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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
□ 마가복음 4:1-20 □
박창환 (본연구원장・신약학)
1.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갈릴리와 예루살렘 양 지역을 넘나드는 모양으로 묘사하였는데, 마가복음은 갈릴리에서 사시다가 예루살렘으로 직행하셔서 처형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은 억압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고, 가난하게 사는 갈릴리 사람들 가운데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당신의 많은 기적과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보여주셨다. 아무도 감이 손을 못 대고, 지적도 하지 못하던 고질적인 인간의 낡은 질서와 그릇된 제도를 지적하시고 시정하시고 새 질서를 세워 주시는 권위를 나타내셨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특이한 교훈 방편이었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신 한 부분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 시대 유대인들의 인식은 매우 변질된 것이었고, 예수님이 보시기에 너무도 그릇된 것이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것을 건설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마태복음에 압도적으로 나오는 “하늘 나라”(天國)라는 술어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에 있는 어떤 나라 또는 장소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고유면사인 ⌈야웨⌋ הוהי 는 물론, 그 보통명사인 ⌈엘로힘⌋ םיהלא 즉 “하나님”이라는 말조차도 사용하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에, 유대인이었던 마태복음 저자가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글을 쓰면서 “하나님 나라” 대신 “하늘 나라”를 선호한 것이며, 따라서 “하늘”을 “하나님”의 동의어(同義語)로 취급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고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때가 되면 내가 다스리겠다”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신 대로 하나님이 진정 왕이 되셔서 통치해야 할 때가 다가 왔다고, 예수께서 갈릴지 전도 초창기부터 언명하셨다(막 1:15). 그러나 사람들은 그 나라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고, 모두가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러 가지 비유를 가지고 그 진리를 가르치신 것이다.
비유 연구의 역사가 길고, 따라서 비유가 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가지가지이지만, 근자의 경향은, 예수께서 비유를 통하여 그릇된 세계관, 인생관, 메시아관, 천국관 등을 송두리째 뒤엎어 버리려는 데 subvert 목적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John Dominic Crossan은, 신화 myth 는 세상을 세우고 비유는 세상을 뒤엎는다 subverts 고 설명한다 (J.D. Crossan, The Dark Interval. Towards a Theology of Narrative. Niles, III.: Argus Communications, 1975).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중심 관심사였고 그의 교훈의 중심이기도 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가르침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그 당시 일반 유대인들의 인식을 송두리째 뒤엎고 참된 신국관(神國觀)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11. 본문 주해
< 1절 >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마가는 예수의 인기가 점진적으로 높아 갔다는 것을, 군중의 수의 증가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나타나셨을 때에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가 없게 됐다(막 2:1-2). 3:7에는 예수께서 집회 장소를 아예 호숫가 광장으로 잡았던 것을 보여 준다. 너무 사람이 많아 자기를 밀어대기 때문에 자칫하면 물에 빠질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배를 한 척 준비해 놓으라고 지시하셨다(막 3:9). 그런데 이 번에도 다시 호숫가에 장소를 잡고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밀려드는 군중의 대세를 보니 더 이상 육지에 서 계실 수가 없다고 판단되어, 아예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군중은 뭍에 남아 있게 한 상황에서, 설교를 하신 것이다. 지금도 갈릴리 관광을 가면, 갈릴리 호수 서북 쪽, 가버나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원형극장처럼 생긴 곳을 지적해 주며, 아마도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설교하시던 장소가 아니겠는가 하며 그 장면을 상기시킨다.
< 2절 >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예수께서 배에 앉으시고 군중은 뭍에 안고 서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경청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물론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밀려왔었는데, 예수님께 다가갈 도리가 없어서 안타까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민중의 많은 병을 고쳐 주는 것도 서슴지 않으셨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이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에서 살면서 암흑 속을 걷고 있다.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도 별로 나은 것이 없었다. 하늘에서 오신 진리 자체이신 분의 눈으로 인간을 보실 때, 인간이 얼마나 비진리와 무지 속에서 살면서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가를 직시(直視)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여러 가지 문제를 가르치기 시작하셨고, 그 방법으로서 비유를 채택하셨다는 말이다. 비유(比喩, ⌈파라볼레⌋ παραβολἠ)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옆에다 던진다”라는 뜻으로,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옆에 나란히 두어 비교하며 설명하려는 사물이나 이야기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우선 길든지 짧든지 이야기 형식으로 된 것으로서, 어떤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위에서도 지적한대로 비유의 용도와 그 해석법이 다양하지만, 요사이 많은 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그릇된 인식을 뒤엎고 바로 잡아주기 위한 이야기들이라고 말한다. 그런 각도에서 본문에 나오는 비유를 관찰해 보자.
< 3절 >
들으라(⌈아쿠에테⌋ ἀκούετε). 하나님이 여러 부분과 모양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또 말씀하고 계신다(히1:1-2).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이신 예수님이 말씀으로 나타나셨고, 그 입으로 친히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지 않는 데 있고, 또 알아듣지 못하는 데 있다. 9 절 끝, 즉 이 단락 맨 끝 단어도 역시 들으라는 명령의 말씀이다.�이 비유는 “들으라”는 명령으로 시작하고 또 마감했다. 그만큼 듣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원문에는 “들으라”는 말 다음에 ⌈이두⌋ ἰδοὺ 라는 말이 있는데, 한글개역에서는 그것을 표현하지 않았다. 아마도 예수께서 설교하시던 때가 가을이어서, 사방 들녘에서는 밀을 심는 농군들이 밭에서 씨를 뿌리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주로 실물을 가지고 비유를 삼아 말씀하셨기 때문에 여기서도, 여기 저기서 씨를 뿌리는 사람들을 지적하며 말씀하신 것 같다. 그래서 “자 저기를 보십시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왔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 비유는 농부가 실제로 한 일을 이야기로 꾸민 것이어서, 동사들이 과거형으로 나온다.
< 4절 >
뿌릴 쌔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뿌릴 쌔”라는 말은 농부가 씨를 뿌리는 과정 중에라는 말이다. 얼마가 걸렸든지 씨를 뿌리는 긴 과정이 있었다. 그러는 중에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밭을 갈다가 길가에까지는 바짝 갈지를 못하여, 그 길가는 흙이 갈리지를 않은 채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밀알이 거기에 떨어지면 새들의 눈에 곧 발견되게 마련이어서, 새에게 먹힌다는 말이다. Joachim Jeremias는 “길 가”를 “ 길바닥”이라고 해석한다. 즉 옛날 농사법에는 밭을 갈아엎기 전에, 씨부터 부리고, 그 다음에 쟁기로 갈아엎는 다는 것이다. 밀 가을을 마치고 나면 한 여름 동안 밀 밭 한 가운데로 길이 난다. 그러다가 가을이 되어 이른 비가 내리면서 땅이 축축해지면 씨를 먼저 뿌리고 그 다음에 흙을 갈아서 뒤엎는다. 이 과정에 있어서 농부가 뿌린 씨가 여름에 임시로 생겨났던 길바닥에도 물론 떨어지게 마련이다. 다른데 떨어진 씨는 울퉁불퉁한 땅이나 옛 그루터기나 잡초들 사이에 떨어졌기 때문에 새들의 눈에 잘 뜨이지 않았다. 그러나 길바닥에 떨어진 씨는 즉각적으로 새들의 표적이 됐다는 말이다. 씨를 뿌리는 농군의 입장에서 볼 때, 귀한 종자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새에게 먹히게 되니 답답하고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헛수고를 한 셈이다.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노력을 하겠지만, 어떻게 한 알의 밀도 손실하지 않고 다 열매맺게 할 도리가 있는가. 날아다니는 새를 어떻게 다 막으며, 날리면서 농사를 짓겠는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 5절 >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져. 어떤 곳은 밑에 박석이 깔리고 그 위에 흙이 덮여 있기는 하지만 흙이 얇아서, 태양열에 흙이 빨리 더워지고, 거기 떨어진 씨를 더 빨리 싹트게 했다. 잠시 동안은 성공적인 것 같이 보이고, 다른 씨보다 유망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 6절 >
그러나 그 싹은 해가 내리 쬐자 말라 버리고 말았다. 밑이 바위인지라 뿌리가 내리지 못했고, 따라서 수분을 밑으로부터 공급하지 못했기 때문에 타버린 것이다. 이것 역시 농부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주어진 농토에서 농사를 하는 농군들에 있어서는, 받은 운명을 바꿀 수는 없고, 다만 주어진 여건에서 충성을 다해야 할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갈릴리는 대개 예루살렘에 있는 부자들의 땅을 소작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남의 땅을 빌어서 농사를 하는 형편이었기에, 주어진 여건을 쓰다 달다 불평하지 못하고, 일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경우에도 농사꾼의 정성어린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 7절 >
또 어떤 씨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습기도 있고 해서 싹이 잘 났지만 잡초와 함께 자라면서 그늘이 지고 영양분을 잡초에게 다 빼앗기다 보니, 열매가 영글지를 못했다. 농부는 할 수 있는 대로 잡초를 제거하고 한 알의 씨라도 손실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손은 모자라고 구석구석을 다 보살필 수가 없기에 더러는 그렇게 실패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렇게 농부의 뜻과는 다르게 손실을 가져오는 경우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을 보고 농부들이 물론 안타까워하고 마음 상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좌절할 것인가. 실망하고 말 것인가? 이 비유의 경우는 그렇지를 않았다.
< 8-9절 >
더러는(⌈알라⌋ ἄλλα). 이것은 복수형으로서 5절과 7절에 나온 단수형(⌈알로⌋ ἄλλο)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손실을 보는 씨는 많지 않고 결실을 맺는 씨가 더 많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그 농부가 경작하는 땅은 좋은 부분도 있어서, 그리고 그 좋은 땅도 등급이 있어서 아주 좋고, 썩 좋고, 보통 좋은 부분이 있어서, 거기에 떨어진 씨들은 마침내 30배의 열매를, 어떤 것은 60배, 어떤 것은 100배를 내었다는 것이다. 역시 Jeremias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의 밀 수확은 약 7,8배를 내는데 그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30배라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수치이다. 하물며 60배, 100배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엄청난 수확이다. 적어도 세 가지의 손실을 보면서, 애도 타고, 실망스럽기도 하고, 고통을 겪었지만, 때가 되니까 예상보다 훨씬 놀라운 수확을 거두게 됐다는 것이다. 결실하였으니 라는 표현은 원어에 ⌈에디두 칼폰⌋ ἐδίδου καρπόν 으로서, 미완료 직설법 동사이고 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낸다. 한 번만 많은 열매를 맺었다는 것이 아니고 계속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자라고 무성하고 ἀναβαίνοντα καὶ αὐξανόμενα 도 역시 현재분사형으로서 계속적 동작을 의미한다. 개역성경에는 ⌈애패론⌋ ἔφερον 이라는 말을 번역하지 않고 말았다. 앞에 그와 의미가 같은 것이 나왔기 때문에 반복을 피한 것 같다. 30배, 60배, 100배를 “낸다” “산출한다”는 동사이며, 역시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 동작을 나타낸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 비유는 의미가 담겨있는 이야기이다. 그것을 잘 풀이하여 참 뜻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너무도 명백하고, 모두가 날마다 경험하는 사물과 사건의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깊은 진리를 담고 있는 이야기여서, 잘 새겨들으라는 부탁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를 우화적 allegorical 으로 해석하지 말고 한 비유에서 하나의 중요한 핵심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재래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는 Jeremias의 의견대로 처음과 나중의 대조에 초점을 둘 수 있을 것이다 (Joachim Jeremias, The Parables of Jesus, 150). 즉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씨를 뿌리는 일에 불과하고, 고작 김을 매고 거름을 주는 정도이지 그 이상일 수는 없다. 게다가 손실도 많이 있다. 그래도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셔서, 인간의 기대를 훨씬 넘는 놀라운 수확을 얻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건설 운동도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미약하지만, 결과는 하나님이 그의 크신 능력으로 성취하신다는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자의 비유해석은, 비유 전체의 씨와 날 속에 의미가 퍼져 있다고 보아( Dan Otto Via. Jr., The Parables, 89-90) 오직 하나의 의미를 찾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묵시론적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어떤 징조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즉 수직적으로 하나님의 간섭의 손이 나타나서 유대 민족을 구출하고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하여,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당당한 나라를 이루어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느부갓네살 왕이 본 거대한 신상을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다”(단 2:34-35)는 신앙을 가진 유대인들은 하늘에서부터 어떤 대 격변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좀 더 성급한 사람들, 즉 젤롯 zealot 당원들은 자기들의 폭력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예수께서 보실 때 이러한 생각들은 잘 못된 것이어서,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묵시론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그 잘못된 견해를 뒤엎어 버리고 참된 신국관을 넣어 주시려고 주신 비유가 바로 이 비유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하나의 긴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임을 지적하신 것이다. 하나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단번에,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 사업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다. 그 완성이 언제일지는 알 수 없다. 긴 역사를 거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 과정 속에는 여러 가지 손실을 보는 경우도 있다. 그것들은 없을 수 없는 과정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바람직한 결말을 가져오신다는 것이다.
< 10절 >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 10절에서 갑자기 다른 장소, 다른 때에 된 사건을 끌어드렸다. 즉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시고 설교하시던 상황이 아니라, 그 후의 어떤 때에 생긴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21절에서 원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시고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 비유들은 유대인 일반에게나 제자들에게나 다 이해하기 쉬운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매우 어려운 것들이었다. 정말로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어떤 날 예수님과 그의 측근들만이 있는 틈을 타서, 그의 제자들과 측근이 비유에 대해서 예수님께 문의했던 것이다.
< 11절 >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여기에 두 종류의 사람이 나타난다. “너희”라는 부류와 “외인”(⌈토이스 엨소⌋ τοίς ἔξω)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안에 있는 사람” insiders 이라 하고 아직 예수를 따르지 않고 예수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을 “바깥 사람” outsiders 으로 취급하신 것 같다. 다르게 말해 본다면, 회개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수락하고, 이미 하나님의 통치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insider라고 하고, 아직 하나님의 통치를 반대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outsider라고 했을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무엇일까? 하나님 나라의 참 모습과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등의 진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제는 공개된 비밀이 됐다. 즉 그의 비유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밝혀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 경험으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설교를 듣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어떻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기에, 그 비밀을 이미 알고 있으며 체험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너희에게는 주어졌으나”의 동사가 현재 완료형으로 나타났다. “주어졌다”는 말은 원어로 ⌈데도타이⌋ δέ- δοται 인데 그것은 이미 예수의 제자들과 그 측근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반면에 외인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든 것이 그냥 수수께끼(⌈마샬⌋ לשׁמ)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비유가 그냥 하나의 이야기로 남아 있을 뿐, 그것을 통하여 진리에로까지 도달하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제자들에게는 비유가 하나님 나라 진리를 밝혀 주는 도구의 역할 을 했지만, 마음을 닫고 귀를 막고 있는 외인들에게는, 비유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 βασιλεία 는 동사개념을 가진 단어로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라는 뜻이고, 따라서 그의 통치에 복종하고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 그 나라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유가 잘 이해 됐을 것이다. 꿀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 꿀을 설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외인들은 예수를 머리로 하는 하늘 공동체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 12절 >
이사야 6:9를 인용하여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 시대의 외인을 닮은꼴로 삼으셨다. 사람들이 너무도 패역해서 아무리 보여 주어도 보지 못하고 아무리 들려주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며, 회개하고 사죄를 받을 희망이 없을 정도로 타락했음을 개탄하셨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만드신 것처럼 표현되어 있어서, 해석에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결과론적으로는 사람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고, 두 가지 종류의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진실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 13절 >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찐대. 10절에서는 비유들에 대해서 질문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비유 일반에 대한 포괄적 질문을 했다는 말로 이해된다. 그러나 13 절에서는 이 비유라고 말함으로써 3-8절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제한해서 물은 것으로 나타난다. 공관복음 각 책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다 첫 비유로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고, 아마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유들의 총론적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비유를 알면 다름 비유들도 알 수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 14절 >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니라. 14절 이하의 설명이 allegorical한 설명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 비유의 모든 부분 즉 씨와 날이 유기적으로 뭉쳐서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보여준다고 할 때, 부분 부분의 설명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보인다. 하나님의 나라의 계획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고, 그것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하신 일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 λόγος 곧 진리를 이 땅 백성들에게 전하고 선포하는 일이었다. 예수님이 친히 세상에 오셔서 그것을 선포하기 시작하셨고, 이어서 그의 사도들이 그리고 그의 교회가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
< 15절 >
씨가 길가에 떨어지듯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길가와 같거나 길바닥 같은 인간의 마음 밭에 떨어진다. 결국 하나님 나라 운동의 방해꾼이고 반대자인 사탄이 나타나, 새가 씨를 삼켜버리듯이, 마음에 뿌려진 진리의 말씀을 채가고 만다. 그래서 헛수고로 끝나버린다. 사탄의 세력이 하나님 나라 운동에 많은 손실을 준다는 것이 사실이고,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 16-17 >
돌짝 밭에 뿌려진 씨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어떤 사람의 마음에 뿌려졌지만, 그 마음이 돌짝밭 같아서, 말씀을 듣기가 바쁘게 좋아라 환영하지만, 마음이 얄팍하고, 그 밑바닥에는 바위와 같은 굳은 것들이 있어서 뿌리를 깊이 내릴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잠시 동안(⌈프로스카이로이⌋ πρόσκαιροι) 있다가 스러지고 만다. 그 말씀 때문에 받는 환난과 박해가 결국 그를 넘어뜨리고 만다. 복음 진지를 받는 사람 자신의 자질이나 태도에도 문제가 있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복음을 받는다고 해서 성공적으로 결실한다는 보장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한 손실도 복음 역사에는 허다하게 나타난다.
< 18-19 >
씨가 가시덤불에 떨어지듯이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복잡한 삶의 상황 속에 처한 사람 마음에 떨어졌을 때, 주의 환경의 수많은 문제와 유혹과 또 자신의 욕심 등 때문에, 복음의 싹이 자라다가 마침내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생긴다. 이것이 현실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다.
< 20절 >
그러나 하나님 나라 복음이 어떤 사람의 마음에 심어져서 30배의 열매를 내고, 어떤 사람의 경우는 60배의 결실을, 어떤 사람은 100배를 내게 된다. 결국 긴 과정 끝에 하나님 놀라운 역사에 의해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손실이 없이 성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단번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성공하고야만다. 이 비유를 통해서 혹시나 내가 하나님 나라 건설 과정에서 하나님께 손실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며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111. 사 역
1 다시 예수께서 그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큰 군중이 그에게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배에 올라앉아 호수에 떠 계셨고, 온 군중은 뭍에서 호수를 향하여 있었다.
2 예수께서 비유를 가지시고 많은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르치시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3 “여러분 들으십시오. 자, 보십시오. 씨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왔습니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혹은 길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새들이 와서 그것을 먹어버렸습니다.
5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흙이 깊지 않아서 곳 싹이 났습니다.
6 그러나 해가 돋자 뜨거운 볕을 받고, 뿌리가 없어서 말라버렸습니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떨기들 가운데 떨어졌습니다. 거사떨기들이 자라서 그것의 숨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계속 자라고 불어나고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삼십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 배를 내고 있습니다.“
10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 그의 측근 사람들이 열 두 제자와 함께 비유들에 대한 질문을 드렸다.
11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이미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12 ‘그것은 그들이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게,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며
행여나 그들이 회개하고 사죄를 받을까 두려워서입니다.’“
1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이 비유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다른 모든 비유를 알겠습니까?
14 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립니다.
15 더러는 씨가 길 가(길바닥)에 떨어지는 경우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말씀이 그들에게 뿌려지면 그들은 듣습니다. 그러나 곧 사탄이 와서 그들 속에 뿌려진 말씀을 집어가 버립니다.
16 더러는 씨가 돌짝밭에 떨어지는 경우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자마자 곧 기뻐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17 그러나 그들 속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합니다.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넘어집니다.
18 또 더러는 씨가 가시떨기들 속에 떨어진 경우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19 그러나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다른 여러 가지 욕심이 생겨나서 말씀을 질식시켜 결국 열매 없는 자들이 됩니다.
20 그리고 더러는 씨가 좋은 땅에 뿌려진 경우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열매를 맺습니다. 더러는 삼십 배, 더러는 육십 배, 더러는 백 배를 냅니다.”
1V. 메 시 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마4:23이나 마9:25에는 (1) 가르치시고 (2)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3) 모든 병을 고치시는 분으로 소개됐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교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그의 가르침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였던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의 비유들이 대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고, 인간이 무엇보다도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마6:33)하신 말씀에 비추어 보더라도 예수님의 생각에는 하나님 나라가 가득 차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언제나 인간중심, 자아중심적으로 생각하여, 인간이 장차 누리게 될 낙원(천당)을 생각하고,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그 낙원에로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여긴다. 물론 그것이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장차 인간들이 가서 행복하게 살며, 주인 노릇을 하며, 인간이 왕이 되는 세상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주인이 되셔서 다스리시고, 천군 천사와 만물과 인간들에게 예배와 찬미를 받는 세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이해는 매우 불완전하고 왜곡되어 있다. 그래서 그 나라의 성격을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은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하셨다.
1. 천지의 주재는 하나님이시다. 조물주 하나님은 하늘도 다스리시고, 땅도 다스리시고, 모든 피조물을 다 통치하시려 하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나님이 만물의 왕으로 군림하셔서 왕노릇하시는 것이 이상이며 제격이며 정상이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이 그렇지를 못하기 때문에 문제이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마다하고 반대하고, 사탄과 그의 하수인들이 왕노릇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왕국이 되게 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그 왕국을 선포하게 하시고, 모두가 하나님께 굴복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나라”는 동사 개념이어서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왕노릇하신다“는 말이 명사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통치의 주체이시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의 대상 중의 한 부분이고, 중요한 부분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의 통치를 받으면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에 50%만 순응하면 하나님 나라가 그만큼만 임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수긍하고 그의 통치 아래 굴복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나의 밖에 있는 존재에 불과하다.
2.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반역한 적이 없다. 유독 인간들이 사탄의 사주를 받아 하나님의 통치를 마다하고 자기들이 왕이라고 자처하며 하나님을 몰아낸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복음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께 복종하라는 교훈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어 열 배를 맺는다. 그런 사람이 점점 많아질 때 그 나라는 성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느냐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지느냐가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다던가, 대 격변 속에서 객관적으로 순식간에 임한다던가 하는 생각은 잘못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통치에 승복할 때,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즉 다분히 주관적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긴 과정과 역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3. 하나님 나라 운동의 발기자는 하나님이시다. 적극 추진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당신을 반역한 인간을 염려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며, 인간 세상도 하나님의 왕국이 되게 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이시다. 사람 하나 하나의 마음을 감동시켜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긴 역사 속에서 당신의 나라를 완성해 가시는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4.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반드시 성공만 하는 거시 아니다. 많은 손실을 보는 경우도 있다. 과거에 중국에 왔던 경교(景敎)가 괴장한 세력으로 중국에 퍼졌었지만,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큰 실패가 아닐 수 없다. 북한에 훨씬 더 많은 신도와 교회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가. 하나님의 큰 손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손실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추수를 거두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마침내 그 나라는 완성되고야 만다.
5.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꾀나 힘이나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번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힘이나 꾀로써 그것을 앞당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고 그의 통치를 받을 때, 이미 나는 그 나라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 나라의 완성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할뿐이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그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완성하실터이니까.
6.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복종하여 insider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수긍하고 그를 믿고 따름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외인”이 되어 겉돌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예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아무리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즉 비유와 같이 일상 생활에서 보고 듣는 것을 가지고 말해도, 이해가 안되고, 그대로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다.