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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계획 없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 문호리로 간다. 장작 난로가 있는 따뜻한 미술관 카페에선 차를 마시고, 후미진 골목 허름한 간판 단 식당에선 따뜻한 집밥을 먹는다. 도시에 질린 사람들을 위로할 풍경과 그들의 취향을 정확하게 꿰뚫은 공간이 그곳에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청국장·천연 염색 유아복·수제 잼·건강 빵… 시골 정서에 감성 더한 물품 가득
뻥치시네 ·밥이 브라운·어서 오슈… 재치 만점 간판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
공방서 다양한 체험·주말 한정 메뉴도 인기… 오는 10~12일 정월 대보름 맞이 행사도
“6년 전, 제가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문호리는 그저 서울 근교 소박한 시골 동네였죠. 당시만 해도 이 동네로 이사 온 사람들은 모두 갖춰진 도시를 떠나 조금 불편하더라도 전원 속에서 소박함을 즐기며 살았는데 지금은 전원이라고 하기에 무색할 정도로 도시처럼 많은 것이 다시 갖춰지고 있어요. 시골 동네의 소박함을 사랑했던 이곳 주민으로선 조금 아쉽지만 이 동네가 좋아 일부러 찾아와주시는 분이 많아지니 좋네요.”
문호2리 주민이자 이 동네 빵집 ‘긴즈버그’의 주인 조진용씨 말처럼 요즘 문호리는 양평 나들이, 데이트 인기 코스였던 바로 옆 동네 양수리를 제치고 양평에서도 가장 ‘핫한’ 동네가 됐다.
서울에도 몇 곳 없는 유명 커피집 분점이, 수준 높은 작품을 한자리에 전시해놓은 미술관이, 도심 한복판에 있을 것만 같은 세련된 분위기 카페가 그곳에 있다.
매달 첫째, 셋째 주말엔 마을 주민과 감각 있는 핸드메이드 작가들이 어우러져 정다운 문화장터도 연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던 어느 겨울날의 문호리.
지난달 22일 눈 내린 주말, 한파가 몰아친다는 날씨 예보에도 어김없이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북한강로 941 북한강변을 따라 1.2km에 걸쳐 장(場)이 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매달 첫째·셋째주 주말에 열린다는 ‘문호리리버마켓’이다. 하얀 천막을 친 마켓 부스를 사이에 두고 눈이 소복하게 덮인 강변에선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공터의 화목 난로에선 어른들이 불을 쬐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
130팀이 ‘셀러’(판매자)로 참가한 한겨울 야외 마켓은 직접 띄운 청국장을 시작으로 천연 염색 영유아복, 우드 스피커, 세라믹 모빌, 손뜨개 모자와 목도리, 수제 잼, 건강 빵 등 다양한 아이템으로 꾸민 부스들로 가득 찼다. 시골 정서에 감성을 더한 아기자기한 물품들을 찍느라 여기저기서 셔터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들어와 난롯불이라도 쬐고 가세요!” “안 사도 좋으니 편안하게 차 한잔 어떠세요?” 강추위 탓에 구경하는 사람보다 셀러가 더 많아 보였지만 부스 앞을 지나칠 때마다 넘쳐나는 문호리리버마켓 사람들 온기가 칼바람까지 녹이는 듯했다.
바지 위에 랩스커트를 두르고 챙 넓은 멕시코 전통모자 솜브레로를 멋들어지게 쓴 뻥튀기 장수가 짧고 굵게 “뻥이오” 외치자 ‘뻥’ 소리와 함께 기계에서 하얀 연기가 터져 나왔다. “어렸을 적 꿈이 뻥튀기 장수였어요. 직장 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켓이 열리는 첫째·셋째 주엔 이곳에서 뻥튀기 장수로 ‘투잡’하고 있습니다.” 부스 이름은 ‘뻥치시네’. 나란히 있는 ‘따사로운 정원’에선 초등학교 동창이었다는 그의 아내가 직접 만든 도예 작품들을 전시·판매한다.
맞은편 부스 ‘호매5’ 주인은 마켓에 참여하려고 첫째·셋째 주말마다 경북 구미에서 문호리로 ‘출근’한단다. “여긴 농산물도 예술이 되는 곳이에요. 판매품이 손으로 만든 것이나 직접 생산한 제품 위주여야 한다는 것 말고 참가 자격 조건은 따로 없어요. 그래도 콩 하나도 아이디어를 더해서 예쁘게 담게 되고, 투박한 현수막 대신 직접 만든 간판·메뉴판을 써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다 보니 점점 각 부스(브랜드)만의 색깔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 덕에 재치 넘치는 부스 이름, 손품 들여 만든 간판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엄마와 아들이 현미 누룽지를 스낵처럼 만들어 판매하는 ‘Bobi Brown(밥이 브라운)’, 슈크림빵 전문점 ‘어서 오슈’, 컵스테이크 푸드 트럭 ‘SO(牛)프트럭’은 이곳의 ‘간판스타’. 이름 그대로 재미있는 간판으로 스타가 된 부스다. 착한 재료로 만든 수제햄 전문점 ‘착햄’이나 토종 벌꿀 전문점 ‘토종벌의 꿈’ 등 담백한 간판도 눈에 띈다. 컬러링북 ‘네 마음을 말해봐’를 펴낸 발달장애 여성 ‘은혜’씨가 그려주는 캐리커처 전문 ‘니 얼굴’, 함께 방문한 반려견들을 위해 세심하게 물통을 비치해놓은 강아지 웰빙 수제간식·비누 전문 ‘구름이네’도 유명 부스들이다.
핸드메이드 작가들이 운영하는 공방 부스는 시골 사랑방이 따로 없다. ‘마노 공방’의 도자기 페인팅, ‘삐뚜루 공방’의 가죽공예, ‘가람’의 풍경 만들기, ‘모루’의 금속 공예·커피 스쿱 만들기, ‘나무공방이음’의 코바늘 매트 만들기 체험 등을 비롯해 목공, 발도르프 인형 만들기 체험 등 요즘 유행한다는 웬만한 공방 체험은 다 해볼 수 있다. 공방에 따라 다르지만 체험료는 대개 재료비 포함 3000원~3만원 선이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닌, 문호리리버마켓 장날에만 맛볼 수 있는 인기 메뉴들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건강 빵 전문 ‘폴 브레드’에선 노부부가 화덕을 설치해 즉석에서 따끈따끈한 난(2000원)을 구워낸다. 커리(2000원)를 발라 토르티야처럼 먹는데 난을 굽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어 아이들이 더 좋아한다. ‘소프트럭’은 한정판 컵스테이크(130g, 1만원)를 파는 푸드트럭으로 유명하다. 강추위만 아니라면 오후 4~5시면 ‘완판’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석에서 스테이크와 채소를 구워 따뜻하게 녹인 고다치즈를 듬뿍 얹어내는 과정은 퍼포먼스에 가깝다. 컵밥 전문 푸드트럭 ‘MISS COREA’도 줄 서는 맛집이다. 스팸, 김치 등 다양한 재료를 토핑한 컵밥을 판매한다. 구입한 먹을거리는 부스 안쪽이나 문호리리버마켓 곳곳의 테이블과 벤치에서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
빵, 잼, 고추장·된장, 각종 반찬, 과일칩, 견과류, 떡 등 먹을거리를 판매하는 부스에서 시식은 기본. “문호리리버마켓에서 시식만 해도 배부르다”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부스 사이, 뒤편은 포토존이다. 하얗게 눈 덮인 북한강을 배경으로 빈티지하면서도 멋스러운 테이블과 의자, 소품들이 보인다. 셀러들이 직접 꾸민 공간들로 방문객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다.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매달 공식 카페(rivermarket.co.kr)를 통해 사전 신청하면 누구나 셀러로도 참가할 수 있다. 현재 참가 셀러들은 문호리 주민을 포함해 양평군민이 75% 정도를 차지한다고. 12세 이하 어린이들의 교류, 놀이마당이라 할 수 있는 ‘게릴라 벼룩시장’도 매달 1번씩 2시간 동안 열린다. 어떤 단체나 지자체 지원이나 개입 없이 순수하게 마켓에 참가하는 셀러들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장터다 보니 셀러로 참가할 때 지켜야 할 몇 가지 약속이 있다. 셀러들은 서로 이름 대신 닉네임을 사용한다. 참가비는 없지만 주차 관리, 화장실 등 마켓 현장 관리 등을 같이 해야 한다.
“여긴 번듯한 운영본부조차 없어요. 내가 누구고, 무엇을 하는지는 중요치 않아요. 평등한 입장에서 호칭을 부를 수 있도록 닉네임을 정해서 씁니다. 운영도 수익금의 몇 퍼센트를 정해 기부받는 형식이 아니라, 셀러들이 병아리 모이통(모금함)에 자발적으로 모금하는 것으로 해요. 이 돈으로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마켓에 필요한 시설들을 마련하지요.”
2014년 4월 문호리리버마켓을 시작한 ‘캐논아빠’는 “사고파는 ‘마켓’ ‘마트’의 개념보다 마을 주민과 이주민, 문호리를 찾아오는 도시민이 함께 만들어가는 문화장터를 지향한다”며 “셀러들에겐 자신의 브랜드를 키워나가는 인큐베이터이자, 생산자와 소비자가 좋은 상품으로 만나는 플랫폼”이라고 했다. 10년 전 문호리로 이사 온 그는 이주민들과 마을 원주민들이 함께 어우러질 방법을 고민하다 장터를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3년 동안 마켓을 지켜온 것은 ‘셀러’와 ‘손님’들이었어요. 주말에 먼 걸음 하며 일부러 찾아온 손님들이 이곳에 와서 꿈, 마음, 많은 생각을 두손 가득 가지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매달 첫째·셋째 주엔 문호리 강변, 둘째 주는 여주도자세상, 넷째 주엔 충주 목계나루에서 정기적으로 열린다. 단 이번 달 둘째 주(10~12일)는 정월대보름을 맞아 문호리 강변에서 연중 최대 행사인 ‘문호리 3일’을 연다. 마켓 셀러들이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이구동성 말했다. “지난해 행사 3일 동안에만 하루 평균 2만여명이 다녀갔어요. 사흘간 셀러들이 주축이 돼 대형 달집태우기, 쥐불놀이, 풍등 띄우기, 불꽃놀이 등을 펼칠 예정인데 꽤 볼만할 겁니다.”
아트&디자인 미술관 ‘구하우스’
일명 ‘청호리’란다. ‘양평에 있는 청담동급 시설들이 모여 있는 동네 문호리’ ‘연예인들의 많이 사는 동네’란 뜻으로 부르는 문호리의 별칭이다. 요즘 문호리는 서울춘천고속도로를 이용하면 강남에서 30~40분 만에 닿는 덕에 평일에도 강남 주부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아트·디자인 미술관 구하우스(KOO HOUSE, 031-774-7460)에서 만난 윤진희(50·서울 삼성동), 신현숙(48·경기도 분당)씨는 “인스타그램에서 엄청 유명해서 꼭 한 번 와보고 싶었는데 문호리가 이렇게 가까운 동네인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지난 7월 문호리에 문 연 구하우스는 개관한 지 1년도 안 됐지만 청호리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4628㎡(1400평) 대지에 외벽을 회색 벽돌로 마감한 2층 건물은 빛의 방향,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낸다. 미술관 내부로 들어가면 ‘제1전시실’ ‘기획전시실’이란 이름 대신 ‘거실’ ‘침실’ ‘서재’ ‘복도’라 명명한 집의 공간들이 펼쳐진다. 각 공간에는 서도호, 제프 쿤스, 데이미언 허스트, 키스 해링 등 현대작가 작품 140여점과 필립 스탁 같은 디자인 거장의 가구 등 작품 300여점이 어우러져 있다. 프랑스 대표 작가 자비에 베이앙의 커다란 모빌 작품이 걸린 서재엔 찰스·레이 임스의 테이블과 조지 나카시마 벤치가 조화롭게 놓여 있다.
한 벽면은 예술·디자인 전문 책으로 가득하다. 안쪽 방은 ‘장 프루베의 룸’이란 이름의 손님방. 프랑스 건축가 장 프루베가 어느 대학교 기숙사 방을 위해 고안했다는 침대, 책상, 의자, 암체어, 선반 등이 안락한 구도로 배치돼 있다. 방 안쪽 아담한 욕실에 들어서면 중국 작가 펑 이잉의 설치작품이 기다린다.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직사각형 빛이 스며드는 1층 거실엔 설치미술가 김기라의 러그 작품 위에 톰 딕슨의 파이론 체어와 론 아라드,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의자 등이 배치돼 있다.
‘주방’에 해당하는 라운지도 예사롭지 않다. 애플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가 아이폰 디자인할 때 롤 모델 삼았던 독일 디자이너 디터 람스의 606 유니버셜 셀빙 시스템이 한 벽면을 장식했다. 선반에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디자인 소품과 작품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진짜 구하우스의 대표하는 공간은 라운지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복도다. 자연 채광되는 높은 천고의 복도엔 각기 다른 디자인의 검은색 의자와 함께 유명 작가 17명의 ‘거울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예술과 디자인에 대한 남다른 안목을 지닌 이 ‘집’의 ‘집주인’은 KBS·쌍용·카스·국민은행 등 주요 브랜드의 CI를 만든 구정순 ‘디자인 포커스’ 대표. 오랫동안 문호리에서 전원생활을 해온 구 대표는 “사람들이 명품 브랜드의 옷과 가방을 사고 맛집도 찾아다니면서 집은 잠만 자는 ‘베드 하우스’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이 좀 안타까웠다”면서 “예술과 함께하는 ‘미술관 같은 집, 집 같은 미술관’을 꾸미고 싶었다”고 했다. 관람객들이 미술관 관람 후 ‘나도 집을 이렇게 꾸며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게 구 대표의 바람이란다.
큐레이터 작품 해설은 사전 예약 시 매주 화·수·금·토요일 오전 11시, 오후 2시 30분, 최소 신청 인원 10명 이상일 때 진행된다. 일정은 미술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 관람 시간은 화~일요일 오전 10시 30분~오후 5시, 토요일 및 공휴일은 오후 6시까지다. 관람료는 라운지에서 제공하는 음료 1잔 포함해 일반 1만5000원, 청소년 8000원, 어린이 60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