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순교자 23위 시복시성을 준비하며 -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 (11) 김시우 알렉스
연산 김씨로 시우재라고 하며, 청양 고을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품이 착하고 어질었으며, 열심한 신앙으로 신자본분을 지켰으나 오른쪽 몸이 반신불수이고 살림살이가 몹시 가난하여 장가도 들 수 없었다. 그는 교우들의 애긍시사를 받아 생계를 유지해 나갔으며, 학식이 많고 재간이 있었기 때문에 왼손으로 서책을 베껴 그것으로 생계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우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많은 외교인들을 가르쳐 입교시켰다.
달레에 의하면 진보에 살던 김시우는 그 지방에서 학식과 평판이 높았다고 전하면서, 그가 교우들을 따라 노래산에 가서 부활축일에 참례하게 되었는데, 그 때 청송아문의 포졸들이 습격하여 교우들이 잡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교우들은 잡아가는데, 자기는 붙잡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울기 시작하였다. “어째서 우느냐?”고 포졸들이 물으니 “나도 천주교 신자인데 병신이라고 잡아가려고 하지 않는군요. 그래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아아, 네 소원이 그렇다면 같이 가자.”고 포졸들이 말하니 그는 기쁜 낯으로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김시우의 항구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함께 부활의 기쁨을 나누기 위하여 진보에서 멀리 떨어진 청송 노래산의 부활첨례에 참여하였고, 반신불수라고 신앙공동체에서 제외시켜 놓으려는 것을 눈물로써 호소하여 당당히 그리고 기쁜 낯으로 붙잡힌 신자대열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경주진영에 끌려나가 반신불수의 몸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형벌을 받았는데, 그의 항구한 마음은 관원들조차 칭찬하게 되었다. 이에 관하여 다블뤼 주교는 그가 “큰 언변에다가 문학에 대한 지식이 그의 열성을 일으켜 관가에서 천주 창조주의 존재, 강생과 구속, 상선벌악 등 주요한 신조를 여러 번 전개케 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전언들을 비추어 볼 때 김시우 알렉스는 비록 가난하고 수족이 불편하였지만 학식이 풍부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신앙심이 견고했을 뿐 아니라 지식수준이 높았음은 경상감영의 감옥으로 이송된 후 감사의 문초에 응하는 그의 태도와 응답의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감사가 묻기를, “네가 예수를 흠숭한다고 하는데, 그 예수라는 자가 저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의 매에 죽은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 맞아 죽은 사람을 흠숭할 이유가 무엇이며, 그의 죽음이 어째서 그리 훌륭하단 말이냐?”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대해 김시우 알렉스는 “9년 동안 장마가 졌을 적에 하우(夏禹) 임금님은 나라를 끊임없이 두루 다니면서 백성을 구하려고 온갖 일을 다 해 보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이나 자기 궁궐 대문 앞을 지나치면서도 들어가기를 거절하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이 훌륭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컨대 자기 신민의 물질적 구원밖에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하우 임금님이 고금을 통해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계 만방의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시려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이렇듯 은혜를 베푸신 이를 섬기지 않는 자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감사님도 예수께 감사드리고, 그 분을 흠숭하고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감사는 알렉스의 대답에 오히려 창피를 당하고 성이 발끈 나서 알렉스의 턱을 부수어 말을 못하게 하고, 고문을 한층 더 심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김시우 알렉스는 중국의 고전에 정통하여 우 임금의 치수의 고사를 예로 들어, 중국에서 우 임금이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고, 또 예수님은 모든 인간들의 영혼을 구하시려고 강생구속하시고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셨는데, 그 큰 은혜를 모르는 이는 사람이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존재와 천주교의 진리를 설파하고, 나아가 문초를 하고 있는 감사에게도 천주교에의 입교를 권면하고 있다.
당시 경상감사 이존수는 유교적 소양을 가진 정통사대부였기 때문에 추로지향(鄒魯之鄕 : 공자와 맹자의 고향으로 당시 유학이 가장 성했던 경상도지방을 일컫는 말)인 경상도지방을 목민하는데 남다른 각오를 가지고 교육과 주민의 교화에 주력했던 인물이다. 더욱이 그는 효명세자(순조의 아들)가 대리청정할 때 유교의 경전을 중시하여 경전을 보지 않으면 치국에 무익하다고 하였으며,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잡서를 보면 정력을 허비한다고까지 이야기하면서 세자를 권면하고 있다. 이어 성인이 경전을 지은 것은 독자로 하여금 그 문장을 암송하고 뜻을 익혀 사리의 당연한 바를 알며, 도의의 전체를 보고 힘써 그것을 행함으로써 성현에 나아가는 데 있다고 하였다.
특별히 그는 유학을 강조하여 우리 나라는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하게 여겨 습속이 병들었을 때는 형상(刑賞)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정학(正學)인 유학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병든 습속을 치유할 수 있다고 제창하였다. 이렇게 볼 때 이존수는 철저한 유교적 소양을 가지고 사학(邪學)인 천주교의 이입과 유혹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여기에 빠져 엄중한 형벌을 가함으로써 교화를 시도했던 을해박해의 중심인물이라고 하겠다. 이런 감사 앞에서 알렉스는 조금도 두려움없이 자기가 믿고 있던 교리를 조목조목 설파하고, 나아가 감사에게 천주교에의 입교를 권면한 것은 그의 불굴의 용기를 드러낸 것이며, 순교자에게는 항상 하느님이 함께 한다는 또 하나의 징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천주의 존재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그의 확신은 그 누구보다도 강하였으므로, 그는 경상감영의 감옥으로 이송된 후에 고문과 회유를 번갈아 가며 배교를 유도하던 경상감사의 유혹을 뿌리치고 신앙을 끝까지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책을 숨겨둔 곳은 다만 지명을 말했을 뿐 누구와 주고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엄하게 신문하고 조사하여도 한사코 바른 대로 고하지 않고, 흉측하고 모질기가 말할 수 없으니 빨리 해당되는 법을 시행하기를 단연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고 전하는 경상감사 이존수의 6월 19일자 장계에서 우리들은 확신에 찬 증거자로서의 김시우 알렉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끝까지 천주를 증거하여 1815년 10월 18일 사형선고를 받았고, 자기가 받은 선고에 서명을 한 후에 감옥으로 들어 가 처형의 날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경상도 지역은 혹심한 흉년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죄수들에게는 식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알렉스는 수중에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연명하였으나, 다른 죄수들처럼 짚신을 삼을 수도 없었던 그에게 수중에 돈이 떨어지자 지금까지 음식을 갖다 주던 여인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었다. 이 여인은 그를 나무라며 아무 것도 갖다 주지 않았다. 형벌로 쇠약해지고 굶주림에 시달려 알렉스는 대구로 이송되어 온 지 두 달 가량이 지나 옥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그의 나이 34세였다.
다블뤼 주교는 그의 비망기에서 김시우 알렉스는 불구와 재간과 재능, 관원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변호한 용기, 특히 동정신분으로 인하여 이 나라 사람들에게 귀한 존재가 되어, 이들은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자기들 교회의 영광 중의 하나로 삼고 있다고 전한다.
[월간빛, 2002년 10월호, 이경규 안드레아(대구가톨릭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