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탈(坐脫)
때가 되자
그는 가만히 곡기를 끊었다.
물만 조금씩 마시며 속을 비웠다.
깊은 묵상에 들었다.
불필요한 살들이 내리자
눈빛과 피부가 투명해졌다.
하루 한번 인적 드문 시간을 골라
천천히 집 주변을 걸었다.
가끔 한자리에 오래 서 있기도 했다.
먼 데를 보는 듯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저녁별 기우는 초겨울 날을 골라
고요히 몸을 벗었다 신음 한번 없이
갔다.
벗어둔 몸이 이미 정갈했으므로
아무것도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개의 몸으로 그는 세상을 다녀갔다.
한국사
얼빠진 집구석에 태어나
허벅지 살만 불리다가 속절없이 저무는구나.
내 새끼들도 십중팔구
행랑채나 지키다가 장작이나 패주다가 풍악이나 잡아주다가 행하 몇푼에 해해거리다 취생몽사하리라.
괴로워 때로 주리가 틀리겠지만
길은 없으리라.
친구들 생각하면 눈물 난다.
빛나던 눈빛과 팔다리들
소주병 곁에서 용접기 옆에서 증권사 전광판 앞에서 엎어지고 자빠져
눈도 감지 못한 채 우리는 모두 불쏘시개.
오냐 그 누구여
너는 누구냐.
보이지 않는 어디서 무심히도 풀무질을 해대는 거냐.
똑바로 좀 보자.
네 면상을 똑바로 보면서 울어도 울고 싶다.
죽어도 그렇게 죽고 싶다.
첫차
차라리 귀가 없었으면 싶었다.
동틀 녘 바람 맵고
턱이 굳어 말도 안 나오던
두산 삼거리
언 발로 얼음을 구르며 차를 기다렸다.
광목 수건을 꽁꽁 동이며
젖이 분 새댁은 주막집 부엌에 들어가
울며 아픈 젖을 짜내고
흐른 젖에서는 김이 오르고
김치 그릇 미끄러지는 밥상을 든
어린 식모는 손등이 터졌다.
내다보는 눈이 아릴 때까지
보은 가는 첫차가 오지 않았다.
볼
볼펜이 자빠져 있네.
다 쓴 자지 같네.
쩔은 과메기 토막 같네.
나는 왜 저 볼펜이 시무룩하다고 생각할까.
볼펜은 그 여자의 하이힐 소리와 냄새와 작은 손등과 푸른 실핏줄을 기억할까.
펄쩍 뛰어라도 봐 볼펜!
논두렁의 개구리처럼 괜히 한번
털렁거려봐 볼펜!
시골길 쇠불알처럼 천연덕스럽게.
이대로 좀
금 간 브로크의 키 낮은 담
삐뚤빼뚤한 보도블록 곁으로
고양이 한마리 어슬렁거리고
귀가하던 늙은 내외가 구멍가게 바랜 파라솔 아래 앉아
삶은 달걀과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이는 곳.
우편함 위에는 포장이사 열쇠수리 딱지들 옹기종기 붙어 있고
반쯤 열린 철대문 안쪽으로
문간방 새댁네의 부엌세간들이 비치기도 하는 곳 얌전한 곳.
직장 없는 안집 둘째가 한번씩 청바지에 손을 꽂고 골목 이쪽저쪽 훑어보다가 침을 칙 뱉고 다시 들어가는 곳.
대문 돌쩌귀엔 솔이끼도 몇 돋아 있는 곳.
스티로폼 상자에 파와 고추 두그루씩과 상추 몇포기가 같이 사는 곳.
떨어진 자전거 바퀴 하나가 몇년째 모셔져 있는 곳.
몽당비가 잘 세워져 있는 곳.
이 하찮은 곳을 좀
부디 하찮은 대로 좀.
에이 시브럴
몸은 하나고 맘은 바쁘고
마음 바쁜데 일은 안되고
일은 안되는데 전화는 와쌓고
땀은 흐르고 배는 고프고
배는 굴풋한데 입 다실 건 마땅찮고
그런데 그런데 테레비에서
「내 남자의 여자」는 재방송하고
그러다보니 깜북 졸았나
한번 감았다 떴는데 날이 저물고
아무것도 못한 채 날은 저물고
바로 이때 나직하게 해보십지
'에이 시브럴─'
양말 벗어 팽개치듯 '에이 시브럴─'
자갈밭 막 굴러온 개털 인생처럼
다소 고독하게 가래침 돋워
입도 개운합지 '에이 시브럴─'
갓댐에 염병에 ㅈ에 ㅆ, 쓸 만한 말들이야 줄을 섰지만
그래도 그중 인간미가 있기로는
나직하게 피리 부는 '에이 시브럴─'
(존재의 초월이랄까 무슨 대해방 비슷한 게 거기 좀 있다니깐)
얼토당토않은 '에이 시브럴─'
마감 날은 닥쳤고 이런 것도 글이 되냐
크게는 못하고 입안으로 읊조리는
'에이 시브럴─'
공부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끓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