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Hole / 변선자
공 하나를 삼키기 위해 조용히 입을 벌리고 있다. 막상 공을 보내려 하면 손목이 흔들리고 마음이 조급해진다. 몇 번의 실패 끝에 힘을 빼고 천천히 굴리면 공은 마치 제 길을 아는 듯 홀 속으로 빠져든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단지 홀 하나뿐인데, 그 안으로 거리와 시간, 집중과 흔들림이 함께 빨려 들어간다. 그 순간의 성취감은 묘하게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다.
스포츠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보이지 않는 홀이 존재한다. 축구 골대, 농구대의 링, 당구대의 포켓 등 들어가야 비로소 의미가 완성되는 구조적 홀들이다. 그곳은 단순한 빈곳이 아니다. 움직임을 끝맺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이 열리는 곳이다.
수비의 틈, 순간의 공백, 망설임 사이에 파고드는 무형의 홀들도 있다. 홀들은 순간 나타났다가 문득 사라진다. 그때 홀은 형태가 아니라 순간의 시간이며, 성공의 희열이 되기도 하고 실패의 좌절이 되기도 한다.
일상에는 수많은 홀이 있다. 단춧구멍, 바늘귀, 창문 틈, 하수구 입구 등 눈에 보이는 홀들은 무엇인가를 통과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실이 지나가고, 바람이 드나들고, 물이 빠져들어 간다. 비어있음이 홀일 수 있는 자격이리라.
물리적으로 보면 홀은 결핍의 상태이다. 빠져나간 빈자리,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다. 그래서 새로운 다음이 만들어지고 주변의 것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든다. 빈곳이 하나의 존재처럼 움직이며 흐름을 만든다. 공이 굴러가는 것 또한 에너지와 마찰, 중력의 질서 속에서 낮은 곳을 향해 가는 과정일 뿐이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크고 작은 홀을 통해 세상과 연결된다. 숨이 드나들고, 말이 흘러나오며, 빛이 스며드는 눈동자 등 열려 있으므로 받아들이고, 듣고, 나눈다. 닫힌 존재는 홀일 수 없고 생명일 수 없다. 몸속의 수많은 통로를 따라 보이지 않는 흐름이 오가며 생명을 이어간다. 막히면 죽고 비어있으면 사는 이치이다. 그게 홀의 존재 이유이다.
우주에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있다.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곳, 극단적인 중력은 어쩌면 우리 삶의 어떤 순간과 닮아있다. 마음속에 문득 생겨나는 공허,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 이유 없이 빠져드는 슬픔.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여도 어느 날 갑자기 발밑으로 꺼지듯 떨어져 버리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던 그 어둠도,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도 그 순간은 견디기 어렵다. 잠시라도 비어있는 홀을 채우려고 한다.
젊었을 때의 나는,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홀들을 없애려고만 애를 썼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것처럼 여기며 외면하고, 덮고, 잊으려 했다. 그러나 삶은 덮어둔 자리마다 또 다른 홀을 만들어냈다.
이순을 넘긴 지금, 나는 생각이 달라졌다. 홀은 없애고 메꿔야 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공간이라는 것을. 골프공이 홀을 향해 가듯, 마음도 때로는 어떤 빈곳을 향해 움직인다. 비어있는 홀로 마음이 향함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비어있기에 다시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홀에 빠질 것 같은 순간이 오면 허둥대지 않는다. 되레 반긴다. 잠시 멈추어 깊이를 가늠해보고, 천천히 가장자리로 발을 옮긴다. 때로는 그 안에 잠시 머물기도 한다. 그러면 그곳은 나를 삼키는 어둠이 아니라 나를 돌아보게 한다. 돌이켜보면 그 빈 공간이 지금의 내 삶을 풍요롭게 한 여백이었던 것을.
골프공이 홀에 들어가는 순간처럼, 삶에도 결국 제자리로 찾아가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수많은 빗나감 끝에 도달하는 고요한 안착. 홀이라는 것은 비어있음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방향을 정하며 끝과 시작을 동시에 품는 자리이다. 공이 홀에 들어가는 순간 한 홀이 끝나지만, 또 다른 홀이 기다리고 있다. 삶도 그렇다. 수많은 홀을 통과하며 이어진다. 어떤 것은 나를 완성하고, 어떤 것은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빈 곳이 있기에 그곳을 향해 움직이고, 선택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나는 공 하나를 들고 잔디 위에 선다. 바람을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내가 정한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스윙한다. 그 공이 어디로 가든 그 궤적이 곧 나의 길이 될 것이다.
내 삶에 생겨난 작은 홀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피하려 애쓰지 않고, 메우려 서두르지 않는다. 그저 조심스럽고 담담하게 그 곁에서 지켜본다.
아직 남아있는 홀 하나가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잠시 그 앞에 서서 바라본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클럽에 힘을 실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