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일하는 것 보다 노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실제로 창세기에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자 하느님은 그에게 ‘너는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으리라’고 노동을 죄에 대한 벌처럼 언급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산이 있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인간다움의 기본조건이다'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동은 노예가 하는 것이며 자유인은 노동을 하지 않고 철학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 대단하다는 서양 철학은 노예들의 피땀흘린 노동의 대가로 이루어진 것이다. 동양의 선비들 역시 농업이나 공업, 상업등의 노동은 자기들이 할 일이 아니며 선비는 굶어 죽어도 자기 이익을 위해 노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노동자들의 노동 덕에 살면서도 감사하기는커녕 노동을 비하한 이런 특권층들의 생각은 참으로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이었다.
마르크스는 산업화 되면서 노동자는 노동 생산의 자유도 박탈 당하고 자기가 생산한 노동 생산물로부터도 소외됨으로써 노동의 소외와 인간성의 소외를 겪게 되었다며 자본가들이 착취하여 누리는 사유재산을 폐지할 때 노동의 소외나 인간성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노동이 착취의 수단이 되는한 인간의 노동은 신성하지도 않고 노동자의 인격은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유재산의 폐지가 답이 아니라는 것은 그 이후 출현한 공산주의의 실패에서 입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영성이나 신성함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 나는 우리가 자본주의라는 제도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저녁에 따듯한 난로가에서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빵굽는 사람의 우리에 대한 자비나 호의 때문이 아니라 그의 경제적 이익에 대한 추구 때문이다’(아담스미쓰). 노동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일의 보수를 능력에 따라 차등 지급한다는 것이 현대자본주의의 원리다. 하는 일 자체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많은 보수를 받는 사람은 고급 노동을 하는 사람이고 적은 보수를 받는 사람은 저급 노동을 하는 사람이다. 하는 일과 받는 소득이 사람의 등급까지 결정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기를 쓰고 자기의 노동 가치를 올리려고 한다. 일에 따라 전문성이나 위험성, 준비하는 기간이나 노력등의 차이가 있어 어느 정도 소득의 차이를 주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소득의 차이가 지나치게 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며 소득이 인간의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것이다.
쌀 한가마의 가격과 휴대폰 한 대의 가격은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소비와 공급의 관계로 시장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킨다. 시골 농민과 삼성전자 직원의 소득이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농민의 노동이 삼성전자 직원의 노동 보다 저질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그렇게 결정해주는 것이다. 나는 우리에게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농민의 노동을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제공해주는 이들의 노동 보다 더 신성하게 여기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보다 나은 대우를 해주는 것을 정치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이 노동의 보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많은 종교의 대가들은 일이야말로 신에게 이르는 가장 중요한 길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은 자기를 위한 것일 뿐만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다. 남에게 잘해주고 남을 사랑하고서 돈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의사는 환자를 치료해주는 좋은 일을 해주고 돈까지 받는다. 환자가 들어 올 때 오늘 백명은 와야 소득이 얼마일텐데 하며 머리 속으로 환자를 하나의 숫자로 생각한다면 그 의사는 참 안됬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타락한 의사이다. 이런 의사는 심지어 과잉 검사나 과잉진료의 유혹에 빠질지도 모른다.
바가받기타라는 힌두교의 경전에는 신은 만방을 향한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 어느 길로 가든 신에게로 갈 수 있다며 그 중에서도 특히 일을 통해 신에게로 가는 카르마 요가를 중시하고 있다. 무슨 일이든 일의 결과나 보상에 대한 관심이 없이 오직 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을 하는 사람은 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모든 직업은 귀천이 없이 신에게 이르는 길이다. 아무런 보상에 대한 관심이 없이 오직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치는 일 그 자체를 즐기는 교사는 이미 하늘의 사람이며 의사든 농민이든 청소부든 요리사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 그 자체를 즐기고 그것을 기도며 신에 대한 예배라고 여기는 사람은 이미 성자들이다.
까뮤는 ‘일에 영혼이 없으면 인생은 질식사한다’고 했다. 일에서 사랑의 영혼이 빠져나가면 그 일은 사람을 병들게하고 죽게 만든다. 인도에 까말라는 성자가 있었다. 그는 글도 모르고 평생 옷감을 짜는 일을 했다. 그의 삶이 너무도 고결하고 평화로와 많은 이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몰려들어 제자들이 수천명에 이르르자 제자들이 그에게 이제 옷감 짜는 일은 그만하시고 가르치는 일만 하라고 권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노동은 신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내가 정성을 다해 옷감을 짜는 것은 그 옷감으로 옷을 해입을 사람들에 대한 나의 유일한 사랑이다.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의 삶은 무의미하며 나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일의 영성을 생각할 때 내가 좋아하는 칼릴 지브란의 일에 대한 시가 떠오른다. 이 시인의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다면 무슨 깨달음이 더 필요하겠는가.
일에 대해
그때에 한 농부가 ‘우리에게 일에 대하여 말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대가 일하는 것은 대지와 그 대지의 영혼이 하는 일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입니다.
일하지 않고 게으른 자가 되는 것은 일하는 계절들의 이방인이 되고, 품위있고 당당하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신을 향해 걸어가는 모든 생명의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일할 때 그대는 혼신을 다해 시간의 속삭임을 음악으로 바꾸는 피리입니다.
다른 모든 생명들이 함께 노래를 부를 때, 누가 입을 다물고 벙어리로 있으려 하겠습니까?
그대는 항상 일은 저주이고 노동은 불행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말합니다. 일을 할 때 그대는 처음부터 그대에게 맡겨진 대지의 가장 소중한 꿈의 일부를 이루는 것입니다.
일과 하나가 될 때 그대는 진실로 삶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을 통해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의 가장 깊은 비밀과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고통 속에서 출생을 재앙이라고 부르고, 육체를 보존하는 것을 이마 위에 새겨진 저주라고 부른다면, 나는 그대에게 말합니다. 오직 그대의 이마에 흐르는 땀으로만 그 저주를 지울 수 있다고.
그대는 또한 삶은 암흑이라는 말을 듣고 지친 자들이 하는 말을 지친 채로 앵무새처럼 따라합니다. 그러나 나는 말합니다.
욕구가 없으면 삶은 진실로 암담하고
지식이 없으면 그 모든 욕구는 맹목적이 되고,
일이 없으면 그 모든 지식은 쓸데없으며,
사랑이 없으면 그 모든 일은 헛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사랑으로 일을 할 때, 그대는 자신과 이웃과 신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대가 사랑하는 자가 입기라도 할 것처럼, 그대의 마음으로 잣은 실로 옷감을 짜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가 사랑하는 자가 그 집에 살 것처럼, 애정으로 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가 사랑하는 자가 그 과실을 먹을 것처럼, 사랑으로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수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가 만드는 모든 것들에 그대 자신의 영혼으로 호흡을 불어넣는 것이며,
축복 속에서 죽은 자들 모두가 그대 주위에 둘러서서 그 일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가끔 나는 마치 잠자면서 말하는 것처럼 그대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리석으로 일을 하며, 그 돌 속에서 자신의 영혼의 모습을 발견하는 이는 밭을 가는 이 보다 더 고상하다.”
“무지개를 잡아서 그것을 사람의 형상으로 천에 새기는 이는 신발을 만드는 이 보다 더 훌륭하다.”
그러나 나는 잠 속에서가 아니라 정오에 활짝 깨어 그대에게 말합니다.
“공중에 부는 바람은 거대한 참나무에게 지극히 작은 풀잎에게 보다 더 달콤하게 속삭이지 않습니다.
누구든 그 바람의 소리를 그 자신의 사랑으로 더 달콤한 노래로 바꾸는 이만이 진실로 위대한 분입니다.
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랑입니다.
만약 그대가 사랑이 아니라 증오로 일을 할 수밖에 없다면, 그대는 일터를 떠나서 사원의 정문 앞에 앉아서, 기쁨으로 일하는 자들에게 구걸을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 빵을 굽는다면, 그대가 구운 빵은 사람의 배고픔을 절반밖에 채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하기 싫은 마음으로 포도를 으깬다면, 그대의 원한이 증류되어 포도주 속으로 방울방울 떨어져 들어갈 것입니다.
그대가 천사처럼 노래할지라도, 노래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낮의 소리와 밤의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귀를 막는 자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