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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을 냅시다.
본문/갈4:18절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삶은 게으름에서 떠나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열심있는”그리스도인의 삶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인의 모습입니다. 열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성경에 행전26장에 베스도 앞에서서 자기를 변명하는 바울에게 한 말이 생각납니다.
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그러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임금으로 모시고 성경을 알고 믿음의 좁은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하여 나의 삶으로 끌여들어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주제의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믿는다는 믿음의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딛2:14절에서,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선한일에 열심을 내는 삶을 살아라고 하십니다. 반면에 게으름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계시록 3장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책망의 말씀에 있습니다.(계3:19절)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오늘 이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는 목적은 직업에도 소명의식을 가지고 열심을 내어야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주님의 일에도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육신에 대한 일에는 열심을 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내세와 금생에 약속이 있는 이 거룩한 삶에는 무덤덤합니다. 열심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게으른 사람은 좁은 길로 들어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반대로 자기일에는 열심을 내는 자는 이기적이고 육적인 사람입니다. 영적인 새활력속에 주님의 부르심에 열심을 다하셔야 합니다. 광신자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모르고 그 부루심을 소망을 모른채 자신의 힘으로 열심을 낼때에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그게 광신자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열심당이라는 하나의 당파가 존재했습니다. 셀롯인 시몬이 바로 그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교 국가인 로마와 그 국가가 신봉하는 다신교에 대해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배척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공격적인 정치적 당파로서 유대인들의 민족적·종교적 생활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으며, 같은 유대인들일지라도 로마 권력자들과 평화와 화해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6년 로마가 갈릴리의 인구조사를 명령하자, 그 명령에 순응하는 것은 이교도들이 자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명백히 인정하는 행위라는 근거를 내세우며 민중을 규합하여 불복종운동을 벌였다. 열심당 가운데 극단주의자들은 테러 행위와 암살에 가담했기에 시카리(그리스어로 '단검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뜻)로 알려졌다. 그들은 단검을 품에 감추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자주 나타나 로마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죽였다. 로마에 대한 제1차 반란(66~70) 때 열심당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73년 마사다 요새를 넘겨주게 되자 집단 자살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다음 세기 초반까지도 여전히 인정받는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몇몇 학자들은 열심당과 사해 두루마리에 언급되어 있는 유대인 종교 공동체가 서로 관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본다. |
우리는 잘못된 열심자가 아니라. 성경적인 열심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때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되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일에는 열심이지만 거룩한 영적인것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저주하시는 그 엄한 명령을 내마음속에 새겨넣어야 할 것입니다.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그리스도인의 속성은 나태하고 굼뜨고, 편안하게 안이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죄악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열심을 내는 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함께 열심히라는 말씀의 뜻을 나누면서, 이 짧은 인생을 살면서 자기만의 열심히 끝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더 마지막이 가까움을 볼수록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자 라는 (롬12:11절)는 말씀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하신 말씀(엡5:18절)의 뜻을 갖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열심당이라는 당파가 있듯이 오늘 교회안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할 부분은
첫째로, 신앙에 열심을 낸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으로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모든 가능하고 합당한 방식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알리는 행위입니다. 이는 본성적으로 가질수 잇는 열망이 아닙니다. 회심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 갖고 잇는 것입니다. 그중에도 특히 교회안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있는 사람으로 불릴만한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계2:3절)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이 열망이 너무나 강해서 이 소망에 한번 사로잡힌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면 어떤 희생과 수고를 감수하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고난과 수고와 고생과 노력을 감내하며, 죽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합니다.
영적인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은 한가지 일에만 열중하는 사람이 됩니다. 열렬하다, 온 마음으로 한다. 지칠줄 모른다. 철저하게 한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런 사람이 신경쓰는 것은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만을 위해 삽니다. 한 가지 일에만 사로잡힙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합니다. 이 한가지 일,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위해서 사나 죽으나, 건강하나, 아프거나, 부요하거나, 가난하거나, 사람들이 기뻐하거나 싫어하나,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열심을 내는 그 한 가지만 이루어질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촛불과 같이 자신을 태움으로 어둠을 밝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르비딤 골짜기에서 적군과 마주할 때 여호수아는 군대를 이끌고 싸우기 위하여 전쟁터로 나가는데 그곳에 가지 못한다고 주저할게 아니라. 모세와 아론처럼 기도로 힘을 가세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자신이 직접 함여하지 못하면 다른 데라서도 돕는 손길이 일어날 때까지 주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않습니다. 신앙에 열심을 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수 많은 업적을 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것들이 바로 열심입니다. 정치와 학계와 여러 가지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일에 목숨걸고 뛰어든 사람입니다. 한가지 일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물붙듯이 쏟아내는 모습입니다.
특별히 과학계에 업적을 남긴 자들은 그 분야에 어떤 결과를 내기 위해서 얼마나 정신병자처럼 연구하는 지 우리는 잘 아실 것입니다. 전구를 발명하기 위하여 에디슨은 1천번 이상의 실패를 거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성공을 거둘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동일한 습관으로 정진하는 것이 바로 심앙의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몇일전에 대한민국의 큰 잔치같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대한민국 작가가 탄생하였습니다. 그 이름은 한강입니다.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그런 큰 상을 받을수 있을까요? 이제 큰일 났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완전 좌파작가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의 책은 불티나게 팔릴것이며 그의 좌파적 사상들이 이제 더 널리 파급효과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대표작 세편이 있는데 그게 전부다 완전 좌파의 책입니다. 우리교회 벤드에 올려놨는데 한번 여러분들에게 노파심으로 알려드리자면
그의 대표작 중에 하나가 채식주의자라는 소설인데요 이 책은 페미니즘을 나타내는 책입니다.
그리고 5.18광주 민주와 운동으로 “채색된 소년이 온다.” 라는 책입니다. 그리고 제주4.3사건을 북한적 시각으로 나타내고 있는 “작별하지 않는다”는 책은 제주 경찰이 시민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6.25전쟁을 이웃 강대국들에 의해 한반도에서 벌어진 대리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군이 남한 사람들을 위엄있는 인간으로 인식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단어나 문장들을 보면 전부다 북한에 가르치는 식의 소설입니다.
제가 감리사로 일할때에 감독으로 함께 일했던 분이 페이스북 SNS에 한강의 노벨상을 축하하면서 자신의 책꽂이에 “채식주의자”가 꽂혀잇는 것을 찍에 올려놓았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으로 개념없는 자의 모습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런 자들의 책을 읽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성경적 사고로 노벨상에 필적할 만한 책을 쓰는데 기독교가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개념없는 목회자들이 오늘 설교석상에서 한강을 칭찬하며 또 필독서로 권장하지 않을까 염려가됩니다.
몇 년전에 대한민국교회에서 대표적인 목사님이 제주4.3사건의 주동자인 북한 인민 최고대의원인 김달삼입니다.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의 주범으로 북한에 의해 조종받아 대한민국을 적화통일 하려고 하던 북한에 조종을 받던 자입니다.
#1. 대한민국 최대 공안사건 '통일혁명당' 속 간첩망(間諜網), 여전히 유효하다! 기자는 최근 통일혁명당에 대한 대공수사(對共搜査) 보고서 내용이 담겨진 30년 전 작성됐던 주요 문서집 사본 일부를 입수했다. 해당 문건에서는 北 공작사업지침서 등의 내용이 적나라하게 수록됐다. 지금까지도 북한에서는 통일혁명당에 대해 '재남 운동권 혁명단체'로 소개하며 우표를 발간하고 있다는 점에서 통일혁명당 속 공작망의 실체는 이번 사건의 숨겨진 모습과 오버랩될 수 있는 부분이다. 통일혁명당의 '간첩망(間諜網)'은 <<북한대남공작사업 제1권>> 속 내용에 따라 구성됐다. 그중에서도 ▲ 단선연계 조직화 ▲ 합법적 보장조치 ▲ 재남 각계각층 역량 축적보존 사업 등이 관건이다. 특히 '단선연계 조직화'의 경우, 최근 기자가 만난 원로 대공수사 관계관은 "지하당을 조직하면 연결망 형태를 단선과 복선으로 만드는데, 단선의 경우 공작원이 정계 등에서 A를 전취(포섭)하면 B와 C까지 엮어내는 일종의 공작망"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기자는 앞서 예고한 단선 연계형 조직화 방식을 비롯한 이 세 가지 조직화 준칙에 따라 통혁당 사건의 전말과 현 정치세력과의 연관자들을 밝히고자 한다. 기자는 최근 통일혁명당에 대한 간첩수사 보고서 내용이 담긴 30년 전 주요 문서집 사본 일부를 확인했다.2021.08.07(사진=조주형 기자) #2. 현 정부 주요 인사 모두 엮인 '통일혁명당'···대체 어떤 조직이길래?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한다고 밝힌 故 신영복은, 지난 2017년 1월15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에서 1기 추모식 주인공이 됐다. 이 자리에 문재인 대통령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가 자리를 참석했는데, 그는 이 자리에서 "내년에는, 선생님이 강조한 '더불어숲'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씀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신영복은 경남 밀양 출생으로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와 동 대학원을 나와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지냈다. 그는 1966년 2월 통혁당 위원장 김종태에 이은 김질락 민족해방전선 책임비서에게 포섭돼 '민족해방전선 조직비서' 및 '청년학생 지도책'을 맡았다. '민족해방전선 조직비서 및 청년학생 지도책'으로써 신영복은, 이종태·노인영(과학기술처 행정주사)·박성준(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남편)·이수인(법무장관 비서, 공군 정훈장교)·심재주('청맥' 기자)를 포섭하기에 이른다. 기자는 최근 통일혁명당에 대한 간첩수사 보고서 내용이 담긴 30년 전 주요 문서집 사본 일부를 확인했다.2021.08.07(사진=조주형 기자) 그가 조직비서로써 활동했던 '통혁당 민족해방전선'은 8개 대중단체를 만들어 기층민중을 잠식해 나기기 위한 첫 작업에 돌입했다. 일종의 '당 사업'이었는데, 세포조직인 '통혁당 소조'를 만들어 여타 혁명 인자(因子)를 늘려나갔다. 그에게 포섭됐던 서울대 출신 이종태는 서울대 상대를 중심으로 한 '경우회'를 만들었고, 노인영 또한 서울대 문리대를 중심으로 '동학회'를 조직화하면서 기세춘과 김형래 등을 끌어들이기에 이른다. 기세춘은, 훗날인 2021년 4월16일 문재인 대통령이 방역기획관으로 임명 지명하는 기모란 국립암센터 국제암대학원대학교 암관리학과 교수의 부친이다. 그외에도 신영복이 포섭했던 박성준은, 기독교 계통의 학생을 기반으로 둔 기독청년경제복지회를 조직 운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내 한명숙(훗날 대한민국 제37대 국무총리 및 故 노무현 대통령 장의위원장)을 포섭한다. 이수인 역시 그의 아내를 끌어들였다. 기자는 최근 통일혁명당에 대한 간첩수사 보고서 내용이 담긴 30년 전 주요 문서집 사본 일부를 확인했다.2021.08.07(사진=조주형 기자) [출처] [탐사기획] 박지원 국정원 속 통혁당 신영복의 '스텔스 여론전 공작 사건' 간첩망 추적|작성자 DK의 세상 바로 보기 |
이런 사람을 존경한다고 설교석상에서 말하는 목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습관처럼 배어 잇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행20:24절)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또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을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하시기 위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말씀입니다.(빌3:13-14절)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변화된 때부터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성경을 통해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신의 세상적인 야망을 포기했습니다. 결혼도 포기했습니다. 그의 삶을 그리스도를 위해 모두 바쳤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협박과 고난을 받으면서 에수님을 증거하러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는 회심때부터 자신이 잔해하려던 예수님을 순교하기 까지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추구해야할 열심입니다.
이는 또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중의 하나입니다. 그때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행28:22절에 잘 나타나 있는데
“어디서든지 반대는 받는”사람들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드러내놓고 예배모임을 가질수 없었습니다. 밀실에서 숨어서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믿음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해야 했습니다. 믿음 때문에 핍박과 비판받는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때로는 사자들의 밥으로 사자의 우리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대표적인 순교자 이그나티우스의 말을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사자의 우리에 던져졌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야 내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구나”
로마 총독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라는 요구를 받은 폴리갑이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십 하고도 육년을 그리스도를 섬겨왔습니다. 그동안 그분은 단 한번도 나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런 나의 왕을 부인해서 그분을 욕되게 한단 말입니까?” 상상할수 없는 그리스도에 대한 열심의 표현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루터의 이야기도 빼 놓을수 없습니다. 돈으로 성직 매매가 일반화되었고, 성전을 짓기위해 천국가는 티켓까지 팔고 있는 잘못된 천주교를 향해 진정한 구원의 횟불로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이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결국 출교를 당하고, 죽음의 위험앞에 서게되었습니다. 그는 교황들과 루터를 죽이려는 그들의 재판정에 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곳 보름스의 의사당 지붕의 모든 타일마다 마귀가 덕지덕지 붙어서 나를 공격한다고 해도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계속 이 길을 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열심입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의 열심도 전혀 뒤지지 않습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며 성공회 목사로서 출교를 당하자, 창녀촌에서, 탄광촌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감리교인이었으나 후에 구세군을 창시한 윌리암 부드는 어느날 왕앞에서서 그는 외치기를 “위대한 폐하시여! 어떤 사람의 야망은 예술입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명성입니다. 어떤 사람의 야망은 황금입니다. 그러나 폐하시여 나의 야망은 사람들의이 영혼입니다.” 라고 외치며 복음을 전하여 오늘날 구세군 단체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이땅에 계실 때 어떤 자로 불리움을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이땅에 메시야로 오시기 전에 많은 선지자들중에 그분에 대해서 예언하시기를
사59:17절에서“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신”분으로 묘사했습니다.
시69:9절에서는 예수님을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으로 삼킴을 받을 분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4:34절에서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열심을 예로 들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그것은 사복음서가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발바취를 따라가면 알수가있습니다. 그분은 공생에 처음부터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심까지의 모든 사람의 기록을 찬찬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시며, 대목자장이 되시는 예수님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 열심은 열심 그자체가 되십니다.
우리가 믿는 그 예수님의 아름다운 면모중 열심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잘못된 열심은 위험합니다. 이땅에서 그런 위험성을 많이 나타내고 있는 말들이 있습니다. 무식한자가 열심을 내면 손발이 고생한다고요....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만난 자들이 열심을 낼때에 모든 불이익이나, 주위에서 눈총, 때로는 광신자라는 찬물을 끼얹는 말에 신경쓰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정죄하는 말에 부화뇌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하신 예수님을 거스리는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벧전2:21)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닮지 않고 그를 따르는 사도들과는 별도로 잘못된 신앙의 길을 걷는 자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광신자들이나. 종교의 극단주의자들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그런 자들이 있었습니다.
종교적 열성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예수님 시대의 안나스와 가야바, 빌라도와 헤롯, 베스도와 아그립바같은 자들입니다. 이들과 잘 어울리는 잘못된 신앙인들도 많습니다.
두 번째로, 무엇이 진정한 열심인지 알아보시겠습니다.
사탄은 흉내 내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들을 다 흉내내고 있습니다. 고가의 지폐일수록 위조가 많듯이 말입니다.
좋은 것일수록 모조품들이 판을 칩니다. 영적인 세계에도 똑같습니다.
네로는 잔인하게 예수 믿는 자들에게 들짐승의 가죽을 씌워 달아나게 한뒤, 개들로 그들을 뒤 쫓게해서 물어뜯게 했습니다. 사탄의 계략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앞에 잘못된 신자들의 모습을 들이대어서 기독교의 은혜가 사람들의 멸시 거리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의 열정과 열심만큼 사람들에게 왜곡시키는 것도 없습니다. 열심만큼 가짜도 많고, 사람들이 오해도 많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열심과 관련된 주변의 모든 허탄하고 부질없는 생각들을 정리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실로 선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열심히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1)지식에 따른 열심히 참된 열심입니다. 맹목적이고 무지한 열심히 광신입니다. 성경에 부합하는 진중하고 합리적이고 지각이 있는 원리를 따라 한 걸음씩 내딛는 열심입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도 자기들의 원리로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롬10:2절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바리새인이었던 사울 역시 열심히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히 있는자”였다고 자신을 행22:3절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므낫세도 열심히 우상숭배 했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열심을 추구했나하면 성경에 보시면 자기의 낳은 어린 핏덩이를 불가운데로 지나가게 할 정도로 열심을 다해 우상숭배 즉 몰록을 섬기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던 야고보와 요한은 어떻습니다. 그들이 사마리아로 지나갈때에 그들이 자기를 영접하지 않는 것을 분하게 여거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멸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잡아가려던 대제사장의 수하들의 귀를 칼로 잘랐습니다. 말씀에 부합하지 않았지만 과히 그들을 따를 열심은 인정해야 할 정도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안에서도 이런 열심을 얼마든지 찾아볼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안에는 간절한 마음으로 열심을 다했던 자들을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열심히 아닙니다. 하나같이 “지식에 따른 열심”이었습니다.
(2) 참된 열심을 내기 위해서는 동기가 발라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간교해서 나쁜 동기를 가지고 좋은 일을 하기도 합니다.
유다왕 아마시야와 요아스가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동기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선하고 바른 일에 열심을 낼 동기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열심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못쓰게 된 물건과 같은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면 전혀 가치 없는 열심입니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동기를 보십니다. 사람은 얼마나 많은 일들을 이루었는지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을 보십니다.
집단 이기주의에서 나오는 열심도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에 은혜가 없으면서도 자기가 속한 교회나 교단의 일에 증진하는 데에 힘든 줄 모르고 열심을 낼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도 않고, 그분을 알지도 못하면서도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도 자신이 속한 기독교 종파에 헌신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열심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들을 보고 예수님은 한마디로 다음과 같이 평가하십니다.(마23:15)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이것은 참된 열심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최종적인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바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한 이기심의 발로로 열심도 낼 수가 있습니다. 경쟁적으로 말입니다. 신앙에 열심을 내는 것으로 큰 이득을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의 옷을 입어서 세상의 좋은 것들을 얻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는 항상 가식적인 거짓 열심히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인본적으로 열심을 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알을 숭배했던 예후의 열심히 바로 그런 열심이었습니다. 성경 열왕기하 10장에 레갑의 아들인 여호나답을 만나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왕하10:16)
16 이르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고 하는 천로역정에 보시면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사람들의 “칭송”을 얻기 위해 시온산으로 길을 나서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칭송을 얻기 위하여 이런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짓되고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도 상당한 자기 희생이나 헌신을 할수 있다는 사실은 사람이 얼마나 타락할 수가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이 고전13장에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고전13:3절)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내어던져 구원하여 주셨던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는 체험하지 못해도 그렇게 할수 있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광야로 나아고, 수도원에서 한평생 칩거해도,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아닐수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지 않아도 받은 자보다 더 크게 자신을 헌신하는 열심을 낼수가 있는 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아무리 고상하고 대단하게 보일지라도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된 열심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이땅에 속한 일일 뿐 하늘에 속한 일은 아닙니다.
(3)참된 열심, 바른 열심은 항상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가장 고상하고 탁월한 열심을 예로 들어본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거룩함을 이루고자 하는 열심입니다. 이런 열심을 가진 자들은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대하고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기 위해서라는 못할일이 어디 있겟습니까?
예수님을 더욱더 닮기를 원한다면 어떤 희생도 기꺼이 감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중 바울이 바로 그러한 자입니다. 그는 그런 모습은 고전9:27절, 제가 제일로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그중 또 대표적인 열심을 말씀드린다면 영혼구원에 대한 열심입니다. 이런 열심을 가진 사람은 수많은 영혼들을 뒤덮고 있는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고자 불타오릅니다. 자신이 만난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도록 안달이 난 자입니다. 예수님을 소개해 주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도 그렇습니다. 그분은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을 완성하기 위하여 내의 음식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밥먹을 틈이 없었습니다.(막6:31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바울도 그러합니다. 모든 이들에게 예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전9:22절)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참된 열심은 악한 습관과 행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잘못된 제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을 없애기 위해 힘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존귀한 이름을 드러내기 위하여 열심히 타오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에 침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거스르는 일을 가장 큰 죄로 여깁니다.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이런 사람입니다. 구약에 우상을 척결하기 위하여 노력한 이들이 대표적인 자입니다. 히스기아와 요시야입니다.
참된 열심은 성경의 진리를 지지하고 지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사상과 교육과 이념 앞에 침묵하지 않습니다. 신앙적 오류를 희생을 치르고라도 막아내야 하는 자입니다. 잘못되고 변질된 복음 앞에 끝까지 잘못된 것들을 지적합니다.
가장 큰 중요한 것인데,
(4)참된 열심은 인애와 사랑으로 조화를 이룹니다.
냉혈하고 신랄하고 약독한 열심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적개심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칼과 같은 육체의 병기로 무장하는 열심히 아닙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경고할때에 어머니가 자녀를 타이를 때의 마음으로 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것처럼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는 단호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뱀들아...”
참된 열심은 단호합니다. 생명을 위협하며 몸을 썩게하는 병균을 대하는 의사처럼 그렇습니다. 동시에 부드럽습니다. 부드러워서 형제의 상처를 싸매줍니다.
(5)중요한것인데 참된 열심은 항상 깊은 겸손을 동반합니다.
진실로 참된 열심은 자신의 성과물을 나타내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욕구를 이루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히려 자신의 무익함을 나타냅니다. 그저 하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에 놀라기만 합니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그랫던 것처럼 자기 얼굴을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지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참된 열심이란, 앞서 가르쳤던 것처럼 지식에 부함하는 열심, 참된 동기에서 비롯된 열심, 성경의 모범에 부합하는 열심, 사랑으로 옷입은 열심, 깊은 겸손을 수반한 열심이 바로 참된 열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열심입니다. 이런 열심은 아무리 많아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 영적으로 건기를 지나는 메마른 시대에 우리는 참된 열심이 회복될 때이며 그러하기 위해서 이 열심히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리고 참된 열심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무지해도 열심만 있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열심있는 삶을 인정해 주신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열심을 내는 것이 우상이 될수도 있습니다. 열심을 낼수록 잘못된 길로 갈수가 더 많습니다. 어찌하든지 열심만 잇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른 신앙적인 열심은 우리를 천국으로 안전하게 이루게 합니다. 하나님은 열심있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두가지로 심판하십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 주인이 대답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하여 ,(마태복음25장)
이것은 특별한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시149:4) 어린아이부터,큰자까지 어둠의 권세와 치열하게 싸우는 전쟁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로 서기 위하여 영적인 열심을 회복된 자들로 살기를 바랍니다.
성격적으로 소심하고 내성적인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십니다.(시103:13)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심으신 영적인 나무들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국 토양에서 생기를 잃어 허약에 빠진 사람들도 많지만, 예수님이 친히 정원사가 되시어 손수 키우는 식물을 사랑하고 힘써 돌보듯이 그분을 의지하는 불쌍한 죄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 주님은 오늘 열심을 다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으신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은 방식으로 드러내십니다. 이런 분들이 바로 하나님과 합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한 모든 일들에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상을 주실 것입니다.
물론 마태5:10절에서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상을 받을 것입니다. 열심잇는 한분을 통하여 모든 이들에게 여러 가지 좋은 영적인 자료가 됩니다.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교회를 더 아름답게 세웁니다. 여러분 마지막때에 죄악이 창궐한 이때에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에게 덕을 세워나가는 자로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믿는자들 중에 게으른 자는 없습니다. 부지런한 자들입니다. 열심잇는 자들입니다. 이런자들에게는 하늘나라가 가까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지 않겠습니까? 열심을 냅시다. 다시 회복합시다.
우리 다함께 이런 열심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 앞에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심판을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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