가며 썼는데, ‘태평양’은 박래부기자 (현 논설위원)가 썼다.
당시 기사를 옮겨본다. (김영철)
소설 ‘태평양’의 무대는 이제하가 성장시절을 보냈던 경남 마산시와 마산고등학교, 마산 앞바다이고, 소설 속의 교장은 마산고에 1950년부터 6년 동안 봉직했던 이상철(李相喆) 교장이 모델이다. 마산고 15회 졸업생인 작가는 “학교 건물이 전쟁으로 중상을 입은 환자와 상이군인, 결핵환자를 수용하는 군병원으로 징발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늘 옮겨 다니며 닥치는 대로 공부를 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그들은 바위와 돌로 뒤덮인 산골짜기에서 입학식을 치렀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노천교실에서 공부를 했다. 여름 햇볕이 따가울 때는 납작한 돌멩이를 깔고 앉아 개울물에 적신 수건을 머리에 얹고 수업을 받았고, 겨울철에는 부둣가의 어둑어둑하고 유리창이 깨어져 나간 폐창(廢倉)의 임시교사에서 차가운 바람을 겨우겨우 가려가며 공부를 했다.
학생들의 임시교사였던 그 폐창들은 종전과 함께 다시 수리되어 80년대 초까지도 쌀과 시멘트, 어류들을 저장했었으나, 지금은 거의 다 헐리고, 학생들이 해풍에 모자를 날려가며 조례를 서던 부둣가와 함께 거대한 저탄장과 주정공장이 되어있다. 검은 탄가루가 바다 쪽으로 날리고 있는 제3부두 자리에서 해안 중심 쪽으로는 단정하게 정돈된 세관건물과 마산항 여객터미널이 들어서 있는데, 터미널에서는 유원지가 된 돝섬과 황포.장목.하청 등지로 가는 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이제 마산의 부둣가에서 6.25와 관련된 작가의 임시교사 시절을 떠올려 주는 것은 해안선과 그 주변의 포장이 덜 된 도로의 윤곽뿐, 소년들이 교장을 모시고 해수욕을 하던 그 바다는 국내에서 오염도가 가장 심한 해역으로 탁하고 어두울 뿐이다.
마산과 창원 일대의 공업화로 늙어가고 있는 이 바다는 노산 이은상이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하고 노래한 대로 아직은 갈매기들이 간간이 날고 바다 기슭과 선창가 주변을 서성이며 어패류들을 쪼고 있다. 한 도시의 발전이 괴로웠던 시절의 물질적 흔적들을 지워 나가는 작업이라면, 문학이 하는 일은 고통스런 시대와 맞섰던 정신의 힘을 새롭게 조명하는 일일 것이다.
소설 ‘태평양’은 열악한 교육환경과 세대간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인간적 각성에 이르게 한 교장의 강인한 정신력에 초점을 맞추면서, 기성세대와 전후세대가 교차하는 점진적인 과정을 그려 새로운 세대가 전개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작가는 “우리 학생들은 대부분 그 엄한 교장을 싫어했고 무서워했고, 때로는 모여서 욕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지나고 나니 그분은 어마어마하게 큰 어른으로 느껴졌다. 졸업할 무렵에는 안색이 안 좋으셨는데, 그 몇 년 뒤 돌아가셨다. 소설은 강직.근엄하고 결단과 의지의 인물이었던 그분의 이미지만 빌었을 뿐 에피소드들은 허구”라고 말했다.
소설은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교장과 폭격으로 부모를 잃은 학교 밴드부장 백영기의 대립과 갈등을 큰 골격으로 삼고, 고통스럽게 각자 자기 성설성을 증명해 보이는 과정을 거쳐 행복한 화해와 결말에 이른다. 수재이고 우등생인, 그러나 학비를 벌기위해 밤에는 신사복으로 갈아입고 홀에서 트럼펫을 불어야 하는 전쟁고아 백영기가 삭발을 피하기 위해 도망친 일, 그에게 내려진 퇴학처분을 철회해 달라도 ‘나’를 포함한 학생대표들이 농성을 벌이며 교장실을 찾아간 일, 교장이 혈서를 쓰려는 학생대표보다 먼저 자신의 팔을 과도로 그은 일, 머리를 깎은 백영기가 교장에게 “선생님도 마찬가집니다... 모두가 고독합니다...”라고 속삭인 일, 그리고 교장의 불같은 분노와 백영기의 옥상에서의 투신.... 이 모든 일은 학교가 마산시 완월동에 위치한 원래의 건물로 돌아온 뒤의 사건들이다.
마산시의 서북쪽에 있는 무학산 기슭, 양지쪽에 자리잡고 있는 마산고는 옛 시가지와 임시교사가 있던 부둣가 도시의 남쪽 끝에 있는 호수 모양의 바다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교문을 들어서면 나이 많은 전나무.벚나무.은행나무들이 서 있고, 왼쪽 운동장 끝에는 커다란 비닐하우스 모양의 야구연습장이 봄비에 젖고 있다.
연한 황갈색의 3층 교사가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는 오른편으로는 체육관 겸 강당, 도서관, 음악실, 작은 규모의 정원 등이 오래된 건물답게 육중하고도 퇴색된 분위기를 지닌 채 서 있고 도서관 앞 게시판에는 ‘하이네 명시’‘광장’‘안중근’‘안네의 일기’ 등의 책이름이 ‘이 달의 청소년 도서’로 권장, 소개되고 있다.
이 학교의 규모와 건물드르은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던 그 전통만큼 화려하거나 웅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앉았던 책상과 운동장가 벤치에 다시 아들이 앉을 수 있는 지방도시의 명문교답게 소박하고 정겨운 모습이다. 지금의 학생수는 2천명, 교사는 68명이고 소설 ‘태평양’이 그리고 있는 이상철교장이 재직할 당시 교무주임이었던 지금의 박용환(朴容煥)교장은 이 학교 2회 졸업생이기도 하다.
박교장과 작가는 이상철 전 교장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교장은 교육관이 확고했고 성격은 강직.근엄했으나, 뜻밖에 따뜻한 면도 있었고, 밴드부장 백영기의 말처럼 고독한 일면이 있었으므로 문학을 좋아했고, ‘태백의 정기서려 마제에 맺고, 남해의 푸른 물결 합포에 치이...’로 시작되는 교가를 작사하여 당시 마산에 머물던 작곡가 윤이상(尹伊桑)에게 의뢰해서 교가를 완성했다는 것 등이다.
이 학교 12회 졸업생인 노재봉(盧在鳳)교수(서울대.외교학)는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이란 한 산문에서 “나는 이상철이라는 한 개성이 비교육적인 교육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제자들에게서 교육받을 필요가 없는 성숙한 인간을 기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비교육적인 자세가 이제 와서 생각하면 살아있는 교육이 된다. 그의 근면함, 외강내강, 쌀쌀함은 비교육적이지만, 그의 곧음, 꿋꿋함, 자신감 등의 대쪽같은 성격으로 해서 오히려 비타협의 정신적 지표로 산교육이 되는 것”이라고 술회했다.
작가가 만났던 이 큰 스승은 그 후 경상남도 학무과장, 경남여고 교장을 거쳐 지난 1961년 췌장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47세. “그의 죽음의 장지에 이르는 긴 행렬은 오열의 바다였다”고 노재봉교수는 전하고 있다.
이교장은 6.25의 와중에 경남지방으로 피난 나온 우수한 인재들을 교사로 초빙했는데, 특히 그의 문학에 대한 애호가 이 작가에게 빛나는 여러 시인교사들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소설에서 시인이며 여자 국어교사로 그려진 서은조선생의 모델이었던 시인 김 남(金 南)씨와 김춘수(金春洙), 김상옥(金相沃), 이원섭(李元燮)씨 등이 그 당시 이 학교의 교사들이었다.
운동장 너머로 바다가 바라보이는 이 학교와 임시교사가 있던 부둣가에는 한 시대의 비애를 노래한 시인교사들의 흔적들과 함께,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고 문학에 눈떠 간 가난한 소년의 성장기적 궤적들이 묻혀있을 터이다. 시대적으로는 불운했지만 문학적 체험으로는 오히려 행복할 수 있었던 고교시절의 이 작가는 고 1때, 그 당사 널리 읽히기 시작했던 학생잡지 ‘학원’에 시와 산문을 단골로 발표하면서부터 재능이 다채로운 시인.소설가.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졸업식 때는 학생들이 돌아서서 저항의 노래를 부르고, 입학식장에서는 교수들이 퇴장을 해 버리는 이 불신의 시대에 마산에서 다시 만나는 ‘태평양’의 감동적인 사제(師弟)관계는 아득한 향수 같기도 하고, 비애의 시대를 헤치고 나아가 마침내 만나야 할 미래의 모습 같기도 하다.
첫댓글 모교의 자긍심 을 이토록 강열하고 튼실하게 심어주신 영철님!! 조은 자료 정말 고맙슴니다!!!
정말 조은 사실을 알아았습니다. 허기사 우린 마산에 대해 넘 모르고 살지요 옛날 이름이 합포란 것만 알지 삼국시대는 골포 였다는것도 -- 독립운동가 목발(目發)선생도 몰으드라 - 서울 동문회 때 목발 선생 이야기 하니 아무도 모르고 이름도 처음 듣는 사람이 전부고 오직 한사람 만이 ----- 이래도 되는건가 마산을 사랑 한다면서 -------박종규
목발선생, 혹시 옛날 남성동 선창가에 사셨던 그 선배님 아니신가 모르겠습니다. 目發이란 이름도 일본 놈의 눈을 뺐다고 지어진 게 아니신지요?
영철님! 참 좋은 자료를 올려 주셔 고맙습니다. 아마 영철님도 문학에 상당한 소질을 가지신듯 합니다. 이렇듯 옛 명문 모교가 요즘은 명성을 잃어가는 듯하여 아쉽습니다!!!
그렇습니더 영철님의 필력이 대단한것 같읍니더!! 앞으로 기대 하겠음니더 ㅎ
김영철님! 대단합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