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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고향 풍기 원문보기 글쓴이: 시보네/54
향교가 있어 향교마을, 학교가 많아 교촌마을 | ||||||||||||||||||||||||||||||||||||||||||||||||||||||||||||||
우리마을탐방[73]풍기읍 교촌1리(향교마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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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붕이 옮겨 세운 풍기향교가 있는 마을 풍기읍 교촌1리(향교마을) 가는길 마을표석 ‘→’표 방향으로 들어서면 예나 지금이나 좁은 골목길이다. 왼쪽은 마을이고 오른쪽은 과수원이다. 골목 안 골목십자거리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원룸이 즐비하고 하숙집 간판이 여럿 보인다. 조금 낮은 지대로 내려가면 고향슈퍼라는 가게가 나오고 그 안쪽에 향교마을회관이 있다. 지난 16일 오후 2시 마을회관에서 김성욱 이장, 윤정희 노인회장, 정경자 부녀회부회장, 김일훈 어르신과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마을의 역사와 옛 이야기를 듣고 왔다. 마을의 역사 조선 후기 1849년 경 작성된 풍기군지에 보면 교촌리 지역은 풍기군 서부면에 속했다. 당시 서부면에는 서문리(西門里), 북문리(北門里), 고로촌리(古老村里), 신교리(新校里)[교촌], 구교리(舊敎里)[금계1리], 등구리(登邱里)[등드들], 백야동리(白也洞里), 욱금리(郁錦里)가 있었으며 순흥과 접경을 이루었다. 그 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풍기군 서부면의 신교리와 등구리를 합하여 ‘교촌리’라 칭하고 영주군 풍기면에 편입시켰다. 지명 유래 풍기향교의 내력 1692년(숙종 18) 군수 정증(鄭증)이 구지(舊址)로 옮겼다가, 1735년(영조 11) 군수 임집(任집)이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조선시대 때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음력 2월과 8월에 문묘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대성전과 동무·서무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돼 있으며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마을의 옛 모습 윤정희(70) 노인회장은 “마을 앞들을 ‘구름밭들’이라 하고 마을 뒷들을 ‘서다리굼들’이라 부르며 소백산 비로봉에서 시원하여 흐르는 금계천을 ‘뒷창락’이라 불렀다”고 하면서 “이 마을 앞을 약간 지나 소(沼)가 있었는데 소의 이름이 문동소(文童沼)라 했다”고 말했다. 문동소라 이름 한 것은 향교에서 강학하던 유생들이 여름철이면 이 소를 많이 이용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1936 대홍수로 때 매몰되고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고 한다. 까치샘과 동신당 이야기 마을 원로 김일훈(77) 어르신은 동신당 이야기를 들려줬다. “향교 앞에 수령 7백년으로 추정되는 굴참나무가 있었다. 높이가 25m 밑동 둘레가 3m 쯤 되는 노거수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 밑에 동신당(洞神堂)을 세우고 나무이름을 동신나무라 불렀으며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동신제를 지냈다”고 말했다. 또한 마을 주민들은 두벌 논메기가 끝나는 7월이면 해마다 풋굿날을 정해 각자 집에서 음식을 마련해 이 나무 밑에 모여 농악놀이를 하면서 고단함을 달랬다고 한다. 마을의 애환과 유서(由緖)를 간직한 이 동신목은 1990년 경 고사하고 말았는데 이 때 온 마을 사람들이 애석해 했다고 한다. 향교마을 학교 풍기고등학교는 1954년 개교하여 1992년 풍기종합고등학교로, 1995년 공업고등학교로, 2001년 과학고등학교로, 2007년에는 경북항공고등학교로 개칭됐다. 풍기북부초등학교는 1963년 개교하였고 병설유치원은 1981년 개원했다. 이 마을 박정헌(62)씨는 “풍기초에 입학했다가 4학년 때 북부초가 설립되어 북부초로 전학했었다”고 하면서 “1994년 교촌리 1번지에 동양대학교가 설립됨으로써 교촌은 한 마을에 유초중고 대학이 함께 존속하는 명실상부한 교촌마을이 됐다”고 말했다. 향교마을 사람들 한세창 새마을지도자는 “동양대가 개교되어 처음에는 하숙집이 하나 둘 생기더니, 10여년전부터는 원룸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지금은 30여채로 늘어나 향교촌이 원룸촌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정경자(54) 부녀회 부회장은 “동양대가 교촌에 설립된 후부터 마을이 농촌형에서 도시형로 변했다”며 “농사짓는 집은 30% 이하로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윤석주(70) 노인회 총무는 “어릴 적 마을의 모습은 전체가 초가집뿐이었고, 삼가동으로 가는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면서 “지금은 옛 집은 몇 채 안 되고 원룸과 연립주택으로 가득하다”고 말했다. 10년 전 이 마을로 이사 왔다는 정순자(76)씨는 “마을 앞으로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지만 잡초가 우거져 접근조차 어렵다”면서 “동양대 앞을 흐르는 금계천을 정비하여 물을 가까이 할 수 있고, 물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풍기읍 교촌1리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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