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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소통하기 위해 태어난 문자
사극을 보다 보면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마을 곳곳에 방문(訪問)이 붙습니다. 하얀 화선지 위에 먹물로 휘갈긴 듯한 글이지요. 드라마를 보는 우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옛날에 사용되었던 언어니까요. 그런데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들도 그 방문에 적힌 글자를 처음 접하나 봅니다. 이럴 때 흔히 나오는 장면이 있죠. 몇몇 사람이 말합니다. “뭐라고 하는 거야? 뭐라고 쓰여있어?” 그럴 때면 옆에서 붓 좀 잡아본 것 같은 사람이 수염을 만지작대며 설명해주곤 합니다. “아~ 글쎄, 임금님이 우리를 위해 쌀을 주신다는 군. 허허~”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안내문을 보고 판독을 못해 글을 아는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물론 정확한 의미파악이 안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 최소한 어떤 글이라도 한글로 적혀있다면 읽을 수는 있지요. 비록 그것이 외국어라 하더라도 말이죠. 우리는 한글로 “왓 아 유 두잉(What are you doing).”, “즈 마 펠 선희(Je m'appelle Sunhui)” “와타시와 선희데스(私はソンフィです)” 등 외국어를 큰 어려움 없이 옮겨 쓸 수 있습니다. 물론 외국어 발음을 완벽하게 옮길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에서 외국어를 표기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한글 표기의 우수성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글 문화가 없는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선택한 것도 이러한 한글의 소통 능력 때문이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각 문자마다 독특성이 있기에 문자 간의 우열성을 논하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한글의 우수한 소통 능력은 증명된 것이 아닐까요?
10월 9일, 우리 한글의 565번째 생일을 맞아, 한 달 동안 우리 한글에 대한 집중적으로 다뤄보려 합니다. 뭐든지 시작은 뿌리찾기부터 시작해야겠죠? 한글의 역사로 10월의 테마를 시작합니다.
어린 백성을 위한 스물 여덟 자
‘饭已经做好了,在那边。 待会儿饿了你自己吃。(판이징쭈어하오러, 짜이나비엔. 따이후얼으어러니쯔지츠.)’
학교에 다녀오니 냉장고 앞에 쪽지가 붙어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3학년인 옌시(姸熙)는 아직도 글을 읽지 못합니다. 쪽지를 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사전을 뒤져보지만 알 수 있는 단어는 별로 없습니다. 결국 옆집으로 들고 갑니다. 띵동~ “쉐이아~(谁啊, 누구세요?)” “워쓰옌시(我是姸熙, 옌시에요)” “칭찐(请进, 들어오너라)” 옌시는 신발을 벗고 성큼성큼 옆집으로 들어갑니다.
옌시는 글은 읽지 못하지만 대화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언어를 글로 옮겨 쓰지 못한다면 그것이 그 언어를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질 뻔 했던 일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면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을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너무 쉽게 읽고 사용해서 소중함조차 생각하지 않게 되는 한글. 그 의의를 아주 재미있게 되짚어 보겠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훈민정음의 시작입니다. 이 책은 세종이 지은 ‘예의(例義)’와 정인지·박팽년·신숙주·성삼문·최항·강희안·이개·이선로 등 집현전 실용학파 학사가 집필한 ‘해례(解例)’, 그리고 정인지의 ‘서문’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홍기문의 <정음발달사>를 보면 세종이 지은 예의보다 집현전에서 편찬한 해례가 더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세종이 직접 지은 훈민정음 예의에서 볼 수 있듯이 한글은 한문을 어려워했던 백성들을 위해 본인이 알리고자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소통’을 위한 문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배우고 사용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그 당시 백성들에게는 문자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세종대왕이 편찬한 예의는 백성을 위한 글이며, 실용주의 학파 학사들이 집필한 해례는 사대주의에 찌들어있는 경학 위주의 보수파 조정관료들에게 일침을 놓기 위해서라는 의견도 있지요. 이 책(훈민정음 해례)을 백성들이 읽고 한글의 원리를 이해하기 바란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바로 한글을 단순한 소리문자라고 이야기하면서 한문을 쓰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외치는 고함이라고나 할까요? 그를 뒷받침하듯 훈민정음 해례에서는 정확한 한글의 창제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훈민정음은 소리만 무조건 딴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언어를 빌려서 만든 것도 아니며,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른 발음기관 상형설이 제자원리(制字原理)라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이치는 한 음양과 오행일 따름이니 곤과 복의 사이가 태극이 되고 움직임과 고요함 뒤가 음양이 된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삶을 누리고 있는 무리들이 음양을 버리고 어찌 살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의 소리가 다 음양의 이치가 있으되 돌아보건데 사람이 살피지 않았을 뿐이다.’
이 글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세종은 사람의 소리 자체를 음양과 오행으로 나누어 목구멍을 물, 어금니는 나무, 혀를 가리켜 불, 이는 쇠, 입술은 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입 안에서의 오행을 맞춰 글자를 만들어낸 것이지요. 극과 극을 멀리하고, 상생하는 부분을 붙여서 우리가 알고 있는 자음의 기본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여기에 획이 더해져 17개의 글자가 만들어지고, 모음은 하늘, 땅, 사람을 본 따 만든 3개의 기본음을 조합해 11개의 글자를 만듭니다. 훈민정음은 간단하지만 삼라만상이 모두 어우러지는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글은 죽지 않아! (한글은 쓰러지지 않아!)
팔사파 문자라고 아십니까? 1269년에 원의 세조 쿠빌라이가 티베트의 승려이자 학자였던 파스파에게 명해 몽골어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문자입니다. 티베트 문자를 기초로 그것을 방형화하고 왼쪽부터 세로로 몽골어를 적었지요. 만든 해에 공용문자로 채택했지만 빨리 쓸 수 없는 등 용이하지 않아 보급이 잘 되지 않았는데요. 결국 원이 망한 후에는 거의 쓰지 않고 이젠 죽은 문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지요. 한글 역시 참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하게 했을 정도로(반포는 했으나 조정대신들의 반대로 사용할 수 없었음) 천대를 받았는데, 꿋꿋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실제로 한글은 1443년 세종대왕이 창제했고, 1446년에 반포했는데요. 안타깝게도 조선의 관료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지 못해 나라의 공식언어로서 인정받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쉽게 익히고 쓸 수 있어 천한 글’이다, ‘중국의 글자를 사용하지 않으면 중국의 노여움을 살 것’이다, ‘중국의 훌륭한 글자를 두고 왜 조선에서 글자를 만드느냐’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고 하지요.
그러고 보면 어려운 글자를 좋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지금도 눈알 대신 안구(眼球)를 더 고급단어로 생각하고, 입안보다는 구강(口腔)을 더 세련되었다고 생각하지요. 옛날 관리들의 생각이 그대로 답습된 듯합니다. 한글은 계속 우리 곁에 있는데, 결국 소통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안구라는 단어를 모르는 현대인 없고, 구강이라는 단어를 이해 못하는 한국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어려운 단어로 들어간다면 ‘패용(佩用)’이라는 말이 있겠지요. 흔히 볼 수 있는 단어지만 그 뜻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명찰을 패용하시오’라고 적힌 단어는 ‘명찰을 다세요’로 바뀌면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말이 될 텐데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한자어입니다. 한자어와 섞어 사용하니까 고급스럽게 느껴지시나요?
다시 조선시대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관료들의 반대로 조정에서는 사용되지 못한 한글이 백성들에게는 잘 스며들었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조선 시대는 자신이 먹고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한 글을 익힐 이유가 없었습니다. 쉬운 예로 현재 당신에게 누군가가 러시아어를 가르쳐주기 시작합니다. 러시아어를 배워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과 러시아에 관심이 많아 언어를 배워두고 싶은 사람들 외에는 굳이 이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한글은 없어지지 않고, 일부 트인 사람들과 공부를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었던 조선 여인들을 중심으로 조용히 그 입지를 넓혀갑니다. 허난설헌은 한글로 시를 지었고, 허균은 한글로 소설을 썼지요. 한글은 그렇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조용히 퍼져갑니다. 그리고 반포된 지 448년 후 1894년, 고종은 한글을 국가의 공식문자로 선포합니다. 실제로 이 시기 고종이 내린 교지는 한글로 되어 있고, 명성황후가 본인의 이모에게 보내는 서찰도 한글로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이미 한글은 그 전부터 나라 전체에 어느 정도 퍼져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근대화 흐름에 맞추어 고종이 공식문자로 선포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다른 면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종이 재임 당시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만 보더라도 한자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한제국은 하나의 제국이기 때문에 중국의 속국임을 의미하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이겠지요.
이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된 한글! 그러나 한글의 수난시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910년에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자, 한글의 운명은 일본에 넘어가게 됩니다. 특히 일제치하 말기 창씨개명을 통해 한글로 지어진 이름을 빼앗고, 한글을 사용하면 바로 수감되었지요. 덕분에 지금도 우리 말 뿌리에는 은근한 일본어가 남아있습니다. 이 부분은 2주차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때도 한글은 몇몇 열린 사람들에 의해 죽지 않고 숨어서 살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서 그 숨은 뜻을 펼치는 아름다운 시와 노래들로 재탄생하지요. 윤동주의 서시, 별 헤는 밤, 이런 시들이 한글로 쓰여지지 않았다면 그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어떻게 와닿겠습니까. 영시(英詩), 일시(日時)에서 느껴지는 감동보다 한시(韓詩)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더욱 우리 마음에 젖어 들지요. 한글은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들이 가장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만들어진 글이기 때문에, 우리의 얼이 담겨 있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아닐까요?
결국 한글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광복 이후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443년에 제정돼 1446년에 반포되었고, 고종 때 국가 문자가 되었다가 다시 또 일본에게 짓밟히고, 반포 후 무려 500년이 지나서야 한글이 제 생명을 찾게 된 것이죠. 그런데 이제는 영어공용화다, 제2외국어다, 조기영어교육의 틈에서 할딱할딱 또 한번 숨이 넘어갈 듯합니다. 당신은 한글날에만 한글을 생각해주는 척, 인공호흡기를 달아 주겠습니까? 아니면 건강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항상 곁에서 힘을 북돋아주시겠습니까?
‘안녕하세요’로 유럽을 발칵 뒤집은 한글
“안녕하세요.” 이 한 마디에 유럽이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에게는 흔한 인사말에 유럽이 주목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바로 윌스트리스저널(WSJ) 유럽판에 실린 제1면 광고 때문입니다.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교수가 지난해 4월 28일 윌스트리트저널 유럽판 1면에 한글 광고를 실었습니다. 이에 대한 각 국의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처음 보는 문자여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독일의 바우어 씨는 ‘한글 광고를 통해 한국의 인사말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벨기에의 안드레 씨는 ‘웹사이트에서 광고를 보았는데, 굉장히 신선한 아이디어로 지속적으로 광고를 낸다면 벨기에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널리 전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현재의 한글은 단순히 언어로서의 기능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기존에는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탄생한 언어라면 이제는 문화와도 소통한다고 할까요? 예를 들면 최근 시도되고 있는 디자인으로서의 한글의 변화는 한글이 문화와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글은 다양한 조합(풀어쓰기, 모아쓰기)으로 여러 디자인을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인데요. 파리 패션 전시 기획자 르하는 한글 패션을 보고 난 후, 한글을 두고 ‘섬세하고 낭만적이다’라고 표현했으며, 파리의 패션디자이너 이렌은 ‘현대적이고 그래픽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일본의 서체 디자이너인 고미야마는 ‘한국의 정신 그 자체다’라고 전했지요.
<프린스필더의 목에 왕자라는 한글 문신이 새겨져 있다>
한글이 디자인으로써의 문화와 소통하는 예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팝의 여왕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신흥호남향우회에 가입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물론 사실은 아닙니다. 신흥호남향우회라는 무늬를 넣은 원피스를 입고 다니는 브리트니를 보고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요. 올해 메이저리그 MVP 2연패를 달성한 야구 선수 프린스 필더의 목에는 자신의 영어 이름을 뜻하는 왕자라는 한글 문신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세계가 한글을 통해 대한민국의 문화와 소통하고 있는 한 단면이라고 한다면 다소 과장된 주장이라 할 수도 있지만, 한글이 써있는 티셔츠를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인식과는 세계인의 인식은 분명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글이 세계와 소통하는 방법, 그것은 문화이다>
천지인, 삼성이 개발한 거라고? (천지인, 나랏글 삼성 LG가 개발?)
OX 퀴즈 하나 풀어보시겠어요? 천지인은 삼성에서 만든 것이다. 맞다? 틀리다? 답은 무엇일까요? 최근 충격적인 글을 읽었습니다. 천지인 한글에 대해 궁금함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휴대폰에 적혀있는 천지인 한글을 삼성이 만든 것이냐며 인터넷에 글을 올렸는데, ‘삼성 애니콜에서 만든 문자입력시스템’이라고 답변을 달아준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로 이런저런 설명이 적혀 있었지만 마지막 한 문장만 적겠습니다. ‘우리 나라 모음은 세 개(∙,ㅡ,ㅣ)로 다 만들 수 있는데, 삼성에서 개발해서 만든 것이지요’라는 말입니다.
천지인, 나랏글로 문자를 작성할 수 있는 키패드는 삼성과 LG가 개발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까지 그들이 만든 것은 아닙니다. 누가 만들었냐고요?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휴대폰 문자의 천지인과 나랏글이 바로 한글의 창제원리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훈민정음이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으세요? 지금 바로 LG 휴대폰을 꺼내보세요. ㄱ에 획 하나를 덧붙여 ㅋ을 만듭니다. ㄴ에 획 하나를 더해서 ㄷ, 거기에 하나를 더 더해서 ㅌ이 됩니다. ㅁ에 하나 더해서 ㅂ, 또 ㅍ으로 변해갑니다. 천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ㅡ에 ∙이 위로 하나 더해지면 ㅗ, 위로 두개 더해지면 ㅛ가 되지요. 마찬가지로 아래로 더해지면, 옆으로 더해지면 ㅜ, ㅏ 등 각각 다른 소리의 모음이 탄생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ㅡ와 ㅣ가 만나면 ㅢ가 되지요. 무엇 하나 버릴 것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한글입니다.
삼성과 LG는 훈민정음 창제원리인 천지인과 나랏글을 알고 있는 한국 기업이기에 이를 이용해서 휴대폰 자판을 매우 간단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일례로 이런 원리를 모르는 모토로라나 애플 같은 경우는 키패드가 사용하기 매우 어렵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물론 관련 특허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천지인과 나랏글은 한글에 관심이 있는 사람 외에는 그 원리까지는 자세히 알기 어렵기 때문에 응용할 수 없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 요즘 사람들은 키보드에도 익숙해서인지 쿼티도 손에 익는다고 하니, 본인 편한 대로만 사용하면 되겠지요. 하지만 키보드 자판이 이렇게 완벽하게 나올 수 있는 것도 한글만이 가능하다는 것 잊으면 안 됩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천지인과 나랏글을 무의식적으로 익숙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토로라 휴대폰을 사용하던 부모님이 문자 보내기를 버거워했는데, 삼성 천지인 휴대폰으로 바꿨더니, 문자 보내는 재미에 푹 빠졌다는 일화를 봐도 알 수가 있지요. 한글은 누구와도 쉽게 소통합니다. 그래서 천지인과 나랏글을 이용해서 문자를 보내는 60세의 어르신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미루어 보면 한글, 정말 소통하기 위해 태어난 문자 맞지요?
자, 여기까지 우리는 한글의 소통 능력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창제 당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소통을 위해 살아온 한글. 어린아이부터 10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한 한글의 능력이 놀랍지 않으세요?
그러나 요즘, 한글의 소통 능력이 점차 소실되어감을 느낍니다. 모바일로 한 번에 더 많은 문자를 보내기 위해 쉽게 무시하는 띄어쓰기. 쓰기 쉽게 받침을 간단하게 표현해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 더 함축해서, 더 축약해서 쓰느라 단어의 어원조차 알 수 없는 줄임말들 때문입니다.
이제는 20대조차 10대와 소통할 수 없어져가는 이 시기, 2주차에서는 자주 틀리는 맞춤법과 줄임말, 비속어의 순화, 그리고 아름다운 우리 토박이 말을 살려 쓰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당신의 한글, 사람과 통(通)하십니까? 그럼 다음주에 만나요! 안녕~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안내문을 보고 판독을 못해 글을 아는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물론 정확한 의미파악이 안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 최소한 어떤 글이라도 한글로 적혀있다면 읽을 수는 있지요. 비록 그것이 외국어라 하더라도 말이죠. 우리는 한글로 “왓 아 유 두잉(What are you doing).”, “즈 마 펠 선희(Je m'appelle Sunhui)” “와타시와 선희데스(私はソンフィです)” 등 외국어를 큰 어려움 없이 옮겨 쓸 수 있습니다. 물론 외국어 발음을 완벽하게 옮길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에서 외국어를 표기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한글 표기의 우수성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글 문화가 없는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선택한 것도 이러한 한글의 소통 능력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각 문자마다 독특성이 있기에 문자 간의 우열성을 논하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한글의 우수한 소통 능력은 증명된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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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러고 보니 어제가 한글날...부끄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