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을 일러 흔히 제 2의 경주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만큼 덩그런 고분군과 예스러운 불탑에 불상이 전한다. 읍내 진흥왕순수비와 석빙고까지 있다. 우포늪의 생태환경은 자연사 학습의 좋은 장소다. 옛 명성만큼은 아닐지라도 부곡의 뜨거운 유황 온천수는 다녀가 본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지난 정월대보름 화왕산성 억새 태우기 행사 때 생긴 안전사고는 안타깝고 유감스럽다.
입추가 하루 뒤 팔월 초여드레는 토요일이었다. 나는 마산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창녕행 시외버스를 탔다. 한 시간 남짓 고속도로를 달려가니 창녕이었다. 마침 장날이라 주차장 앞 길거리는 지역특산물인 양파와 마늘이 가득 쌓였다. 올여름 딴 빨간 고추도 말려 나왔다. 할머니 한 분한테 시세를 물었더니 한 근에 육천오백 원이라고 했다. 고향 형님 댁 고추농사는 어떤지 궁금했다.
나는 1080번 지방도 따라 대지면사무소 쪽으로 걸었다. 고속도로와 국도의 지하도를 지나니 모산마을이 나왔다. 마을 뒤 야트막한 산자락에 커다란 봉분이 보였다. 나는 무덤의 주인공이 누굴까 궁금해 길 따라 올라가보았다. 조려중기 개창한 창녕 성씨 시조 묘였다. 우리 지역에 본향을 둔 명문 씨족의 뿌리가 여기구나 생각 들었다. 내가 여름 뙤약볕에 이곳으로 걷는 이유이기도 했다.
조금 더 가니 길가 앙쪽 피어난 코스모스 꽃이 아름다웠다. 주제넘게 내가 올 줄 미리 알고 일찍 핀 것으로 착각했다. 초등학교 앞엔 역시 같은 성씨 고려 충신의 비각이 있었다. 조선왕조 개국에 협조하지 않고 만수산 두문동에 숨어든 72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어 내가 마음먹고 찾아온 발길의 본색이 드러났다. 그것은 바로 석리 성씨 고가촌이었다. 달리 부른 이름은 성부자 집이다.
독특한 강호동양학의 경지를 개척해가는 조용헌이 있다. 그가 발품 팔아 찾아낸 우리 땅 삼대 양택 명당으로 구례 운조루와 강릉 선교장에다 창녕 아석가를 꼽았다. 아석가는 선대부터 만석꾼인 성부자 집이다. 해방 후 성유경은 남로당 재정국장을 지내다 세 딸과 함께 월북했다. 그 가운데 성혜림이 김정일의 첫째 부인으로 정남의 생모다. 서울 살던 성혜림이 어린 시절 방학이면 찾은 석리다.
세기의 독재자 김일성은 노동자와 무산자보고 계급 혁명을 일으키자고 꼬드겼다. 그래놓고 그는 정작 만석꾼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야했다. 당시 성혜림은 월북작가 이기영의 아들과 결혼해 아이까지 둔 유부녀였지만 권력 앞에 단란했던 한 가정은 무너져야했다. 이후 성혜림은 모스코바에 유폐되다시피 연금 상태로 지내다 몇 해 전 쓸쓸히 죽어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모스코바에 묻혔다.
석리 고가는 김정일한테는 처갓집이요, 그의 아들 정남한테는 외갓집이다. 내가 찾았을 때는 복원 공사 중으로 사전 약속 되지 않은 방문은 허락되지 않았다. 고색창연하지는 않아도 근대 한옥의 발전사를 알 수 있는 문화재급이었다. 안채, 사랑채, 곳간, 대문채 등이 부농 주택의 실용적 요소와 개화기 외래 건축이 절충된 양식이었다. 나는 울 밖에 서성이다 화왕산 능선에 눈길을 멈추었다.
이후 나는 우포늪 방면으로 계속 걸었다. 신당마을을 앞두고 길섶에 자라는 비름을 발견했다. 이럴 땐 그냥 스칠 수 없는지라 나는 배낭에 비날 봉지를 꺼내 보드랍고 깨끗한 순을 따 모았다. 아마 저녁이나 아침 밥상에 맛난 비름나물이 오르지 싶다. 사람들은 우포가 한 개의 광활한 늪인 줄 아나 그렇지 않다. 우포 말고도 목포와 사지포에다 쪽지벌까지 세 개 더 있어 탐방로도 각기 다르다.
나는 소목제방 가까운 솔밭에서 도시락을 비웠다. 건너편 아스라한 전망대를 바라보며 제 3탐방로를 걸었다. 소목마을 지나자 ‘푸른우포사람들’이라는 우포 자연학습원이 나왔다. 늪에는 마름과 자라풀이 가득했고 군데군데 중대백로와 왜가리는 한가로웠다. 쪽지벌로 향하는 제 4탐방로 비포장 자갈길은 발바닥 지압을 받는 기분이었다. 하염없이 걸어 유어면 낙동강 둑길에서 귀가를 서둘렀다. 09.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