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배려가 담긴 행복한 집-문영미

▼문영미, <초록지붕집>, 145.5×89.4cm, Oil on canvas, 2011년
1)어린 시절에 살았던 우리집은 낡고 허름했다. 한여름에는 너무 덥고 한겨울에는 너무 추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집을 생각하면 금새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유는 그곳에 사랑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항상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다. 나도 지금 그런 집을 만들고 있을까.

▼문영미, <2층집>, 45.3×52.8㎝, Oil on canvas, 2016년
2)우리 모두는 더 많이, 더 편리하게 살면 행복하리라 생각한다.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에 살면 만족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차, 아무리 넓은 집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보다는 더 많은 웃음과 더 넓은 유대관계 속에서 샘솟는다. 어려웠지만 즐거운 추억이 가득했던 어린 시절에서 얻은 교훈이다.
어제는 평소 존경하는 분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 분은 판교에 있는 한 중견기업의 부사장으로 나의 책이 인연이 되어 알게 된 사이다. 서로 바쁘다 보니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니지만 만날 때마다 큰 울림을 주어 내 삶이 풍부해진 느낌을 받는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얼마 전에 병원에 갔다 온 사건을 듣게 되었다. 사연은 이렇다.
C부사장이 회사에 출근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집에 있는 그의 아내가 전화를 했다. 며느리가 갑자기 심하게 아파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을 들은 C부사장은 자신이 곧바로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택시를 타고 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으로 향했다. 그의 아내가 손주까지 안고 며느리를 부축해 병원에 데려갈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사적인 일로 근무 중에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마음에 걸렸지만 회사에서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집 식구들부터 챙겨줘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렇게 C부사장은 며느리를 차에 태워서 병원에 데리고 갔다. 그런데 입원 수속을 밟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마음이 다급해진 그는 엘리베이터를 포기하고 계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한시라도 더 빨리 며느리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서였다. 올 해 환갑을 지낸 사람이 며느리를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이 상상이 되어 가슴이 뭉클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느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주일 전에 손주가 감기가 걸려 입원을 했으니 며느리가 얼마나 애가 탔겠어요. 더구나 친정어머니가 암수술을 받아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데 자식까지 아프니 마음고생이 심했겠지요. 그래서 며느리가 손주 퇴원하자마자 긴장이 풀어졌는지 쓰러지게 된 것 같아요. 병원에는 가야 하는데 아이 맡길 데는 없고, 출근한 남편이 걱정할까봐 전화도 못하고 고민하다가 시어머니한테 전화를 한 모양인데 이럴 때 시아버지가 도와줘야지요.”
세상에 저런 시아버지가 있을까. 친정아버지라도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대단하세요. 보통 시부모들은 아들 며느리만 보면 아프다는 소리만 하고, 어떻게 하면 용돈이라도 더 받아볼까 그 생각만 하는데 부사장님은 정말 배려심이 깊으시네요. 어른들이 어른 노릇을 잘해야 젊은 사람들이 따르는 법인데 어른 노릇은 하지 않으면서 맨날 권위나 내세우고 의무만 앞세우니까 며느리들이 시댁이라면 질색을 하는 거 아니겠어요. 부사장님처럼 어른이 먼저 배려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떤 며느리가 시댁을 싫어하겠어요. 정말 우리 시대에 귀감이 될 만한 어른상을 보여주셔서 멋지십니다. 저도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오늘 배운 대로 따라해야겠어요.”
나도 아들이 둘이다 보니 언젠가는 시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때 우리 집에 들어온 새 식구가 마음 편안하게 한 가족이 될 수 있도록 특별히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제 부사장님은 자식들 혼사도 전부 치루고 손주까지 봤으니 더 이상 돈 쓸 일도 없으시겠어요. 언제든지 은퇴하셔도 되겠네요.”
내가 그 말을 하자 C부사장은 손사래를 치며 얘기한다.
“아이쿠, 예전보다 돈이 훨씬 더 많이 들어요. 아들 며느리와 딸과 사위가 주말마다 집에 와서는 아예 갈 생각을 안 해요. 그러니 냉장고를 가득가득 채워 놓아야 해서 생활비가 한두 푼 드는 게 아닙니다. 게다가 생일 챙겨줘야지, 백일잔치 해줘야지, 명절 선물 줘야지 이런저런 대소사를 일일이 챙겨줘야 하니까 보통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돈이 들긴 하지만 그 핑계라도 대고 자주 만나야 자식들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죠.”
돈이 더 많이 든다면서 엄살을 피우는 그 분의 얼굴에는 행복한 표정이 가득했다. 참 보기 좋았다. 내 곁에 저런 멘토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거창하고 무거운 담론을 제기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나의 삶 속에서 실현가능한 목표치를 제시해주는 분이 곁에 있어 의욕이 생긴다. 저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욕심을 낼 수 있게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틱낫한 스님의 아미타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정토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사바세계보다 더 아름답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토에서 보게 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이곳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이 편안하고, 탁 트이고 홀가분할 때면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전부 저절로 정토가 되는 것이다.”
새해다.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날인데 12월 31일과 1월 1일은 눈뜨는 아침부터 새롭다. 1월 1일의 아침 해가 특별히 밝아서가 아니다. 묵은 감정을 털어낸 자리에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심었기 때문에 새롭다. 올해는 꼭 이것 하나만은 실천해야지. 굳은 결심과 함께 맞이한 설렘이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만든다. 중요한 것은 새 해의 계획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는가 하는 것이다. 목표를 지나치게 높게 설정하여 한 달도 되기 전에 ‘번아웃’되어 버리는 한 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자신을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한 해가 되어야 한다.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 그 모든 출발은 나를 사랑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자칫 옆에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내가 나를 사랑하듯 옆에 있는 사람도 귀한 줄 알아야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된다. 나만 정토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도 정토에 사는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 그렇게 귀한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은 그곳이 어떤 곳이든 행복하고 아름다운 장소가 된다. 집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길거리든 그곳이 모두 정토가 되고 천국이 된다. 남에게 먼저 요구할 필요도 없다. 내가 먼저 실천하면 된다. 어른이 먼저, 직장 상사가 먼저, 많이 가진 사람이 먼저 실천하면 된다. C부사장이 사는 집은 낡고 오래 되었어도 행복할 것이다. 우리집도 그런 집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런 집을 만들고 싶다. 사소하지만 꼭 지키고 싶은 올해의 계획이다.
*이 글은 한전 사보 "꽃피우다"1,2월호에 실린 글을 수정보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