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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명의 새벽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 했다(헤로도토스) 아비시니아 고원에서 발원하는 청나일과 아프리카 중부 빅토리아호에서 흘러오는 백나일이 합쳐진 나일강은 해마다 일어나는 범람으로 인하여 6,600여km의 강변에 형성된 비옥한 토양에 일찍부터 문명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알려진 역사만 해도 고대 30개 왕조를 포함하여 약 5천년에 이른다. 이른바 인류 문명의 발상지로 꼽히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 문명 중에서 가장 문명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고 숱한 미스테리를 불러 일으킨 이집트의 문화유적 답사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그 현장으로 떠나게 됐다.
3월 중순이라 그리 덥지 않는 시기였지만, 현지 치안이 우려되어 아랍에미레이트를 경유하는 패키지 여행상품으로 마누라와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부르즈칼리파 전망대 관람을 위시한 화려한 두바이의 밤을 보내고, 다음날 이집트 카이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벼르고 별렀던 문명의 발상지에 드디어 발을 닿았다는 흥분과 설레임으로 가득찼지만, 막상 아스완으로 가기 위해 기차역으로 가는 길은 자동차로 범벅이 된 교통지옥이었다. 2시간여의 사투끝에 간신히 우리나라 무궁화급이 연상되는 낡은 야간 열차에 올랐다. 아뭏튼 아스완까지는 860여 km 13시간 정도 소요되어 내일 아침에 도착한다고 해서 느긋하게 침대에 몸을 맡겼다.
2 나일강을 따라난 문명의 흔적들
1)아스완과 아부심벨
종려나무가 늘어선 나일강의 새벽을 기차는 달려가고 있다. 우리가 앉아있는 창가는 나일강 서쪽 풍광으로 도배되어 있다. 녹색 숲 너머 멀리 황량한 사막과 드문드문 무덤들이 보인다. 이집트인들은 해가 뜨는 동쪽을 산 사람의 세계, 서쪽을 죽은 사람들의 세계로 구분지었다고 한다. 더없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이윽고 이집트 제3의 도시 아스완에 도착했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스완댐으로 향했다. 1971년 완공된 아스완 하이댐 호수 멀리 필레신전이 보인다. 이 댐으로 인해서 원래 이곳에 있었던 아부심벨 신전이 수몰될 위기에 처했는데, 현대 과학의 힘으로 해체하여 고도가 65m 높은 상류 지역으로 이전할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마 엄청난 분해 작업이었으리라. 이를 주도한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에 대한 애착에 경의를 표한다.
오후에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나일강의 전통 목선 펠루카를 탔다. 전적으로 바람에 의해서 움직이는 배로서 예로 부터 나일강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다고 한다. 타고 보니 강물의 경사가 급하지 않아 마치 평평한 호수위에 떠있는 것 같다. 배는 이집트 남쪽의 소민족인 누비아 사람 2명이 운행하고 있었다. 다소 마르고 피부는 햇빛에 그을렀지만, 사람좋은 모습으로 각종 엑세서리를 팔고 있었다. 그중에서 나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준다는 신물이라고 하는 나무로 만든 앵크 십자가를 집어 들었다.
다음날 새벽 고대 신왕국의 람세스 2세가 조성한 아부심벨 신전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아스완 남쪽, 수단 국경쪽으로 280km 정도, 3시간 정도 가야 하는데, 드넖은 사하라 사막사이로 쭉뻗은 아스팔트 도로가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는 것 같아 묘한 느낌을 받았다.
아부심벨 신전은 나일강 기슭의 벼랑을 뚫어 만든 암굴 신전으로 1817년 조반니 벨초니(1778~1823)가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신전 전면 람세스2세가 앉아있는 4개 거대 석상이 위압감을 주는 가운데, 내부로 들어가니 여러 기둥이 들어찬 전실이 나왔는데, 관광객들에 밀려 내부 전체를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높은 기둥과 천정 사이사이에는 오시리스, 호루스 등의 이집트 전통 신들의 석상과 그림들이 채워져 있었고, 벽면에는 람세스 2세가 신들에 드리는 경배 장면이나 재위 당시의 업적이 부조되어 있었다. 계속 30~40m 정도 지나 이윽고 람세스 2세가 아몬신을 비롯한 세 신들과 나란히 앉아있는 지성소에 이르렀다. 어두컴컴한 맨 안쪽임에도 일년에 두번은 태양이 이곳을 비집고 들어오도록 설계되어 있다니, 역시 고대 이집트의 세심한 건축기술에 탄복할 수 밖에 없었다.
신전 바로 옆, 네페르타리 왕비를 위한 하토르 신전에도 들렀다 나오니, 이미 눈부신 아침 햇살이 아스원댐 나세르호의 물살을 타고 아부심벨 신전앞 석상들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멀리 지평선 부근에서 섬같이 물에 떠있는 듯한 신기루를 봤다. 이러한 빛의 굴절에 의한 착시현상에 옛날 사막을 오가는 대상들도 애를 먹었다지. 아마, 우리 인생도 신기루와 같은 꿈이나 연극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이 모습을 보면서 로마의 금언인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가 문득 떠오른다. 로마군의 개선 환영식에서 되내었다는 '죽음을 생각하라' 라는 뜻으로, 혹시 인간이 혹시 가질 수 있는 자만심을 경계하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 같다. 그 의미를 생각해서 그런지 아직도 내 휴대폰의 배경 문구로 쓰고 있다.
2)신화와 역사
이집트 신화에 의하면 '만물의 창조주인 태양신 아톤은 대기의 신 슈와 습기의 여신 테프네트를 만든다. 이 두 신이 결합하여 대지의 신 게브와 하늘의 여신 누트를 낳고, 이들 사이에서 오시리스와 이시스, 세트와 네프티스 네 형제가 탄생하는데, 자연스레 장남인 오시리스가 이집트의 통치를 맡게 되나, 이를 시기한 남동생 세트가 형인 오시리스를 조각내 죽이는 비극이 일어난다'
'그러나 여동생이자 부인인 이시스가 그 시신을 수습, 재활시키고, 오시리스와 이시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호루스가 성장한 후 복수에 나서 세트를 쳐부수고 다시 왕으로 복귀한다'
라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가 탄 나일크루즈는 호루스신을 모신 콤보 신전과 에드푸 신전을 거쳐 고대 중왕국 이후의 주도였던 룩소르에 도착했다. 옛날 테베로 불렸던 이 도시는 가히 문명의 야외 박물관이라 할만큼 유적의 보고였다. 나일강 서안에는 죽은 자를 위한 왕가의 계곡, 하트셉수트 장제전, 멤논의 거상 등의 유적이 있고, 나일강 동안에는 카르나크 신전, 룩소르 신전 등 유적외에도 시장과 거주 주택 등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공간이 있다.
먼저 나일강 서편 죽은 자의 공간을 갔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소멸해도 영혼(카와 바)는 남아서 그들이 쉴 수 있는 내세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세속의 권력과 더불어 신성을 함께 갖고 있는 파라오는 죽어서도 신들의 세계를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사관이 죽어서도 부활할 수 있는 미라나 무덤에 집착하는 이유인 것 같다.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의 무덤이 있는 왕가의 계곡은 대부분 도굴이 되었지만, 아멘호테프 4세(아케나톤)의 뒤를 이은 소년왕 투탕카멘의 무덤만이 1922년 하워드 카터(1874~1939)에 의해 새롭게 발굴되어 금빛 마스크를 비롯한 3천여 점의 유품이 이집트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인류의 찬란한 문화유산으로서 발굴 당시, 세계적으로 센세이션한 이슈를 불러 일으켰다 한다.
하지만, 나일강 서안의 또 하나의 명작은 바위산 절벽 깊숙히 자리잡은 하트셉수트 장제전이었다. 고대 중왕국시대 투트모스2세의 왕비로 후일 고대 이집트 왕조 유일의 여왕에 올랐던 하트셉수트의 장례 사원으로지어진 3층 테라스 건축물은 절벽이라는 병풍위에 그려진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이 장엄하고 아름다웠다. 균형미가 돋보이는 좌우 대칭형의 이 장제전 곳곳에서 아몬과 하토르신의 은총이 여왕에게 내리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었다. 다만 벽면의 여왕 얼굴부분은 대부분 훼손되어 있었는데, 이는 파라오를 물려받은 투트모스 3세가 여왕 재위중 소외되었던 데 대한 복수심에서 취한 행동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나일강 동안의 룩소르 시내에서의 압권은 단연 태양의 신 아몬-라를 모신 카르나크 신전이었다. 중왕국 이후 역대 파라오들이 증축에 증축을 거듭한 결과, 둘레가 최대 15m, 높이 23m와 15m의 기둥이 134개가 세워져 있는 대열주실을 비롯하여 수많은 석상과 주랑, 지성소 등으로 이루어져 가히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신전 입구부터 40여개의 숫양머리의 스핑크스가 파숫꾼처럼 도열하고 있을 뿐 아니라, 높이 40여 m의 탑문 등 요소요소에는 람세스 2세와 3세 등 파라오들의 석상이 버티고 서있는 데다, 신전 중앙홀 근처에는 현재 이집트내에 몇개 남아있지 않는 오벨리스크도 2개가 세워져 있어 신전의 무게감을 더하고 있었다. 비록 오벨리스크에 씌여진 상형문자는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파란 하늘 높이 우뚝선 아름다운 자태에 반해 나도 하트셉수트 여왕이 세운 오벨리스크 앞에서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현대 기술로도 쉽지 않을 이러한 거석 건축물을 수천년전에 이미 정교한 솜씨로 축조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카르나크 신전을 나와 마차를 타고 록소르 시내를 둘러보았다. 보다 많은 팁을 노린 듯 자신의 궁핍한 사정을 연신 떠들어대는 마부의 말을 흘려 들으면서 오래된 회색빛 도시 내부로 들어갔다. 시가지, 시장, 호텔, 상가건물 등등.... 그리 깔끔하지는 않았지만, 활기찬 군상들이 내뿜는 삶의 열기를 흠뻑 맡을 수 있었다.
룩소르에서의 추억을 뒤로 하고 우리는 동북방 홍해변의 휴양도시 후루가다에서 하룻밤 머물렀다. 붉은 산호의 영향으로 홍해라 했다는 바다는 실제로 너무 광활하여 성서에 모세가 이집트 탈출시 바다를 갈랐다는 것이 믿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휴양도시답게 모든 게 깨끗하고 편안했다. 하얀 리조트를 비롯하여 에머랄드빛 바다, 파아란 하늘, 그리고 초록색의 열대성 나무들이 어울어져 이국의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스쿠버 다이버들의 천국이라는 이 곳에서 감히 바다에 뛰어들지는 못하고, 대신 베란다 쇼파에 누워 밤하늘의 별들을 세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내일은 다시 카이로로 간다.
3 카이로
1) 고고학박물관
고고학박물관에서의 가장 큰 관심은 역시 투탕카멘의 유물이었다. 파라오 재임시 별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파라오 무덤들이 도굴되는 와중에서 파라오의 미라와 황금관을 비롯 전차, 가마, 침대, 향수 항아리 등 3천여점의 유물들이 천우신조로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얼굴을 덮는 황금 마스크는 일약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그들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2층 별실은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 박물관에는 모두 10만여 점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고고학적 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핵심 유물을 짚어 내기도 힘들었다. 각종 석상과 석관, 상징물, 미라, 상형문자와 그림, 부장물 등등 그게 그거인 것 같았다. 거기다 이집트 역사도 밝지 못하여 멘투호테프 2세, 투투모스 3세, 아멘호테프 3세 등 파라오들도 혼동하기 일수라 마치 미로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다만, 고대 이집트의 그림을 보노라면 특이한 현상이 보였다. 사람이나 동물의 얼굴과 상반신은 정면을, 팔과 허리,하반신은 옆을 향해 그리며, 사실적인 관점의 원근법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게 궁금해서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사실적인 회화를 추구하면 그 특징이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영원성을 추구하는 신전이나 분묘에는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다.
관람이 끝날 무렵, 출입구 근처의 작은 홀에 들어가니 많은 석상들 중앙에 벤벤(Benben)이라는 현무암이 비치되어 있었다. 태초 암흑의 물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 정사각뿔 스톤에는 영원한 태양신을 상징하듯 태양신 라와 파라오에 대한 신화를 상형문자로 쓰여 있었는데, 주로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 꼭지를 장식하기도 하고 영적인 힘을 부르는 사제들의 신물로 만들어지기도 한단다. 모습도 정교하거니와 웬지 모를 힘에 이끌리듯 한동안 거기서 머물렀다.
박물관을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 시절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카이로에서 머물었던 아기예수 피난교회에 들렀다. 교회 천장은 노아의 방주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지하 동굴에는 피난 당시의 생활 도구들과 우물터 등 거주공간들이 앙증맞게 마련되어 있었다. 이집트에는 BC 42년 기독교가 들어왔는데, 한 때 이곳은 이집트 기독교(콥트)의 본부 역할을 했단다.
이슬람이 대부분인 이 나라에 초기 콥틱 교회가 있는 데에 신기했는데, 그러고 보니 문명의 발상지 답게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가 모두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지역에서 태동하여 발전해온 데다, 교리나 계율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 유일신 숭배, 예배 의식, 돼지고기 식용 금지 등등...
아마도 사막의 특성이나 대상들을 통한 접촉 등으로 종교도 서로 닮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2) 알렉산드리아
약 3천년 가까운 고대 이집트왕조를 끝내고 BC 4세기말 알렉산더 대왕이 새로 건설한 지중해연안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나일강 하구 삼각주의 한쪽을 점하고 있는데다, 알렉산더는 물론 율리우스 시저나 클레오파트라, 나폴레옹 등 역사상 영웅들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 은근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카이로에서 2시간여 만에 도착한 알렉산드리아는 과거 프톨레마이우스 왕조의 수도로서 한 때 50만권의 장서가 소장되어 있었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비롯하여 로마시대 원형 극장, 이슬람 왕가의 여름별장이었던 몬타자 궁전, 카이트 요새 등 과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에 걸맞게 많은 문명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카이트 요새앞 지중해 바다에는 세계 7대불가사의의 하나인 파로스 등대가 서있었다고 했다. 해변에 우두커니 서서 그 옛날 클레오파트라가 시저를 맞이하던 장면을 그려 보다가, 근처 식당에 들러 닭고기와 야채에 소위 걸레빵이라는 순밀가루로 구운 애시빵을 곁들인 점심 식사를 하고 카이로로 돌아왔다.
4 기자의 피라미드
1) 여전한 미스테리
"기자의 피라미드를 보지 않고 이집트를 말하지 말라"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날 카이로 서쪽 13km에 있는 기자 지역으로 향했다.
남아있는 지구 최대의 불가사의로서 수많은 관심과 추측을 불러 일으켰던 이 3개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아직까지 그 축조 목적이나 방법, 조성 시기 등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사실 이 3개 피라미드가 석재위의 낙서나 밸리신전에서 발견된 석상이나 비석 등을 근거로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 피라미드라 일컬어지긴 하지만, 정말로 BC 2500년경에 이 파라오들이 축조했는지도 여전히 의문시되고, 그 축조 방법 역시 석재의 채굴, 가공, 운반, 건립 등 과정에서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인지 아직도 의문시되고 있다. 축조 목적도 미스테리이긴 마찬가지이다. 파라오의 분묘로 보기에는 미이라나 부장품은 물론 벽화도 전혀 발견되지 않아 하늘과의 제사나 교신 을 위한 시설, 천문관측소, 심지어는 발전 설비라는 등 분분한 추측이 나오고 있다.
2) 대피라미드의 구조
이른바 대피라미드라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정확히 동서남북 방위에 맞춰진 한변이 230m 높이가 146m인 정사각뿔 형태로 거석 230만개, 600만톤이 소요되었다 한다. 이러한 거대 건축물을 어떻게 옮겨와서 정밀하게 축조했는지 현대 과학으로서도 설명할 길이 없다. 앞서 9세기경 발견된 통로를 따라 내부로 들어가 봤다. 40~50m 정도 경사로를 올라가니 이른바 왕의 방이라는 장방형의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텅빈 섬록암 석관? 하나가 구석에 놓여 있었을뿐 아무것도 없었다. 이방의 목적이나 용도는 모르나 기하학적으로 이 피라미드 바닥면적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상 45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피라미드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천문학적인 해석이 있는데, 기자의 3개 피라미드의 꼭지점을 연결하면 오리온좌의 3개별과 배치와 일치하고 그 크기도 별의 밝기에 정비례한다는 것이다. 특히 대피라미드가 서있는 지점을 기준으로 동서남북 측지 거점으로 역할을 하고 있으며, 피라미드 밑변을 원호로 변형하면 지구의 북반부를 43,200 배율로 축소한 모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더욱 신기한 것은 기자의 피라미드 이후 축조된 다른 피라미드의 기술적 완성도가 확연히 조악하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기술이 발전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집트 피라미드의 경우 그 반대인 셈이다.
3)스핑크스
한편, 피라미드 동편에 파수꾼처럼 쭈그리고 앉아있는 스핑크스는 오랜 세월동안 사막 모래에 덮여 있었는데, 바위산을 그대로 깎아 얼굴은 사람, 몸체는 사자모양을 한 길이 73m 높이 21m의 석상으로서, 이 역시 그 조성 목적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축조방법과 시기도 미스테리에 싸여 있다. 특히 스핑크스 앞쪽의 밸리신전이나 스핑크스신전에 사용된 무게 200톤이상의 거석들을 어떻게 다룰수 있었는지 아직도 적절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조성 시기와 관련하여 일부 천문학적인 견해로 스핑크스가 사자자리의 춘분시 일출 방향을 향해 있을 때였다고 하면, 이에 해당하는 천체도는 BC 10,450년으로 보고 있는 한편, 지질학적으로는 스핑크스 몸체의 물에 의한 침식 상태로 판단하건대, 비가 많이 내린 빙하기 말기인 BC 11,000 ~ BC 10,000년 정도에 축조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4) 신의 지문일까?
그레이엄 핸콕(1950 ~ )은 그의 저서 '신의 지문' 에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에 대한 다양한 미스테리를 소개하고 아주 오래전, 특히 빙하기 말기였던 BC 11,000 ~ BC 10,000년 전후의 지각변동이나 기후변화로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초고대 문명이 존재했다는 표식, 즉 신의 지문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흔히들 아틀란티스 대륙이라고 하는 사라진 초고대 문명과 관련하여 남극 대륙이 발견되기 훨씬 이전에 발견된 지도상에도 남극 대륙이 표시되어 있었다면서 아마도 이 남극 대륙을 덮고 있는 얼음 밑에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5 신의 섭리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영원한 내세를 보장받으려면 심장이 죄로 더러워지지 않음을 증명하는 절차로서 명계(冥界) 오시리스 신앞의 저울에 죽은 자의 심장과 마트 여신의 깃을 각각 올려 놓아 심장이 놓여진 저울추가 내려가지 않아야 한다. 마치 염라대왕의 심판이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디케의 저울을 연상하는데 여기서 마트(Maat)란 인간이 만든 업보나 정의의 잣대라기 보다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신의 섭리같은 것을 뜻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신의 뜻이라며 '인살라' 를 외치는 이슬람교와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인간의 삶 이면에 있는 죽음을 직시하고 내세의 삶을 중시하는 고대 이집트인의 생사관에 무거운 경외감을 느낀다. 과연 내세나 신의 섭리라는 것이 있을까?
인류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하나인 이집트에서의 짪은 여정은 끝났다. 그들 문명의 흔적에서 삶을 보았고 죽음도 함께 보았다. 사막의 전갈이나 낙타처럼 강인한 생명을 보았는가 하면 미라나 석상의 형태로 편안히 모셔진 내세의 모습도 보았다.
무릇 삶과 죽음의 윤회란 생각을 바꾸는 법이다. 이집트인들의 시각으로는 과거에 일어난 일은 미래에도 일어난다고 한다. 만일 사후의 세계가 영원한 시간에 둘러쌓여 있다면, 어떠한 가능성도 열려있다는 식이다. 태양아래에서 새로운 것은 없다던가~
그렇다면 현생에서 심장이 죄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마음을 내려놓고 신의 섭리에 따라 보면 어떻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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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지구를 나오면서 파라오와 오시리스신 등이 그려진 파피루스 그림 몇장과 침묵의 안내인 아비누스 조각상을 샀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전이나 사가지고 가야 할게 아니겠는가? ㅎㅎ
공항으로 가는 도중, 카이로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지구 어디에서도 하늘은 변함없는 것 같다. 내일도 어김없이 해가 뜰 것이다.
(수년전 코로나 유행 직전에 다녀온 여행을 최근 정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