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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_인문학 산책
운명에 대하여
관상, 사주팔자, 운명 따위의 말에 약한 한국인
21세기,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자기만의 고치 속에서 살아가는 IT 강국 국민이 어째서 ‘관상’이라는 비과학적 체계에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매몰되는 것일까. <관상>의 흥행 요인을 영화적으로 분석하는 사람이 많다. 화려한 캐스팅과 연기력, 선명한 갈등 구조, 시대적 불안 요인 등등. 모두 일리 있는 분석이지만 이 영화가 흥행할 수밖에 없는 한국적 특수 상황으로 나는 영화의 제목을 꼽았다. ‘관상’이라는 제목이 영화가 만들어 지기 전부터 보증 수표 노릇을 했다고 본 것이다. 한국적 특수 상황을 간파한 영화 기획자가 노린 것도 아마 이 지점이었을 것이다. 관상, 사주팔자, 운명 따위의 말이 한국인의 의식 체계에 미치는 지배적 경향성을 부정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김종서 장군과 수양대군의 강력한 대결 구도와 단종애사(端宗哀史)가 중요한 몫을 차지하지만, 그 정도의 시나리오적 성과는 이미 다른 영화에서 숱하게 다뤘으므로 그것을 흥행의 주요인으로 꼽기는 힘들다. 결국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연기력 뒤에 도사린 결정적 흥행의 키는 한국인의 심성을 무의식적으로 주눅 들게 하는 ‘관상’이라는 무형의 지배 체계다.
관상학의 계보 또는 전설 따라 삼천리
관상과 연관된 이야기는 중국 3황 5제 중 최고의 제왕으로 꼽히는 복희씨(伏羲氏)에서부터 시작된다. 복희씨가 팔괘(八卦)라는 우주, 기본수의 원리를 창안한 이후 우(禹)나라, 하(河)나라, 은(銀)나라를 거쳐 주(周)나라 문왕(文王)에 이르러 비로소 ‘주역(周易)’이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학술적인 체계는 허술했다. 그 후 동주 시대의 숙복(叔服), 주(周)나라의 고포자경(姑布子卿), 초(楚)나라의 당거(唐擧)가 대를 이어 관상가의 3대 명가(名家)를 형성했다.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에 남인도에서 달마(達磨)가 중국으로 들어와 선종(禪宗)을 일으키는 동시에 <달마상법(達磨相法)>을 후세에 전하고, 송(宋)나라 초기에는 마의도사(麻衣道士)가 <마의상법(麻衣相法)>을 남겨 관상학의 체계가 비로소 확립되었다.
그 후 고려에 이르러 학자 문익점이 상서(相書-관상서)를 도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 말엽에는 도선국사와 무학대사가 유명했고, 이성계의 얼굴을 보고 가까운 장래에 창국(創國)할 것을 예언한 관상가 혜증(惠證)이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대동기문(大東奇聞)>을 보면 관상가들이 고관대작이나 사대붓집에 자주 출입
바꿀 수 있는 것, 바꿀 수 없는 것
관상을 보는 일은 종교적인 행위와 무관하다. 그래서 종교인은 그것을 미신이나 비과학적인 행위로 치부한다. 하지만 관상 보는 일에 종사하거나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정보학이나 통계학 등으로 재해석해 21세기적 토양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를 위해 서양의 점성술과 타로카드, 골상학까지 들여와 그 타당성을 역설한다. 하지만 서양의 점성술과 타로카드와 관련된 정보가 경차 한 대 분량이라면 사주 관상과 관련된 정보는 KTX 열차로도 모자랄 만큼 방대하다. 그만큼 정설과 정석, 정통한 것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좋은 점괘가 나올 때까지 여러 점집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생긴다. 나쁜 점괘가 나올 때 느끼는 좌절감이나 열패감을 부정확한 비과학성으로 보상받고자 하는 것도 개그에 가까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점괘가 좋게 나올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터무니없는 환희와 기쁨에 도취해 가만히 있어도 절로 모든 것이 이뤄져 천금을 희롱하는 망상을 갖게 하니 현실에 크게 도움 될 건 없다. 그 야말로 기분풀이나 심심풀이 땅콩 정도라면 모를까.
인간이 관상과 사주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그것이 필연적으로 운명이라는 영역과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흔히 ‘팔자타령을 한다’고 할 때 우리는 불운한 운명에 사로잡힌 인간을 떠올린다. 운명이란 인간이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비껴갈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어 모든 걸 체념하고 노력과 열정을 상실하게 한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에 관상 보는 법과 사주 보는 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확대 재생산해온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시기도 아니고 21세기와 같은 초첨단 과학 문명의 시대에 관상과 사주가 성행하고 얼굴까지 뜯어고쳐 팔자를 바꾸고 싶어 하는 성형 열풍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정해진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 정해진 대로 살다 죽는다고 믿는 것이 운명론적 고정 관념이다. 그래서 자기 운명을 알고 싶어 하고, 그것이 나쁘다는 말을 듣게 되면 견디기 힘들어한다. 영화 <관상>에서 한명회가 목을 베일까 노이로제 증상을 보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운명이 실제로 존재하는 인생의 프로그램이라면 인간이 그것을 마음대로 뜯어고칠 수 있을 것인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관상 성형을 해서라도 팔자를 고칠 수 있다면 운명은 더 이상 운명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할 것이다. 돈만 있으면 바꿀 수 있는 것에 어떻게 ‘운명’이라는 거창한 명칭을 부여할 수 있겠는가. 영화 <관상>의 멘토 역할을 한 진짜 관상가에게 기자가 물었다.
“관상을 봐가며 성형을 하면 운명이 바뀌나?” 멘토가 명쾌하게 답변했다.
허영만의 관상 만화 <꼴>을 감수한 관상가도 잘라 말했다. “성형수술은 물건의 포장을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물건 자체를 바꾸는 것은 아니다”라고. 요컨대 관상은 타고난 DNA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 <관상>의 멘토는 어째서 관상을 바꿀 수 없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운명의 프로그램, 내가 만든 인생 과제
관상과 사주의 키워드는 ‘길흉화복’이다. 인간은 그것을 미리 알고 예방하고 싶어 하지만, 영화<관상>에서처럼 알려줘도 비껴가기 어려운 게 운명이다.
관상가 내경에게서 목이 잘릴 팔자라는 말을 들은 한명회가 죽는 날까지 불안에 시달리다 자연사하지만 나중에 부관참시를 당함으로써 운명을 완성한다.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이건만 파도만 보고 바람은 보지 못했다”는 내경의 마지막 술회가 인상적인 건 그것이 곧 운명의 양면성에 관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파도는 운명의 프로그램이지만 그것을 조성하는 바람은 프로그램 소스에 해당하니 인간이 범접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사주와 관상, 운명과 팔자는 모두 하드웨어적 고정 관념이다. 하드웨어는 바꿀 수 없지만 소프트웨어의 활용에 따라 똑같은 하드웨어도 다른 가치를 얻게 된다. 그 것에 눈뜬 현대인이 몸에 대한 투자보다 마음에 투자하는 시간을 늘리는 건 당연하고 현명한 일이다. 자신의 미래를 알고 좋게 뜯어고치려는 노력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프로그램을 이해하고, 그것을 적극 수용하는 자세로부터 인생의 진정한 변화는 시작되기 때문이다.
폼 나게 세단을 타고 가다 논두렁에 처박히는 인생보다 경차를 타고도 얼마든지 고속도로를 질주할 수 있음을 발견함으로써 자기 인생의 가치와 의미, 보람과 기쁨을 얼마든지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상이나 사주가 운명을 좌우하는 것도 아니고, 운명이 관상이나 사주를 좌우하는 것도 아니다. 길흉화복의 운명적 프로그램은 인간에게 주어진 학습 과제일 뿐이다. 길흉화복을 통해 배우고 터득하며 영적인 진화를 거듭하는 것이니 그것을 멀리하고서는 좋은 인생을 구현하기 어렵다. 나아가 그 운명의 프로그램을 자신이 직접 구성한 것이라면 부실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강하기 위한 자발 학습 과제일 테니 더더욱 좋고 나쁨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내 운명, 내게 최적화된 개인 학습 프로그램인데, 그걸 왜 밖으로 나돌며 문제의 답을 찾으려 하는가!
팔자에는 주/객이 없다. 누가 나에게 부과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지만 그것 역시 어떤 노력과 훈련의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유래를 잊어버렸다. 그래서 ‘팔자타령’을 하며 하늘과 부모 혹은 사회를 원망한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의 탓이라면 마땅히 그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기는커녕 더더욱 팔자를 꼬는데 몰두한다면 그건 대체 누구의 탓인가?
자업자득, 자작자수!
글 박상우 일러스트 홍소희
글쓴이 박상우는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88년 <문예중앙>신인문학상에 중편 <스러지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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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