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은 오푸스 데이(Opus Dei, 우리말로 '하느님의 사업'이라는 뜻) 창립자인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의 축일이며, 그의 사망일이다. 에스크리바는 1975년 사망후 30년도 채 되지 않은 27년만인 2002년 10월 6일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의 시신은 로마 비알레 부르노 부오찌 75번지 평화의 모후 성당에 안치되었다.
한국에서는 지난 6월 21일 오후 6시 30분, 서울 한남동성당(주임 이창준 신부)에서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오푸스 데이 창립자의 축일미사가 오스발도 파딜랴 교황청 대사의 주례로 봉헌되었다. 이날 미사에는 한국인 오푸스 데이 소속 사제인 홍지영 신부와 같은 오푸스 데이 소속으로 한국에 와 있는 필리핀 사제 솔리스 신부 등이 교황대사와 함께 집전했으며, 협력자들을 포함해 80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했다.
에스크리바, 오푸스 데이, 바티칸
에스크리바 신부가 1925년 스페인에서 오푸스 데이를 창립한 뒤로, 오푸스 데이는 스페인 내란으로 인해 황폐해진 스페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평신도 영성운동'으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나, 1946년 이후 로마에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오푸스 데이의 엄격한 위계질서와 권력에 대한 탐닉과 교황주의로 '굶주린 관료주의'라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오푸스 데이 회원들은 파시스트였던 프랑코 정권아래서 요직을 두루 차지하였고, 정치-경제-금융업계를 장악했다. 1975년 프랑코가 죽은 뒤에도 정계를 제외하곤 여전히 이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오푸스 데이는 1950년 바티칸에서 세속협회의 지위를 획득했으나, 줄곧 주교를 통해 자치권을 갖는 면속구(免屬區)가 되길 갈망해 왔으며, 예수회 처럼 지역 교구에 속하지 않는 전세계적인 관할권을 얻고자 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이런 면속구는 군종교구와 노동자의 연합체의 '미션 오브 프랑스' 등이 있다.
그러나 오푸스 데이가 지금처럼 '성직자치단'이라는 면속구가 되는데 20년을 기다려야 했다. 개혁적이고 개방적인 교회를 원했던 요한 23세 교황과 바오로 6세 교황이 '교회 안의 교회'가 되려는 오푸스 데이의 요구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오푸스 데이의 동조자였던 당시 성직자성 장관 팔라치니 추기경을 좌천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등장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미 교황이 되기전부터 오푸스 데이와 친분을 맺어 왔으며,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장례식에 참석차 로마에 와서는 1975년에 죽은 에스크리바의 유해가 안치된 오푸스 데이 대저택의 지하납골당에서 기도를 드렸다. 교황이 된 뒤에는 물러난 팔라치니 추기경을 다시 불러들여 교황청 시복시성 성성 장관으로 앉혔다. 그리고 팔라치니는 에스크리바의 후계자였던 오푸스 데이 총장 폴틸리오 신부를 시성에 관한 최고 자문위원으로 임명하고 에스크리바의 시복시성을 추진했다.
결국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일부 주교들이 격렬히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오푸스 데이의 면속구 지정을 추인해, 오푸스 데이는 '성직자치단'을 구성할 수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스페인 출신의 출신의 오푸스 데이 정회원인 호아킨 나바로 발스를 바티칸 대변인으로 임명하고, 오푸스 데이 소속 사제인 오카리츠 신부는 라칭거가 맡고 있는 신앙교리성(종교재판소의 후신)의 최고 자문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오푸스 데이 사제와 동조자들을 라틴아메리카와 유럽의 주교로 임명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의 신문인 <엘 파이스>의 바티칸 주재 특파원인 후앙 아리아스에 따르면, "오푸스 데이는 헌신적이면서도 로마의 통제아래 세속세계에서 활동할 능력이 있는 평신도의 군대를 만들려는 보이티야(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생각에 부분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교황은 "오푸스 데이의 행동주의, 반공산주의, 그리고 사고의 다원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내부규율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에스크리바는 스페인 내란을 겪으면서 프랑코 파시즘을 지지했던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자였으며, 금욕주의적이고, 교회 규율 안에서 가톨릭교회의 세력화에 복무할 영향력 있는 평신도 엘리트를 양성하는데 몰두하였다. 또한 교황에 대한 충성을 맹약함으로써 자신들의 법적 자치권을 획득해 갔다. 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주역이었던 요한 23세 교황과 바오로 6세 교황, 그리고 교회권력이 민주화되길 희망했던 스킬레벡스와 한스 큉 등 자유주의적 개혁자들, 그리고 세상 안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선호했던 해방신학자들의 입장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오푸스 데이와 달리 노동운동 등 사회개혁운동을 지지했지만, 바티칸공의회가 천명한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교회에 부정적 태도를 지녔다. 그 후계자인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공의회 이후 나타난 교회의 자유주의적 경향 모두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지닌다. 특별히 해방신학에 대한 태도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이전 교리성 장관 라칭거 추기경)은 오푸스 데이와 더불어 공격적인 태도를 지녔다. 그래서 <민중의 외침>, <로마교황청과 국제정치> 등의 책을 쓴 저널리스트인 페니 러녹스와 같은 이들은 오푸스 데이 동조자들을 '반개혁주의적 전통주의자' 또는 '반(反)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주역이라 부른다.
결국 교황청의 교황중심주의적 경향과 교회의 자유주의적 경향에 대한 경계심이 오푸스 데이를 동반자로 끌어들이게 되었으며, 전 세계 지역교회를 단속하고 가톨릭신앙이 권력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보수적 경향으로 기울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오푸스 데이의 모든 면을 선호한 것이 아니었기에 오랫동안 직접 오푸스 데이 사제들을 서품하면서 단도리를 하기도 했지만, 그의 생애 말년인 2002년에 에스크리바를 결국 시성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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