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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순종과 언약적 순종
니콜라스 호체스박사/한역: 손성은목사
서론
개혁신학은 오랫동안 언약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한가지 예만 들어 본다면, 칼빈은 그의 주석들을 통해서 계속 언약을 언급하였습니다.
성인세례서식문에서는 새로운 순종에 대한 이 언약적 순종은 다섯 번째 질문에서 강조되어서 진술되고 있습니다: “그대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지체로서 적합한 대로, 언제나 크리스챤다운 삶을 살며 또한 세상과 세상의 악한 욕망들을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하시는가요?” 우리의 교회 문서에 따르면,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은, 그것과 함께 순종적인 삶을 사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언약에 대한 이런 강조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에 의무감을 갖게 되는 것은 오늘날 몇가지 질문들을 불러 옵니다. 만약 언약이 언약의 백성들로 하여금 은혜의 혜택들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면, 최소한 구원이 행위들에 의한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만약 그것이 우리의 행위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구원은 최소한 우리의 선행들에 부분적으로 기초해 있는 것이 됩니다. 최근에, 이 특별한 사안들에 관하여 여러 가지 질문들을 받았는데, 그것은 매우 논란이 되는 사안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 사안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언약적 순종을 강조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시기에 공식화되어졌던 대로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그리고 오직 은혜로만(sola Christo) 주어지는 것이라는, 성경적 가르침을 손상시키지 않습니까? 간혹 또 다른 표현이 첨가되는데,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sola Christo)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의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의 언약적 순종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는 것입니까? 우리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사역에 첨가되는 것이 필요한 것인가요?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이루시는 이 부분의 신학적 명칭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입니다. 교의학에 있어서,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에 대해서 구분을 하곤 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은 수동적인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수난과 죽으심을 당하여야 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신 그분의 사역의 이 부분은 그분의 삶의 바로 끝에 집중되어 있는데, 우리 구세주의 삶에 첨가되어야 할 더 많은 것이 있지 않으셨나 하는 질문을 야기시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이것은 능동적 순종을 인정하는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래에서 우리는 먼저 고백서들에 나타나는 대로 그 발전을 탐구해 보겠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 교리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교리가 언약적 순종에 대한 강조와 양립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논의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교리에 대한 고백서들 안에서의 발전과정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교리는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발전되었습니다. “능동적 순종”이라는 표현의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그 교리 자체는 16세기의 종교개혁이 진행되던 교회들 가운데서 등장하였습니다.
그 교리는 천천히 발전하였습니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인 사역을 강조하였습니다: 죄인들은 율법을 성취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당신의 순종과 사랑으로 그것을 완전하게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행하신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의존합니다. 그분은 그것을 나를 위하여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당신의 성취를 전가하셨습니다. 루터는 포괄적인 용어들로 말하였고, 그의 진술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셨는지에 대해서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루터의 동료였던 멜랑히톤은 두 측면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논의하였습니다. 우리들을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서 마땅한 형벌을 당하셨고, 또한 그분께서는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언급들은 그리스도의 순종의 수동적인 측면과 능동적인 측면을 함께 취급하지 않으면서 분리되어서 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초반 세대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이중적인 순종의 교리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또한 초기 루터파의 고백서들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부르그 고백서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을 따라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고 고난을 당하사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죽음 당하셨으며 장사지내셔서 원죄를 위해서만 아니고 모든 다른 범죄들을 위하여서 희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달래셨습니다. 아우구스부르그 고백서에 나오는 멜랑히톤의 방어를 보면, 이 진술에 실체상의 어떤 것도 첨가되지 않았습니다. 루터파 고백서들은 1577년 화해문서(Form of Concord)에 첫 번째로 능동적 순종을 언급하였습니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세기에 있어서 오히려 늦은 때이기 때문에, 우리는 종교개혁 공동체 안에 있는 발전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혁신앙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은 1560년대 동안에 하나의 승인된 교리가 되었습니다. 하나의 대단히 흥미로운 발전이 여기서 언급되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로움을 취급하고 있는, Gallican Confession(1559년)의 18항은, 우리의 의로움이 용서에 기초해 있다면서, 우리들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는 다른 방법들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덕들이나 공로들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존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모든 죄들을 덮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의 은총과 호의를 발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전가되어집니다.”우리의 의로움이 용서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Gallican Confession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모든 다른 수단들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 진술은 포괄적이지만 아주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용어들로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비슷한 진술이 벨직고백서의 1561년판의 22항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그분의 모든 공로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 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조항의 뒤에 이렇게 확장되고 있습니다: “...신앙은 그분의 모든 공로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끌어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수행하신 만큼의 많은 거룩한 사역들만큼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백서 문서들에서 처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질문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그리스도의 선한 사역들”이라는 그 진술이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을 진실로 언급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능동적인 순종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칼빈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교리를 수년간에 거치면서 발전시켰었습니다. 그가 1545년 제네바교리문답을 발행하였을 때, 그는 왜 사도신경이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즉각 그의 수난과 죽으심으로 뛰어넘는가에 대해서 질문하는데, 그 답변이 이렇습니다: “우리의 구속에 관계해서 그 구속의 본질을 어느 정도라도 포함하고 있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여기서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당시 칼빈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구원하시는 공로로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그의 최종작품인 『기독교강요』(1559년)를 보면, 그는 그것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습니다.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죄를 멸하셨으며 우리를 위한 의를 획득하셨는지에 대하여 질문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서 곧장 언급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삶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이것을 그분의 순종의 전체 경로에 의해서 성취하셨다고 일반적으로 답변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답변을 그는 로마서5장19절과 갈라디아서4장4,5절로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칭의에 대한 장에서 특별히 오시안더에 대해서 반박하는 중에 이 주제로 되돌아 옵니다. 오시안더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성에 따라서 의로우시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칼빈은 물론 그리스도의 신성의 중요성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것은 그분의 인성에 따라서였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스스로 종의 모양을 취하신 것 외에 다른 방식으로 순종하셨는가요?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그분의 육체 가운데서 의가 우리들에게 나타나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에 대한 언급들이 그의 주석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1561년판 벨직고백서에서 고백되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베자의 고백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귀도 드 브레(Guido de Bres)가 벨직고백서를 작성하였을 때, 그는 Gallican Confession만 아니라, 베자가 1559년에 작성하였던 고백서를 참고하였습니다. 이 고백서에서 베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형벌을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불의를 덮으실 수 있도록 모든 의를 이루셨다고 진술하였습니다.
모든 의를 이루신다고 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 두 번째 부분은 그분의 수난을 언급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결합되어서, 그리스도의 의는 그분의 능동적인 순종을 언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첨가된 증거본문들인 로마서5장19절과 마태복음3장15절에 의해서 확증되어집니다. 특별히 첫 번째 구절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위한 표준준거입니다.
벨직고백서의 본문 그 자체가 능동적인 순종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22조항의 첫부분에서 바울의 진술이 언급되고 있는데, 우리는 행위 없이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서3장28절을 인용하는 것인데, “오직”이라는 단어를 첨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행위는 “율법의 행위”, 곧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여 실행하여야 하는 일들로 불러집니다. 동일한 22항의 뒷부분을 보면, 이 신앙고백서는 진술하기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만큼의 많은 거룩한 행위들로서 그분의 모든 공로들이 우리의 의(justice)입니다.” 칭의에 있어서 우리의 역할을 부인함으로써, 그리고 우리를 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주목함으로써, 벨직고백서는 그분의 전체 생애가 구원하시는 공로를 지니고 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거룩한 사역들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인정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시작은 너무나도 잠정적인 것이어서 이것을 더욱 강조하는 것으로 진술해야 할 필요가 느껴졌었습니다.
이것은 후기의 고백서들에 의해서 확증될 수 있습니다. 하이델베르그문답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다루고 있는가 하는 질문은 답변하기가 곤란합니다. 이 문답서에 대한 Klooster의 새주석은 대색인표(General Index)에서 이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순종”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와 연관되어서 여러 번 등장합니다. 여섯 번째 주의 날을 보면, 고린도전서1장30절이 인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중보자께서 다른 것들 가운데서 우리의 의로움이 되신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으면, 문답서의 이 구절이 능동적인 순종을 의미하는 것임이 입증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23번째 주의 날에서 다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완전한 만족, 의로우심, 그리고 거룩하심을 우리들에게 전가하신다는 것입니다(61문). 주의 성찬을 다루는 29번째 주의 날에서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모든 수난과 순종이 우리들의 것임을 우리들이 확신하기를 원하신다고 진술합니다(79문). 비록 “순종”이라는 단어가 언급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단어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언급한 뒤에 나온다고 하는 사실은 이것이 수난이 있기 이전의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언급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우르시누스의 설명도 문답서가 능동적인 순종의 교리를 언급하고 있는 표지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1560년대에 있었던 두 개의 다른 고백서들, 곧 전통적인 39개신조(1563년)와 제2차스위스고백서도 능동적 순종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교리의 발전은 벨직고백서를 따라가면서 추적되어질 수 있습니다. 1566년에 벨직고백서는 앤트워프(Antwe게) 총회에서 개정되었습니다. 아주 조그만 부분이지만, 의미심장한 변화가 22항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라는 단어가 첨가되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공로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만큼의 많은 거룩한 사역들과 같은 공로들이 우리의 의로움(righteousness)입니다.” “그리고”라는 작은 단어 하나의 첨가는 “거룩한 사역들”을 그리스도의 공로들과 분리시켜 놓습니다. 우리들의 죄를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수동적 순종)에 첨가해서, 이 고백서(1566년)는 우리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역들(능동적 순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능동적 순종이 애매모호하지 않게 고백되어진 첫 번째 경우입니다.
얼마되지 않아서, 이 교리는 또한 독일의 루터파 교회들의 고백서에 포함되어 졌습니다. 아우구스부르그고백서는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의를 하나님께서는 불쌍한 죄인들의 믿음의 의로써 여기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초기의 진술은 이 의에 무엇이 포함되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을 화해의 문서(The Form of Concord)는 다음과 같이 진술함으로써 정교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되신 그리스도만의 공로, 전체의 순종, 그리고 극심한 고통, 죽으심과 부활하심 때문에, 순전한 은혜의 기초에서만 의롭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공로는 그분의 수난과 죽으심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순종의 생애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가 공로를 이루는 것은 부인되어집니다: “....이전에 있었던 것이나 현재의 것이거나 앞으로 있게 될, 우리 자신의 어떠한 공로나 가치와는 조금도 관계없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선,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의 교리가 그 완전한 형태 가운데서 공식화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전체 순종이 그분의 수난과 죽으심에 부가되어서 언급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능동적인 순종에 대한 강조는 인간의 행위들의 공로됨을 부인함으로써 확증되어지고 있습니다.
화해의 형식(The Form of Concord)은 다음의 절들 가운데서 이것을 확장되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분의 수난과 죽으심에서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자유롭게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 아래에서 사시고 당신의 순종하심으로써 그 율법을 성취하셨고 또한 그것을 우리에게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셨다는 사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서는 또한 “그분의 행위들과 고난당하심, 사심고 죽으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전체적인 순종”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장의 좀 더 뒤에서는, 왜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이 강조되어서 제시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 고백서는 성령을 통한 우리의 중생이 “...그 중생 이후에 의롭게 되어지고 다시금 태어난 사람의 본성과 삶에 더 이상 붙어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여기서 진술하고 있습니다. 대신에, 그것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순종과 더불어서 그들의 모든 죄악들을 덮으셨는데, 그 죄악들은 이 생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이 죄악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대신, 비록 의롭게 되고 중생한 자들이 자신들의 부패한 본성 때문에 무덤에 이르도록 죄인들이고 죄인인 채로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순종 때문에 믿음 때문에 올곧은 것으로 간주되고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입니다(그 그리스도의 순종은 당신께서 태어나셔서 가장 수치스러운 그 십자가상에서의 죽으심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아버지를 위하여 수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은 죄는 더 이상 인간 안에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을 반대하면서 거듭 강조되고 있습니다. 오시안더가 그런 생각을 전파시켰었습니다. 이것은 개혁파 고백서들과 루터파 고백서들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교리가 등장하게 된 것은, 하나의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오시안더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을 교회의 한 교리로서 받아들이게 된 것은, 17세기 동안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 확증되었습니다: 벨직고백서를 개정하는 일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제정하는 일에 있어서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먼저, 1619년 도르트총회는 다시금 22항을 개정해서 현재의 내용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분은 그분의 모든 공로들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행하신 것만큼의 많은 거룩한 사역들만큼을 우리들에게 전가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를 첨가함으로써, 총회는 화란의 개혁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고백하였음을 매우 분명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도르트 총회는 비록 그 사안 자체를 다루지는 않고 있지만, 오류들의 거절(the Rejection of Errors)부분에서 언급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교리의 고백서상의 발전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에서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집중해서 말하면,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제8장에서 그것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진술에서 능동적 순종이 고백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직분을 주 예수께서 가장 자발적으로 취하셨는데, 그것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그분께서는 율법 아래에 있게 되셨으며, 그리고 그것을 완전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이 항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수난, 십자가형과 죽으심, 그리고 장사되신 것을 사도신경에 부합되게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순종하신 것은, 초기의 신조들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분의 수난의 곁에 의미심장한 교리로서 첨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트 총회의 결정은 80여년간 계속되어졌던 발전과정의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 동안에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은 점차적으로 분명해지고 또한 확신을 갖고 인식되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성경적 토대
근본적인 질문은, 이 교리가 성경에서서 발견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고백서들의 진술들이 이 교리의 포함을 방어하였을까요? 여기서 반드시 언급해 두어야 할 것은, 이 교리의 역사는 정확하게 어떤 성경구절로 그것을 방어하였는지에 대해서 그렇게 도움을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벨직고백서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최초의 판에서, 난외의 구절들이 첨부되긴 하였지만, 이것들 어느 하나도 능동적 순종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제2판이 개정되어서 능동적 순종이 분명하게 고백되어지도록 하였지만, 난외의 구절들은 개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능동적 순종을 첨가한 그 동일한 도르트총회가 난외의 구절들을 모두 다 삭제해 버렸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있게 되셨다는 진술을 위하여 갈라디아서4장4절,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셨다는 그 가르침을 지지하기 위해서 마태복음3장15절과 5장17절을 언급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의 교리의 성경적 토대를 검토해 보기 위해서 좋은 출발점이 되겠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맥락에서 취급됩니다(comes up): 우리는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율법을 행함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갈2:16). 바울은 계속해서 진술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심으로써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나무에 매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느니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갈3:3). 하지만 바울은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태어나게 하셔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구속하사 우리가 아들들의 완전한 권리들을 받게 하셨습니다”(갈4,5).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공로가 당신 자신이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것으로 모두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가리킵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우리를 위하여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셨”던 것입니다.
이 “율법”은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에게 특별하게 주어졌던 율법입니다(갈3:17). 하나님의 아들은 한 유대인이 되셨고, 이렇게 되심으로써 모세의 율법의 규칙들에 종속되셨습니다. 롱거네커(Longenecker)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셨다”는 표현을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과 인류를 대표하시는 특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태어나신 것”과 구분합니다. “율법 아래에 태어나신 것”은 예수께서 한 유대인으로서 태어나셨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율법 아래에 있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유대인”으로서 “그분은 오셨기” 때문에, 그분의 생애 동안에 율법의 요구들을 완성하시고(마5:17~18참고), 그분의 죽으심 가운데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시게 되는 것입니다(갈3:13;빌2:8참고). 바울은 이 구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포괄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모든 요구들을 성취하셨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들만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특별하게 주신 그 율법을 또한 성취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할례를 받으심으로써,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모든 율법들을 지켜야할 의무를 지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방인들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모든 율법들에 당신 자신을 스스로 종속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포괄적인 성격은 빌립보서2장8절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종이 되셨다는 것을 진술한 이후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봉사를 세부적으로 묘사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사, 죽음에까지 순종하게 되시되, 십자가에 죽음 당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죽음에까지 순종하셨다”(obedient to death)는 눈에 띄는 표현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방법으로 순종하시되, 심지어는 죽음을 경험하시게 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은 그분의 순종을 모두 합해 놓은 총합이 아닙니다. 단지 그분의 순종의 절정에 해당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순종하시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바울은 진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독자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힘쓰면서(2:12),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고무시키고, 사악하고 부패한 세대로부터 흠이 없게 되고, 또한 점도 없이 하나님의 순결한 자녀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2:15) 그리스도의 순종의 삶을 강조합니다(빌2:7).
그리스도의 일반적인 순종과 연관해서, 그분의 할례 받으심(눅2:21)에는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할례는 언약의 표지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언약 안에 자녀를 결합(incorporation)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을 의미하며, 구약 율법의 규칙들에 따라서 살아갈 의무를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갈5:3). 그리스도의 할례 받으심은 그분께서 공식적으로 언약의 백성으로 결합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그것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그분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셔야 할 의무가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30년”의 기능을 고려해야 합니다.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되셨다고 합니다(눅3:23). 예수께서는 당신의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셨고 곧 당신의 부모와 함께 나사렛으로 가셔서 부모에게 순종하셨다는 진술(눅2:51) 외에는, 지상에서의 이 기간 동안에 대하여 어떤 것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최소한 17년의 기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던 과제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순종하셨다는 것을 꼭 집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5계명은 자신의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고 말합니다. 이 명령은 예수에 의해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부모에게 순종하셔서 혈연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사역을 시작하시기 이전에 요셉이 죽었다는 것을 우리가 가정하는 것이 정확하다면, 그는 순종은 가정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일하셨음을 포함합니다. 그분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자세히 우리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친에 대한 책임을 그가 사랑하였던 제자에게 맡기는 것을 포함하여(요19:26f), 전 생애 동안, 당신의 부모를 존경함으로써 제5계명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분의 지상생애의 30여년 동안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순종하셨던 것입니다(빌2:8).
이것은 공생애 사역 기간 동안 예수께서 행하셨던 순종에 이어지는데, 그것은 세례를 받으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세례요한이 그분에게 세례를 베풀기를 주저하였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행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라는 단어에 대해서 다른 의견들이 여럿 있다고 할지라도, 세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서는 순종의 행위였다는 것에는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성령에 이끌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광야로 나아가셨습니다. 백성을 가르치시기는 것으로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시는 것보다는, 사탄과 싸우시기 위해서 그들을 뒤에 남겨 두셨습니다. 음식을 전혀 먹지도 않으시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은 매우 긴밀하게 엮여 있습니다: 능동적인 순종으로 광야에 가신 것이 수동적 순종인 큰 고난을 야기시켰던 것입니다.
이 기간 동안의 그분의 순종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들은 복음서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번 당신께서는 순종하셔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셨습니다(요4:34, 5:30 6:38).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첫 번째의 경우입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여 그 일을 이루는 것이로다”(요4:34). 요한복음4장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그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마리아인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일반적인 진술이 유명한 마가복음10장45절에서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그분의 순종이 특별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고,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고자 함이로다.” 이것은 제자들 사이에서 앞으로의 자신들의 신분에 대한 논쟁이 있었을 때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왕이 되실 경우 보다 높은 자리를 원하였던 것입니다(37절).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나의 본보기로서 제시하셨던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섬기시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분께서는 당신의 전체 생애를 섬김으로써 규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이것들을 전 생애 동안 이루셨는데, 먼저는 부모에게 순종하셨고, 그리고 공생애 사역의 시작 때부터 백성들의 교사로서 그들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이 본문을 설명하면서, 죄악들의 구속의 맥락 가운데에 올바르게 주목이 되어 왔었습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동시에 그의 전 생애는 순종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진술의 눈에 뜨이는 특징은,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사이에 있는 너무나도 확고한 연결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능동적인 순종의 절정으로서 볼 수 있습니다. 죽으심에까지 이르게 되는 이 수난은, 그분께서 범하신 죄악들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의 죄 많은 백성들을 대신하시기 위해서, 순종하신 것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에 있어서 그분의 능동적인 순종이 수동적인 순종으로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수난을 당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분의 순종은, 그분의 능동적인 순종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능동적인 순종이 전포괄적인(overarching) 교리입니다. 능동적 순종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행하신 희생제사로서의 수난과 죽으심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신서들은 이 교리의 중요성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로마서5장의 그 어려운 장에서부터 한 진술과 직면하게 되는데, 그것은 한 사람의 범죄의 결과가 한 사람의 의로우심의 결과들과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죄인들이 되었습니다(롬5:12). 이것은 우리들에게 원죄의 실재를 직면케 합니다: 아담과 연결된 모든 이들이 그의 죄를 공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되어 집니다. 우리는 특별히 “의”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Sanday와 Headlam은 이것을 죽으심에 있어서의 순종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한 사람의 불순종과 또 다른 한 사람의 순종을 대조하고 있는 단어들의 비교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금지된 과일을 따먹게 되는 일에 있어서 아담의 불순종과 대조해서 그리스도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에 내어맡기시는 일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완전한 그분의 순종을 언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죽음을 당하시는 일에 있어서의 그분의 순종을 반드시 포함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그 한 가지 행위에만 국한시켜야 할 이유를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던(Dunn)은 말하기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아담의 불순종의 한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반립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죽으심에 국한시켜서 이 구절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오해에 기초한 견해입니다. 그 오해는 순종의 전체적인 의미를 인식하지 못한데에 기초한 것입니다. 본질상 순종은 지속되는 상태인데, 곧 순종의 지속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불순종의 경우에는 한 번의 불순종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불순종하는 사람을 불순종하는 것으로 만듭니다. 로마서5장에 있는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 문맥상,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분의 전체 생애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유명한 빌립보서2장6-11절을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술하고 있는 곳입니다. 8절은 그분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합니다. 칼빈은, 성경을 주석하면서 성경의 어떤 진술의 교의적 함축성들에 대해서 언제나 민감한데, 말하기를, 생명과 사망의 주님이신 그분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까지 아버지에게 복종하셨다고 합니다. 그는 첨가하기를, 예수께서는 수치를 당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 저주를 받으셨는데, 이것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겸손의 한 전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에게 순종하셨다는 칼빈의 진술은, 예상되어질 수 있는 바, 실제적으로 능동적 순종이라고 구분하지는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후의 주석들은 이것을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19세기 주석가인 H.A.W.Meyer는, “까지”라는 단어는 “그분께서 순종하셨던 최상의 정도대로, 죽으심이 최절정의 지점으로 강조되고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것은 바울에 의해서 주어지는 적용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순종이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있어서 신자들이 인내하는 것을 위한 하나의 자극제인 것입니다.
이 구절들에다 간혹 히브리서5:8, “그가 아들이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웠다”는 구절이 첨가되곤 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셨던 동안 보여주셨던 순종과 연관되어 왔습니다. Hughes는 “그러면, 성육신한 아들로서 그분께서는 순종을 배우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셨습니다. 그분의 순종은 우리들의 불순종을 상쇄시키기 위해서 필수적이였기 때문”이라고 진술합니다. 하지만, 레인(Lane)은 “순종”이라는 단어는 그 앞에 정관사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언급하고 있는 문맥이기 때문에, 그 단어는 “...너무나도 특수한 의미를 가리키게 되는데,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일치하여서 죽으심을 당하시도록 부르시는 그 부르심에 대한 순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만약 히브리서5장8절이 확신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것 대신에 베드로전서1장2절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다. 그 편지의 수신자들은 “God's elect, who has been chosen according to the foreknowledge of God the Father, through the sanctifying work of the Spirit, for obedience to Jesus Christ”로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번역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어떤 표시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만, 이 번역은 제고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가 언급되고 있고, 각 위격에 한 가지씩 특징들이 부언되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미리 아심,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순종과 그분의 비피로 씻기심을 받는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NIV번역이 원본과 비교되어진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위치가 바뀌어져 있다는 것이 발견될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그 표현은 “for obedience and sprinkling with the blood of Jesus Christ”로 번역되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순종”이라는 단어로서 의미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NIV판은 베드로의 표현을 크리스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괴상망칙합니다. 그렇게 번역하면, 한 문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순종의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또한 그분의 피를 뿌리는 주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해결책들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한 주석가는 성령에 의한 거룩케 하심이 순종과 그리스도의 피로 뿌리심을 받게 되는데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순종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피로 피뿌림을 받는 것이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사역의 목표로서 간주될 수 있는지가 분명치가 않습니다. Spicq는 출애굽기24장을 배경으로 해서 그것을 설명하면서, 또한 그 백성들의 거룩하심에 돌리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율법의 규칙들을 준수할 것을 약속한 뒤에, 모세가 그들을 희생짐승들의 피로 피뿌렸던 것입니다. 삼위일체적인 인사말로 시작하는 베드로전서의 서론을 읽을 때, 이 특별한 사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질문은, 답변이 주어지지 않는 채로 남게 됩니다.
그 진술 자체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과 연관되어 있는 각 부분은 전치사로 시작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택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는데, 세상에서는 나그네들이지만, 다음과 같이 택자들이 되어진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서입니다.
-성령의 거룩케 하심(의 과정)을 통해서입니다.
-for the obedience and the sprinkling with the blood of Jesus Christ.
앞부분의 두 진술은 세 번째 진술이 순종을 행하신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더 낫게 보게 합니다. 첫눈에 보면, 이것은 마지막 말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피 뿌림을 받는다는 것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9장11-14절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의 피를 우리의 죄로부터 우리들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서 드리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1장2절의 자연스러운 해석은,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을 가리키고, 그분의 피로 피 뿌리는 것은 그분의 수동적인 순종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그분의 전 생애를 통하여 보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은 신약성경에 분명하게 진술되어 있고, 베드로전서1장2절에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두 가지 중요한 일들 중의 하나로 요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16세기와 17세기의 개혁파와 루터파의 신앙고백서들에 올바르게 인지되고 있습니다.
3. 능동적 순종과 우리의 순종
신약성경의 자료들을 검토해 보는 것은, 얼마간 우리들 각자를 스스로 검토해 보는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충분히 주목해 왔는가요? 그분의 생애, 그분의 가르치심과 그분의 수난 당하심을 다루는 것이 광범위하게 논의되어져 왔을 때 우리는 그분의 신실하신 순종의 삶에 대해서 충분히 주목해 왔던가요? 확실히, 성경은 그분의 지상 생애 동안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셨던 일상의 순종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는데, 그것은 부분적인 설명으로서 제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는 하나님의 십계명에 대한 그분의 순종의 행위에보다는, 오히려, 그분의 가르치심과 수난 당하심, 그리고 죽으심에 대하여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심지어 일반적인 견지에서조차도 그분의 능동적 순종에 주목하는 것을 무시해 왔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지상생애 동안 신실하게 수행하셨던 하나의 사역으로서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언약적 순종에 반대되는 것으로 제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할 것(롬2장) 뿐만 아니라,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은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강조합니다. 성경을 관통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은 언약적 순종을 하여야 할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몇 가지 중요한 노선들을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짐승들을 쪼개라고 말씀하시고 그의 후손들이 가나안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한 언약을 맺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언약은 그 약속이 이뤄지는 동안에 아브라함이 권리도 없고 안전도 보장받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를 기다리면서, 외국인으로서 홀로 살아가야 할 것을 의미했습니다(창15:13-16).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에게 그의 백성이 숫자상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셨을 때 확증되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창17:1)해야 할 것을 확증하셨습니다. 강조에 있어서 차이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그 두 사건들은 함께 속하여 있습니다. 창세기15장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순종을 포함하면서 전경(前景)에 있는 반면(창15:9,10), 17장에서는 그의 믿음을 배경으로 하여 순종이 전경에 있는 것입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의 주도로 성립되지만, 만약 그것이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헌신된 신실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특별한 명령들도 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요구되어지고 있는 순종은 전포괄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십계명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그의 최종적인 연설에서 모세가 그들에게 십계명을 상기시켰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음을 상기시켰습니다. 모세는 계속하여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언약을 너희에게 반포하시고 너희에게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곧 십계명이며 두 돌판에 친히 쓰신 것이라”(신4:13)고 하였습니다. 율법은 언약에 속하여 있는데, 그 율법이 심지어 “언약”이라고 불러질 정도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언약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필요를 강조하고 있는 많은 경우들을 뒤에 기록되는 구약성경의 책들에서 인용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오히려 신약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려 오셨습니다(마5:17). 그분께서는 산상보훈에서 그것이 6계명, 7계명, 그리고 9계명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후에, 그분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마22:37-39). 이 사랑의 계명을 주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십계명을 폐지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이 이 두 가지 계명들에 달려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율법들이 유지되고 있는 서신서들에서 확증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제5계명에 호소합니다(엡6:1). 그가 첨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주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이신 예수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순종하기 위해서 지금 현존하고 있는 계명에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1장에서, 죄인들의 목록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십계명의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다(9절이하). 그리고 야고보는 율법을 강조하면서,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2:11)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능동적 순종 가운데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을 성취하셨지만, 이것은 결코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우리들 자신의 방식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무법주의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음 당하셨음을 바울이 설명하였을 때, 그는, 우리가 더 이상 죄에 종노릇하면서 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음을 첨언하고 있습니다(롬6:5-7). 이것 이후에, 율법이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은 그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면을 가집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롬12:1,2). 그리고 이것은 또 다시 한 번 더 십계명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롬13:8-10)!
로마서의 중요한 부분은 영광송으로 그 서문이 시작됩니다(롬11:33-36). 이것은 신약성경에 있는 율법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진정한 위치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는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우리의 감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영광송 바로 직후 “그러므로”라는 말로 강조되고 있는 바와 같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상 구약 성경과 완벽하게 일치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은 애굽에서 당신의 백성을 해방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획득하셨습니다. 당신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모두를 통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속은 하나님의 백성을 언약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율법으로 되돌려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과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우리의 순종 사이에는 어떤 대립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 때문에 하나님께 우리가 감사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순종에 있어서 아주 능동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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