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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년간(英祖年間,1725~1776) 간행된 성삼문(成三問,1418~1456)의『성근보집(成謹甫集)』2권에 안숭선(安崇善,1392∼1452)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있다. 성삼문은 안숭선의 본관을 죽계안씨(竹溪安氏)라고 적고있다.
안숭선(安崇善,1392∼145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중지(仲止), 호는 옹재(雍齋). 고조부는 고려 말기의 학자로서 도첨의찬성사를 역임한 축(軸), 증조부는 판문하부사를 역임한 종원(宗源), 할아버지는 선의 개국공신에 오른 경공(景恭), 아버지는 판중추원사를 지낸 순(純)이다. 부인은 송씨(宋氏)로 판전농시사 천우(千祐)의 딸이다. 그는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5년에 음보로 계성전직(啓聖殿直)에 임명되었으며, 1418년에는 사헌감찰에 이르렀다. 1420년(세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평으로 승진하였고, 그 이듬해에 이조전랑으로 전보되었으며, 1426년 장령이 되었다. 이때 사헌부에서 예조참판 이명덕(李明德)을 수차에 걸쳐 탄핵하였는데 그가 앞장을 섰다. 이 일로 세종의 뜻에 거슬려 좌천되었으며 곧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고, 1429년에 대호군으로 승진하여 함녕군(諴寧君) 인(裀: 세종의 동생으로 처음 받은 봉군호는 景寧君)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사행은 명나라가 요구한 금은(金銀)의 양이 과다하여 이를 감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기 때문에 귀국하자 그는 곧 동부대언(同副代言)에 발탁되었고, 1433년에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그뒤 1437년 3월 대사헌으로 승진될 때까지 승지로 있었다. 1433년 파저강(婆豬江)의 야인정벌 때 세종의 정책을 적극 추진, 이로 인하여 세종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그뒤 그는 조정의 인사행정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 사관의 평에 “겸판이조사(兼判吏曹事) 맹사성(孟思誠)은 착하기는 하지만 결단성이 없고 이조판서 신개(申槩)는 그저 남의 의견을 따르기만 하였기 때문에 모든 인사행정을 안숭선이 좌우하였다.”고 한 것은 당시의 사정을 잘 말하여주고 있다. 이와같이 승지의 법제외적 권한이 인사행정에 크게 작용하자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이러한 비판은 자연히 안숭선 개인에게 집중되었으며, 나아가 승지의 인사행정과 관계되는 업무를 규제하려는 방향으로까지 전개되었다. 결국 1437년 3월에 안숭선은 대사헌으로 전보되고, 5개월 후에는 승지들의 전주권(銓注權)을 크게 제약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1443년에 형조판서, 1444년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지중추원사·집현전대제학, 1445년에 병조판서 겸 지춘추관사로서 《고려사》 수찬에 참여하였고, 1448년에는 병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이때 정실인사가 문제되어 진천현에 부처되었다가 풀려나왔다. 1450년(문종 즉위)에 의정부우참찬을 거쳐 좌참찬에 이르렀다. 《근재집 謹齋集》에 부록으로 유고가 전한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左參贊文肅安公神道碑銘 幷序 a_010_198a
竹溪安氏。其賢且顯者諱軸。仕高麗。爲都僉議贊成事。諡曰文貞。人至今稱謹齋。生諱宗源。卒於判門下府事。諡文簡。文簡生諱景恭。佐我太祖開國。賜鐵券。封興寧府院君。諡良度。良度生諱純。官至判中樞院事。諡靖肅。自謹齋世業儒。相繼爲名臣。門戶烜赫。而人無間言。靖肅娶淸源君諡文簡鄭公公權之女。生四子。公於次居二。諱崇善。字仲止。雍齋其號。生於洪武二十五年壬申九月甲申。永樂九年辛卯。公中司馬試。乙未。蔭補啓聖殿直。累遷至司憲監察。時嶺南守令多不法殘民者。以公爲行臺。一問得其情。歲戊戌也。越二年庚子。許文敬公稠掌試。寘公第一。特拜司憲持平。明年。遷禮曹正郞。又遷吏曹。知製敎。自此皆帶館閣。時郞吏或一二月而遷。久者不過半歲。以公爲賢。則留天官者三年。甲辰。乃出佐京畿監司幕。洪煕元年乙巳。召爲漢城少尹。公治煩剸劇。左酬右答。剖決如流。一府歎服。宣德元年丙午。轉司憲掌令。以言事左遷成均司藝。尋擢爲執義。又罷。己酉。國家請免金銀。重其事。遣宗室恭寧君䄄赴京。以恭寧年少。選一時名儒爲書狀。公以大護軍行。果得請。旣還。賜土田。庚戌。擢同副代言。辛亥春。世宗講武于江原道。會天暴寒。士卒有凍傷者。政院不卽聞。上震怒。知申事坐免。左代言以下人各自謂得代。批出。乃公也。公性又剛直。遇事敢爲。見遇日隆。同僚積不平。壬子科。公爲對讀官。取金吉通等三十三人。癸丑。國家將征婆猪江。廷議紛紜。上以問公。公對曰。自古武士論征伐。儒臣守和親。以臣所料。滿住惡逆貫盈。問罪之師。不容緩也。凡軍情機務。一以咨公。公皆從容運決。師果有功。上益重之。公以喉舌任重。母夫人且有疾。前後累乞解職。皆不允。公自初侍病。衣不解睫不交者累旬。及卒。哀毀成疾。上遣使弔且祭。送侍醫御劑不絶。公得不傷生。正統二年丁巳。外除未禫。徑拜大司憲。公據禮固辭。上是之。仍著士大夫經禫除拜之令。而公則不許其請。公乃僶勉就職。居數月。疾復作。移工曹參判。病愈。拜禮曹。階加嘉靖。文敬以春官職掌三禮。請擇精明者久其任。上問誰可者。文敬對以公。有是除。會京畿監司缺。授公鈇鉞。畿甸環京師。求請輻湊。公皆不聽。冬。丁內艱。癸亥。拜刑曹判書。囹圄幾虛。甲子。奉幣金臺。遷知中樞院事。集賢殿大提學。乙丑。以兵曹判書,知春秋館事修高麗史。丁卯。西北饑。上軫慮。命輔臣薦監司者甚急。前日忌公者以公名聞。且曰。非此人不可。公自連喪。眩暈轉劇。方欲辭職。聞是命。力疾上道。至則躬行閭里。竭心賑救。民賴脫於溝壑。則復以疾辭者再。戊辰春。召以藝文大提學。就醫京師。初。公在兵曹。有公錯。忌公者摘之。搆公獄。配固城。公生長閥閱。一朝。貶窮荒瘴海之濱。無一怨悱色。唯以詩書自娛。未幾。上審其無他。遂賜環。景泰元年庚午。勑使尹鳳至國。文宗起公館之。卽除中樞院事。尋拜議政府右參贊。辛未。轉左。冬。兼判兵曹。公再三力辭。壬申春。又以病乞退。皆不得允。公自有疾。盥櫛不廢。必具冠帶。至四月戊寅。病革。就正寢。集子弟而語之曰。死生常理。今吾位廊廟。年且耳順。何恨。我死。不作佛事。言訖而卒。享年六十又一。遠近聞者莫不悲之曰。國家亡一賢相矣。訃聞。上震悼。輟朝二日。賜賻祭。易名文肅。公姿英達。自少好學。雖連篇累牘。一覽輒記。善於賦詠。人推流麗。事父母甚孝。與朋友交而信。居家不言利。財賄不入門。哀憫無告。好士禮賢。嫉惡而褒善。出於天性。居家處事。凜若秋霜。而與人談笑。和氣溫溫如也。僕近從太史後。修世宗實錄。見公之爲。知奏六年之間。言聽計從。其獻替之益。眷遇之篤。君臣相得。可謂千一之逢。未嘗不爲公三嘆也。公之座主文敬將終。以犀帶付之公。本我獨谷叟舊物。世號爲斯文衣鉢者也。人以公之不得帶此爲恨。余曰不然。人之期望。有不在彼。而天者又不可必乎則帶不帶。不足言也。帶今歸右贊成李公思哲云。公配。貞夫人冶爐宋氏。判典農寺事諱千祐之女也。生二男二女。男長曰訓。奉訓郞,宗廟署令。次曰誼。承義校尉,中軍副司直兼司憲監察。女長適宣節將軍義興司軍金潚。次適奉列大夫知安山郡事曹錫文。甲寅科第二人。署令娶敦寧府判官李厚之女。生三男三女。男長曰友淵。次曰友商。次曰友晳。餘皆幼。監察娶前錄事尹孝童之女。生四男一女。男長曰友參。次曰友伋。次曰友騫。次曰友益。餘幼。護軍生四男二女。男長曰福寧。娶司直李命通之女。次曰壽寧。癸酉壯元。直拜集賢殿副修撰。年僅十八。養且學於公者也。次曰德寧。次曰命寧。女長適幼學柳漢卿。餘幼。公旣卒之三月丁酉。厝于京畿臨江任內松林古縣之北朱巖洞原。署令昆季將以甲戌仲春立石。徵文於余。嗚呼。歲丁卯。家君赴京。道平壤。公館穀有加。宴席。命三問行酒。執家君手命之曰。吾兩家世相往來。吾於若翁。交分又素。若知之乎。若肯與吾兒遊。若兩父者乎。三問曰。固所願也。況公之命。退而喜未嘗忘也。曾歲月之幾何。而作銘之請在吾耳乎。謹爲之銘曰。猗歟根有百里盤。菁蔥蔽日干靑天。竹溪望族姓曰安。謹齋東人仰斗山。文子文孫世有賢。箕裘趾美忠孝全。烈烈雍齋直挺然。隼翼秋橫太華巓。君臣際會罕千年。一逐要觀南海堧。朅來黃閣望如仙。向之吠者多厚顏。與德又壽天所慳。爲國悲淚令人潸。墳前有石字可鐫。作文留與後世看。
번역문 출처 : 순흥안씨 문숙공파 종회
좌참찬 문숙안공 신도비명 병서(左參贊文肅安公神道碑銘 幷序)
죽계안씨 중에 어질고 높은 지위에 오른 분은 휘 축(軸)이시니 고려조에 관직이 오르시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내시고 시호(諡號)가 문정(文貞)이시며 사람들이 지금껏 근재선생(謹齋先生)이라 칭하고 있다. 근재가 휘 종원(宗源)을 낳으시니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이셨고 돌아가심에 시호가 문간(文簡)이다. 문간이 휘 경공(景恭)을 낳으신 우리태조를 도우시어 개국(開國)하여 공신의 호를 받으시고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으로 봉(封)해졌으며 시호는 양도(良度)이시다. 양도공이 휘 순(純)을 낳으시니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시호는 정숙(靖肅)이시니 근재로부터 세세(世世)로 유학(儒學)을 계승하고 명신이 되어 가문이 빛나니 사람들이 더 말을 하지 못한다. 정숙이 청원군(淸原君) 문간정공(文簡鄭公) 공권(公權)의 따님과 결혼하여 4형제를 두시니 공은 둘째로 휘는 숭선(崇善)이며 자(字)는 중지(仲止)요 옹재(雍齋)는 그 호(號)이다. 홍무(洪武) 25년 임신(壬申,1392) 9월 갑신(甲申)에 나시어 영락(永樂) 9년 신묘(辛卯,1411)에 사마시에 합격하시고 을미(乙未,1415)에 조상의 덕으로 직책을 맡아 계성전직(啓聖殿直)이 되시고 여러번 옮겨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다. 그때에 영남의 수령(守令)들이 불법으로 백성을 해치는 자가 많거늘 공으로 지방에 나아가 살피는 일을 맡기니 한번에 그 실정을 파악하니 1418년이었다. 2년을 지내고 경자(庚子,1420)에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가 과거를 주관하여 공을 장원으로 뽑으니 사헌지평(司憲持平)을 받았고 그 이듬해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옮기고 도 이조(吏曹)와 지제교(知製敎)로 옮기니 이로부터 다 홍문관(弘文館)과 규장각(奎章閣) 같은 곳의 벼슬을 겸하였다. 당시 낭관(낭관) 벼슬은 1개월 또는 2개월 만에 옮기고 길어도 반년에 불과했는데 공은 어질다 하여 육조(六曹)의 벼슬에 3년이나 재임(在任)토록 했고 갑진(甲辰,1424)에는 경기감영(京畿監營)으로 나아가서 보좌(輔佐)하는 벼슬에 있다가 홍희원년(洪熙元年,1425) 을사에 한성부 소윤(漢城府少尹)으로 부름을 받으니 공이 번잡하고 어려운 일을 잘 다스리고 이쪽저쪽으로 부산하에 대처하여 시비를 결정함이 물 흐르듯 하니 부중(府中)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선덕(宣德) 원년(元年1426년, 세종 8) 병오(丙午)에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종3품관)으로 전임되었으나 언사(言事)로 성균사예(成均司藝,정4품관)로 좌천되었다가 모든 일이 밝혀져 집의(執義.사헌부 종3품관)로 발탁되었다가 이번에는 파직(罷職)되었다. 己酉年(1429, 세종 11)에 국가가 중국(中國)에 금은(金銀)을 공납(貢納)하는 것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하기 위해 종친(宗親.왕의 가까운 친척)인 공녕군(恭寧君) 인(姻)을 중국에 보내기로 하였으나 나이가 어려서 이름 높은 학자를 선택하여 서장관(書狀官.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와 서장관(書狀官)이란 이름의 기록관(記錄官)을 보냈다)을 삼아 보내기로 하고 공을 대호군(大護軍.종3품관)으로 가게 하였던 바 청(請)이 받아들여져 돌아오니 왕께서 전토(田土)를 하사(下賜)하셨다. 경술(庚戌,1430)에 동부대언(동부대언)으로 발탁되고 신해(辛亥,1431)년 봄에 세종께서 강원도에서 임금이 친히 연병(練兵)하실 때 혹독한 추위로 사졸(士卒)이 동상에 걸린 자가 있거늘 정원(政院)에서 즉시 아뢰지 않아 임금께서 매우 노하시고 지신사(知申事:도승지)를 면직시키니 좌대언(左代言)이하 사람들이 각각 자기가 그 자리에 들어갈 것이라 스스로 말하였으나 임금은 공을 임명하셨다. 공은 성격이 강직하여 일을 처리함에 과감하였는데 때를 만나 날로 더함으로 동료들이 불평하였다. 임자(壬子,1432)년 과거에 공이 대독관(對讀官)이 되어 김길통(金吉通)등 33명을 뽑았고, 계축(癸丑,1433)에 국가가 장차 파저강(婆猪江)을 정벌하려 할때 조정의 여론이 분분하였다. 임금께서 공에게 의견을 물으시니 공께서 대담하되 “자고로 무신(武臣)은 정벌을 주장하고 유신(儒臣)은 화친(和親)을 지키나니 신의 생각하는 바로는 여진(女眞)의 이만주(李滿住)가 심히 극악무도하고 죄가 크니 역적을 치는 군대를 늦출 수가 없다고 생각하나이다.”라고 아뢰니 임금께서 모든 군대의 사정과 비밀한 정무(政務)를 일체 공에게 물어 시행하니 공은 조용히 계책을 시행하여 군사(軍師)로서 공이 있었다. 임금께서 공을 더욱 중하게 생각하시어 왕명을 받들어 행하는 승정원(承政院)의 중직(重職)에 임용(任用)했다. 모부인(母夫人)께서 병환이 나셔서 여러 번 사직을 요청했으나 허락지 않으셨다. 공이 처음부터 병을 돌보심에 옷고름과 띠를 풀지 않고 눈 부치지 아니하고 정성껏 수십일간 시종(侍從)터니 모부인께서 돌아가시자 슬픔으로 병을 얻으셨고, 임금께서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시의(侍醫)를 보내고 지은 약이 끊이지 않아 몸이 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정통(正統) 2년(1437) 정사(丁巳)에 대상(大祥)을 지낸 다음 달에 지내는 담제(禫祭)전임에도 급히 대사헌(大司憲)의 벼슬을 받게 되니 공이 예법에 의거하여 굳게 사양하였고 임금께서 옳게 생각하시어 사대부들이 담제 후에 벼슬을 내리는 법령을 만드시되 공에게는 그 요청을 허락지 않으셨다. 공이 할 수 없이 그 직에 나아가 부지런히 힘쓰더니 수개월 후에 병이 다시 일어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옮기고 병이 완쾌된 후 예조(禮曹)로 옮기고 가정대부(嘉靖大夫)가 되었다. 허문경공(許文敬公)이 예조가 삼례(三禮)를 장악하는 자리니 정밀하고 분명한 자를 택하여 오래 맡도록 하기를 청하니 임금께서 누가 적임자인가를 물으심에 문경공이 공을 추천하여 제수(除授)된 것이었다. 이즈음 경기감사가 비어 있어 공에게 명이 내려 나아가서 기내(畿內)와 서울 주변에서 청구하는 것이 많았지만 공이 다 들어 주지 않았다. 경신(庚申,1440)년 겨울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고 계해(癸亥,1443)에 형조판서를 받으니 감옥이 거의 비었었다. 갑자(甲子,1444)에 사신(使臣)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이 되고, 을축(乙丑,1445)에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지춘추관사(知春樞舘事)로서 고려사(高麗史)를 편수하였다. 정묘(丁卯,1447)에 서북(西北)지방이 흉년이 들어 굶주리게 되자 임금께서 근심하여 재상에게 명하여 감사(監司)를 급히 추천토록 하였는바 전날에 공을 시기하던 자가 공을 천거하고 또 이사람 아니면 불가하다 하였다. 공이 연이은 상사(喪事)로 어지러운 병이 심해져 바야흐로 벼슬을 사직코자 하던 때였는데 이 명령을 받으시고 병을 무릅쓰고 빨리 임지에 이르러 지방으로 몸소 다니면서 힘을 다하여 구호하니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곧 병으로 사직함을 두 번이나 청하니 무진(戊辰,1448)봄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불러 올려 서울에서 치료케 하였다. 처음 병조판서로 있었을 때 공적인 착오(錯誤)가 있었는데 공을 시기하는 자가 적발하여 옥사(獄事)를 일으켜 고성(固城)으로 유배(流配)되니 공이 문벌(門閥)있는 집안에서 성장하여 하루 아침에 궁벽한 바닷가로 귀양 갔으나 하나도 원망하거나 분해하는 빛이 없고 오직 시서(詩書)를 즐기며 지내더니 미구에 임금께서 그 딴 마음이 없었음을 살피시고 드디어 돌아오도록 하셨다. 경태(景泰) 원년(元年,1450)에 황제의 명령을 받고 오는 명나라 사신 윤봉(尹鳳)이 도착하니 문종(文宗)이 공을 기용하여 묵는 객사(客舍)에 가서 그들을 접대케 하였고, 바로 중추원사(中樞院事)를 시키고 얼마 안 있어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신미(辛未,1451)에 좌참찬(左參贊)으로 옮기고, 겨울에 병조판서를 겸하게 되니 재삼 극구 사양하고 임신(壬申,1452) 봄에 또 병이 생겨 퇴임하고자 청원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공은 병중에도 세수와 빗질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반드시 갓을 쓰고 띠를 매고 있었다. 4월 무인(戊寅)에 병이 심하여 안방에 자제를 모아놓고 “죽고 사는 것은 이치라 이제 내가 벼슬이 조정(朝廷)의 대신이며 나이 또한 60이라 어찌 한탄하겠느냐 죽은 후에 불사(佛事)를 하지 말라.”하시고 돌아가시니 향년(享年)이 61세였다. 원근(遠近)에서 부고(訃告)를 들은 사람들이 슬퍼하여 나라의 어진 재상을 잃었다고들 하였다. 별세 소식을 들은 임금께서 매우 슬퍼하시어 조회(朝會)를 2일 동안 중지하시고 부의를 내리시고 이름을 바꾸어 문숙(文肅)이라 하였다. 공의 용모와 자태가 영민하고 총명하시고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즐겨 비록 많은 책이라도 한번 보면 기억하고 시가(詩歌)를 잘 지어 유창하고 아름답다고 칭찬받았으며 부모에게 지극히 효도하고 벗을 사귐에 신의(信義)가 있고, 집에서 이익(利益)을 말하지 않고 재물을 문안에 들이지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선비를 좋아했으며 어진이를 예로써 대우하고 악을 미워하고 선(善)을 칭찬함이 천성에서 났으며 집에 거처하여 일을 처리함에 늠름하고 추상(秋霜)같이 엄했으며 사람과 더불어 담소(談笑)하실 대에는 화기(和氣)가 다사로왔다. 내가 근일에 태사(太史: 공께서 고려사를 편수함)의 뒤를 좇아 세종실록(世宗實錄)을 저술함에 공의 일하심을 보건대 6년간 임금께서 공이 아뢴 말을 들으시고 계책을 따르셨으며 임금을 보좌하여 선을 권하고 악을 못하게 한 큰 효과와 두터운 대우가 매우 컷음은 임금과 신하가 마음이 서로 통한 것을 말해 주는 것으로 가위 천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드믄 만남이라 할 수 있으니 미상불 공을 여러번 찬탄(讚嘆)하는 바이다. 공의 시험관 즉 좌주(座主)였던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이 별세할 무렵 1품 벼슬을 가진 관리가 두르던 띠인 서대(犀帶: 물소뿔로 장식함)를 공에게 주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본시 이것은 나 독곡수(獨谷叟)의 구물(舊物)인데 세상 사람들이 유가(儒家)의 전수물(傳授物: 불가에서의 의발衣鉢)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이 이 띠를 얻지 않음이 한(恨)이라고 하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늘이 또 꼭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즉 띠를 띠었다든가 안띠었다든가 하는 말은 만족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띠는 지금 우찬성(右贊成) 이사철(李思哲) 공에게 돌아갔다 한다. 공의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야로송씨(冶爐宋氏)이니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휘 천우(千祐)의 따님이다. 2남 2녀를 낳으셨으니 장남은 훈(訓)이니 봉훈랑(奉訓郞) 종묘서령(宗廟署令)이요, 차남은 의(誼)이니 승의교위(承議校尉) 중군부사직(中軍副司直) 겸 사헌감찰(司憲監察)이요, 장녀는 선절장군(宣節將軍) 의흥사호군(義興司護軍) 김숙(金潚)의 부인이요, 차녀는 봉열대부(奉列大夫)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 조석문(曺錫文)의 부인이니 갑인년(甲寅年) 과거에 차석으로 급제한 사람이다. 서령(訓)은 돈녕부판관(敦寧府判官) 이후(李厚)의 따님과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우연(友淵)이요, 다음은 우상(友商), 우석(友析)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감찰(誼)는 녹사(錄事) 윤효동(윤효동)의 따님과 결혼하여 4남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우삼(友參)이요, 다음은 우급(友伋), 우건(友騫), 우익(友益)이요 나머지는 어리다. 호군(金潚)은 4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복녕(福寧)이니 사직(司直) 이명통(李命通)의 따님과 결혼하였고 차남은 수령(壽寧)이니 계유(癸酉,1453)에 장원하여 곧바로 집현전(集賢殿) 부수찬(副修撰)을 받으니 나이 18세라 공에게서 배우고 양육된 사람이다. 다음은 덕녕(德寧), 명녕(命寧)이며 딸은 장녀가 유학(幼學) 유연경(柳演卿)의 부인이요, 나머지는 어리다. 공이 돌아가신지 3개월 정유(丁酉)에 경기 임진강 송림(宋林) 고현(古縣) 북쪽 주암동(朱岩洞) 산언덕에 장사하였다. [후에 파주 공릉 화소외 수리동면 기동에 개장하였다가 1989년 3월 13일 시흥 양도공묘계하로 면봉(緬奉)하였음]서령(署令)으로 있는 훈(訓) 형제가 갑술(甲戌,1454)년 음 2월에 비를 세우기 위하여 나에게 비문을 요청하니 아! 정묘년(丁卯,1447)년에 우리 아버지께서 서울로 가실 때 평양을 다스리던 공께서 객사에 양곡을 더 주시고 연회석(宴會席)에서 삼문(三問)에게 술을 붓도록 하시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우리 두 집안은 세세(世世)로 왕래하고 내가 너의 아버님과 교분(交分)이 오래임을 네가 아느냐? 네가 즐거이 우리 아들과 더불어 이 두 애비들과 같이 사귀겠는가?”하시매 삼문이 “본래 바라던 바입니다. 하물며 공의 명이 있으시니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하고 물러나와 기뻐서 잊지를 못하였다. 그 날이 얼마나 지냈기에 묘비명(墓碑銘)을 짓는 청이 내 귀에 들리는고 삼가 명(銘)하노니
아름다워라 굳은 뿌리 백리까지 뻗어 푸르게 우거져 청천(靑天)을 가리도다.
죽계의 명망있는 성(姓)은 안(安)씨요 근재(謹齋)는 세상 사람이 북두(北斗)와 태산(泰山)같이 우러렀도다.
학문 높은 아들 손자 대대로 어질고 부조(父祖)의 높은 벼슬 훌륭히 이어서 충효가 온존하도다.
곧고 강한 옹재(雍齋: 문숙공의 호)는 곧은 막대기 같고 송골매 가을에 태화산(泰華山) 나는듯 하네,
어진 신하가 어진 임금 만나기 천년에 드문데 한번 내침에 남해 바닷가 망루(望樓)에 있었네,
조정으로 돌아오니 신선같은 용모 공을 비방하던 자 뻔뻔스럽기 그지없도다.
덕을 주고 또 수(壽)하게 했으니 하늘이 아낀 바요 나라위해 흘린 눈물 사람 마음 움직이네 묘앞에 비세우고 글자를 새기리니 글을 지어 후세에 보게 하도다.
1454년 경술(庚戌,단종 2년) 중춘(仲春) 성삼문(成三問) 짓다.
조선 초기의 문신.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
1. 가계와 관직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 승(勝)이며,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에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1447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수찬(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올라갔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독 禮記大文諺讀》을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에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개(李塏) 등과 함께 이를 도왔으며,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곳에 유배중인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만나 음운(音韻)을 질문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와서 1446년 9월 29일에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에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으면서 그 추종자들과 함께 그에게 내린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이어서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禪位)를 강요할 때에 그가 국새(國璽)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세조가 그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2. 단종복위 운동
그는 아버지 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朴仲林)·박팽년·유응부(兪應孚)·허조(許慥)·권자신(權自愼)·이개·유성원(柳誠源) 등을 포섭해서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면서 거사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는 거사일 전날에 집현전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그의 아버지 승과 유응부·박쟁(朴崝) 등 무신들에게는 운검(雲劒)으로 세조의 뒤에 섰다가 세조와 윤사로(尹師路)·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를, 병조정랑 윤영손(尹鈴孫)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을 시켰다. 그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 무사들이 나누어 제거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김질(金礩)에게는 그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으로 하여금 상왕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의 시립이 폐지되자 그날의 거사는 일단 중지되고, 뒷날 세조가 친히 거둥하는 관가(觀稼)때로 미루어졌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를 하였으므로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3. 복위운동의 실패
그는 세조를 가리켜 ‘진사(進賜: 종친에 대한 호칭)’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도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쇠를 달구어 그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냈으나 그는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고 있던 강희안(姜希顔)을 변호해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그달 8일에 아버지 승과 이개·하위지(河緯地)·박중림·김문기(金文起)·유응부·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다. 그때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맹년(孟年)·맹종(孟終) 및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음을 당하여 혈손이 끊겼다. 그가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가 깔려 있을 뿐이었다.
4. 인품과 학문
그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또한, 그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은 민족문화의 차원에서도 그의 높은 절의에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뒷날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에 대의를 위하여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그의 높은 절의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그의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에도 있다. 장릉(莊陵: 端宗의 능)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으며,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서울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공주 동학사(東鶴寺)의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는 《매죽헌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