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마사다 유적지
마사다는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 현장이다. 2000년이 지난 후 발견된 요새다. 하지만 지금은 이스라엘 최고의 성지이자 세계의 관광지가 되었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인데 꼭대기는 평평한 지형 위에 자리 잡아 천혜의 요새다. 1900년 마사다를 발견하여 성지로 보존하고 있다.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스라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AD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하여 점령당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장군은 960명을 데리고 이곳 마사다로 들어와 끝까지 항전하였다. 이 마사다 저항군은 로마군에게 대항하는 열심당원이다. 로마 장군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마사다 점령을 시도하였지만 특수한 지형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 유대인 960명이 처참하게도 자결했던 유적지다.
마사다는 기원전 37년 유대의 헤롯 대왕이 지은 요새화된 궁전이다. 헤롯 대왕이 산꼭대기에 자신의 궁전을 짓기 시작했을 때, 이곳에는 이미 기원전 100년에 지어진 건물이 있었다. 마사다는 호화로운 저택으로, 로마 양식의 목욕탕, 창고, 주택, 방어탑이 있는 성벽이 있었다. 헤롯의 가장 뛰어난 건축 계획은 요새에서 필요한 물을 댈 수 있도록 지은 물 공급 체계였다. 열두 개의 저수지가 바위 속에 파여 있다. 500mℓ 물병 1800만 개 분량을 보관할 수 있었다는 물 저장고다. 마사다 유적지에는 주로 헤롯 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각종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로마 초기 양식으로 호화롭게 지어진 왕궁은 물론 행정청사, 목욕탕, 곡물창고, 성곽과 망루 등이 놀라울 정도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전쟁 시 자급자족하면서 적과 싸울 수 있는 모든 시스템을 완벽하게 구축해 놓은 것이다. 궁전 가까운 곳에는 화려한 모자이크 바닥과 벽화로 장식된 벽들이 있는 거대한 로마 스타일의 욕실이 있으며, 이외에도 유대교 세례욕실, 저장실, 전망탑, 그리고 마사다 역사와 관련된 예배당 같은 많은 건축물과 저장실, 채색된 도자기, 동전들과 같은 공예품들이 있다.
그러나 헤롯왕은 단 한 번도 이곳에 오지 않았고 사용한 적도 없었다. 헤롯이 죽은 이후 로마 주둔군이 마사다를 차지했으나, 로마 통치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온 유태인 열심당원인 시카리의 피난처가 되었다. 로마군은 요새의 능선의 경사로를 흙과 돌, 나무로 쌓아올려 요새와 같은 높이로 했다. AD 73년, 마사다의 꼭대기에서 로마군 8000명에 포위당하자 7년 항쟁 최후의 생존자들 960명은 포로가 되어 또다시 노예로 살 순 없다며 집단 자결을 결심한다. 동이 트기 전에 차례로 죽음을 맞이하기로 했다. 아내와 자식들을 우리 손으로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자고 결의했다.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차례로 가족들을 제 손으로 죽였다. 그리고 다시 모여 청장년 10명씩 조를 짜는 제비뽑기를 했다. 한 사람이 9명을 죽였다. 이런 방식으로 밤새 죽음의 의식을 반복했다. 최후의 한 사람은 전원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는 성에다 불을 지른 후 자결했다. 유대 율법은 자살을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추첨으로 10명을 뽑았던 것이다. 동포가 자살하지 않아도 되도록 살인을 맡아줄 이들이다. 피바다 속에 남은 마지막 한 명만이 자살을 택했다. 그때 추첨 도구로 쓴 토기 조각 10개를 전시하고 있다. 다음 날 아침 경사로를 통해 쳐들어 온 로마군은 저항 없는 이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식량은 3년치나 남았고, 물에는 독도 타지 않았다. 로마군은 타다 남은 재속에 놓여 있는 960여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5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하도에 숨어 있던 2명의 여인, 그러니까 7명뿐이었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살아남은 노파와 두 여자아이의 입으로 후세에 전해졌다. 실제로 독일의 고고학자가 마사다를 발굴했을 요새 내부에는 그때까지도 목이 잘린 시체와 여자의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었다.
헤롯왕의 궁전은 대단했다. 아직도 그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궁전을 둘러보고 나서 물 저장고를 보았다. 마사다에는 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는데 이들이 수년 동안 살았던 물 탱크가 절벽 아래로 보인다. 유대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사다는 2세기에 유대인들이 잠시 탈환한 일이 있고 5~6세기에는 비잔틴 교회당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그 뒤 십자군들이 잠시 차지한 시기를 제외하면 20세기까지 방치되어 아랍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앗사바, 즉 저주받은 곳이라고 했다. 1955~56년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이 유적지 전체를 조사했고, 1963~65년에는 이가엘 야딘이 세계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에 힘입어 정상 전지역에 대한 발굴작업을 벌였다. 많은 관심을 끈 발굴물들 가운데 하나는 히브리 사람 이름이 새겨진 질그릇 조각들로, 마지막 남은 수비대원들이 먼저 죽을 사람을 정하기 위해서 마련한 제비뽑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조각 10개의 사진을 전시해 둔 것을 보니 소름이 돋았다. 마사다 유적지 끝자락에서 콜룸바리움 타워라는 비둘기장을 보았다. 비둘기를 길러 잡아먹던 흔적이다. 비둘기는 아닌 것 같은데 까만 새들 몇 마리가 앉기도 하고 배회한다. 바람이 심히도 분다.
마사다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선서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군인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필수 방문 코스로 선조들의 용기와 신념을 담아가는 곳이다. 2천 년 전 전투의 함성, 절망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서로를 격려하며 버틴 곳이다, 인내와 힘, 신앙과 굴복 그리고 야망과 비극적 종말의 순간을 생생히 보는 현장이다. 이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한 뒤로 1000년 동안 이어진 이스라엘 왕국이 사라지고, 이후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세계를 떠돌게 되는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을 비감하게 장식한 사건이다. 마사다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최후의 항전지로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성소다.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이자 긍지요, 저항정신의 상징이다. 영화 ‘마사다’로 세계에 알려졌다. 오늘날에는 이스라엘에서 손꼽히는 관광지가 되어 이스라엘 국내 항공사가 마사다에서 가까운 사해평원의 작은 공항까지 정기운항을 한다. 우리는 이스라엘 남부 에일랏 항구에 크루즈배로 와서 버스로 올라와 관람했다. 마사다는 많은 교훈을 주는 유적지다. 애국심과 자존심과 결단력을 보여주는 결코 잊지 못할 유적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