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겨울, 내가 창비에서 첫시집을 묶을 때 발문을 이성복 선생님께 부탁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우파가 좌파의 시집에 발문을 쓴다는 것이 어째 이상하다. 두번 째 시집 낼 때 그때 내가 발문을 써 주마”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 첫 시집은 동화작가 권정생이 두번째 시집은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발문을 썼다.
이성복 선생이 제2회 김수영문학상을 받을 때 끝까지 반대한 사람이 염무웅인데 나는 염무웅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80년대 말에 대구에 있는 한 방송국의 문학관련 프로에 손님으로 초대되어 나간 적이 있다. 진행자가 갑자기 시인 가운데 누구를 가장 좋아하나 하고 물었다. 나는 즉시 이성복 시인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진행자가 당신은 민중문학을 하고 이성복은 그렇지 않은 걸로 아는 데 어떻게 이성복을 가장 좋아할 수 있느냐고 다그치듯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나는 “이성복의 작품에는 내가 동의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인간적 면모, 또 예술을 대하는 장인적인 기질 같은 그런 태도를 존경한다”고 대답했다. 그때 처음으로 이성복이라는 인간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는 따뜻하고 겸손하며 섬세한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직한 시인이다.
앞서 언급한 짧은 예화는 그와 관련하여 내가 서 있는 문학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마 그를 지지하는 많은 지지자들 가운데 나는 문학적 성향으로보아 가장 이질적 대척점인지도 모른다.
1982년 여름, 내가 대학 4학년 때 처음 선생님을 뵌 이래 지금까지 16~7년을 선생님 곁에서 가르침을 받아오면서, 나도 언젠가 번듯한 이성복론을 한 편 써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최근까지 평론가들이 이성복 문학에 대해 쓴 평론이 50편이 넘는다. 굉장한 숫자다.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소위 민족문학진영 평론가들의 글이 없다. 정과리가 “그의 시를 사회학적으로 번역해 낼라치면 그 특이한 미학을 놓쳐버렸고, 그의 시를 이미지들의 변주로 도식화 해 놓고 나면, 그 이미지들이 꿈틀대며 발산하는 뜨거운 현실성을 놓쳐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는 안타가움을 토로한 바도 있지만 그럼에도 내 생각으로는 특히 그의 첫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현실주의적 시각으로 봐야 그 풍부한 시적 의미가 완전히 해명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씌어진 많은 이성복론과는 다른 글을 써보려고 내심 벼르고 있다.) 그러나 문학을 보는 눈도 짧고 공부도 부족하여 한 해 두 해 미루는 사이 벌써 십 수년이 지나고 말았다.
월간 <현대시>로부터 커버스토리를 부탁받고 사실 내키지 않았다. 본격적인 작품론이나 작가론도 아니고 근황 탐방이나 가십 꺼리 정도의 글을 쓰기가 어쩐지 맘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원고 마감 기한도 촉박했다. 난색을 표하자 청탁자가 이성복 선생이 나를 지명했다고 했다.(나중에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성복 선생은 대담으로 알고 가까이 있는 편한 내가 하길 바랐다고 했다)
내가 대학 4학년이던 1982년 봄에 그는 계명대 교수로 부임해 왔다. 나는 4학년 2학기 수업 가운데 한 강좌로 선생님의 보들레르 강의를 직접 들은 바 있다. 이런 관계말고도 나는 그의 이런 저런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아 지금껏 그를 문학뿐만아니라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누구못지 않게 가까이 지내고 이런 저런 속내까지 털어 놓는 사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를 매우 어려워 한다. 그리고 앞서 몇 줄의 구절로 언급한 바도 있지만 소위 문학적 경향도 반드시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여러가지 요인들이 나로하여금 이 글 쓰기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막막하여 그간 이성복 선생이 낸 시집과 산문집 그리고 그에 대해 평론가들이 쓴 평문들을 대부분 다시 읽어 보았다. 그 중에서 특히 이성복의 문학앨범이라는 책을 흥미있게 읽었다. 이 책은 이성복 문학의 기초 자료로 충분할 만큼 세세한 그의 문학적 계기와 신변사가 기록되어 있다. 문학앨범은 화보, 문인들의 교우관계를 비롯한 사생활, 그와 관련된 평문, 저자의 문학론 등이 적절한 배열로 구성된, 흔히 문학 초심자들의 흥미나 가십 거리로 읽기 좋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상업적인 출판형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출판도 철저히 자본의 돈벌이 생리를 따른다. 따라서 당연히 일가를 이루어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원로문인이나 잘나가는 젊은 문인이 출판 대상이다. 우리나라의 수천 명 문인 가운데 이성복 시인이 고은 신경림 등의 원로를 포함 열손가락 안으로 제한된 그 문학앨범의 출판 대상이 된 것은 어떤 의미로든 문단에서 그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겠구나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책의 첫장을 펼쳤다.
“졸업을 축하한다. 용락에게“라는 볼펜 싸인과 함께 95년 2월 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 아마 내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할 때 그가 준 책인 모양이다. 내가 받은 그의 첫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하는 시집에는 “죽음으로써 기억한다”는 짧은 글귀와 함께 나에게 준다는 연필글씨가 쓰여 있다. 나는 이 시집을 지금도 무슨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당시 문학청년이던 내가 위와 같은 아주 멋있는 글귀와 함께 한창 뜨고 있는 시인에게 직접 시집을 증정받는 기쁨은 문학청년의 길을 걸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가 충분히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지금부터 나는 그간 내가 겪은 이성복 관련 몇 개의 삽화를 그리려고 한다. 이 삽화를 통해 독자들은 시인 이성복의 인간적 면모와 그의 문학적 향기를 읽어내길 바란다.
내가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았을 때 이성복은 자신의 문학앨범 외에 또 준 것이 있다. “술 마시지 말고 구두 사 신어라”라는 말과 함께 돈 10만원을 흰 봉투에 넣어 주었다. 나는 그 돈으로 신을 사지 않고 술 마셨다. 새삼스레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그동안 선생님으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받았다. 시에 관련된 가르침에서부터 우리 애들 책뿐아니라 하다못해 그가 프랑스 유학 마치고 귀국하면서 우리 마누라에게 선물한 화장품까지 목록으로 작성하자면 꽤 길 것 같다.
80년대는 ‘시의 시대’로 불릴 만큼 시가 많이 쓰여지고 수용되었다. 그리고 좋은 시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당시 문학관련 저널은 시의 시대 운운하면서 기사의 앞머리에는 항상 이성복이라는 이름을 올려 놓았다. 속된 말로 한창 뜰 때였다. 문학청년이던 나는 어느날 그에게 “선생님은 천잽니까. 어떻게 시를 그렇게 잘 씁니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나는 천재도 아니고 문학에서 천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애정이 문제이다. 내가 문학에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있느냐하는 것이 시인으로서 성공의 가늠길이 아닐까” 하는 말씀을 하셨다. 노력을 말씀하신 것인데 나는 이 말에 공감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문학 강의 첫시간에 이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부터 문학수업을 시작하고 있다.
80년대 이후 한 때 우리 시단에는 이성복 신드롬 같은 게 있었다. 시를 공부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이성복 시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그의 시와 비슷한 발상법의 모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많은 평론가들이 앞다투어 이성복 시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문단에 등단한 이래 짧은 시간에 그토록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문인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복은 문학적으로 성공한 셈인데 그 성공 뒤에는 앞서 말한 바 문학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을 것이다.
누구 말처럼 80년대는 불의 연대였다. 뜨거웠고 변혁의 열기가 충일하던 연대였다. 이성복은 문학적으로 볼 때 자유주의자이다. 그는 정치적 실천보다 내면 탐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당시는 대학교수들이 시국사건에 대해 서명의 형태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시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서슬퍼런 군사독재 아래서 서명 결과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누구보다 먼저 서명자 명단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지식인의 소명을 다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당시 민주화운동가로 명망 있던 교수들도 처음에는 서명을 피했다가 일차적으로 서명한 교수들이 별 탈 없자 그 다음부터 서명에 동참하는 실망스런 기회주의적 모습을 드러낸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이들과 비교해보면 그는 애초 민주화운동한다고 유별나게 나서지 않았지만 자기 앞에 오는 책무는 회피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없이 그런 상황을 지켜보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그가 정직한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의 문학에 대해서도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신뢰를 보냈다.(물론 오해는 없길 바란다. 나는 서명한 자들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악이라는 단순 논리를 펴는 것이 아니다. 자기 진정성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초에 나는 지방 일간지 기자로 일하다가 노조문제로 구속된 후 풀려나 수배자로 잠시 숨어 지낸 적이 있다. 이후 내 신변문제는 해결되어 신문사에서 해고된 후 집에서 두어살 바기 애를 보면서 세월을 보냈다. 하루는 내가 사는 낡은 아파트로 그가 사모님과 함께 여름 과일을 굉장히 많이 사가지고 찾아 왔다. 당시 작고한 김현 선생의 장례에 참석하고 대구 내려온 지 며칠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당시 내 딱한 처지에 대해 여러가지 위로의 말을 남기고 갔다. 나는 그가 스승의 죽음을 겪으면서 새삼 사제지간의 정이나 인간의 정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가졌다.
평소 나는 그가 지나치게 행복해서 문제라는 생각을 자주한다. 이 이야기는 본인에게도 한 바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세속적인 의미에서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부분의 것을 이룬 사람이다. 한국과 같은 학벌 사회에서 소위 케이에스라는 경기고 서울대를 졸업했고 대학 교수 신분에다. 시인으로서도 젊은 나이에 한국에서 가장 각광 받는 시인이 되었다. 거기다가 부인도 역시 경기여고 서울대 출신의 교수이며 자녀도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두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더 부러울 것이 없는 다복한 가정이다. 나는 이런 그의 주변이 예술가로서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생각해 봤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고통이 있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기로는 실패를 겪어보지 않은 것 같은 인생이, 실패나 들러리 인생의 처절한 비애를 한번이라도 겪어보지 않은 삶이 질곡과 그 가파른 질곡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생의 진정한 슬픔이나 비의를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까? 나는 이성복 선생에 대해서는 이것이 항상 의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그의 문학에 쏟아진 일방의 그 많은 갈채와 찬사가 그의 문학을 더욱 성숙되고 풍요롭게 하는 데 역 방향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문학도 인간의 정치적 행위 가운데 하나이다. 정치란 권력 획득이 중요한 목표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며 당연히 힘의 논리가 적용된다. 80~90년대 그의 문학을 들러싼 찬사 일변도의 담론이 혹시 당시 우리 문학의 주류이던 문학과 지성 그룹의 후광에 대한 평론가들의 자진 굴복이나 경기 서울대 출신이라는 그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무언의 동조는 아니었을까?(그가 문학과 지성 출신이 아니라면, 그리고 서울대 불문과 출신이 아니었다면 그에 대한 평가가 과연 지금과 같을 수 있을까하는 지극히 천박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근래 수 년간 이성복 선생은 시를 쓰지 않았다. 대신 테니스에 푹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다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여름에 계명대 철학과의 목요철학 세미나라는 공개강좌에서 나는 세계화 시대의 민족문학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는 자기 제자가 발표한다고해서 대견(?)한 생각이 들었는지 굳이 방청했다. 나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신통찮은 실력에 준비마저 부족한 터에 그가 청중석에 앉아 있으니 강연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다. 횡설수설 규정 시간을 겨우 떼우고 관련 교수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주차장 입새에 앉아 오랫만에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그는 구제금융체제의 현실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이제 나라 꼴은 어떻게 되며 우리 자식들은 어떻게 사나. 해고 노동자문제는 어떻게 하나. 앞으로 더욱 검소하게 살아야겠다. 절약하기 위해 승용차도 두고 시내버스 타고 다닌다는 등(이후 그는 아예 승용차를 팔고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버스 통근을 하고 있다) 엉망이 된 나라현실에 대해 깊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면 나는 속으로 교수가 괜히 엄살떠나 하는 시선으로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없는 소리 못하고 과장하지 못하는, 순결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의 예민함을 아는지라 나도 함께 무척 우울했다.
아울러 그는 계약제로 가는 대학의 임용체제와 모든 것을 논문 중심의 점수제로 환원해서 승급이나 급여를 결정하는 식의 신자유주의식 경영으로 가는 대학 체제에 대해 깊은 우려와 절망감을 드러냈다. 가령 몇 년이 걸리는 예술적 성취를 이룬 시집 한 권이 불과 며칠 밖에 걸리지 않는 엉터리 같은 논문 한 편의 삼분의 일 정도의 점수도 받지 못하는 이와 같은 제도 아래서 예술가가 느끼는 비애나 절망감은 이해할 만 한 것이다. 그는 여차하면 대학교수직을 그만두고 서울가서 문학잡지 편집일이나 하면서 문학이나 더 열심히 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아이엠에프 때문에 모든 것이 글렀다며 애석해 했다.
최근에 그는 계명대 문예창작과 학과장을 맡았다. 불문과 교수와 겸직이다. 며칠 전에 전화를 해왔다. 주 용건은 강의 시간표 문제였는데 그것보다는 다소 흥분한 어투로 대뜸 동료 교수 아무개는 논문 한 편 쓰고 학술진흥원으로부터 1천50만원의 지원금을 받고 또 누구는 120여쪽 짜리 번역 하나하고 950만원을 받았는데, 지금과 같은 아이엠에프 시대에 이렇게 돈을 함부로 써도 되느냐, 천만 원이면 웬만한 사무직원이나 노동자의 1년 연봉에 해당 되는 돈인데 나라돈을 이렇게 아무렇게나 써도 되느냐. 나는 평소 집 애들에게 검소하게 살아라고 하면서 용돈도 제대로 주지 않고 절약해서 살면서 저축한 돈으로 의미있는 일도 하곤했는데 이럴 바에야 아예 차도 몰고다니고 학술논문 많이 신청해서 돈 벌고 이름도 날리고 차라리 그렇게 사는게 낫겠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그의 어투로 봐서 뭔가 꽤 흥분할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이건 전혀 평소의 선생님 모습이 아니다. 저간의 사정은 잘 모르겠거니와 사실 선생님은 누가 돈주면서 그렇게 살아라해도 못 살 분이다. 사리분명하고 예의바르고, 나는 그를 보면 항상 조선시대 예절에 밝은 전형적인 선비의 몸가짐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갖는다.
이성복 시인이 주역과 원불교를 깊이있게 공부하고 특히 주역을 원용해서 박사논문도 썼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요즘 그는 가톨릭에 몰입해 있다. 두 해 전 사모님의 인도로 영세를 받은 후 열심자가 되었는데 본인의 말로는 6명을 가톨릭에 입문시켰다고 했다. 언젠가 그는 40대 후반인 자신의 나이를 기차 여행에 비유하면서 서울-부산행 새마을호를 타고 동대구역쯤 와 있는 것이 현재 자신의 나이이며 이제는 정리해서 내릴 일만 남았노라고 쓸쓸해 한 적이 있다. 그 쓸쓸한 이야기 끝에 그는 나에게도 가톨릭에 귀의할 것을 권했다.
내가 주임 강사로 있는 대구 예술마당 솔이라는 문화공간의 시창작교실에서 매 분기마다 한두 명의 특강 강사를 모시는데 회원들이 이성복 시인을 원해서 그를 특강 강사로 두어 번 모신 적이 있다. 그때마다 그는 가톨릭 성인들을 비유의 대상으로 삼아 그분들의 행적을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등 수준 높은 강의로 회원들을 사로잡곤 했다. 여기에 그 강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한 회원이 선생님은 글쓰시다가 글이 안될 때 어떻게 풀어가느냐고 묻자 그는 요즘도 글을 쓰다가 글이 안 되면 죽고 싶을 때가 많다고 대답했다. 사실 나는 이 대답에 충격 받았다. 이미 일가를 이룬 시인이 뭐 그까짓 시가 좀 안 써진다고 죽고 싶기까지 할까? 하는 것이 안일한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가 문학에 대해 적어도 이 정도와 같은 초심자의 열의나 경건성이 있기에 우리에게 좋은 시인으로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문학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새삼 많은 것을 느꼈다. 이래저래 그는 나에게 평생교육의 장이다. 그 곁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무한한 행운으로 여긴다.
몇 년간 절필했던 그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적어도 앞으로 몇 년간은 다시 그의 작품을 따라 읽는 재미로 세상살이의 무료함이나 답답함이 좀 줄어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