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은 실패할 권리가 있다.”
‘구름작가’로 알려진 강운(姜雲·45)이 5년 만에 개인전을 열면서 던진 말이다. 강운은 2000년부터 줄곧 캔버스라는 하늘 위에 변화무쌍한 구름을 담아왔다. ‘雲(구름 운)’이라는 이름부터 그의 삶은 구름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전라도의 무명작가에서 1998년 서울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전’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해 2000년 광주 비엔날레 참가, 2005년 도쿄 롯폰기의 모리미술관 초대전, 2009 체코 프라하 비엔날레에서 ‘어메이징(amazing)!’이라는 평가를 받는 화가가 되기까지 ‘구름’이 그를 키웠다.
‘실패할 권리가 있다’를 당당하게 외치는 강운의 이번 작품은 예전 그의 구름 시리즈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꽤나 당황스러울 만큼 변했다. ‘구름, 바람, 꽃 그리고 순수’라고 내건 전시 제목처럼 여전히 그에게 화두는 구름과 자연이되 물감 대신 화선지를, 붓 대신 가위를 든 것이다. 쪽물로 천연염색을 한 파란 캔버스 위에 화선지를 잘게 잘라 붙여 형상을 만들었다. 여러 번 붓질을 하듯 수없이 화선지 조각을 겹치다 보면 두껍게 붙인 부분은 구름이 되고, 날리듯 얇게 붙인 부분은 바람이 되고 여백이 된다. 그 위로 작은 꽃잎들이 무심히 날리고 있다.
전혀 엉뚱한 재료로, 훨씬 섬세해지고, 구상에서 추상으로 바뀐 작품 앞에서 그는 “변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예전의 구름 작품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엄청난 변화를 느낄 수 있지만 나는 달라진 것이 없다. 유화냐 한지냐, 매체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은 똑같은 것이다. 구상과 추상도 한 끗 차이일 뿐 단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는 직관에 의해 그릴 뿐이다. 전문가들이 알리바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온갖 해석을 붙인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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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수형태-바람, 놀다(143×73㎝)
- 강운이 ‘그의 구름’을 만난 것은 20년 전인 1991년이다. 전남대 미대 졸업 후 방황하다 진도 씻김굿을 구경하러 가는 도중, 전남 해남에서 우연히 올려다 본 그곳의 구름에 발목을 잡혔다. 빈 창고를 얻어 그대로 눌러앉았다. 스티로폼을 깔고 생활하면서 작업을 했다. 같은 전남대 미대 출신인 부인이 만삭의 몸으로 그를 찾아 왔다가 울면서 돌아갔다. “직업도 없고 앞길도 막막한 그림쟁이한테 딸을 맡길 수 없다”며 결사코 반대하는 장인을 설득하기 위해 그가 어렵게 교직을 얻은 후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한 이후였다. 아내는 집안의 반대와 싸우기 위해 ‘필살의 무기’로 모아두었던 수면제를 결혼 첫날이 돼서야 화장실에 쏟아 부었던 ‘독한 여자’였다. 결혼을 위해 얻은 교직을 6개월 만에 집어치운 그에게 “내가 먹여살릴 테니 걱정 말고 그리고 싶은 그림 실컷 그려라”고 등을 두드려 준 ‘통 큰 여자’였다. 그런 아내를 울리며 버텼던 해남 생활은 살던 곳에 불이 나는 바람에 2년 만에 끝이 났다. 빈털터리 상태로 그곳의 하늘만 마음에 담아왔다. 광주 인근에 있는 담양에다 터를 잡고 다시 시작했다. 큐레이터를 하던 아내도 일을 놓은 터라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그나마 정물 그림이 생계 유지를 해주었다. 쌀이 떨어지면 호박·감자·고구마를 그려 팔았다.
“동료 작가들이 유학을 가고 서울로 떠날 때 나는 시골로 점점 더 들어갔다. 담양에서 다시 화순 동복으로 옮겼다. 실업과 전업을 반복하며 다음 작품이 팔릴 때까지 버텼다.” 그에게는 먹구름만 가득하던 시기였다. 1997년 지역의 유망한 현대화가를 찾던 서울 포스코미술관의 눈에 띄면서부터 먹구름이 걷혔다. 지금도 갤러리들은 잘 팔리는 예전의 구름을 원하지만 그는 갤러리가 원하는 그림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한번 놀아보자는 생각으로 한지 작업을 시작했다. 무심히 한지를 자르고 붙여나가다 보면 생각도 단순해지고 형태도 단순해지면서 작품에 더 몰입하게 된다.”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다른 하늘’을 꿈꾸고 있었다. 꽃잎과 바람과 소통하면서 캔버스에 새로운 하늘을 열어가고 있는 강운의 ‘순수형태-바람, 놀다’ 시리즈는 서울 용산동 파크타워 비컨갤러리에서 6월 11일까지 만날 수 있다. (02)567-1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