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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여행 자료
<4월 20일>
10:30 인천공항 제2청사 3층 D구역 미팅
13:10 러시아항공 인천출발
<4월 21일>
00:35 카이로 도착 (4월20일 20:45 모스크바 출발)
카이로 전일 자유투어
기자 피라미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이집트를 넘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고대 유적이다. 이집트 기자에 위치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0년 전인 기원전 2560년 무렵 고대 이집트 왕국 제4왕조 시대에 만들어졌다. 기자 피라미드는 쿠푸왕의 피라미드, 카프레왕의 피라미드, 멘카우라왕의 피라미드 등 크게 3개로 나눌 수 있다.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는 완공까지 20년 걸렸다고 한다. 높이는 약 147m, 밑변의 길이는 230m이다. 건축 당시 들어간 돌의 전체 무게는 약 5900만 톤, 약 230만 개의 석회암과 화강암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1311년 잉글랜드에 링컨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무려 3800년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알려졌다. 건축 당시 꼭대기에 금으로 만든 피라미드 꼭지 모양이 있었으나 도난당했다.
대피라미드에는 두 개의 입구가 있으며, 내부에는 좁고 긴 회랑과 왕의 방, 왕비의 방으로 이름 붙은 공간이 있다. 이 방들은 애초부터 텅 비어 있었다는 설이 있다. 고고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곳은 도굴꾼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가짜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공간의 명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며 왕비의 방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이집트의 상징으로서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스핑크스는 카프레 피라미드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카프레의 피라미드는 3대 피라미드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높이는 143m이다. 멘카우레 피라미드의 높이는 65m로 3대 피라미드 중 가장 작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 가장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기자 피라미드는 보존 상태도 훌륭하여 언제나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이집트 박물관
카이로의 중심부에 있으며, 고대 이집트의 미술과 고고학적 유물의 수집으로는 양과질적인 면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19세기 초부터 이집트의 고(古)미술품이함부로 해외에 반출되자 이를 우려한 프랑스 고고학자 A.마리에트(1821∼1881)에의해 1858년 카이로 교외의 불라크에 창설된 후 190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그레코로만시대 초기에 이르는 유물 약 10만 점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그 대부분은 이집트 각지의 신전(神殿)유적이나 무덤에서 발굴된유물로서, 건축의 일부, 각종 조상(彫像), 부조(浮彫) ·벽화 ·공예품 등 당시의생활 전반에 걸쳐 있다. 일괄 유물로는 제18왕조 말 투탕카멘묘(墓) 부장품이 가장유명한데, 그의 황금마스크와 황금의 관(棺)을 비롯하여 호화롭던 파라오의궁정예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카프레왕 ·멘카우레왕 ·람세스왕 등의 조상, 서기 ·귀족 ·궁정부인, 일하는 노예의 조상 등이 유명하다. 또, 역대 파라오의 미라를한 곳에 모아 놓은 방도 있다
<4월 22일> 카이로 전일 자유투어
칼 카릴리 바자르
이집트는 서방세계와 동방세계를 이어주는 가교이며, 그 중심에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가 있다. 이집트는 중세시기에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세수입을 거두었고, 이를 기반으로 정치, 종교, 경제적인 번영을 구가하였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새로운 항로개척과 페스트 등으로 인해 이집트의 경제와 문화는 서서히 쇠락을 길을 걷는다. ‘정복자의 도시’ 카이로에 있는 <칸 엘 카릴리(Khan el-Khalili, 아랍어: خان الخليلي)>는 쇠락하는 이집트를 부흥시키기 위해 만든 시장이었다. 이 시장은 물건을 거래하는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근대 이후에는 이집트인들의 정신적 고향이 되기도 하였다.
<칸 엘 카릴리>는 주로 ‘카릴리’ 시장이라고 불리는데, 원래는 ‘카릴리가 만든 대상(隊商, 카라반)의 숙소’를 의미한다(칸은 페르시아어로 ‘대상의 숙소’). 이 시장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맘루크 왕조의 장군(emir)인 알 카릴리이다. 카릴리 시장은 카이로의 중심부인 이슬람 구역에 있는데, 주변에는 이슬람 연구의 본산인 알 아즈하르(Al-Azhar) 모스크와 알 아즈하르 대학교, 그리고 모하메드의 손자 두개골과 가장 오래된 쿠란 완본이 보관되어 있는 알 후세인(Al-Hussein) 모스크가 있다. 이외에도 이 시장 주변에는 수많은 모스크와 이슬람 학교들이 있다
카이로는 한때 중국의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세계의 중심도시는 아니다. 현재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은 터키의 그랜드바자르로, 카릴리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시장 정도로 만족하여야만 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과는 별도로 이집트인들이 이 시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정은 대단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카릴리를 일종의 정신적 고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시장은 19세기 말 이슬람 문예부흥운동의 산실이었는데,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 학생들이 시장 카페들에 모여서 이슬람과 이집트의 부흥에 대해 격론을 벌였고, 이들 중 상당수가 후에 이집트 근대화의 추동 세력이 되었다. 지금은 비록 그 수가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시장과 아즈하르 모스크 사이에는 이슬람 책방들이 있고 시장에는 카페들이 있다. 이슬람 세계에서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나기브 마푸즈(Naguib Mahfouz, 1911~2006) 역시 이곳에서 자랐는데, 그의 문학작품에서 이 시장은 단순한 무대장치 이상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또한 수많은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고, 많은 시인들이 시장을 칭송하는 시와 노랫말을 지었다.
현재 카릴리 시장은 외국 관광객과 지역 중산층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들을 주로 판매하고 있다. 2010년에만 천만 명 이상의 외국 관광객이 이 시장을 방문해 기념품들을 구매하였지만 현재는 관광객의 숫자가 급감하였다. 많은 상점주인들이 이러다 곧 상점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지만, 불안정한 국내 정치 상황으로 인해 상황이 개선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동굴 교회, 시타텔
17:15 야간열차 탑승 후 아스완으로 이동. 익일 05:45 도착
<4월 23일>
아부심벨
이집트 남부 나일 강 계곡에 있는 고대 문명 유적지. 아스완 상류, 제2폭포 하류, 수단 국경 부근에 있음. 1812년 람세스2세 때 건설된 대소 2개의 암굴 신전이 발견됐으나 아스완하이 댐의 건설로 물에 잠기게 돼 북서쪽 약 140km 되는 곳에 이전했음.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대신전
기원전 1257년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오늘날 아부 심벨이라고 알려진 누비아 지방의 아스완 남쪽 나일 서안에 2개의 신전을 건립하였다.
람세스 2세 이전부터 이곳은 하토르(Hathor) 신의 신성한 영역이었고, 람세스 2세는 이 사원을 태양신 아몬-라와 라-호라크테(Ra-Horakhte), 프타신(Ptah)에게 바쳤다.
수단 국경 근처 먼 이집트 남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 사원은 1813년 재발견될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1817년 이집트 학자 지오바니 바티스타 벨초니가 이곳을 처음으로 탐험하였다
아스완
이집트 남동부 아스완 주의 주도. 나일 강 동안의 제1 폭포 바로 북쪽에 있다. 고대에는 셰네(Shene)라고 불렸으며, 이집트 남한(南限)의 땅으로 성서에도 나온다. 지명은 고프트 어로 '시장'이라는 뜻이다. 이전부터 수단과 에티오피아의 상업·교통의 중심을 이루어 상업 도시, 피한지로 알려져 있었는데 1902년에 아스완 댐이, 1970년에 아스완하이 댐이 건설됨에 따라 공업 도시로 발전하였다. 이 전력을 이용한 화학 비료·철강·시멘트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다. 대안의 엘레판티네 섬은 고대 이집트의 남쪽 문호로 많은 고대 유적이 있다. 고대 이집트 시대 에라토스테네스가 알렉산드리아와 이 곳의 거리를 측정하여 지구의 둘레를 처음으로 계산하였다
<4월 24일>
아부삼벨
대신전
람세스 2세의 웅장한 석조 신전들이자 자신의 영광을 떨치기도 하는 곳
람세스 2세는 고대 이집트의 통치자들 중 가장 강력했던 파라오의 하나였다. 여러 학자들은 그를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내용인 성경의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파라오와 동일 인물로 간주한다. 그는 기원전 1279년부터 66년 동안 통치했으며, 기원전 1213년 사망했을 때는 여러 명의 아내와 첩들에게서 얻은 백 명이 넘는 자녀들을 남겼다고 한다.
람세스 2세의 조각상은 다른 어떤 파라오들의 것보다 더 많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러 채의 신전을 세우고, 증축하고, 장식했다. 누비아의 아부 심벨의 산자락에 조각된 태양신에게 바친 그의 신전은, 발치에 작게 조각된 다른 가족들을 두고 왕관을 쓴 채 옥좌에 앉아 있는 파라오의 모습을 나타낸 네 개의 거대한 조각상으로 유명하다. 바위를 깎아 조각되었으며 건물의 파사드를 지배하고 있는 높이 20m 이상의 이 조각상들은 '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자아(自我)상'이라 묘사되어 왔으며, 지방 부족들에게 파라오가 지닌 초인적인 힘을 깊이 심어 주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었다. 파사드 꼭대기에는 개코원숭이들이 태양을 향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신전 내부에는 파라오의 조각상과 그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나타낸 그림들이 있다.
1813년 스위스의 동양학자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재발견되었을 때, 이 신전은 거의 완전히 모래에 뒤덮여 있었다. 이탈리아의 도굴꾼인 조반니 벨초니가 1817년 무덤 안에 들어가는 데 성공해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은 몽땅 다 가져가 버렸다. 사랑의 여신 하토르에게 바쳐진 두 번째 신전이자 좀 더 작은 신전이, 람세스 2세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이며 그가 '태양은 그녀를 위해 빛난다'라고까지 일컬었던 네페르타리를 위해 건축되었다.
1960년대 초반 아스완 하이 댐이 건설되고 있을 무렵, 유네스코는 전 세계적인 캠페인을 일으켜 자금과 전문적인 기술을 동원해 아부 심벨의 신전들이 나세르 호수의 물에 잠기지 않도록 더 높은 지대로 옮겼다.
하토르 신전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을 경배하는 신전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 제국은 분할되었으며 이집트는 그가 거느렸던 마케도니아 장군 중 하나인 프톨레마이오스가 다스렸다. 그의 후계자들은 로마 시대까지 이집트를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덴데라에 있는 무덤은 이 시기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암소를 포함한 신성한 동물도 매장되었다.
하토르 여신이 취했던 형상 중 하나가 바로 암소였다. 그녀는 모든 어린 파라오에게 젖을 주었으며 종종 소의 귀가 달리고 두 개의 뿔 사이에 태양의 원반으로 치장된 왕관을 쓴 여인으로 묘사된다. 하토르는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이었으며, '음주를 지배하는 여주인'이라는 칭호로 춤과 환락과도 연관되었다. 그녀는 점차 지중해 동쪽 연안에서 가장 숭배한 신들 중 하나인 이시스 여신과 일치되었다.
덴데라에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하토르 신전은 예전에 있었던 신전을 대체하여 새로이 지어진 것으로, 그 이후에도 로마의 초기 황제들 시대에 이르기까지 개조되고 증축되었다. 이집트 신전의 독특한 특징은 '치료소'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곳에서 환자들은 여신이 보내 주는 치유의 꿈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라며 밤을 보냈다.
신전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한쪽 외벽에는 기원전 30년에 죽은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카이사리온과 함께 나타난 커다란 부조가 새겨져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을 여신과 동일시하기 위해 이러한 이미지를 사용했던 듯하다.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후 몇 년이 지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이시스에게 바치는 독립된 사원을 하나 지었다. 중앙 신전에 있는 그림에는 이후의 황제들이 이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장면이 나타나 있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서기 35년경–에는 다주실(hypostyle hall : 내부 공간이 기둥으로 받쳐진 건물)이 증축되었다. 이 홀의 기둥머리는 이시스 여신과 연관이 있는 고대 이집트의 타악기인 '시스트럼' 모양이며, 천장에는 점성학의 12궁이 새겨져 있다. 이 건물 일부는 55기에 콥트 교회 건물이 되었다.
"그대는 축제의 여주인이자, 춤의 여왕이고, 음악의 여주인이십니다…"
하토르에게 바치는 찬가
나일강 유람선
인류의 젖줄을 탐험하는 나일강 크루즈
이집트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파라오의 숨결을 느껴보고자 하는 것은 당연지사인지도 모른다.
이런 이들에게는 나일강의 크루즈를 경험해 보는 것은 추천할만하다.
물론 지금이야 항공기로 이집트의 남쪽지방까지 쉽게 갈 수 있지만 고대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나일강이 강쪽으로 뻗쳐있는 사원과 신전을 방문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고대 이집트 지역을 방문하는 일반적인 교통수단이며,
그 외에도 보다 느긋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4월 25일> - 전일 크루즈 여행
크루즈 탑승 후 정박지에 머물며 하는 투어는 선사에서 실시하는 옵션 투어로
희망자만 선택
물론 개별적으로 하선하여 자유 투어로 하신 후 정해진 시간 내 크루즈로 복귀하셔도 됩니다
선상 조식후 콤옴보 신전 투어
콤옴보 신전
쿰옴부(Kum Ombu)·콤옴보(Kôm Ombo)라고도 한다. 아스완시(市) 북쪽 약 40km, 나일강 동안에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누비아나 에티오피아 방면을 상대로 하는 대상무역의 거점으로 번영하였다. 악어 머리를 가진 세베크신(神)과 매의 머리를 가진 호루스신(神)을 모신 BC 2세기의 신전 등의 유적이 있는데, 신전의 기둥이나 벽화를 장식한 돋을새김이 아름답다. 주요공업은 제당업(製糖業)과 제면업(製綿業)이다
콤옴보 신전 투어후 에드푸드 이동 - 약 5시간
호루스 신전
이집트 신 중 가장 유명한 신의 하나인 호루스가 화려하게 경배 받는 곳
'하늘의 주인'인 호루스 신이 고대 이집트의 주요 신들 중 하나가 되자, 이후 모든 파라오는 자신을 '살아 있는 호루스', 지상 만물의 올바른 질서의 수호자와 동일시했다.
호루스를 둘러싼 신화는 서로 차이를 보이지만, 그는 주로 이시스와 오시리스 신의 아들로 숭배된다. 그는 종종 매의 머리를 한 인간, 매의 머리를 한 동물, 혹은 매 그 자체로 묘사된다. 에드푸 신전의 주 안뜰에 있는 화강암으로 된 거대한 조각상에서 호루스는 이집트의 왕관을 쓰고 있는 위풍당당한 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호루스 신전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유물'이라 묘사되어 왔으며, 신전에 있는 비문들은 고대 이집트의 의식과 축제, 사제들, 그리고 신화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현재의 신전은 보다 먼저 세워졌던 신전을 대체한 것으로, 여러 대에 걸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자들에 의해 건축되었다. 그리스 출신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은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집트의 신들과 신앙을 받아들였다.
기원전 237년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한 이 신전은 180년이 지나 프톨레마이오스 12세에 의해 완성되었다. 입구 관문에는 호루스와 다른 신들, 그리고 적을 무찌르는 모습의 파라오가 나타나 있다. 관문 위에는 태양의 원반이 있는데, 양쪽으로 뱀이 둘러싸고 있다. 신전의 내부 성소에는 안에 황금으로 된 호루스 상을 감추어 두었으며 연마한 돌로 만든 사당이 남아 있다.
신전에는 방대한 도서관과 향수 제조소가 있었는데, 공장의 벽에는 향수와 향(香)의 제조법이 자세하게 새겨져 있다. 일 년에 한 차례, 호루스의 어머니인 이시스 여신의 조각상이 북쪽 덴데라에 있는 그녀의 신전으로부터 금을 입힌 배에 실려 나일 강을 따라 에드푸로 실려 왔다. 그녀는 강변에 늘어선 환희에 찬 군중들 사이를 지나 '아름다운 만남의 축제'에서 행복과 환락 가운데 상징적으로 호루스 신에게 생명을 주러 오는 것이다.
<4월 26일> 룩소르 도착 하선/ 룩소르 유적 투어
조식후 크루즈에서 체크아웃 후 호텔 이동- 짐 보관 후 룩소르 투어
맴논의 거상
이집트 제18 왕조 파라오 아멘호텝 3세가 테베(Thebes)에 건축하였던 장제전(mortuary temple)의 정문을 지키던 두 개의 거대한 석상으로 아멘호텝 3세를 묘사한 것이며 높이가 17m에 이른다.
석상 중 하나는 거대한 바위를 조각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개의 바위를 쌓아가며 조각한 것이다. 신전은 범람이 잦은 평지에 가까이 세워져 모두 파괴되고 거대한 두 개의 석상만이 남아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두 개의 석상을‘통치자의 통치자들’이라고 불렀으며 후에 여행자들이 아랍어로 왼쪽과 오른쪽을 의미하는‘새미(shammy)· 태미(tammy)’로 부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엘콜로샛(el-Colossat)과 에스살라맷(es-Salamat)’이라고 부른다.
북쪽석상에는 아멘호텝 3세와 그의 어머니 무템비아(Mutemwia), 남쪽 석상에는 아멘호텝 3세와 그의 부인 티위(Tiy), 그리고 그의 딸 중 한명이 조각되어 있으며 석상의 옆면에는 나일신 해피(Hapi)와 상하 이집트의 상징 식물들이 함께 조각되어 있다. 석상은 BC 27세기 지진이 있은 후 아침에 종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나서 이를 본 그리스 여행객들에 의해 새벽의 여신 에오스(Eos)의 아들 멤논과 닮았다고 여겨‘멤논의 거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멤논은 에티오피아왕으로 아프리카에서 소아시아로 그의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가했으나 아킬레스에게 살해된 트로이전쟁의 영웅이다. 멤논은‘새벽의 통치자’라는 의미를 가진다. 석상은 199년 로마의 황제 셉티무스 세르베루스(Septimus Severus)에 의해 보수되었으며 그후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투탕케멘
정확하게는 투트 앙크 아멘이라 한다. 제10대 왕 이크나톤(아멘헤테프 4세)의 아우 또는 조카라고도 하는데, 출생에 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제11대 세멘크카라는 만년에 이크나톤과 공동통치를 펼쳤으나 재위 3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9세에 즉위하였다. 왕비는 이크나톤과 네페르티티의 제3왕녀인 안케센아멘이다.
왕은 처음에는 아텐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텐으로 칭하였으나, 즉위 4년째 아멘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멘으로 개칭하고 수도를 아마르나에서 테베로 옮겼다. 연소한 투탕카멘이 당시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신 아이와 노장 할렘헤브(모두 후에 국왕)의 보좌에 힘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8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왕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고 있으며, 업적에 관한 기록도 남겨지지 않아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왕묘가 테베의 서쪽 교외인 '왕가의 계곡'에 조영된 탓으로 이 묘가 발굴되면서부터 유명해졌다
왕가의 계곡
‘왕릉(王陵)의 계곡’이라고도 한다. 당시 국왕들은 매장품의 도굴을 방지하기위하여 사람들 눈에 뜨이기 쉬운 피라미드 등을 피해 의식(儀式)이나 제례를 위한제전(祭殿)과는 별도로 능만을 인적이 드문 계곡 바위틈이나 벼랑에 만들었다. 이곳에는 투트모세 1세부터 람세스 11세에 이르는 제18, 19, 20왕조의 거의 모든왕들이 묻혀 있다. 최대규모인 세티 1세의 능은 길이 100m이며 널길[羡道]과 널방[玄室]이 15개 있다. 그러나 1922년에 발굴된 제18왕조 투탕카멘 왕릉을제외하고 모두 도굴당해 유물은 물론 왕의 미라조차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1995년 카이로에 있는 아메리카대학의 미국인 교수 켄트 위크스(Kent Weeks)에의해서 람세스 2세의 가족묘로 추정되는 거대한 묘를 발견하고 ‘5호고분’이라고명명하였다. 이 고분은 1820년 영국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제임스 버튼(James Burton)이 발굴하다 실패한 것을 1910년 영국인 하워드 카터(Howerd Carter)가 다시시도하였다가 실패한 것으로, 10여 년의 발굴작업 끝에 위크스가 발견한 것이다.
첫째 복도를 지나 둘째 복도에 들어서면 16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가로, 세로 15m의 커다란 중앙홀이 나타나고, 이곳을 지나면 T자 모양으로 배열된 48개의 방과연결된 통로가 나타난다. 이 통로의 교차점 부근에 내세를 관장하는 오시리스 부조상(浮彫像)이 서 있다. T자 모양의 입구 왼쪽 첫째 벽에는 람세스 2세의부조상이, 둘째 벽에는 이시스여신상이 부조되었다. 이 무덤이 이처럼 많은 방을가지고 있기 때문에 52명의 아들을 포함하여 100명이 넘는 자손을 가진 람세스 2세의 가족묘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아직 발굴이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자세한것은 후일로 미룰 수밖에 없다. 한편 왕비 ·왕자 ·왕녀들의 무덤은 이곳에서남쪽으로 1.5km 지점인 ‘왕비의 계곡’에 있다.
합세슈트 장제전
하트셉수트 여왕은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다섯 번째 파라오였다. 하트셉수트는 치세 기간에 다수의 건축물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나일 강 서안, 룩소르를 마주보는 데이르 엘-바리에 지은, 그녀 자신을 위한 사원이 가장 놀랍다. 이 사원은 산 너머 왕들의 계곡에 있는 그녀의 무덤과 일직선상에 있으며, 약 15년(하트셉수트 재위 7년부터 22년까지)에 걸쳐 건축된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또한 사원 앞에는 양옆으로 스핑크스들이 줄지어 늘어선 너비 37미터의 대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사원의 정수는 제세르-제세루, 혹은 '장엄 중의 장엄'이라 불리는, 29.5미터 높이에 서서 그 위로 우뚝 솟아 있는 산맥을 올려다보는 세 개의 열주식 테라스이다.
하트셉수트의 사원은 그 완벽한 좌우대칭으로 유명한데, 이는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을 약 10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제세르-제세루는 본래는 정원이었던 두 개의 경사로를 통해 오를 수 있다. 두 번째 경사로는 위쪽 테라스와, 두 열의 정사각형 열주로 지탱되는 푼트 포르티코로 이어진다. 이 경사로는 오시리스 신의 형상을 한 하트셉수트의 조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벽에는 지금의 에티오피아나 소말리아 북부로 추정되는 푼트 지방 원정을 묘사한 부조가 걸려 있다.
"세넨무트는 고대 이집트의 가장 아름다운 기념물을 지었으며 그 무엇도 그 스타일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카르낙 신전
카르나크 신전은 이집트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신전이다. 룩소르 신전 북쪽 3km에 자리한다. 기원전 1990년부터 건립을 시작하였다. 아메넴헤트 1세가 착공한 이후 후대 파라오들에 의해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잦은 도굴과 지형적 문제 때문에 현재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전체의 10% 정도만 발굴된 상태라고 한다.
기원전 2065~1781년 중왕국 시대부터 기원전 1550~1075년 신왕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거쳐 만들어진 신전과 탑, 오벨리스크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제19왕조 람세스 1세가 세운 대열주실, 제18왕조 투트모세 1세와 하트셉수트의 오벨리스크, 투트모세 3세 신전이 가장 유명하다. 특히 대열주실은 높이 23m에 이르는 중심 기둥 12개와 높이 15m, 둘레 8m의 122개 원기둥이 장관을 이룬다. 섬세한 부조 장식과 이집트 상형문자로 장식되어 있다.
카르나크 신전은 크게 고대 이집트 신 아문, 무트, 멘투에게 바치는 세 개의 신전으로 나뉜다. 이중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은 아문 대신전이다. 입구에서부터 양의 머리를 하고 있는 스핑크스가 양쪽으로 20개씩 늘어서 있으며, 첫째 탑문을 지나면 광활한 광장이 나타난다. 중앙에는 큰 원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오른쪽의 입구로 들어가면 신전이 하나 나타난다. 이것은 람세스 3세가 아문 신에게 바쳤던 신전이다. 카르나크 신전의 가장 안쪽에는 투트모시스 3세의 축제전이 있다. ‘신전의 식물원’이라 불린다. 축제전의 벽에는 각종 식물이 새겨져 있다. 나일강의 범람과 국가의 풍요를 기원하며 축제를 벌이던 장소라고 한다
<4월 27일>
04:30 룩소르 공항 이동 14:20 요르단 암만 도착
호텔 체크인 후 자유시간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요르단강 동쪽 75km 지점, 아라비아 고원의 서쪽 끝 높이 약 800m의 대지에 자리잡고 있다. 암만은 BC 5세기경부터 있었던 옛 도시로, 성서의 라바트암몬과 일치하나, 유적으로는 몇 개의 분묘만이 발굴되었을 뿐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 2세가 도시를 재건했고, 그 후 로마 ·비잔틴 시대에는 필라델피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로마시대의 유적이 많으며, 특히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과 헤라클레스 신전 및 해안에 있는 님프의 폐허가 유명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아밀 압둘라가 이곳에 정부를 수립하고 수도로 정했으며, 팔레스타인 전쟁 때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 세력의 중심지로 아랍 군단이 주둔하기도 했다.
인산염 ·건축용 석재 ·채소 ·과일 등의 집산지이며, 사막의 주민과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 중심지이다. 시내에는 궁전 ·관청 ·법원 ·병원 ·의회 등을 비롯하여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으며, 특히 고대의 성채는 고고학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건물의 대부분은 석조건물로, 도시의 남서쪽에는 대리석 채석장이 있다. 예로부터 성지 메카와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의 숙박지로 발달하였다. 현재는 순례철도가 다마스쿠스로부터 이곳을 지나, 남쪽의 만 ·아슈타르로 이어진다. 포장도로로 다마스쿠스 ·만 ·예루살렘 ·바그다드 등지에 연결되며 암만 국제공항이 있다.
<4월 28일>
이른 조식 후 암만에서 페트라 이동 - 전용차량으로 5시간 이동
페트라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산악도시이다. 나바테아인은 BC 7세기부터 BC 2세기경까지 시리아와 아라비아반도 등지에서 활약한 아랍계 유목민으로,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붉은 사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에 도시를 건설한 후 생활하였다.
이집트, 아라비아, 페니키아 등의 교차지점에 위치하여 선사시대부터 사막의 대상로를 지배하여 번영을 누렸다.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서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않은 도시가 있다. 협소한 통로와 협곡으로 둘러싸인 바위산을 깎아 조성된 페트라의 건물들은 대부분 암벽을 파서 만들어졌다.
이곳은 BC 1400~1200년 경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에 자리했으며, 구약에서는 '에돔의 셀라'라고 지칭하고 있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를 의미하고, 셀라도 히브리어로 '바위'를 뜻하니 페트라는 바위의 도시인 셈이다. 또한 이곳은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던 모세와 그 추종자들에게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BC 7세기 무렵 유목생활을 하던 나바테아인이 페트라를 중심으로 정착하면서 나바테 문명이 세워졌다. 106년에는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땅을 빼앗겼다가, 하드리아누스가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하드리아누스의 페트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후 6세기경 발생한 지진에 의해 도시 전체가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12년 탐험가 부르크하르트가 잊혀진 페트라 도시를 발견하였고, 이후 그의 여행기를 통해 페트라가 유럽에 알려졌다.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가 되었으며,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영국의 시인 존 윌리엄 버건이 페트라를 '영원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라고 노래한 바 있으며,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마지막 성배"(1989)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진 바 있다.
<4월 29일>
조식 후 와디럼 이동 - 전용차량
와디 럼 지프 사파리
와디 럼(Wadi Rum)은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에서 남쪽으로 약 320km 지점에 위치한 곳이며, 1998년에 요르단 정부에 의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약 720㎢이며, 약 3억 년전 지각 작용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아래층에 화강암층이 있고 그 위에 석회암층 그리고 가장 상부에 사암층이 있다.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745m의 럼 마운틴(Rum mountain)이며 평지로 보이는 곳도 해발 1,000m정도이다.
와디 럼은 오래전부터 아라비아 상인들의 교역로 역할을 하였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올라오는 카라반(대상)들이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있고, 당시에 이들이 남겨 놓은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 유목민들이 이곳을 통과하면서 남겨 놓은 암벽화도 찾아 볼 수 있다.
와디 럼은 1916년부터 아랍 지역에서 활동했던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가 이곳을 통과하여 요르단 최남단의 아카바 항구를 점령하는 장면이 나오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영화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와디 럼을 찾는 여행객들은 트레킹이나 암벽 등반 또는 낙타나 자동차를 이용한 사막투어 등을 할 수 있고 베두윈 텐트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베두윈식의 식사와 밸리 댄스 및 아랍전통 음악 연주와 노래를 즐길 수 있다.
주요 명소는 산 중턱에 있는 로렌스의 샘이며 현재도 물이 나오고 있다. 그 아래 평지에는 선사시대 유목민들이나 카라반들이 남겨 놓았다는 암벽화(사실은 기호나 글자) 바위가 있으며, 알가잘리로 알려져 있는 계곡도 유명하다. 와디(Wadi)는 아랍어로 비가 오는 우기에는 강이 되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 겨울에는 마른 계곡이나 땅이 되어 버리는 곳을 말한다.
와디럼 사막 캠프
붉은 사막 와디럼에서 즐기는 텐트 숙박 체험
붉은 사막 와디럼의 텐트에서 특별한 숙박 체험을 즐길 수 있습니다.
<와디럼 숙박시 준비물입니다 >
- 개인세면도구, 슬리퍼, 모기약(붙이는형이나 바르는형, 피우는 형태),
조식을 위한 컵라면 또는 깻잎이나 멸치 볶음 등의 약간의 밑반찬 등
베두인 전통 바베큐
3~4층의 선반에 닭고기/각종 채소/수프를 쌓아놓고, 숯불로 달궈놓은 사막의 구덩이에 약 1시간~1시간 30분 정도 천천히 익혀 먹는 베두인 전통음식
<4월 30일> 조식후 사해를 거쳐 암만으로 이동
사해 - 약 2시간 동안 사해에서 수영 및 휴식
암만 도착 후 호텔 체크인 휴식
<5월 1일> - 암만 전일 자유 시간
인근 도시인 마다바나 제라쉬에 다녀 오셔도 좋습니다.
특히 제라쉬는 암만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곳으로
고대 로마의 유적이 남아있는 매우 유명한 도시입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이며 서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고 신성시되는 곳이다. 아라비아인은 이 도시를 쿠드스(신성한 도시)라고 부른다. 그만큼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행정수도는 텔아비브이다. 동부는 요르단령이며, 서쪽은 1948년부터 이스라엘령이 되었고, 1950년에는 그 수도가 되었다. 1967년 6월 중동전쟁 이후로 유대교도·그리스도교도·이슬람교도가 저마다 성지(聖地)로 받들고 있는 동쪽 지역도 이스라엘의 점령지이다.
사해(死海)로부터 25km,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55km, 높이 790m 가량의 팔레스타인 중앙산맥의 분수령상에 있는데, 지중해성기후와 사막기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북위 31°41'에 위치하지만 겨울에는 몹시 춥고 봄·가을에는 이따금 37℃의 더위를 겪는다. 동(東)예루살렘에는 사적(史蹟)·성적(聖蹟)이 많으며, 통곡의 벽(유대교), 성묘(聖墓)교회(그리스도교), 오마르사원(이슬람교)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많으며, 해마다 전세계에서 이곳을 찾는 순례자와 관광객이 많다. 서(西)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이며, 정부 청사와 히브리대학교·국립박물관·미술관 등이 있다. 또 금속·담배·플라스틱·신발·전기기구 공장 등이 있다
<5월 2일> - 암만 버스터미널 이동 - 예수살렘행 버스 탑승
제트버스 07:00 출발 암만국경 이동(약 2시간)
요르단, 이스라엘 국경 통과 후
이스라엘 국경마을에서 택시로 예루살렘 이동 (약 2시간)
※※ 요르단 국경 출국세 약 1만5천원 개별 지불
예루살렘 도착후 호텔 체크인 자유시간
예루살렘 도착후 호텔 체크인 자유시간
희망하시는 곳 자유롭게 다녀오세요 - 입장료 교통비 개인지불
중요한 유적지 길 안내는 제가 해드립니다
예수 눈물 교회
올리브산에서 게세마니동산으로 내려오는 중간지점에 있다. 5세기 무렵 비잔틴 양식의 작은 성당이 있던 자리에 1955년 이탈리아 건축가가 다시 건립하였다. 교회명인 ‘도미누스 플레비트(Dominus Flevit)’는 라틴어로 ‘예수가 눈물을 흘리다’는 의미이다. 건물 외관이 눈물방울 모양을 하고 있으며 지붕의 네 귀퉁이에는 예수의 눈물, 슬픔을 상징하는 항아리가 있다. 이곳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성의 붕괴를 예언하였고, 눈물을 흘리면서 설교하였다고 한다.
교회 제단에는 성경 구절에 나오는, 암탉이 병아리를 모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마당에는 예수가 머리에 쓴 가시관을 만든 가시나무가 있다. 교회 안 뒷부분에는 5세기 무렵의 제단이 남아 있고 정면의 유리창에는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는 가시덩굴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곳을 통해 예루살렘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겟세마네 동굴
겟세마니(Gethsemani, 기름 짜는 기계를 의미함)는 예루살렘의 동쪽, 기드론 계곡을 눈앞에 둔, 감람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동산으로서 예수는 가끔 제자들과 이 동산에 올라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진다. 특히 겟세마니는 예수가 죽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제자들과 함께 올라 슬픔과 고뇌에 찬 최후의 기도를 드린 동산으로, 그리고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가 체포된 극적인 장소로서도 유명하다.
겟세마니 기도는 예수의 마지막 기도이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알고 그것을 피하기 원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대로 진행되기를 원했다. 이에 반하여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고 예수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알아채리지 못했다.
십자가의 길
라틴어로 비아돌로로사 (Via Dolorosa) 혹은 비아크루시스(Via crucis)라고 불리는 ‘십자가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갈라비아언덕)을 향해 걸었던 약 800m의 길과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의미한다. 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이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에는 각각의 의미를 지닌 14개의 지점이 있으며, 이는 18세기에 확정된 것이다. 이 중 일부는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현재 매주 금요일 순례자들은 십자가 수난을 기리는 의식을 거행한다.
비아 돌로로사가 시작되는 제1지점은 예수가 재판을 받은 본디오 빌라도 재판정으로, 이 곳에서 심문을 받았고, 예수의 십자가형이 확정되었다. 이곳은 헤롯왕(헤로데스)이 그의 친구 마가 안토니를 위해 지은 안토니아 성채 내에 있다. 예수 당시의 로마 총독부는 가이사랴(카에사리아)에 있었으며, 당시 총독 빌라도는 유월절 기간 동안에 자주 일어났던 반(反) 로마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선고교회 (Church of Condemnation)가 서 있다.
제2지점은 로마 군사들이 예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혀 희롱한 곳이다. 이곳으로부터 도시의 거리를 지나 골고다로 향했으며,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조롱하였다. 빌라도는 십자가를 메고 나오는 예수를 보고 “자, 이 사람이오(요한복음 19:5)”라고 했다.
제3지점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이다. 1856년에 세워진 아르메니안 기념교회에 속해있는 작은 교회당에 표시되어 있다.
제4지점은 예수가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를 만난 곳이다.
제5지점은 키레네 사람 시몬(Simon of Cyrene)이 예수의 십자가를 골고다 언덕까지 대신 진 곳이다. 성경에 의하면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의 아버지 였는데,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어었다.(마가복음 15:21)”라고 되어있다. 1895년에 세워진 프란시스칸 교회가 있다.
제6지점은 성 베로니카(St. Veronica) 여인이 물수건으로 예수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는 곳이다. 성 베로니카가 예수의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는데 돌려 받은 손수건에 예수의 초상이 새겨졌다는 전승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가 1882년에 이 지점에 기념교회를 세웠다.
제7지점은 기둥에 표시 되어 있으며, 예수가 두 번째로 쓰러진 곳으로, 당시에는 성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고 한다(히브리서 13:12~13). 1875년에 이 곳에 두 개의 예배당이 세워졌다.
제8지점은 예수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누가복음 23:28) 라고 말씀하신 곳이다.
제9지점은 예수가 세 번째로 쓰러진 곳으로, 콥틱 교회가 서있다.
제10지점은 예수의 옷을 벗긴 곳이다(요한복음 19:23~24).
제11지점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이다(누가복음 23:33).
제12지점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곳이다(마태복음 27:45~51).
제 13지점은 아리마태아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내려 놓은 지점이다(마태복음 27:59).
제14지점은 아리마태아 요셉이 자기의 무덤에 예수를 장사 지낸 곳이다(마태복음 27:60~61).
제10지점 에서 제14지점까지는 처형의 목적지인 골고다 언덕 위로써 지금의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안에 있다.
성묘교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맞이한 뒤 안장된 묘지에 세워진 교회로 오늘날의 구예루살렘 북서쪽의 골고다 언덕 위에 위치한다. 성분묘교회, 무덤교회라고도 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아리마테아 요셉의 무덤이 십자가가 세워진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한복음 19:41).
성묘 교회는 오늘날의 구 예루살렘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동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서기 336년에 처음 교회가 만들어 졌으나, 페르시아인에 의해 614년에 파괴되었다. 그 후 테도시우스 수도원장인 모데스터스(Modestus)에 의해 다시 건립 되었으나, 1009년 이슬람 파티마 왕조의 알 하킴 빈 아므르 알라(al-Hakim Bi-Amr Allah) 칼리파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존하는 교회는 십자군에 의해서 다시 세워진 것이며 그 후 여러 번에 걸친 개축과 보수가 이루어졌으나 오늘날까지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교회 내부는 가톨릭교, 그리스 정교회, 콥틱 기독교,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안 정교회 등의 여러 교파가 각각 구획을 나누어 사용하고 있으며, 교회의 열쇠는 이슬람 측이 소유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묘교회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두산백과)
<5월 3일> - 예루살렘 전일 자유투어
통곡의 벽
구약성서에 의하면 솔로몬왕은 예루살렘에 장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성전은 전쟁 등으로 파괴되었으나, 헤로데스 왕이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재건하였다. 이 벽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전의 서쪽 일부라 여겨 '서쪽벽(Western Wall)'이라 불렸다.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란 명칭도 자주 사용하는데 이 용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래가 전해진다. 하나는예수가 죽은 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데, 이같은 비극을 지켜 본 성벽이 밤이 되면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는 설에서유래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이 성벽 앞에 모여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했기 때문에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다.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사이의 오랜 분쟁거리로 남아있다. 유대인들에게 이 벽은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의 상징이지만,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바위 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에 속한 이슬람 성지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어 1929년에는 '통곡의 벽 사건'이라 불리는 폭력 및 대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종교 분쟁은 1928년 9월 일부 유대교 신자들이 남녀가 따로 모여 앉아 예배를 올려야 한다는 유대교식 집회를 위해 벽에 막과 분리대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자신들이 성지라 여기는 곳에 일방적으로 공사를 하는 유대인들에게 큰 분노를 느꼈고 돌을 던지며 이를 제재하려고 했다. 당시의 분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유대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적 감정이 크게 악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요르단으로 분할되면서 이 성벽은 요르단에 속하였으나, 1967년 6월의 제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점령하여 성벽은 이스라엘로 넘어왔다
홀로코스트 박물관
정식 명칭은 홀로코스트역사박물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에 희생된 600만 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박물관으로, 원래는 1953년 야드 바솀(Yad Vashem) 기념관으로 건립되었다. 야드 바솀은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뒤에 21세기에도 계속 홀로코스트(대학살)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고, 다시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1990년대 중반부터 확장 공사를 시작해, 10년의 공사 끝에 2005년 3월 15일 재개관하였다.
새로 개관한 박물관은 기존 기념관의 4배 규모로, 면적은 4,200㎡이다. 이스라엘계 미국인 건축가가 설계하였고, 총 공사비는 미화 5600만 달러가 들었다. 건물은 크게 전적박물관·미술박물관·전시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외관은 꼭대기가 뾰족한 가파른 산(山) 모습에, 각 모서리는 긴 선형(線形) 구조를 하고 있다. 내부 길이는 180m이다.
나치스에 학살된 600만 유대인의 위령탑과 희생자들의 유물 및 사진, 생존자들의 증언 자료, 희생자들이 수용소 안에서 그린 그림 등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원뿔꼴인 '이름의 홀(Hall of Names)' 내부 벽면은 무수한 희생자들의 사진들로 채워져 있다.
이 박물관 외에도 세계 각국에는 곳곳에 홀로코스트박물관 및 추모관들이 세워져 있다. 그 가운데 1993년 미국 내 유대인들의 기금과 미국 정부의 지원으로 건립된 워싱턴의 미국홀로코스트박물관이 가장 규모가 크다. 야드 바솀 홀로코스트박물관은 세계 각국에 있는 이들 홀로코스트 관련 박물관과 추모관들의 본부 역할을 한다.
2005년 3월 15일 개관식 때 이스라엘 정부는 국제연합 사무총장을 비롯해 세계 40개국 지도자들을 초청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은 한 명도 초청하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이면서도, 오히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를 홀로코스트에 비교해, 마치 자신들이 피해자인 것처럼 국제사회에 이미지를 조작한 데 따른 것이다.
베를레헴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팔레스타인의 중앙산맥, 사해(死海)까지 계속되는 ‘유다의 광야’의 끝,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의 연변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이며, 예수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동굴 뒤에는 성탄교회(聖誕敎會)가 있다.
역사상으로는 이미 BC 14세기에 등장하며, 그 후 부근의 마을과 광야의 유목민의 교역소로서 발전하였고, 16세기경부터는 올리브재(材)와 진주조개의 가공업도 발달하였다. 그리스도교도의 순례지이며,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하였다가 1995년 12월 팔레스타인으로 반환하고 철수하였다
베들레헴 투어 후 예루살렘 복귀
<5월 4일> 조식 후 텔아비브 공항 이동
14:30 텔아비브 출발 19:00 모스크바 도착 2시간 45분 공항 대기
러시아항공 20:45 모스크바 출발 익일 11:10 인천 도착
<5월 5일>
11:10 인천공항 도착
첫댓글 청장님 또 좋은 곳 가시는군요...부러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